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16
약먹는 천재마법사 1316화(1316/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16화
대장군의 영묘(14)
사천사화마경을 지배하는 죽은 대장군. 제국의 통합전쟁을 이끌었던 뛰어난 정복자.
숨이 끊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연맹과 교단이 그 육신을 탐낼 정도로 강대한 초월자.
외신에게 공양되던 광성대장군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구를 잡고 전장에 나선 이 순간.
철컥!!!!
인육의 제단에서 내려온 대장군의 신형이, 걸음을 옮긴 순간 레녹을 지나 신녀의 앞에 도달한다.
부서진 위성분쇄자를 끌고 걷는 대장군과, 석장을 움켜쥔 우레카 나이드리가 정면에서 대치하고.
대장군의 공허한 눈동자 너머로 일그러진 표정의 신녀가 비친 순간.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던 집채만 한 도끼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우웅-
잔해물 사이를 박차고 튕겨나와 완만한 궤적을 그리면서 회전한다.
우레카는 물론이고 뒤켠에서 지켜보던 레녹조차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느릿한 움직임.
가볍게 옆으로 움직여 피할 수 있을 만큼 느리다. 이미 진작 기감에 잡혀 있을 만큼 선명하고 올곧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분쇄자의 날은 이미 우레카의 옆구리에 틀어박혀 맥동하고 있었다.
으직-
[……!!!!!!!]내면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의 공명.
한발 늦게 석장을 뻗으며 조금이라도 위력을 죽여보려던 우레카의 표정이 확 변했다.
진짜 육신이 아니라 영체로 이루어진 우레카의 의식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섬뜩한 감각.
[빌어먹을-]우둑, 뚜두두두둑-
신녀의 모든 감각과 인지능력이, 옆구리에 꽂힌 분쇄자를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마치 분쇄자의 날을 중심으로 우레카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것이 강제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강렬한 위화감.
우득, 석장이 부러지고 영성과 의식이 파열됐다. 발작하듯 쏘아내려던 술식과 권능이 기반부터 무너지며 박살 났다.
[이, 개같은……!!!!!!]처음부터 피하거나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극.
그제서야 그 사실을 직감한 신녀가 발작하듯 괴성을 터트리며 발버둥치던 순간.
묘실 지하 한복판에서 시작된 참격이 신녀의 영성을 가르며 지하 수천 미터 일대를 뚫고 솟구쳤다.
번쩍!
황금빛의 도끼날이 아래서부터 하늘을 베어내듯 사선으로 회전하는 순간 그 의념이 지평선 끝까지 범람하고.
사천사화마경의 광대한 협곡 전체를 반절로 꿰뚫어 절단 낼 것처럼 회전하며 찍어눌렀다.
콰아아아아아아!!!!!
마경 전역에 펼쳐진 밀림과 정글이 참격에 찍어 눌리며 실시간으로 시들어간다.
인간을 잡아먹고 죽음을 빨아먹는 괴식물들이 한줌 가루가 되어 소멸하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참격의 궤적을 따라 수십미터 깊이에 다다른 거대한 절벽이 사방에서 연달아 솟구치며 거센 지진을 일으켰다.
단 한사람의 힘으로 지도를 바꿔내는 초월자의 참격.
쿠과과과과과과!!!
“끄, 아아아아악!!!”
“안 돼, 안 돼……!!!!”
“이럴 수가, 어떻게 신녀님께서!!!”
그 충격파에 휩쓸린 교단의 전력들이 사방에서 엄청난 속도로 죽어나가며 비명을 터트렸다.
숨을 헐떡이며 소리 지르는 주교.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기도를 올리는 사제.
부상자들을 이끌고 무너지는 영묘를 벗어나려던 교정기사들의 갑주가 으스러지며 육신이 무너진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총본산으로 복귀하라!!!”
“대장군이 깨어났다!! 제국의 광성이-!!!”
“도망쳐라!! 정면에서 상대하면 죽는다……!!!”
콰과과과과!!!!
무너지는 묘실 천장 잔해물을 뚫고 내리찍히는 창백한 성광.
광대한 빛의 기둥이 사방에서 내리찍히며 지반을 터트리고 영묘를 박살 낸다.
