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05
약먹는 천재마법사 1305화(1305/1315)
약먹는 천재마법사 1305화
대장군의 영묘(3)
마이야의 복제체를 쓰러뜨리는 것과 동시에 영묘 안쪽으로 난입해 온 세 초월자의 존재.
얼굴에 검은 꽃을 피운 채 무너진 관문의 양 옆에 내려선 장생종과 노인, 여성의 모습.
쿠구구구!!!
시체꽃에 먹힌 노인과 용종이 흘리는 의념이 영묘의 대기를 무겁게 짓누른다.
흩뿌리는 의지가 물리력을 담고 약동하며 사방에 흩어진 잔해물이 흔들리고.
그 초월적인 힘의 잔상을 인지한 사제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군단의 장성. 그리고 쿤다라의 장생종인가……?”
“이럴 수가. 어떻게 자벨린이 이곳에-”
낡은 군복을 입은 노년의 군인. 용의 머리를 지닌 거구의 장생종.
그리고 두 초월자의 사이에 내려선 탁한 금발을 가지런히 묶은 여성.
현재 사천사화마경에 개입하지 않은 군단과 전단, 쿤다라의 초월자들이 영묘 안쪽에서 동시에 나타난 상황.
하지만 레녹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초월자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시체꽃에 먹힌 자벨린이 본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하지만 장생종과 군단 측의 초인은 모르겠군.’
에레디스 자벨린이 마경공략에 실패한 뒤 소멸번대를 이끌고 생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자벨린은 마이야처럼 본인의 생체정보를 다른 시체에 덧씌운 영체의 일종이겠지.
‘자벨린의 혈족을 베이스로 삼은 게 아니라면, 마이야처럼 본신능력을 제대로 꺼내 쓸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에레디스 자벨린의 본신무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레녹이 자벨린에 대해 아는 사실은 그녀가 중앙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강자이며, 존재만으로 세력 간 균형을 뒤흔들 수 있는 초월자라는 것 정도.
접합술주의 일이 끝난 뒤 그녀가 첫 번째 관문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이능개화전단의 외교에 문제가 생길 정도라 했었으니.
에레디스 자벨린의 생체정보를 베이스로 삼아 움직이는 저 복제품이, 그녀의 능력을 일부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
“…….”
쿠구구구구……!!!
관문 위에 올라탄 괴물들을 올려다보는 사이, 그들 역시 약속이나 한 듯 레녹을 내려다본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외 모든 변수를 배제하는 듯한, 식물처럼 무기질적인 의념.
하지만 레녹은 정작 자신을 내려다보는 괴물들이 아니라,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기척을 읽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기척을 감추고 관문 뒤로 이동하고 있는 아일렌의 생명반응을.
“사도살해자.”
그 순간, 사제들을 이끌고 있던 주교가 굳은 표정으로 레녹을 불렀다.
“자벨린의 모습을 한 괴물은 본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군단의 장성 쪽은 본인이 맞을 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름은 리히토. 아르무트 대장의 후임으로 들어온 고명한 정령술사였는데, 얼마 남지 않은 수명에 집착하다 마경 공략을 시도하고 그대로 실종되었지.”
“…….”
“그 때문에 바라간이 후임으로 정해지기 전까지 세번째 대장직이 비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만약 저 노인이 내가 기억하는 그자가 맞다면-”
“교단 소속이면서 군단 내부 사정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군.”
레녹이 주교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에단에게 충성하던 군인이었나?”
“지금은 신을 섬기는 미천한 종에 불과할 뿐.”
“…….”
묘하게 말투가 딱딱하다 싶었는데, 군단에서 교단 쪽으로 전향한 군인 출신이었나.
주교가 관문에 나타난 괴물들을 보자마자 알아본 것은 그의 출신 때문이었던 모양.
“자벨린은 이쪽에서 강신술식을 사용해 시간을 끌어보지. 그 틈에 천번, 네가 장생종이나 리히토를 처리해라.”
주교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살아온 노괴라서 독특한 정령을 다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하기 버거워질 거다. 어느 한쪽이라도 먼저 처리하지 않는다면-”
“교단의 주구 주제에 내게 명령하지 마라.”
