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23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3화(1323/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3화
설계된 초월성(1)
귀도 교단 총본산, 비탄의 협곡.
만신전이 위치한 장엄한 백색의 신전 앞에서, 화려한 예복을 입은 추기경들이 바쁘게 걷고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추기경 모두가 교단의 대소사에 참여하며 이 거대한 조직을 통솔하는 수장들.
개개인이 지부와 단체를 이끄는 이들이자, 수십만 신도들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 지도자다.
하지만 언제나 평정을 지키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의 표정이 지금만큼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천사화마경의 공략이 실패로 돌아갔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더냐.”
“신녀께서 직접 손을 쓰신 계획이다. 그 7사도가 나섰는데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고?”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허튼 조사를 하였다면 경을 칠 것이야……!”
세이나의 뒤를 이어 11대 신녀에 오른 우레카 나이드리는 역대 신녀들 중에서도 유독 포악한 성정이 두드러지는 자.
하지만 상종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나운 성품과는 별개로, 그 능력만큼은 보수적인 만신전의 추기경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총본산 지하에 유폐된 미친 사도들을 재활용하는 권능도 권능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교단의 성세를 끊임없이 확장하는 그 공격적인 행보 그 자체.
교단의 최전성기에 신녀를 맡아 안정을 추구한 이젤이나, 역대 나이드리 중에서도 가장 온건한 성품이었던 세이나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불신자들을 지옥 밑바닥에 밀어 넣는 한이 있더라도 교단의 영광을 추구하는 우레카의 행보를 내심 기꺼워하는 추기경들이 적지 않았던 것.
“그 견뢰와 맞서면서도 아나테마를 6사도로 삼으셨던 분이다.”
“그분이 직접 나섰는데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을 리가 없-”
[아아아아아악-!!!!!]그 순간, 만신전 전역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에 추기경의 발걸음이 딱딱하게 굳었다.
잔뜩 쉬고 갈라진 칼칼한 목소리로 찢어져라 소리지르는 음색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들 역시 곧바로 알아차렸던 것.
“이럴 수가……!!”
“비켜라, 지금 당장 신녀님을 뵈어야겠다!!”
“불가합니다.”
발 빠르게 비명이 들려온 방으로 향하던 추기경들이, 앞을 막아서는 교정기사들에게 저지당했다.
역정을 내며 당장이라도 방으로 들어가려는 추기경을 막아선 기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방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전을 장담드릴 수 없습니다. 부디 물러나 주십시오.”
“무슨 헛소리를……!!!”
파직……!!!
버럭 소리를 지르며 기사를 밀치려던 추기경이, 문틈 사이로 터져 나온 뇌광에 흠칫 몸을 떨었다.
굳게 닫힌 채 몇겹에 달하는 봉인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 범람하는 새파란 광채.
그 벼락 안에 담겨 있는 섬뜩한 살의를 마주한 추기경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사특하기 그지없는 살의로다……!”
“설마, 신녀님께서 그 자에게 다시……!!”
“마경 공략 도중에 영성이 훼손될 정도의 큰 부상을 입으신 듯합니다.”
문 앞을 지키고 선 교정기사들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문에 신녀님의 팔에 새겨진 벼락의 저주가 폭주하며 그분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
“사제들을 공양하여 어떻게든 억누르고는 있지만, 이미 고통에 의식을 놓아버리셔서……”
[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문 너머에서 번뜩이는 뇌광이 거세질 때마다, 신녀의 목소리 역시 고통과 광기에 절여져 변질되어 간다.
그때마다 문틈 아래로 새빨간 선혈이 줄줄 흘러나오고 방 안에서 무언가 퍽퍽 죽어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단의 누구보다 독한 성정을 지닌 신녀가 한낱 고통을 참지 못해 인격째로 망가져 가고 있는 형상.
대체 그 몸에 새겨진 벼락이 얼마나 지독한 힘이기에 저렇게까지 버티지 못하는 것일까.
“현장을, 현장을 확인해 봐야겠구나.”
더듬거리며 물러난 추기경이 황급히 걸음을 돌렸다.
“신녀님께서 지금 쓰러져서는 아니된다. 마경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아야겠다!”
만신전의 추기경들은 오랫동안 교단에 몸을 바쳐온 만큼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원로가 대부분.
모든 추기경이 우레카를 호의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그녀의 필요성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성전 이후 오랫동안 멈춰 있던 교단이 이제 와 다시 활발하게 운신할 수 있는 것은 우레카의 권능에 기반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미친 사도들의 이성을 되돌려 교단의 전력으로 재활용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전선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드넓은 전당으로 이동한 추기경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제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저울술식을 빌려 사천사화마경을 비추겠다. 지금 당장 문을 열어!!”
“지금은 사도술식을 사용하지 않아도 마경 관측이 가능한 상황입니다만…….”
머뭇거리던 사제가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말씀하신 대로 현장을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뭘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길게 늘어놓는 것이냐……!!”
분개한 표정으로 소리치며 전당으로 이동하던 추기경들이, 전당 위에 떠오른 영상을 보고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교단의 사제들이 사도술식을 사용해 안개가 완전히 걷힌 사천사화마경의 풍경을 하늘에서부터 비추는 영상.
하지만 죽음을 먹고 존속하는 그 지옥도는, 더 이상. 추기경들이 익히 알고 있는 거대한 밀림의 풍경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아-
하늘과 지상이 흑백으로 물들어 뒤섞이며 만상이 소멸해 나가는 아득한 정경.
모든 것이 색채를 잃고 무너지며 세계의 바깥으로 떠밀려 사라지는 무외(無外)의 극치.
불투명한 스크린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추기경들이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멈춰 섰다.
