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298
약먹는 천재마법사 1298화(1298/1301)
약먹는 천재마법사 1298화
타락의 약속(2)
“그러니까, 이게 사화(死火)라는 말이군.”
“조심해서 만져요. 혹시라도 다치면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타닥, 타닥!!!
교단과 연맹이 협정을 맺고 집결한 주둔지 바깥쪽에 펼쳐진 빽빽한 정글.
레녹은 아일렌과 함께 밀림 한복판에 앉아 모닥불을 피고 손을 쬐고 있었다.
화르르륵!!
얼핏 보기엔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모닥불을 피운 듯한 두 사람의 모습.
하지만 레녹 앞에 놓인 모닥불의 빛은 붉은색이 아니라, 어두운 잿빛에 가까웠다.
손에 닿는 것 역시 뜨거운 열기가 아니라 미적지근하게 느껴지는 음습한 온기.
겹쳐 쌓은 사화(死花)의 꽃잎이 타오르며 피어나는 잿빛 불꽃을 말없이 지켜본다.
“색깔이 특이하죠?”
“…….”
영묘 공략을 앞두고 일행에게 주어진 반나절의 휴식시간.
레녹은 아일렌과 함께 그 사이 마경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바깥에 나와 있었다.
“죽음을 원료로 태워 피어오르는 불꽃이라…… 확실히 특이하긴 하군.”
사화의 불꽃 안으로 손을 갖다댄 레녹이 고개를 숙였다.
타오르는 모닥불 안에 손을 내밀었음에도, 레녹의 장갑은 조금도 그을리지 않았다.
“무언가를 태우거나 불을 붙일 수 있는 힘은 아니야. 사화의 꽃잎을 태워 발생한다는 결과로만 존재하는 건가.”
“사화(死火)의 효능에 대해서는 기관의 탐사를 통해 몇 가지 밝혀진 사실이 있어요.”
미리 옆에 쌓아둔 꽃잎을 모닥불에 밀어 넣으며 아일렌이 말했다.
“오직 꽃잎을 태워서만 발생하는 불꽃이지만, 불꽃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다른 물체에 내재된 죽음의 성질도 같이 태울 수 있죠.”
“흥미로운 말이군. 물체에 내재된 죽음의 성질을 태운다?”
“그렇죠. 예를 들자면…… 지금 그쪽이 모닥불에 쬐고 있는 장갑에 내재된 ‘죽음’을 태워 없앤다고 생각해 봐요.”
아일렌이 고개를 기울였다.
“사화에 장갑을 쬘수록 수명은 더욱 늘어나고, 오래 사용할 수 있게 되겠죠. 물체에 손상이나 죽음의 성질을 태워 없애는 거예요.”
“그렇군. 그건…….”
이 죽음불꽃을 쬐는 것만으로 물체의 손상이나 죽음을 어느 정도 유예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물체의 손상이나 파손을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물체 안에 내재된 그럴 가능성 자체를 태워 버리는 불꽃.
얼핏 설명을 듣기만 했음에도 그 사용처가 무수히 생각날 만큼, 실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힘이다.
“철령술주가 내게 사화의 힘으로 마법을 연명할 생각이었냐고 물었던 건 그런 의미였군.”
생각에 잠겨 있던 레녹이 말했다.
“내가 사화를 사용해 약해지는 마법을 조금이라도 유예해 보고자 마경에 왔다고 생각했던 건가.”
“사화의 가능성과 이용가치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그걸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건 그만큼 사화를 사용하는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었죠.”
아일렌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사화의 효능은 꽃잎을 태울 때만 발생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연기는 사기를 농축하고 있어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해요. 고위계 초인도 2분 이상 호흡하면 사망에 이를 수준이고요.”
“…….”
“진혈을 사용한 가공처리 없이는 금방 시들어버리는데, 명함 한 장 크기를 가공하는데 엄청난 양이 필요해요. 어느 쪽이든 효율이 극히 낮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서…… 마경의 힘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여럿 있었음에도 전부 실패로 끝나 버렸죠.”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비해 리스크가 터무니없이 크다는 건가?”