레녹의 서늘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주교의 말이 뚝 끊겼다.
“너희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전혀 관심없어. 내가 알아서 하지.”
“……네놈.”
얼어붙은 관문 위에 올라탄 세 명의 초월자와, 그들의 머리 위쪽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는 아일렌.
흔적을 남길까 봐 소통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아일렌도 레녹이 자신의 기척을 읽었음을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아일렌이 저곳에 멈춰 있는 것 자체가 레녹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나 다름없다.
“…….”
아무래도, 레녹이 마이야를 처리하는 사이 영묘 안쪽에서 길을 찾는데 성공한 것 같은데…….
여기서는 일단 아일렌이 뭘 노리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하나 정도는 줄여놓고 시작해야겠군.”
“뭐라고?”
“비켜.”
레녹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교를 무시하고 고개를 까닥였다.
“걸리적거리면 죽인다.”
“……!!”
슈우우우웅-!!!!
얼어붙은 관문 위로 집채만 한 얼음혜성이 회전하며 추락한다.
전조없는 무영창. 시체꽃에 잠식당한 괴물들조차 순간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강습.
저릿한 한기를 펄펄 내뿜는 거대한 혜성이 얼어붙은 관문 위로 떨어져 내리며 폭발하고.
그 중심부에 위치해 있던 거구의 용종을 직격하며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내뿜었다.
쩌어어어어엉!!!!!
공동 중심에 세워진 관문 전체가 거세게 요동치며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파.
자벨린과 리히토가 관문 양쪽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얼음이 쏟아져내린다.
“그, 궈어…….”
추락하는 얼음혜성의 중심부에 온 몸이 얼어붙은 채 부서져 신음하는 장생종의 모습.
쿤다라의 용종을 단 한 방에 무력화시키는 말도 안 되는 위력에, 사제들이 작금의 상황을 잊고 얼어붙었다.
“미, 미친-!!!”
“술식의 위력이 어찌……!!”
팟!!
모든 이들의 시선이 얼음혜성에 으스러진 장생종을 향한 순간, 숨어 있던 아일렌이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관문 위쪽 난간 사이를 은밀하게 질주하면서, 소리 없이 내부 장치들을 건드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
그것을 보자마자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자벨린과 리히토의 시선을 이쪽에 집중시켰다.
“온다……!!”
쐐액!!
레녹의 폭발적인 마력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두 괴물이 동시에 움직였다.
시체꽃이 피어난 자벨린이 한발을 앞으로 내밀어 이쪽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관문 아래쪽에 떨어진 노인, 리히토가 양손을 합장하고 수인을 맺었다.
퍼어어어엉!!!
노인을 중심으로 검은 연기가 폭발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집채만 한 정령.
[뀌이이익-]살덩어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채, 뒤룩뒤룩 살이 찐 돼지 같은 기묘한 모습.
영계에 기거하는 정령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괴하게 타락한 형상.
정령술사인 리히토가 시체꽃에 잠식당하면서, 그와 계약을 맺고 있는 정령 역시 망가진 것일까.
피부 위에 나 있는 수천 개에 달하는 입이 끊임없이 원념 섞인 언령을 내뱉으며 저주술식을 난사한다.
교단 사제들이 즉시 무릎을 꿇고 제 자리에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축복을 펼쳐라. 사도술식을 빌려온다!”
“지저거신의 이름으로 바라오니-”
쿠과과과과과!!!!
사제들의 기도를 따라 발 밑의 지반이 솟구치며 거대한 암석의 방패가 된다.
동시에 사제들을 중심으로 우윳빛깔의 막이 펼쳐지며 축복과 가호를 두르기 시작했다.
지저거신의 힘을 빌려오는 것과 동시에, 기도를 통해 심신을 보호하는 사제들의 힘.
무릎꿇은 사제들의 중심에 선 주교가 양 손을 펼친 채, 다른 이들과는 다른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전령을 매개로 삼아, 포영왕에게 이 몸을 바칩니다.”
“미천한 신의 종에게, 허락되지 않는 위대함을 잠시 들이부어-”
투콰아아앙!!!!
두 소절을 입에 담는 것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주교의 몸에 쏟아진다.
