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22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2화(1322/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2화
대장군의 영묘(20)
사천사화마경의 하늘과 지상에서 흑과 백이 뒤섞이며 모든 것이 일그러진다.
타락해 변질되어 인간을 잡아먹는 밀림의 풍경도,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아득하기 그지없는 협곡의 정경도.
죽음을 먹으며 존속하는 마경의 생명들이 흑백무상의 정취 아래 씻겨나가며 세계의 바깥으로 떠밀리는 듯한 환상.
그 중심부에 쓰러진 레녹이 창백한 표정으로 무너져가는 마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
하늘에서 검게 타오르는 염열과, 지상의 새하얗게 얼어붙는 풍경이 교차한다.
광대한 마경 전역을 뒤덮은 흑색과 백색의 춤사위가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며 소멸시킨다.
천화만리향과 흑해요신락을 동시에 전개해 충돌시켜 터트려 만들어낸 심의개변 무외(無外).
사천사화마경을 소멸시키는 극의를 터트린 반동이, 싸움이 끝난 이후 레녹의 몸에 쏟아지고 있었다.
“쿨럭!!! 우웁……!!!”
미친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떨리는 손을 짚어 몸을 돌려세운다.
엎드린 채 헛구역질을 반복하고, 죽은 피를 게워내는 것과 동시에 머리칼을 타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사천사화마경을 공략하는 도중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있었던 여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마지막 결전.
흑신마공과 적색성계를 사용해 전신의 마력을 쥐어짜내고, 자성영역을 터트려 심상을 바닥까지 긁어낸 반동.
바닥에 쓰러진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레녹이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토벌전처럼…… 완벽하게 되지는 않는군.’
아무리 준비를 거듭하고 신중을 기해도, 사력을 다해 싸우는 순간마다 레녹의 육신은 감당할 수 없는 반동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온 몸을 짓누르는 고통도, 정신과 영혼을 불사르는 끔찍한 감각도 모두 예상하고 있던 대가.
토벌전에서 그러한 반동을 무시할 수 있던 것은, 그 전쟁이 레녹의 권역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겠지.
천부적인 재능의 대가로 함께 주어진 저주.
그 천칭의 저울을 무시하는 일조차도 결국 레녹이 구축한 세계 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만약, 네 번째를 향해 나아가는 레녹의 답이 여전히 잘못되지 않았다면 언젠가 이러한 반동이나 대가조차도 완전히 초월할 수 있을까.
쿠구구구구구!!!!
“큭……!”
모든 것이 흑백으로 물들어가는 소멸의 중심부에서 힘겹게 정신을 차린다.
무외의 빛이 마경의 인과를 끊어내는 이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릿하게 무너져내리는 아득한 정경.
결판이 났다는 사실은 직감하고 있지만, 아직 확인해야하는 것이 남아있다.
진통제 앰플을 꺼내 목에 꽂아 넣고,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얼어붙은 지상의 파편이 서서히 부서지고, 아득한 눈보라가 되어 소멸해 나갔다.
파아앗……!!!
새하얀 눈보라 속에서 사천사화마경의 모든 것이 서서히 함께 흩어져 정화되는 정경.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중심에서, 쓰러진 채 함께 소멸해 나가는 대장군의 사체.
손가락 끝에서부터 서서히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그 모습을, 레녹이 우두커니 선 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 광성대장군.
9레벨에 오른 승천자이자, 죽어서도 세계를 떠나지 않고 마경에 묶여 있던 정복자.
썩어 문드러져 가는 그 육신으로도 불멸에 가까운 무위를 휘두르던 초월자가 소멸해가고 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부서져 흩날리는 얼음지대를 넘어 대장군의 앞에 선다.
흑백으로 물든 세계의 저편에서 대장군의 얼어붙은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훌륭, 했습니다.”
“…….”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돌아오신 뒤에도…….”
어느새, 대장군의 목소리는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공허한 시선이 보이지 않는 레녹의 기척을 찾아 느릿하게 흔들렸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의 공허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소장의, 부족한 실력으로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군요.”
“……네 덕분이지.”
가볍게 기침한 레녹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쓰러진 대장군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목구멍에 고인 피를 뱉어낸 레녹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술식을 곧바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거다.”
“…….”