“그래서 그쪽이 갖고 있는 마경견문록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인 거예요.”
아일렌이 레녹의 품 안을 가리키며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쳤다.
선글라스 너머로 레녹을 응시하는 그녀의 두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 견문록의 전반부 페이지는 모두 사화의 꽃잎을 겹쳐 만들어진 종이예요. 그게 얼마나 괴상한 일인지 알겠어요?”
“…….”
“에단 바쥬르가 얼마나 대단한 패스파인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화의 꽃잎을 그만큼 가공해 일지로 만드는 것 자체가 사실 불가능해요. 제가 견문록을 보고 놀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죠.”
“정작 아직까지 견문록을 통해 얻을 수 있던 유의미한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
품 안에서 견문록을 꺼내 펼친 레녹이 대답했다.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건 마경에서 태양이 떠오를 때 주변의 식물들이 잠든다는 정보 정도…… 그 외에는 여전히 난해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어.”
“견문록의 내용. 저도 볼 수 있어요?”
“보고 나면 바로 이해할 거다.”
레녹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글귀를 본 아일렌이 할 말을 잃었다.
[사화의 꽃잎은 우울할 때는 신맛. 슬플 때는 단맛. 기쁠 때는 떫은맛.] [복용 당시의 감정과는 반대되는 인상의 맛을 내는 것으로 추정.] [잎사귀를 다져 차를 끓여보았으나 맛이 없다. 근처에 돌아다니던 머리 없는 사슴에게 먹였더니 발광하기에 죽여야 했다.] [덩굴에 열매처럼 달리는 눈알은 진짜 인간의 안구와 구성이 같다. 식인을 피하기 위해 뱉었다.] [마경 깊이 들어갈수록 모든 동식물의 향과 맛이 깊어지고 있다.]“…….”
멍하니 페이지를 바라보던 아일렌이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부비적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도 느꼈지만, 생전의 에단 바쥬르는 굉장히 특이한 미식가였던 것 같더군.”
레녹이 말했다.
“무슨 짓을 해도 육체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역천의 재능을 타고나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직접 먹어보는 게 취미였던 듯하다. 그래서 견문록에는 거의 이런 기록밖에 없어.”
“…….”
“마경에 태양이 떠오르면 식물들이 잠드는 걸 알아차린 것도, 특정 시간대에 따라 식물의 맛이 변하는 걸 통해 눈치챈 것 같더군. 물론 그런 식으로밖에 알아낼 수 없는 정보도 있었겠지만…….”
수첩을 거둔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섭취라는 방식을 선택한 건 결국 에단 바쥬르 본인의 취향이겠지. 오감 중에서 미각이 예민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정밀한 감각기관은 아니잖나.”
“그건 미식가가 아니라 그냥 괴식이 취향인 거잖아요.”
아일렌이 표정을 찌푸리고 있다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마경의 탐사나 조사 쪽으로 도움을 받기는 쉽지 않겠는데요?”
“그런데, 견문록에 적힌 모든 정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이쪽을 봐라.”
레녹이 다른 페이지를 펼쳐서 보여주자 아일렌이 시선을 돌렸다.
[마경 최심부 인근 강줄기를 타고 흐르는 물에서는 피의 맛이 났다.] [맛의 원천을 찾고자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갔음에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동안의 여행기를 뒤진 끝에 이것이 진혈(眞血)의 맛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아?”
아일렌이 살짝 놀라는 것과 동시에, 그 아래 충격적인 글귀가 하나 적혀 있었다.
[사천사화마경 안에서 누군가의 진혈이 흘러 이 지옥의 강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이 ‘누군가’가 어떤 존재를 가리키고 있는지 짐작이 가나?”
레녹이 물었다.
“사천사화마경 전역의 강줄기의 일부가 될 정도로 많은 양의 피를 흘리는 존재. 그 모든 피를 진혈로서 보유하고 있는 초월자.”