마치 교단 사도들이 얻는 것과 같은 초월성을 인간의 몸에 강제로 쑤셔 박는 듯한 기괴한 풍경.
저것이 바로 주교가 말했던 자벨린과 리히토를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강신술식인가.
하지만 레녹의 감각은 그 와중에도 관문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아일렌을 향하고 있었다.
‘사기가 강해질 때마다 관문의 형태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죽음의 기운 자체를 동력원으로 삼는 건가?’
시체들이 날뛰며 인간들과 뒤섞여 죽어나가는 순간마다, 공동 중심부에 세워진 관문의 진동이 강해진다.
그때마다 난간 사이를 빠르게 오가며 안쪽에 위치한 내부기관과 장비들을 조작하는 아일렌의 모습.
철컥!! 우우우웅……!!!
끊어진 전선을 연결하고 떨어져 나온 부품과 레버를 재조립해 잡아당긴다.
소리나 기척이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깨물고 숨을 참으며 계기판을 열고 좌표를 설정한다.
아일렌이 관문을 조작해 길을 열려고 한다면, 그 전까지는 발각당하지 않도록 시간을 끌어주는 게 좋겠지.
그걸 감안하면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자벨린이 움직인다!!!”
탓!!
얼굴에 시체꽃을 피운 자벨린이 공허한 표정으로 몸을 숙인 채 질주한다.
은빛의 경갑을 걸쳤음에도 바람 위를 걷는 듯한 자유롭고 가벼운 몸짓.
얼어붙은 잔해물 사이를 뛰어넘어, 몇 초만에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좁히며 접근한다.
“사제들 전원 술식을 운용하여 방패를 펼쳐라!!!”
“가짜라고는 해도 그 자벨린이다. 절대 접근하게 두지 마!!”
쿠과과과과!!!!!!
사제들이 기도를 올리자 지저거신의 암석방패가 격렬하게 회전했다.
거대한 아치가 머리 위로 펼쳐지며 초능력자의 신형을 상공에서부터 가두고 찍어누르는 모습.
자벨린의 복제조차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듯한 사제들의 반응.
후욱-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자벨린이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시체처럼 창백하게 탈색된 피부. 문신이나 별다른 특색이 없는 마른 손.
하지만 그 손끝이 쩍쩍 갈라지고 있는 것을 본 사제들의 안색이 자벨린의 손보다도 더 창백하게 변했다.
“안돼, 갖고 있어!!”
“흐악, 아아아……!!!”
“모두 휘말리지 않게 피해라!!!”
사제들의 발악을 무시한 자벨린이 떨어지는 암석을 향해 맨 손을 가져다댄 그 순간.
머리 위로 떨어지던 집채만한 암석이 자벨린의 손에 닿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쩌어어엉!!
“……!!!”
단순히 물질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의 공간 자체를 통째로 날려 버리는 듯한 강렬한 감각.
순간적으로 공간이 날아가며 빈 자리에 대기와 마력이 급격하게 쏠리면서 방대한 파문이 펼쳐지고.
직후 엄청난 충격파가 자벨린을 중심으로 터져 나와 교단 사제들을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콰아아아아앙!!!
“흐아아악!!”
“버텨, 버텨!!”
뒤로 밀려나면서도 어떻게든 축복과 가호를 풀지 않으려 하는 사제들의 모습.
하지만 자벨린은 그런 이들을 일일이 돌아보거나 상대하려 시도하지조차 않았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암석들을 지워버리며, 도망치는 사제들을 맨손으로 스치고 지나갈 뿐.
“허억-”
“신이시여-”
고함이나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사제들의 머리나 팔다리 일부가 지워진다.
공간째로 사라진 부위를 중심으로 남은 육신이 빨려 들어가며 한 줌 육편이 되어 일그러졌다.
콰직, 우두두둑!!!!
인간의 형태를 잃고 우그러진 살점과 핏물이 자벨린의 발아래 떨어지며 데구르르 굴렀다.
스무 명이 넘는 고위 사제들을 손짓 한 번으로 학살하고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정갈한 몸짓.
탁.
자벨린이 걸음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가속해 기도하는 주교를 노리고.
직후 그 옆에서 끼어든 레녹과 사선으로 충돌했다.