광성대장군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공양의식을 취소시키고 영묘를 부숴두었기에.
사천사화마경을 훼손하며 무너뜨리고 레녹에게 영묘의 부장품을 넘겨주었기에.
마지막까지 레녹에게 전력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안배해 주었기에.
“천의무봉을 사용한 건 승천자급의 전투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무외(無外)의 출력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했지.”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원래라면 나 자신이 사용하는 술식에 내가 직접 영향을 받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이건 그러한 규격 자체를 뛰어넘는 힘이니까.”
흑해요신락과 천화만리향을 충돌시켜 터트리는 심의, 무외는 레녹 자신조차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소멸기.
만화경 안에 존재하는 두 가능성을 억지로 융합시켜 말 그대로 시공간 전체를 한 번에 날려 버리는 힘이다.
모든 것이 느릿하게 소멸해 가는 이 순간조차, 무외의 빛이 사천사화마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다는 증거.
외해와 직접 연결된 이 지옥도의 인과가 끊어지고 나면, 이곳의 모든 것도 덧없는 환상처럼 사라지겠지.
모든 인과를 완벽하게 소멸시키는 극의를 사용했기에, 외려 두 사람에게 주어지는 잠깐의 시간.
이 정도 위력의 극의를 대장군에게 맞히는 것은, 긴박한 전투 도중 레녹이 직접 대장군을 붙잡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레녹은 대장군과 함께 무외의 술식에 노출되는 것과 동시에 싸움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의무봉의 술식효과는 불가능한 과정을 성립시키는 힘. 한계를 초월한 교전에서 억지를 부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능력이다.”
레녹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외의 힘에 휩쓸려 무너지는 마경 한복판에서, 레녹의 육신을 보존하는 잔불.
모든 싸움이 끝난 뒤에도 희미하게 육신에 감도는 천의무봉의 힘을 느끼며 레녹이 눈을 감았다.
“축퇴로의 핵이 있었다 해도 원래라면 이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했겠지.”
“…….”
“대장군.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 순간을, 이런 식으로 맞이할 순 없었을 거다.”
“……귀공께서 소장에게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았습니다.”
담담하고, 평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소멸해 가는 초월자가 말했다.
흐릿하게 반개한 그 눈동자는 조용하게 흔들리듯 레녹을 쫓고 있었다.
“귀공께서는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오셨군요. 제 결말을 정해주는 순간조차 그리 아파하실 만큼…….”
“…….”
“내면의 불꽃이 촛불처럼 위태롭습니다. 그것이 귀공께서 선택하신…… 운명을 바꾸는 대가입니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레녹이 한 팔을 감싸 쥔 채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 세계도, 나 자신의 결말도…… 분명 저편에서 답을 얻을 수 있겠지.”
“…….”
“후회가 남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대장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꺼져가는 숨결로 힘겹게 사라지는 몸을 들썩였을 뿐.
“……가까이, 와 주시겠습니까.”
레녹이 대장군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과 동시에 손을 뻗었다.
흩어져 먼지로 화해가는 대장군의 거친 손이 레녹의 손과 맞닿은 그 순간.
사체에서 흘러나온 황금빛의 선율이 레녹의 손을 타고 천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사천사화마경에 보관되어 있던 의사권능 : 타락한 황금률.
삼태극의 묘리로 완성되는 천지인의 개념 중 마지막 조각. 대장군이 지니고 있던 인(人)의 힘을 이어받는 이 순간.
죽음으로서 인연과 인연을 잇고, 결말의 끝까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새긴다.
광성대장군이 레녹에게 바랬던 자신의 결말. 레녹이 그 대가로 이어받는 의지.
대장군이 눈을 감았다.
“길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마지막이군요.”
동시에 대장군의 사체가 빠른 속도로 먼지가 되어 소멸하기 시작했다.
의사권능의 연결을 통해 겨우 붙잡고 있던 육신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형태를 잃어간다.
무외의 극의가 펼쳐진 마지막 순간, 이미 대장군의 인과는 이 세계에서 완전히 소멸을 맞이해 있었다.
“다른 대장군들은, 아마 저와 같지 않을 겁니다…….”
소멸해 가는 그의 목소리가 빠르게 희미해졌다.
