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13
약먹는 천재마법사 1313화(1313/1315)
약먹는 천재마법사 1313화
대장군의 영묘(11)
휘오오오!!!
뜨거운 열풍이 흩날리는 묘실의 중심부.
잿덩이가 된 두 초월자의 사체를 던진 레녹이 고개를 숙인 채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털썩!
“후우…….”
심호흡을 할 때마다 배열장치를 타고 과열된 체온이 끊임없이 바깥으로 배출된다.
펄펄 끓는 열기가 주변에 아지랑이처럼 퍼져나오며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아연한 기색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일렌이 중얼거렸다.
“자성영역을 전개하지도 않고…… 사도와 술주를 동시에 죽인 건가요?”
레녹이 대술주와 7사도를 상대로 삼파전을 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마경 초입부에서 두 초월자를 상대로 승리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술주와 사도의 자성영역을 접합해 폭주시키는 기지를 발휘한 결과.
예상치 못한 술식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만큼, 대술주와 7사도 모두 이번에는 작정하고 준비를 하고 나섰을 터.
애초에 영묘 공략을 시작할 당시부터 지금 같은 2차전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레녹은 두 번째로 시작된 싸움에서 영역을 펼치지도, 같은 술식을 두 번 사용하지도 않았다.
레녹을 죽이기 위해 나선 술주와 사도의 자성영역에 홀로 진입한 뒤, 그 자리에서 둘 다 죽이고 영역을 빠져나왔을 뿐.
연맹 대술주와 교단 최고위 사도를 동시에 상대해 힘으로 찍어눌러 죽인다는 기괴한 결과.
그런 초월적인 무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일렌은 같은 편에 서 있음에도 실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마경 초입에서 싸웠을 때 연리술주와 7사도의 자성영역이 충돌하며 서로의 능력이 상쇄된 적이 있었지.”
연기를 훅 뿜어낸 레녹이 느릿하게 대답하며 걸음을 돌렸다.
“단순히 영역이 중첩되는 것만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실 자체가 술주와 사도의 능력이 특수한 성질의 힘이라는 증거…… 영역의 성질이나 규칙 자체를 이용하는 능력이라는 암시였지.”
“…….”
“그런 능력은 까다로운 대가나 조건을 필요로 하는 대신 힘의 격차나 상성을 뒤집는 케이스가 많아. 대술주나 7사도가 나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은 것도 아마 그런 부분에서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멍하니 사체를 내려다보는 아일렌을 지나쳐 걸은 레녹이 말했다.
“그래서 다시 싸우게 된다면 어떤 부분에서 대비를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지.”
“축퇴로의 핵을 손에 넣었을 때부터…… 이미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었군요.”
“확신이 있던 건 아니야. 이런 방식은 어디까지나 불안정한 편법에 불과하니까.”
레녹이 그렇게 대답하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내 손에 축퇴로의 실물이 있는 이상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군.”
적색성계는 레녹이 손에 넣은 ‘불씨’를 마력노심으로 가공해 동력원으로 삼는 증폭술식의 극의.
각 성계를 구성하는 항성은 레녹이 직접 노심으로 가공해야만 온전하게 적색성계 안에서 공전하며 공존한다.
축퇴로의 핵을 가공없이 아홉번째 항성으로 삼은 것은 그러한 도달점을 억지로 끌어오는 편법일 뿐, 정식으로 적색성계를 완성시키는 방식은 아니었던 바.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힘이기에, 9항성의 형상조차 레녹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화염의 이미지를 빌려온 수준에 그쳤지만.
하나 그것만으로도 대술주와 7사도를 회생조차 불가능하게 죽여버리기에는 충분했을 뿐이다.
‘염열계의 도달점을 전격계만큼 빨리 완성시키는 건 어렵겠지. 하지만 억지로나마 아홉 번째에 도달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편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적색성계의 아홉 번째 항성을 일시적으로나마 손에 넣었다면, 머지않아 직접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할 터.
지금은 그 정도 의미면 충분했다.