한 발, 한 발의 폭격이 전술병기에 비견되는, 단 한사람의 접근을 저지하고 견제하기 위한 총공세.
하지만 부서진 갑주를 입은 흑발의 무장은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폭격을 피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자신의 육신 위로 떨어지는 성광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걸음을 옮겼을 뿐.
퍼버버버벙!!!!
하늘에 떠오른 교단의 전함이 급변하는 기압을 이기지 못하고 궤도를 이탈해 비틀거린다.
참격 양쪽으로 퍼져나간 충격파가 대장군을 노리던 교단의 군세를 짓누르고 압살했다.
우레카의 성역 안에서 힘을 얻은 사제와 시체들이 장난감처럼 터져나가며 내장을 쏟아냈다.
처버버버벅!!!!
“아아아악!! 살려, 살려줘……!!!”
“신이시여, 어찌 저희에게 이런-”
“……이럴 수가.”
단 한번 무기를 휘둘러 신녀를 베어내고, 묘실을 피바다로 만들어버린 광성대장군의 무위.
그것만으로 이 자리에서 신녀의 영체가 으스러지고, 사방에서 기천에 달하는 시체가 나뒹굴었다.
교단이 신녀를 필두로 지금껏 이 영묘 안에서 시도했던 모든 계획을 단 한방에 분쇄하는 괴력.
그 압도적인 학살에 아일렌의 말문이 막힌 찰나, 그녀의 발 아래 작은 앰플이 하나 떨어졌다.
“마르티네스……?”
“지혈제다.”
어느새 아일렌의 옆에 선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장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가 난 부위를 응급처치하려면 필요할 거다. 미리 먹어두는 게 좋겠군.”
“…….”
우레카의 석장에 꿰뚫려 관통당한 어깨의 상처.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 부위에 앰플을 꽂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대장군은, 대체…….”
“우리가 생각했던 전제가 처음부터 틀려 있었군.”
레녹이 조용히 대답했다.
“마경의 타락에도 그는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깨어나기 직전까지 정신을 온존하고 있었지.”
“광성대장군은…… 생전에도 지병으로 앓고 있던 광증이 굉장히 심하다고 알려진 초월자였어요.”
아일렌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도 대장군이 이미 미쳐 있을 거라곤 전혀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직 대장군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본인에게 묻지 않는 이상 확답할 수는 없겠지.”
시선을 돌린 레녹이 말했다.
“하지만 그가 제국의 대장군이라는 거창한 위상에 걸맞은 초월자였다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이는군.”
“……아.”
“저것이 아르스노바에 충성하던 학살자. 제국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초월자의 정점인가…….”
쾅!!!
쏟아지는 폭격 속에서 대장군이 시선을 돌릴 때마다, 황금빛의 분쇄자가 느릿하게 번뜩이며 춤을 춘다.
그때마다 시작점과 궤적이 보이지도 않는 참격이 폭발하며 수백의 사제들이 피를 흩뿌리며 터져나갔다.
거창한 술식이나 소우주를 사용하는 일도 없이, 인간이 움직이며 성광이 폭발하는 곳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손을 뻗는다.
그때마다 영묘 전역을 통째로 관통하는 국지규모의 참격과 폭발이 해일처럼 범람하며 교단의 전력을 육편으로 만들었다.
단신으로 수천의 초인들을 상대하고 거꾸로 압도하며 학살하는, 제국의 정복자라는 위명에 어울리는 무위.
“교단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게 아니야.”
피바다 속에 홀로 서 있는 무장을 바라보는 레녹의 시선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남자는 지금 혼자서 이 사천사화마경을 부수려 하고 있다. 그 여파에 휩쓸리는 것만으로 다른 모든 것이 죽어 나가는군.”
“…….”
생사에 얽매이지 않는 강함. 썩어가는 육신으로도 퇴색되지 않는 강고한 초월성.
저것이 바로 심기체 모든 방면에서 온전한 9레벨에 도달했었던 승천자의 강함인가.
헤르메스나 도래, 말레온과는 달리 영혼과 정신, 심상의 측면에서 완성된 괴물.
생전에는 무려 그 진와와 대등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자격을 얻은 초월자.
우웅!!
분쇄자를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가볍게 허공을 움켜쥔다.