쩌어어어어엉!!!!!!
자벨린과 레녹의 손이 허공에서 맞닿으며 섬찟한 파열음을 내뿜었다.
마치 서로의 손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짓이기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멈춰선 모습.
“전단의 2인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생각했지만, 타고난 선천이능 자체가 엄청나게 강력한 쪽이었군.”
빠직, 빠직……!!!
멍하니 시선을 들어올린 자벨린을 보며 레녹이 표정을 찌푸렸다.
“손에 닿는 물질과 공간을 말 그대로 ‘소멸’시키는 건가. 어떻게 인간 중에 이런 초능력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초능력은 정신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선천이능의 하나.
타고난 재능에 극도로 의존하며, 대부분은 자신의 재능을 통제하지 못해 자멸하거나 미쳐 버리게 된다.
초능력을 수련하여 고위계에 오르면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해져, 종국에는 자신의 능력에 잡아먹히는 결말을 맞이할 뿐.
그렇기에 전단 최강의 창이라 불리는 자벨린의 능력이 무엇인지 레녹 역시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설마 그녀의 선천이능이 말 그대로 ‘소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능력일 거라곤 쉽게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맨손으로 결계술을 지워 없애고 있다. 이대로라면 4초 이내에 완전히 공간분단이 해제되겠군.’
콰직!! 우우우웅!!!
자벨린의 복제체가 손가락을 구부릴 때마다, 그녀의 손에 접촉한 방호막과 결계가 소멸해 붕괴된다.
공간을 격리하고 분단하는 최고위 결계법진이 자벨린의 손 안에서 종잇장처럼 으스러지며 박살 나는 괴현상.
진둔의 결계술을 손에 둘렀기에 잠깐이나마 막아설 수 있을 뿐, 원래는 접촉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능이다.
자벨린 본인이 아니라 그녀의 복제품이 흉내 내는 이능조차 이렇게 강력한 건가.
빠직, 빠직……!!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는 결계법진의 컨트롤을 놓고 뒤로 물러선다.
동시에 레녹과 자벨린의 손 안에서 일그러진 공간이 폭발하며 주변을 창백한 빛으로 뒤덮었다.
콰아아아앙!!
자벨린과 반대 방향으로 밀려난 레녹이 기도하고 있는 주교의 옆에 내려섰다.
“위대한 신들의 은혜 덕분인지, 다행히 저 여자는 자벨린 본인이 아닌 것이 확실해 보이는군.”
눈을 감고 식은 땀을 흘리던 주교가 말했다.
“맨손으로만 능력을 쓰는 것을 보니 본인에 비해 한참 열화된 이능을 다루는 것 같다. 저 정도라면 상대할 수 있겠어.”
“저게 본인에 비해 한참이나 열화된 능력이라는 건가?”
“강신술식이 완성되고 나면 내가 저것을 상대할 테니, 네놈은 리히토를 죽이는 일에 집중해라.”
주교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만신전의 숙원이 사천사화마경에 있나니, 낙원을 향한 지름길을 얻을 수 있다면 능히 이 한목숨을 신들께-”
쐐액!!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빛무리. 흑신마공을 끌어올리며 어깨를 숙였다.
공간을 박살 내고 앞으로 뻗어온 자벨린의 손이 레녹이 서 있던 자리를 가로지르고.
아슬아슬하게 자벨린의 손을 빗겨낸 레녹이 그녀의 어깨를 오른팔로 강하게 잡아채 꺾어버렸다.
콰아앙!!!
‘맨손에 닿지 않는다면 능력은 발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능력은 다르지만 상대의 맨손을 주의해야 하는 경험은 접합술주를 상대할 때 해보았다.
그렇다면 자벨린의 능력에 닿지 않고 복제품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것도 가능할 터.
키이이이잉!
극한까지 느려지는 의식 속에서 상반신을 회전시켜 자벨린의 뒤를 잡는다.
복제품의 어깨를 당기고 등허리를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남아 있는 마력과 의념을 계산.
‘잠깐 휴식하면 지금껏 소모한 마력은 절반 정도 회복할 수 있다. 밟고 가야겠군.’