“……대장군이군요.”
“그래.”
영묘 전역을 자신의 의념으로 뒤덮어 시공간을 왜곡시킬 정도로 강대한 존재.
자신의 피를 마경에 흘려 강을 만들 정도로 방대한 양의 진혈을 보유한 귀족.
필멸자의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한 초월성을 품은 존재라면, 이 마경 안에 잠들어 있다는 죽은 대장군밖에 없겠지.
충격에 잠긴 아일렌을 두고 레녹이 견문록을 회수했다.
“견문록의 기록은 대부분 에단의 괴식에 맞춰져 있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야. 지금처럼 기록을 뒤지다 보면 유의미한 단서나 결론으로 이어질 때도 있지.”
“…….”
“영묘에 진입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에단 바쥬르가 영묘에 들어갔다면 분명 그 방법을 남겨두었겠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거다.”
탁. 수첩의 페이지를 덮은 레녹이 말했다.
“아일렌. 네가 다른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말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
타닥, 타닥.
아일렌이 잿빛 모닥불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야차와 용병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 이런 자리는 없을지도 모르지.”
레녹이 아일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안내역을 맡았음에도 영묘로 진입할 방법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를 들을 수 있겠나?”
“……제가 알고 있는 방법은 야차의 제안처럼 영묘 입구를 정식으로 여는 쪽이 아니에요.”
아일렌이 조용히 말했다.
“의식공간을 경유해 영묘의 보안과 결계를 무시하는 편법인데, 대격변 이전 기관에서 사용하던 탐사 방식이라 몇 가지 문제가 있죠.”
“…….”
“영묘의 시공간이 오염되어 있으면 탐사자의 의식과 영성이 같이 오염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 방법을 알고 있으면 더욱 심해져요. 내성이 없다면 시도하기도 전에 정신이 붕괴될 수도 있죠.”
“방법을 알고 있으면 오히려 리스크가 높아진다…….”
아더와 함께 영묘로 향하는 도중 아일렌과 나눈 대화를 되짚어본 레녹이 물었다.
“외해의 지식을 빌린 탐사방법의 일종이겠군.”
“……네.”
인지하기만 해도 정신이 위험해지며, 부작용이 늘어나는 지식의 원천.
기관에서 구성원들의 정보제한을 걸어가면서 관리하고 있다는 외해의 지식들.
색적기관에서 시도했던 마경 탐사는 알아서는 안 되는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었나.
“영묘 주변에 펼쳐져 있는 대장군의 의념 때문에, 의식공간을 경유했으면 그대로 의식이 잡아먹혔을 거예요. 최악의 경우 대장군의 의념에 의식이 흡수당했겠죠.”
“그래서 왜곡역장을 조정해 걷어내겠다는 야차의 제안에 따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건가?”
“연맹과 교단이 동시에 움직이며 왜곡 역장을 걷어내는 사이 한 번쯤은 기회가 생길 테니까.”
아일렌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마르티네스. 당신만큼은 내가 책임지고 반드시 영묘 안으로 들여 보내주겠어요. 그게 안내를 맡은 입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일 테니.”
“무슨 거창한 사명을 짊어진 사람처럼 말하는군……. 쓸데없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타인의 능력이나 수단에 전적으로 기댈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레녹 혼자 마경으로 향하지도 않았겠지.
견문록과 태양선을 손에 넣은 시점에서 레녹 혼자서라도 마경을 탐사할 수단은 갖춰져 있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영묘에 들어간 이후를 고려하면 이쪽이 더 수월하다 생각했기 때문.
레녹이 확인하려 했던 것은 이번 일에서 아일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정도였다.
“네 방법이 반드시 필요했다면 원치 않아도 토해내게 했을 거다. 그러지 않았던 건 결국 영묘 앞에서 한번 물러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귀족이라 그런가? 중앙의 공략파치곤 이상한 부분에서 책임감을 느끼는군.”