“……운이 좋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아일렌은 그런 레녹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7사도와 대술주가 어떻게든 자성영역으로 승부를 보려 한 건, 결국 영역을 펼치지 않은 접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테니까.”
“…….”
“사실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당신처럼 강대한 힘을 지닌 초월자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신중하고 이성적일 수 있는 건지…….”
복잡한 표정으로 술주와 사도의 사체를 바라보던 아일렌이 중얼거렸다.
“진작 미쳤거나 다른 사람을 벌레처럼 여겨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만한 힘을 갖고도 사용할 순간을 신중하게 고르는군요.”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아뇨. 다만…….”
천천히 시선을 돌린 아일렌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가 아는 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하나의 대륙을 발아래 두는 극소수의 초월자들뿐이니까요.”
“…….”
“당신이 이미 그 초입에 도달해 있어요. 그러면서도 그들과는 달리 어떤 인과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다면…….”
거기까지 말한 아일렌이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당신은 색적기관에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군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시자의 업을 내려놓고 청의 눈을 탈퇴한 사도살해자. 군단의 대장직을 걷어차고 데드라이즈와 충돌한 대마법사.
진둔의 결계술을 계승하고도 그 이름을 잇지 않는. 등대지기의 총애를 받고 있음에도 어딘가에 묶이기를 거부하는.
그런 자유로움을 기관이라는 조직 안에 묶어둘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글쎄…… 그렇게 여러 가지로 의미를 따져가면서 움직이지는 않는데. 난 복잡한 걸 싫어하거든.”
하지만 레녹은 그런 아일렌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묶여 있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런 허울이나 굴레 따위가 내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테니까.”
“마르티네스. 그건…….”
“움직이지.”
콰과과과과과과!!!!!
열풍이 몰아치는 광대한 묘실의 최심부.
수천 개의 손 위에 안치된 광성대장군의 사체가 검게 물든 외신의 의념에 파묻혀 끊임없이 일렁인다.
공양의식에 강제로 바쳐진 채, 외신을 마경에 끌어들이는 매개체로서 소모되는 그 모습.
그 중심부에서 이쪽을 향해 간절하게 검게 물든 손을 뻗어오는 ‘누군가’의 형상.
대장군의 사체 위에 내려앉은 외신의 의지를 보며 레녹이 표정을 가라앉혔다.
“외신이 기다리고 있다.”
“…….”
아아……
시체들로 이루어진 제단을 밟고,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올라선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을 이루는 손이 오므라들며 레녹의 신발을 감싸 쥐는 섬뜩한 감촉.
하지만 레녹은 그런 감각을 무시하고 제단 중심부에 놓인 대장군을 향해 다가섰다.
아아…… 아아아아……
그때마다 제단 위로 흘러내리는 검은 손의 물결이 감격한 듯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손을 뻗어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레녹을 직접 어루만지지는 못하고, 레녹의 주변을 둥글게 감싸 끌어안으려는 듯.
아주 위태롭고 부서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만지는 것처럼, 인지의 바깥을 벗어난 공백을 만진다.
기다려왔어……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
“하…….”
아일렌이 그 모습을 보며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답답한 숨을 토해냈다.
“대체,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외해 바깥에서 내려온 외신이, 레녹의 존재를 한없이 극진하게 여기는 듯한 생경한 풍경.
아르스노바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중앙전선을 공략해 온 아일렌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기현상.
그 환희 속에 선 채로도 놀라지 않고 물끄러미 검은 손길을 올려다보는 레녹의 모습까지.
“가까이 다가가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군.”
말없이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검은 손을 바라보던 레녹이 말했다.
“무언가,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할 것 같은데.”
대상지정저항을 보유한 레녹의 존재를 외신은 인식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조차 묘실 전역에 자신의 감각을 채워 넣고, 그 감각이 닿지 않는 곳에서 레녹을 간접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뿐.
레녹 역시 이 의도를 알 수 없는 신을 앞두고 대상지정저항을 섣불리 풀 생각은 없었다.
레녹 자신의 마력이나 의념이 아니면서도, 외신과 소통할 수 있는 촉매가 필요했다.
방법은 멀리 있지 않았다.
“마르티네스.”