자벨린의 이능이 정확하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질과 공간을 통째로 소멸시킬 수 있는 종류라는 건 분명하다.
그 파괴력과 범용성은 물론이고, 적용 범위만 따져도 최상위 특질계 술식에 필적하는 수준이니.
찰나의 순간 판단을 마친 레녹이 자벨린의 뒤를 잡은 채 양손을 강하게 펼쳤다.
쿠화악!!
왼손에 피워올린 화염이 길쭉하게 늘어지며, 새파란 옥염의 빛을 띠고 맹렬하게 회전했다.
핵융합의 성질변화를 거쳐 플라즈마 상태에 도달한 화염을 구체의 형태로 가공해 응축.
[염허(炎虛)]자벨린의 능력이 공간을 소멸시키는 이능이라면, 이쪽은 공간을 불태워 공허로 되돌리는 옥염이다.
뒤를 잡는 것과 동시에 영창을 완성시킨 레녹이 염허를 쥐고 자벨린의 등에 거침없이 때려 넣은 찰나.
자벨린의 복제품이 맨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짚었다.
“……!!!”
뻐어어어엉!!!!
자벨린의 오른쪽 상반신이 자신의 이능에 휩쓸려 소멸하고, 레녹의 손이 그대로 허공을 스쳤다.
직후 넘어지듯 몸을 기울인 자벨린의 육신이 시체꽃에 뒤덮여 무시무시한 속도로 재생하고.
그대로 폭발적으로 가속해 주교의 앞에 도달해 그 얼굴을 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
뻐어어어엉!!!!
주교의 외마디 신음과 동시에 그의 머리가 소멸하며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강신술식을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하고 머리를 잃은 채 고꾸라지는 주교의 시체.
직후 자벨린의 등허리를 걷어찬 레녹이 엄청난 속도로 그녀의 신형을 지면에 갈아 찍어눌렀다.
쾅!!!!
드르르르륵!!!!
“─!!”
“시체꽃의 재생능력을 이용해 자해까지 해가면서 허를 찌른다라…… 단순한 복제품이라 여길 정도는 아니었군.”
바닥에 얼굴이 갈려나가는 자벨린의 복제품을 내려다보며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원본이 갖고 있지 않은 능력조차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은 있는건가.”
“나, 아…….”
쿠오오오……!!
웅얼거림과 함께 반대편 손에 낀 장갑마저 입술로 물고 벗어던지는 자벨린의 모습.
동시에 관문 아래쪽에서 리히토가 소환한 정령이 쉴 새 없이 저주의 언령을 내뱉어 쏘아낸다.
사방에서 물밀듯이 쏟아지는 시체들에 저주를 불어넣고, 레녹과 자벨린을 벌려놓으려는 시도.
하지만 레녹은 리히토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력을 끌어올리며 몸을 휙 돌렸다.
“군단 출신이라면서 상황 판단이 느리군. 시체꽃에 먹혀서 생각이 잘 안 되나?”
어깨를 회전시키며 멱살을 잡은 자벨린의 신형을 허공에 던지고 불꽃을 격발.
자벨린의 방어를 정면에서 박살 내고 그녀의 육신을 하늘 높이 밀어 올렸다.
콰아아앙!!!!
압도적이다 못해 일방적이기까지 한 힘의 격차.
살아남은 사제들이 숨을 삼킨 찰나, 레녹의 신형이 자벨린의 머리 위에서 나타나고.
집채만 한 얼음의 창 두 자루가 사선으로 교차하며 자벨린과 리히토를 동시에 찍어눌렀다.
“싸움은 이미 끝났어.”
쩌어어어어엉!!!!!
“─”
“커어……!!”
비명조차 없이 고개 숙인 자벨린의 복제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낸 리히토의 반응.
얼어붙은 창극에 꿰뚫린 두 초월자의 육신이 세포 단위로 얼음에 저며져 갈기갈기 찢어진다.
두 사람의 검은 피가 투명한 얼음 사이로 배어 나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가는 모습.
집채만 한 얼음의 창 아래서 일어서는 레녹을 지켜보던 교정기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검을 매만졌다.
“사도살해자…… 소문 이상의 무력이로군.”