그것만으로 영묘 일대의 시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상공에 떠오른 전함들이 추락하고 지평선이 왜곡된다.
마치 대장군을 중심으로 일대의 모든 것이 강제로 끌어당겨지며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괴한 현상.
동시에 부상자를 데리고 묘실을 뛰쳐나가던 고위 주교와 기사들이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철컥!!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끌려온 기사가 발작하듯 검을 휘두르지만, 두 사람의 체구 차이 때문에 닿지도 않는다.
버둥거리는 기사의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쥔 대장군이 그 발버둥을 돌아보지도 않고 땅에 패대기친 순간.
기사의 육신이 땅에 닿기도 전에 폭발하며 육편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다.
뻐어어어엉!!
“허, 허억……!!”
“말도 안 돼…… 근력이 대체-!!!”
공기저항만으로 인간의 육신을 터트려버릴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괴력.
죽은 시체의 몸으로도 물질세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치를 아득하게 초월해 있는 듯한 모습.
쿠오오오!!!
대장군의 육신에서 끈적이는 기름 같은 것이 흘러나오며 부서진 갑주를 적신다.
검은 손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팔뚝 위로 휘감기며 힘을 더하고 그 존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드는 모습.
그 검은 손의 형상에서 기시감을 느낀 아일렌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설마, 저건…….”
“자신의 육체에 남아 있는 외신의 기운을 마력 대신 사용해 싸우고 있는 거다.”
레녹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절반 정도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군. 고대의 승천자 정도 되는 괴물은 저런 일도 가능한 건가…….”
대장군의 주검은 오랫동안 진혈을 뽑히면서 마경의 존속을 위해 이용당해 왔던 바.
온몸의 피는 물론이고 의념까지 이용당한 만큼, 그 육신에 충분한 마력이 남아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대장군은 공양의식 도중 자신의 육신에 깃든 외신의 힘을 마력 대신 사용해 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레녹 역시 대장군이 접근해 온 찰나, 순간적으로 그 기척을 전혀 읽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기원이나 기작이 전혀 다른 힘을 몸에 받아들이는 즉시 이해하고 도구처럼 휘두르는 비현실적인 무재.
쾅!! 드르르르륵!!
새하얀 빛의 기둥이 사방에서 무너져 내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축복과 가호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퇴색되고 소멸했다.
대장군이 위성분쇄자를 잡고 전장에 임한 지 대략 채 3분도 되지 않는 시간.
우레카 나이드리가 외신의 힘을 빌려내어 펼친 성역이 단 한 사람의 초월자에게 소멸해 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소멸하는 성역 저편에서 독기에 가득 찬 우레카의 전성이 소름 끼치게 울려 펴졌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가만 두지 않겠어. 네놈들 모두, 전원……!!!!!]“…….”
[주문연맹…… 대장군…… 귀족 년……!!! 그리고 마르티네스으으!!!! 반드시 죽여 그 골수까지 갈아 마셔주마!!!!!]“그건 그대가 아니라 소장의 책무로다.”
턱!!
그 순간, 성역 안에서 울려 퍼지는 빛무리를 대장군이 한 손으로 낚아챘다.
신녀의 의지를 담아 울리는 영성 그 자체를 맨손으로 잡아챈 광성이 말했다.
“강신의 요령을 빌려 현세에 의지를 수육하는 방식이라. 진취적이다. 이대로라면 소장이 그대를 진정으로 벌할 수는 없겠지.”
[놔!!!!]“하지만 이미 그대의 영성 안에는 지울 수 없는 뇌광(雷光)이 아프도록 선명하게 새겨져 있구나.”
[……!!!!]그 순간, 신녀의 영성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각하게 흔들리고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반드시 숨겨야 하는 치부가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예민하고 날카로운 반응.
하지만 대장군은 그런 신녀의 반응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 균열을 잡아 벌리기만 해도 무엇보다 큰 영벌이 될 것이다. 특히나 그대 같은 사제에게라면 더욱…….”
뿌득……!!!
대장군이 힘을 주는 것과 동시에 신녀의 영성이 담긴 빛이 쪼개지듯 파열된다.
“치명적이겠지.”
[아아아아아아!!!!]우레카의 대답은 들려오지 못했다.