“귀공의 ‘역할’을 원치 않은 이들도, 제국의 결말을 비웃는 이들도 있었으니…….”
“……대장군.”
“하지만, 저는…… 귀공께서 일러주셨듯이…… 이 잔혹한 세계에도 다음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
“그러니 부디, 귀공께서는 마지막까지 옥체를 보존하시길.”
한 줌의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대장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 부덕한 신하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파아아앗!!!!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장군의 존재가 산산이 흩어져 소멸했다.
평생 동안 짊어지고 있던 광증을 내려놓고 마침내 안식에 이르듯이.
레녹이 정해준 결말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
죽은 승천자의 결말을 보며 레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참 동안, 레녹은 머리 위로 흩어져 사라지는 대장군의 잔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광성이 남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째서 대장군이 레녹에게 그리 친절했던 건지.
오래전의 과거에 남겨져, 이미 진작 결말이 정해졌던 그 모든 의미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긴다.
대장군의 소멸과 함께 사천사화마경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지금.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하아, 하아…….”
쿠구구구!!!!
레녹과 대장군의 마지막 결전을 거쳐 그 여파로 소멸해 가는 지하 신전의 최심부.
무외의 빛에 노출되어 모든 것이 흑백으로 점철되어 사라져가는 마경의 끝.
눈앞에 비치는 모든 것이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복도 사이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영묘 최하층에서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경사로.
광성대장군이 열어준 제국 황성으로 향하는 길 앞에 선 레녹이 걸음을 멈췄다.
“…….”
사천사화마경 공략을 끝낸 지금 당장 이 앞으로 갈 수는 없다.
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레녹이 원하는 목적지인 제국 황성이 아니라 또 다른 마경.
그곳에는 광성대장군에 비견되거나, 그보다 더한 망가진 괴물이나 재앙들이 도사리고 있겠지.
적어도, 이 마경에서 레녹이 손에 넣은 것을 정리할 잠깐의 시간 정도는 필요할 터.
허나, 그럼에도 레녹이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다시 이 앞에 내려온 이유는-
“……다비.”
흑백으로 물들어가는 시공간의 중심에 선 레녹이 품 안에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철컥.
황금빛으로 빛나는 촉매가 들어 있는 시험관을 꺼내 입구를 연다.
그 안에 담긴 시료를 한 손에 쏟아 움켜쥔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이 시공간좌표에…… 마킹을 해둘 생각이야. 도와줄 수 있겠어?”
[물론이죠, 마스터.]사천사화마경이 완전히 무너지고 나면 이곳의 지형 자체가 바뀌어 길을 찾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레녹은 그때를 대비해 마지막까지 이곳에 보험을 남겨두고 갈 생각이었던 것.
곧바로 레녹의 말을 알아들은 다비가 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행성기준좌표와 공전좌표를 중첩해서 마킹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위치를 찾아드릴게요. 조금만 연산을 하면 금방…… 어라?]눈앞에 홀로그램을 띄워 올린 다비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스터. 바로 아래에 이미 마커가 있는데요?]“…….”
힘겹게 고개를 숙인 레녹이, 기침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
한 손으로 땅을 파내려던 레녹이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말라붙은 마력을 긁어내 공용마법을 영창. 땅을 파내는 마법을 사용해 흙더미를 파낸다.
파칵!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은 레녹이 마법을 멈추고 시선을 기울였다.
흙더미 아래 파묻힌 채 살짝 모습을 드러낸, 매끈하고 검은 표면.
맨손으로 그 표면을 쓰다듬고, 몇번 두들긴 뒤에야 레녹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관이군.”
쿠구구궁!!
지상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휘청이며 레녹이 중얼거렸다.
“대장군의 영묘보다도 더 깊은 곳에…… 다른 누군가가 묻혀 있었어.”
끼이익……!
남아 있는 흙더미를 파낸 뒤 굳게 닫혀 있는 흑관의 문짝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양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죽어 있는 젊은 청년의 시체.
푸른 머리칼을 지닌 수려한 외형.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화사한 모습.
타락한 영묘 최하층에 묻혀 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갈하고 고결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어디선가 한번 마주한 적이 있는 듯한, 묘하게 익숙한 기운에 레녹이 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족의…… 시신인가?”