핏-
소매를 걷어붙인 아일렌이, 블레이드를 팔뚝에 대고 그대로 그어냈다.
비어 있는 탄창에 흘러내리는 진혈을 받아 채워 그대로 레녹에게 던졌다.
철컥!!
아슬아슬하게 탄창을 받아든 레녹을 보며 아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라면 더 말해요. 제가 기절하지 않는 이상 잉크 정도는 채워줄 테니.”
“……아일렌.”
“귀족의 진혈 정도 되는 최상급의 촉매라면 외신도 누가 메시지를 쓰는지 알아볼 수 있겠죠.”
아일렌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힘겹게 웃었다.
“잘 설득해서 돌려보내 봐요. 할 수 있겠죠?”
“…….”
영묘 공략을 시도하는 도중 그녀가 흘린 피가 워낙 많아, 이미 치사량에 인접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레녹에게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진혈을 내준 아일렌의 결단이 진정 옳은 것인지.
하지만 레녹은 아일렌에게 괜찮냐고 묻거나, 자신의 몸부터 챙기라는 구태여 뻔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일렌이 외신에게 사랑받는 레녹을 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듯, 레녹 역시 그런 아일렌의 판단을 존중할 뿐.
지금은 그저, 아일렌이 수명을 쥐어짜 건네준 이 촉매를 무엇보다도 신중하게 사용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찰박.
결심을 마친 레녹이, 푸른 피를 찍어발라 천천히 제단 위에 떨어뜨렸다.
핏방울이 허공에 똑똑 멈춰서며 레녹의 의념을 따라 문자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 이름.
오, 오오오……
허공에 멈춰선 진혈의 배열을 느낀 것인지, 레녹의 주변에서 휘감기는 검은 손이 푸들푸들 떨렸다.
있어…… 여기에 있어……
내게…… 답해줬어……
“…….”
외신의 반응이 지나치게 과민해서 정상적인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레녹에게 호의적이다 못해, 감격에 겨운 것처럼 보이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반응.
허나 그럼에도 레녹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외해 저편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레녹의 존재를 엿보려고 했던 종말의 시선.
애타게 레녹을 부르면서 찾아 헤매고, 조금이라도 그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나날.
상대할 수 없는 초월자라고, 욕망에 절어진 괴물이라 여기며 피해왔던 저 바다의 위대한 신들.
오랜 시간이 지나 겨우 이제서야, 저들과 간단한 소통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한 것인가.
‘신중해야 한다.’
흥분을 억누른 레녹이 아일렌이 건네준 진혈의 잔량을 확인했다.
아일렌은 부족하면 더 피를 주겠다고 말했지만, 그간 흘린 피를 대충 계산해도 진작 한계를 넘었을 가능성이 높다.
레녹의 오판이나 욕심 때문에 그녀가 목숨을 걸고 도와준 기회를 헛되이 날려 버려서는 안 되겠지.
필요한 질문만. 그 무엇보다 물어보아야 하는 것부터.
그렇다면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 결말의 때 모든 외신이 내려오는 이유.
결말……
이유……
질문……?
레녹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이해한 것인가.
사방에 휘감기던 검은 손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확 느려졌다.
마치 그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 오래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처럼.
애초에 외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인간의 개념으로 변환해 해석하듯.
마지막…… 이야……
천천히, 흘러내리는 검은 손이 답했다.
이 세계가, 마지막……
이 세계가, 처음……
처음과 마지막이…… 같이…… 아름답다……
오랜 여행이…… 끝나는……
“…….”
예상하고 있었지만 외신의 대답 중 절반 정도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쩌면 이 세계가 우주 전체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생각할수록 절망스럽기만 한 잔혹한 진실.
억지로 생각을 멈추고, 곧바로 다음으로 질문해야 할 것을 떠올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 공양의식의 중단. 광성대장군의 사체.
약속……
대가……
기다려왔어……
하지만, 레녹이 던진 키워드를 읽고도 외신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문답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무엇을 말해줘야 할지도 모르는 듯.