“영묘 공략이 시작된 지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 아직 저 정도 힘을 남겨둔 건가?”
시체꽃에 먹힌 집행자를 처리하자마자, 연이어 나타난 다른 괴물들마저 차례대로 박살 내는 압도적인 무력.
위력이 큰 기술이나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고위계의 초인들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이해할 수 없는 신위.
멀리서 레녹을 바라보는 교정기사들의 시선에 희미한 살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자다. 지금이라도 추기경께 간청해 협정을 바꿔야 해.”
“애초에, 저만한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 괴물들을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가 의심스러운-”
부아아아앙!!!
그 순간, 공동 중심부에 위치한 관문의 양쪽 기둥이 분리되는 것과 함께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관문을 구성하는 부품 전체가 허공에서 분해되어 승강기의 형태로 재조립된다.
관문 전체가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되어 최하층보다도 더 아래쪽으로 향하려는 모습.
레녹이 승강기에 올라타는 것과 동시에, 그 안쪽에서 아일렌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사제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
“이럴 수가, 설마!!”
교정기사들이 무기를 고쳐잡고 앞으로 달렸다.
“놈이 먼저 대장군을 찾아가려 한다!!”
“승강기에 올라타라. 우리도 함께 가야 해!!”
콰아아아아!!!!
“마르티네스, 타요!!”
격렬하게 진동하는 승강기에 매달린 아일렌이 손을 뻗고 레녹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저 멀리서 승강기를 향해 달려오는 교정기사들을 바라보며 아일렌이 계기판을 조작했다.
“이 관문, 제국 황성에서도 사용하는 변형차원관문의 일종이라 제가 조작할 수 있어요. 마력이 아니라 사기를 동력으로 움직여서 시간이 좀 걸렸지만-”
흘러넘치는 빛무리 속에서 아일렌이 빠르게 말했다.
“이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면 대장군의 유해 바로 앞이에요. 탑승 인원을 우리만 설정해서 이동하면…… 어?”
레녹의 양손에 들려 있는 자벨린과 리히토의 주검을 확인한 아일렌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아니, 지금부터 내려가야 하는데 그걸 왜 가져왔-”
콰아아아아앙!!!
아일렌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레녹의 기감을 엄청난 속도로 관통하는 두 갈래 기척.
공동 상공을 가로지르는 흐릿한 연기 한 줄기. 천장에서 눈물처럼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
잿빛 머리칼의 대술주와, 박쥐날개를 단 7사도가 엄청난 속도로 천장과 벽면을 부수고 양쪽에서 나타났다.
콰아아아아아앙!!!!!
“그쪽이군.”
“꺄하하하하핫!!!! 여기 있었구나!!!”
얼어붙은 공동 위로 울려퍼지는 광기어린 폭소. 순식간에 주변을 메우는 자욱한 연기.
주교가 죽기 전에 시도했던 강신술식의 흔적을 읽고 이쪽의 위치를 파악해낸 것일까.
공동 한복판에서 작동 중인 승강기를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는 두 초월자의 신형.
“안돼, 아직 시간이……!!”
단번에 교정기사들을 뛰어넘어 가속하는 두 괴물들을 보며 아일렌이 낭패한 듯 표정을 찡그린 순간.
흑신마공을 두른 레녹이 양손에 들고 있던 자벨린과 리히토를 승강기 밖으로 집어 던졌다.
파아아앙!!!
“어?”
레녹의 손을 떠난 시체꽃에 잠식된 두 시체가 순식간에 재생을 시작하고.
정신을 차리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서 움직이는 강대한 기척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각!!
양날대검을 든 채 자벨린의 이능을 받아 쳐내는 7사도의 섬뜩한 붉은 눈동자.
곰방대를 물고 리히토의 정령을 걷어찬 연리술주의 희미하게 일그러진 표정.
“미안하지만 무임승차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다.”
순간적으로 승강기에 닿지 못하고 멈춰 선 두 사람을 보며 레녹이 웃었다.
“힘은 빼놨으니 처리하고 와라. 이번에는 먼저가지.”
“당신. 대체 성격이 얼마나 나쁜-”
콰아아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강기에 올라탄 레녹과 아일렌의 신형이 빛에 휩싸여 아래쪽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