레녹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당장 이 마경 안에서도 저런 식으로 무책임한 놈들이 널려있는데 말이다.”
“나 불렀냐?”
촤악!!
시체가 목을 맨 나뭇가지 사이를 헤치고 걸어 나온 아더 메이슨이 침을 탁 뱉었다.
뚱한 표정으로 레녹과 아일렌을 마주한 그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꽃잎을 뭉텅이로 내려놓았다.
“근처에 피어있는 사화의 꽃잎을 모두 뜯어왔다. 양이 부족해서 강줄기를 잠시 넘어갔다 와야 했다고.”
“…….”
“X발, 강바닥에 불어터진 시체들이 잔뜩 가라앉아 있어서 토악질이 나오는군. 어쨌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샷건을 지팡이처럼 꺼내 짚은 아더가 근처의 바위에 걸터 앉아 허리를 주물렀다.
“기껏 주어진 휴식시간에도 마경 환경에 대해 조사하고 싶다니, 색적기관 놈들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부지런한 거냐?”
“입 닥쳐요, 머셔너리.”
아일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래 마경 초입부를 탐사하면서 진작 끝냈어야 하는 일인데, 설마 이렇게 빨리 마경 최심부에 도착할 줄은 몰랐다고요. 빨라도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투자해야 할 줄 알았는데…….”
“……뭐 빨리 왔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거냐?”
“마르티네스가 가이드북을 가지고 있으니까 정말 필요한 기반 지식만 설명해 주고 있는 거예요. 도움이 되지 못할 거면 가만히 쉬고 있어요.”
“하, 진짜 쉬어야 하는 건 나나 네가 아니라 저 재수 없는 마법사 쪽이지.”
아더가 코웃음을 치며 레녹을 돌아보았다.
“애초에 저놈의 태양선이 없으면 이번 일은 시작조차 못 해. 야차라는 놈도 그걸 알아서 반나절의 여유를 준 게 아니었냐?”
“…….”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력을 회복하고 태양선을 소환 가능한 상태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넌 그런 놈을 끌고 나와 마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거고.”
“사천사화마경의 설명과 안내를 부탁한 건 내 쪽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라.”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소모한 마력이 워낙 많아서 회복에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대화를 하거나 걷는 정도라면 지장은 없다. 출발할 즈음에는 거의 다 회복되겠지.”
“…….”
“오히려 지금처럼 적당히 소모되어 있을 때가 감각이 더 예민해져서 좋군. 이 정도 결핍이 있어야 주변의 마력이나 힘의 흐름을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으니…….”
눈앞에 타오르는 사화의 불꽃을 바라보며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보고 나면 감각이 잡힐 것 같은데, 출발 시간까지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괴물 같은 새끼…… 대체 어떤 부분이 좋다는 거냐?”
“…….”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아더는 투덜거리는 수준에 그쳤지만, 아일렌은 말 그대로 괴물을 보는 듯이 레녹을 보고 있었다.
전 9사도와 철령술주를 죽이고 마경에 입성해, 대술주와 7사도를 뿌리치고 아더를 제압해 영묘에 도착하기까지.
그 모든 교전이 마력을 불태우는 국지규모의 파괴전이었음에도, 고작 반나절의 휴식만으로 마력을 대부분 회복할 수 있단 말인가.
바다 같은 마력량만큼 회복속도가 빠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마력소모와 동시에 회복이 시작되는 수준이 아니고서야 믿기 어려울 정도다.
“나에 대해 걱정할 게 아니라 본인부터 챙기는 게 좋겠군.”
잿빛 불꽃에 손을 깊숙이 밀어 넣은 채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영묘 공략을 시작한 뒤로는 이런 시간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컨디션을 완벽하게 회복해두라곤 하지 않겠지만, 서로 발목을 잡는 일은 없게 하지.”
“핫,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정작 연맹과 교단 측이랑 괴상한 협약을 맺은 쪽은 너일 텐데.”