대장군의 손안에서 파열된 빛무리가 산산이 조각나며, 새파란 뇌광에 통째로 집어 삼켜졌다.
억지로 잊고 있던 고통을 떠올리고 잡아먹히면서, 신녀의 의식 자체가 박살 나 무너지는 듯한 감각.
동시에 범람하던 창백한 성역 전체가 흩어지듯 소멸하며, 교단의 은총을 받은 시체들이 인형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두둑!!!
쏴아아아아아-
묘실 사방에서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시체들. 대장군의 손에 죽어 한 줌의 육편이 되어버린 사제와 주교들.
시체와 피가 비처럼 떨어지는 학살의 중심에서 천천히 도끼를 내려놓은 대장군이 눈을 감았다.
갑주 위로 떨어지는 피의 온기만이 느껴지는 유일한 감각인 것처럼 침묵에 빠진 초월자의 모습.
“아…….”
그런 대장군의 음울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자태를, 레녹과 아일렌이 조용히 지켜보았다.
피와 사체가 넘실대는 전장에 서 있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흑발의 대장군.
제국의 통합전쟁에 앞장선 뛰어난 정복자로서 평생을 싸워왔던 황성의 초월자.
오랜 시간을 넘어 죽음에서 깨어난 그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가 아군인지 적군인지조차 알 수 없어진 지금.
쿵!!
분쇄자의 거대한 날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지면에 사선으로 틀어박힌다.
집채만 한 도끼를 놓고 몸을 돌린 대장군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범람하는 참격의 여파로 무너져내리는 영묘의 중심부. 시체와 피바다 속에서 느릿하게 다가오는 학살자의 형상.
“뒤로 물러나라, 아일렌.”
소매 안쪽으로 엘릭서의 약병을 만지작거린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그쪽을 신경 쓰며 상황에 대응하기 어려울 것 같군.”
“…….”
쿵!!
천천히, 레녹의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선 대장군이 시선을 내렸다.
레녹이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올려야 할 정도로 장대한 3m에 가까운 거구.
전신이 근육질에 가까움에도 둔중하거나 두껍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훤칠한 체격.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사기와 창백하게 질린 피부에도 불구하고 묘한 기품이 느껴지는 공허한 얼굴.
하지만 레녹은 공허하기 그지없는 시체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는 죽어서도 황제에게 충성하는 승천자다…… 결국 어떻게 봐도 이쪽의 편은 아니겠지.’
대장군은 황제가 외신이 되어 이 세계를 떠났음을 알면서도 그를 폐하라 불렀다.
레녹을 옛 인연이라 일컬으면서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교단을 학살하는데 집중했을 뿐.
영묘를 제 손으로 무너뜨리며, 그 과정에서 외신의 힘을 마력 대신 사용하기까지 했다면.
대장군이 무언가 ‘이루려는 목표’가 있기에 레녹의 부름에 응해 깨어났음이 분명한 바.
‘나에 대해 알고 있고,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문제는 그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군…….’
제국의 대장군 중 하나로 숭배받으며, 사후에는 영웅으로 영묘에 안치될 정도의 무인이다.
생전에는 수십만 명의 충성을 받으며 군림하던 위대한 초월자였겠지. 그만큼 자긍심이나 자존심이 아주 강한 초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광성대장군이 황제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충성스러운 초월자라면.
레녹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흥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그리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레녹과 대장군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새로운 분기점이 될 터.
적당히 말을 맞춰주며 목적을 끌어내야 할까,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에 선 대장군을 가늠하고.
표정이 없는 얼굴로 레녹을 내려다보던 대장군이 마침내 입을 연 그 순간.
“귀공께서는 소장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
어처구니없게도 레녹은 자신의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지켜보던 아일렌의 몸이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충격적인 대답.
하지만 대장군은 그런 아일렌을 돌아보지도,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공허한 눈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레녹에게 재차 말했을 뿐.
“말씀하시지요.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소장이 답해드리겠습니다.”
“……너는.”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 광성대장군.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미쳐버린 정복자.
수십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통합전쟁에 일조했던 잔혹한 학살자.
단 한순간도 아군이라 생각해 본 적 없는 마경의 지배자가, 레녹을 향해 극도로 정중한 예를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