자신이 중얼거린 말을 메아리처럼 반복하며 느릿하게 의미를 되새길 뿐.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기다리고 있었어……
=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
기다리고, 있는 건……
……
침묵이 길어진다.
레녹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검은 손이 가라앉고, 묘실의 진동마저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그 심상치 않은 반응에 레녹이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고, 아일렌이 숨을 멈춘 그 순간.
검은 손이 천천히 자신의 의지를 기울여 흔들었다.
그것이 마치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한 동작에 가깝다는 사실을 레녹이 어렴풋이 이해한 찰나.
기다리고 있는 건……
너야……
외신이 느릿하게 속삭인 그 말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문답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저편에서……
네가……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고.”
순간, 레녹이 지금의 상황조차 잊고 중얼거렸다.
“내가……?”
오랜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일순……
순간, 희미하게 속삭이던 외신의 말이 뚝 멎었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침묵. 날카롭게 달아올라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마치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듯, 검은 손이 제 자리에서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
……
……나, 는
뿌득.
검은 손의 내면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것처럼 불길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레녹과 소통하던 외신의 의지 자체가 일그러지고 분열되는 듯한 위화감.
동시에 검은 손의 표면 위로 기괴한 두드러기 같은 것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
희미한 단말마.
지금까지의 속삭임을 수천 배는 넘게 뒤덮는 어마어마한 절규.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순간, 레녹의 주변에서 제단 위를 뒤덮은 검은 손이 미친 듯이 날뛰면서 폭발했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대화조차 잊고 어마어마한 흉성을 터트리며 언어가 되지 못한 포효를 토해낸다.
“……!!!!!”
“마르티네스!!!”
사방에서 날뛰는 검은 손이 제단을 미친 듯이 쥐어 터트리고, 그 충격으로 레녹이 추락했다.
아연실색한 아일렌이 아슬아슬하게 달려와 떨어지는 레녹의 몸을 겨우 받아냈다.
“정신 차려요!!!”
“……괜찮아. 이쪽의 문제가 아니다.”
안색이 창백해진 레녹이 하늘 위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멈춰 있던 공양의식이 다시 시작됐어. 누군가 의식에 개입해 손을 대기 시작한 거다.”
“그럴 리가……!!”
대장군의 사체를 매개로 내려온 외신은 레녹을 위해 일부러 의식을 진행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개입으로 공양의식이 재개되며, 힘을 받은 외신의 의지가 끊임없이 범람하고 있는 것.
그리고, 레녹은 지금 이 묘실 안에서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자격이 없어 공양의식을 주관하지는 못할지언정, 의식에 개입할 수는 있는 존재.”
레녹이 싸늘한 표정으로 묘실 뒤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관계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아핫.]키득거리는 속삭임이 들렸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빠른 걸, 마르티네스.]휘오오오오!!!!
창백한 빛이 원형으로 일그러지며, 자그마한 헤일로가 되어 떠오른다.
무너진 잔해물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교단의 예복을 입은 시체의 모습.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끌어안은 사제의 시체가, 목이 없는 몸을 움직여 걸어 나왔다.
[듣기로는 충직하다 못해 미련할 정도라고 들었는데, 막상 직접 보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잖아.]“……설마.”
시체가 들고 있는 것이 몰튼 추기경의 머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아일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레녹은 추기경의 시체를 보면서도 놀라지 않고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타락한 황금률을 통해 레녹의 시야 가득히 펼쳐지는 황금빛의 선율.
인과의 절단면이 끊어진 채 추기경의 사체 주위에 밀도 높게 드리운 모습.
몰튼 추기경의 생명과 인과는 이미 진작에 모두 끊어져 절멸한 지 오래다.
그렇다면, 그 육신을 대신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역시-
[반가워, 사도살해자.]추기경의 머리가 입술을 뗀 순간, 칼칼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그동안 열심히 죽여온 돼지들의 사육사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우레카 나이드리.”
귀도 교단 11대 신녀, 우레카 나이드리.
세이나의 뒤를 이어 신녀 자리에 오른 뒤로 교단의 질서와 위계를 짓밟고 있는 이단아.