“대술주와 7사도. 마경에서 몇 번 충돌해서 그런지 당장이라도 서로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죠.”
아일렌이 생각에 잠겼다.
“마르티네스가 협정을 받아들인 이유는 이해가 가지만, 앞으로 두 세력 간의 균형을 좀 더 면밀하게 신경 쓰는 게 좋겠어요.”
“조금만 삐끗했으면 그 자리에서 교단과 연맹을 모두 상대해야 했을지도 모르겠군.”
아더가 상자 위에 걸터앉아 샷건을 거꾸로 잡아들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봐도 협정이 제대로 지켜질 것 같지가 않은데. 이거 괜히 온 거 아니냐?”
“영묘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지간하면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레녹이 대답했다.
“교단 측 추기경이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더군. 내가 협정에 참가한 이유를 정확히 지적해 상황을 중재했어.”
“…….”
“10사도를 빌미 삼아 내게 시비를 걸던 것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지. 아마 그건 일부러 나를 적대하는 듯한 인상을 주변에 심어주고 의심을 덜어내기 위해서 였을 거다.”
그렇게 말한 레녹이 태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처럼 잠깐 이렇게 시간을 내더라도 주변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도록 말이다.”
“……네?”
무심코 그 말에 대답한 아일렌이 새하얀 예복을 입은 노인의 모습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원탁에 앉아 서약서에 이름을 새긴 교단 추기경. 몰튼이라는 이름의 7사도를 보좌하는 대주교.
이 자리에서 방금 전까지 대화 주제로 삼은 장본인이 어느새, 레녹의 뒤에 나타나 서 있었던 것.
“…….”
뿌우우우-
집결지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느릿한 고동소리.
진동수를 극도로 낮춰 마력사용자의 귀에만 들리도록 조정한 암구호.
곧 있으면 출발할 시각임을 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레녹과 추기경이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암리타 님을 상대로 승리했다던 배교자답군.”
먼저 입을 연 추기경이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역시, 그쪽은 내가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겐가.”
“무슨 일이지?”
“영묘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해둘 것이 있어서 왔네.”
레녹을 바라보는 추기경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그대에게 암리타를 살해한 죄를 물으며 추궁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사제들은 내가 자네를 찾아간다 해도 크게 의심하지 않겠지.”
“…….”
“그대가 이번 협정에 참가한 이유를 안다. 교단과 연맹이 영묘 안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하려 하기 때문이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레녹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교단을 섬기는 추기경이 그쪽의 목적에 대해 알려주기라도 하고 싶다는 건가?”
“그렇다.”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11대 나이드리가 총본산에서 준비하는 의식은 이미 상궤를 벗어나고 있어. 마경의 일은 그것을 위한 거대한 초석이지.”
“…….”
“신녀는 자신의 부족함과 열등감에 집착하다 미쳐버렸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교단의 질서마저 거스르려 하고 있다.”
순간, 레녹이 대답을 잠시 멈췄다.
신녀가 총본산에서 의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기경이 먼저 언급할 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
교단 내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계획을 꺼내 들면서 이쪽과 접촉한 이유.
설마 했던 귀도 교단의 자체의 내분으로 인한 결과인가.
“꼭 신녀의 목적이 교리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기라도 하는 투로군.”
빠르게 판단을 마친 레녹이 물었다.
“교주의 대행자인 신녀가 곧 교단의 질서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추기경의 대답은 그런 레녹의 예상조차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
“허나 신녀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결코 그분의 뜻을 멋대로 곡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야.”
“……그분이라고?”
만신을 섬기는 교단에서 그분이라 칭해지는 존재는 오직 단 하나.
다름 아닌 교주 본인과 관련된 일임을 직감하고 레녹이 멈칫한 찰나.
“이 자리에서 단 한 번만 말해두지.”
추기경이 무섭도록 섬뜩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영묘에 잠든 대장군을 그분의 새로운 강신체로 삼아 부활시킬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