토벌전에서 만난 제국의 황족, 에제키엘 론 메이즈와 묘하게 닮아 있는 듯한 화사하면서도 덧없는 인상.
레녹의 감각으로도 어렴풋이 기시감이 느껴질 뿐이지만, 그럼에도 무심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의 직계 혈족.
푸른 피를 이었다는 황족의 시신이 사천사화마경의 최심부에 묻혀 있었음을.
“…….”
레녹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대장군은 이곳에 분쇄자를 꽂고 ‘무언가’를 작동시켜 길을 열어주었다.
만약 당시 대장군이 분쇄자를 사용해 건드렸던 대상이 특별한 장치가 아니라 이 황족의 시신이었다면.
제국 황성은 다름 아닌 황족의 시체를 마커로 삼아 사천사화마경의 좌표를 기록해둔 것인가.
오고 가는 생각은 많았지만, 고민은 길지 못했다.
[마스터.]레녹과 함께 조용히 시신을 내려다보던 다비가 물었다.
[저 진혈종의 손이…… 뭔가 쥐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쥐고 있다고?”
양손을 가슴에 모아 올려둔 시신의 손이 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다.
마치 무언가를 소중하게 쥐어 간직하고 있는 듯한 자세임을 깨달은 레녹이 손을 뻗었다.
찰칵.
시신의 손 안에 들려 있던 것은 손가락 정도 크기에 달하는 작은 징표.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징표의 옆면에,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음각이 되어 있었다.
네 번째의 저편에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언젠가 다시 돌아올 친구를 위해 만들다
“…….”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전언.
그것을 남긴 존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무심한 메시지.
하지만 그럼에도 레녹은 이것이 누구에게 전하는 말인지, 이것을 남긴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황족의 시신을 한낱 마커로 삼아 마경에 묻어 넣고, 자신의 전언을 전하는 전령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
네 번째의 저편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한 그 말.
언젠가의 레녹이 이 사천사화마경을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처럼 가까이서 전해오는-
“황제…….”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의 정점. 이제는 외신이 되어 이 세계를 떠난 초월자.
이것은 황제가 레녹에게 직접 남긴 전언이자 메시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레녹을 기억할 수 있다는 듯, 아무리 거리가 멀어져도 레녹을 기억하려 한다는 듯.
지금껏 전해 들은 황제에 대한 섬뜩한 행적과는 반대로, 이 징표에서 느껴지는 것은 희미한 그리움에 가깝다.
황제는 레녹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예전의 자신은 황성에게 있어 어떠한 존재였을까.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의 결과로서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이제 와서 레녹이 그때의 기억을 파헤치며 황성에 도달하는 것이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
“……돌아가자.”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이 모든 대답은 레녹이 앞으로 나아가는 도중에만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것.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답을 내렸기에. 아직 이 여정에 의미가 있다고 믿기에.
한 손으로 징표를 쥔 채, 다른 손에 든 촉매를 흩뿌려 마커를 새긴다.
황족의 시체와는 별개로 레녹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겨,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아올 수 있도록.
쿠구구구구구!!!!!
흑백으로 일그러지는 마경의 풍경이 남김없이 휩쓸리며 빛에 집어삼켜진다.
중앙전선 바깥에서부터 여러 난관을 불태우며 시작되었던 대장군의 영묘 공략.
연맹과 교단의 협력과 배신을 지나, 외신을 만나고 대장군을 깨운 뒤 결말에 이르기까지.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 세계의 중심부로 향하는 한 걸음을 새롭게 내딛은 이 순간.
콰과과과과-!!!!
무외의 여파에 뒤덮여 소멸해나가는 사천사화마경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레녹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렸다.
붕괴하는 지상을 해일처럼 쓸어버리는 빛의 파도가 이번에야말로 남아 있던 모든 잔해물을 남김없이 뒤덮고.
레녹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곳에 남겨진 모든 것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묻어버렸다.
* * *
귀도 교단 총본산이 위치해 있는 비탄의 협곡 최심부.
바다의 신들을 숭배하는 만신전의 전당에는 얼어붙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
장엄한 신전 벽면에 떠오른 불투명한 스크린의 저편.
그 위로 흘러넘치는 사천사화마경을 뒤덮은 흑백무상의 광채.
교단의 대소사를 이끄는 추기경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