아나타메의 타락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대륙에 혼란을 퍼트리는 교단의 신녀가, 마지막으로 사천사화마경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도 신녀를 증오해 교단의 계획을 레녹에게 발설해 주었던 추기경의 시체를 그릇으로 삼아서.
우레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통성명은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천번. 너도 나도 서로가 누구인지 잘 알잖아.]“야차의 개입으로 사태가 변질된 시점에서 그쪽도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줄 알았지.”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설마 추기경의 시체마저 재활용할 줄은 몰랐군. 그렇게나 한번 쓰고 버려진 것에 애착이 가나?”
[크큭, 지껄이는 꼴을 보니 나에 대해 들은 게 좀 있나 본데. 7사도를 그릇으로 삼지 않아 의외였나?]추기경의 머리를 든 시체의 손가락이 움직여, 입술을 양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기괴하게 웃는 얼굴이 된 몰튼 추기경의 머리를 통해 신녀가 조롱하듯 말했다.
[교단 극동지부를 학살한 네놈이라면 잘 알겠지만, 교단에는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앞뒤가 꽉 막힌 놈들이 많아. 이 늙은이도 그 중 한 명이었지.]“…….”
[그분을 섬기는 자신에게 취해, 무엇이 진정으로 교단을 위한 일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들. 난 그런 병신들이 감히 날 아니꼬워한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용하기로 한 거야.]신녀가 느긋하게 말했다.
[이 사천사화마경을 본녀의 의지대로 다루기 위한 보험으로 말이지.]“보험…… 이라고요?”
그 순간, 아일렌은 어째서 신녀가 지금 추기경의 시체를 움직여 나타난 것인지 깨달았다.
11대 신녀는 단순히 레녹의 부름에 응답해 직접 내려올 정도로 한가롭거나 호인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입맛대로 상황을 주무르며, 사도들조차 장기말로 써먹고 버리는 것을 선호하는 성정.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신녀가 나타난 것 역시-
“공양의식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추기경의 육신이 그릇으로 더 적합하다 생각했군.”
레녹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처음부터 강제로 의식에 개입해, 교주의 현신을 위한 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나.”
[이 추기경의 탈을 쓴 버러지가 네놈들에게 교단의 대계를 누설했다면, 본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겠지.]신녀가 느긋하게 말했다.
[다만 야차라는 놈이 하는 짓거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본녀가 굳이 공양의식을 멈출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거든.]“필요가 없다고……?”
[대장군의 사체를 그분의 그릇으로 삼을 수 있는지 실험하려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멋진 일이 가능하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철퍽!!
추기경의 머리를 발아래 떨어뜨린 시체가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 순간.
신녀를 중심으로 창백한 술법진이 폭발하듯 퍼져나가며 묘실을 뒤덮었다.
창백한 성광이 묘실은 물론이고 공양의식마저 집어삼키는 압도적인 모습.
[우연을 섬기는 몸으로, 외신의 의지가 이토록 현세에 가까이 내려온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흘러넘치는 빛무리 속에서 신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분의 재림을 위해 준비했던 강신의식을, 이 공양의식에 고스란히 덮어씌울 거다.]파아아아아아앗!!!!
순간, 대장군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외신의 사념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대장군의 사체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던 허기가 옅어지고, 그보다 훨씬 더 음습한 사념이 현세에 드리운다.
광성대장군을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육체에 보다 거대한 기척이 내려앉는 듯한 모습.
오오오오오오-!!!!
[그분께서 주신 징표로 신을 부르고, 그분께서 남기신 약속으로 신의 의지를 대행한다.]몰아치는 성광 속에서 신녀가 히죽 웃었다.
[이대로 강신에 성공하면 외신의 의지가 대장군의 육신에 깃들어 새로운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겠지. 그것보다 멋진 일이 어디에 있겠어?]“말도 안 돼, 그건……!!”
[아니, 가능하다. 그분께서는 이미 한번 해보셨던 일이니까.]대장군의 육체를 돌아보는 신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했다.
[그분께서 자신의 첫 번째 사도를 그런 방식으로 거두셨다면, 나도 할 수 있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