“……저건.”
사천사화마경 전역을 뒤덮고 일그러지는 무외의 광채.
특정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켜 세계의 바깥으로 밀어내 버리는 파멸의 기적.
본래 이 세계 안에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을 억지로 창조하여 현세에 강림시키는 초월의 공능.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상을 통해 지켜보고 있음에도 영혼이 짓눌리는 압박감이 느껴진다.
쿠오오오오오오오!!!!!
“…….”
만신전의 추기경은 교단 내에서도 가장 존귀한 위업을 쌓은 신도에게만 허락되는 자리.
성전에 참가한 전적이 있거나, 전선에서 군종사제 역할을 맡아본 적이 없는 신도는 닿을 수조차 없는 직위다.
이곳에 모인 모든 추기경이 일선에서 불신자를 처단하거나, 실전경험이 풍부한 이들임은 자명한 바.
그렇기 때문에 저 영상을 보는 순간 모든 이들이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저 흑백의 광채는 사천사화마경이 진정으로 무너져 소멸했다는 증거.
자신들은 모든 것이 끝나고 저편에 남아 있는 결과의 잔재만을 엿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마주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압도당해 움츠러들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조차.
얼어붙은 침묵 속에서 현장 상황을 보고하는 사제들의 목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사천사화마경 전역에서 시공간 붕괴가 관측 중. 0.025초 주기로 일대 좌표 전체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영묘 내부에서 관측되던 광성대장군의 영성반응이 소실되었습니다. 직전의 소멸기로 인한 영자의 완전소멸을 확인.”
“외해 바깥에서 신들의 의지가 감응하고 있습니다. 마경 내부에서 진행 중인 인과소멸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소멸지대 최심부에 남아 있는 술식잔향을 확인. 극동지부의 사태와 흡사한 비현실적인 수준의 열량 제어…….”
실시간으로 보고를 이어가던 사제들 중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번(踐燔) 에반 마르티네스…… 사도살해자의 술식으로 보입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수십 명의 사제들이 모여 있는 만신전 안에 적막이 흘렀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끝내 확신하지 못했던 그 이름.
7사도가 마경에서 조우했다던 사도살해자가, 기어이 저 지옥의 중심에서 홀로 승리를 거두었음을.
그것도 죽은 승천자를 상대로 사천사화마경 전역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얻어냈음을 이해했기 때문.
[실로 경이롭기 그지없군.]푸드득-
얼굴에 기괴한 문어다리가 이리저리 돋아난 사제가, 뒷짐을 진 채 추기경들의 곁으로 걸어 나왔다.
촉수로 뒤덮여 본래 얼굴에 존재하는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기괴한 형상.
그 인간을 벗어난 자태에서 상대의 정체를 직감한 사제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캄로달 님!”
“고명하신 8사도를 만신전에서 뵙습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 믿을 수 없는 결과가 이렇게 교단의 눈앞에 있다.]사제들을 무시하고 대번에 영상 앞으로 다가선 캄로달의 인형이 느긋하게 말했다.
[에반 마르티네스…… 그 천번이 황성의 대장군을 쓰러뜨렸군. 그것도 교단과 연맹의 견제를 뿌리치고 단신으로…….]“…….”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 하나, 한낱 인간의 몸으로 승천자를 쓰러뜨린 셈인가. 대륙 역사에 이만한 위업을 남긴 존재가 몇이나 있었지?]“이건, 말도 안 돼…….”
나이가 지긋한 추기경들 중 누군가 패닉에 빠져 중얼거렸다.
“놈이 극동지부에 나타났을 때는 10사도와 비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어. 어떻게, 고작 몇 년 사이에 이런, 이런……!!!!”
전대 10사도 암리타 프라우벨은 위대한 성전에 참가했었던 걸출한 전사.
그렇기에 그 암리타를 일대일로 죽인 천번을 교단에서는 한 순간도 경시한 적이 없었다.
첫 번째 관문에서 접합술주를 죽였을 때도, 열병식에서 군단을 상대로 난동을 피우고 도망쳤을 때도.
교단의 적이라 여기며 배척해 왔음에도, 그 실력과 재능만큼은 항상 인정하고 경계하며 주시해 왔던 바.
허나 그런 교단의 수뇌부조차, 천번의 힘이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8레벨의 최상위에 머무르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진작 그 너머의 단계를 두들기고 있으리라고는-
쿵!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신녀의 방에서 터져 나오는 뇌광에 의한 것인지, 천번이 아홉 번째 위계의 경계선을 부수는 소리였는지.
어느 쪽이든 오랫동안 이어져온 교단의 질서를 무너뜨릴 법한 파멸의 울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추기경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살의가 맴돌았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 에반 마르티네스를 죽여야 하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놈이 한 일이 대륙 전역에 퍼질거요.”
“놈이 홀로 사천사화마경을 공략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돼. 감히 주시자 출신 따위가……!!”
총본산의 사제들이 별다른 술식을 사용하지도 않고 마경을 소멸시키는 술식의 잔향을 관측해 냈다.
그렇다면 중앙의 다른 세력들 역시 오래지 않아 사천사화마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게 될 터.
사천사화마경 공략이 성공했다는 정보가 퍼지는 것도, 천번의 위상이 하늘 끝까지 치솟는 것도 조만간이다.
무엇보다 경계되는 것은 교단의 원로들조차 난생 처음보는 수준에 이른 천번의 비현실적인 성장속도.
바다의 신들을 섬기며, 그들의 화신체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신도들조차 궤를 달리하는 그릇이다.
저런 것이 교단을 배척하며 적대하고 있는 이상,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죽여야 할 터.
[그대들이 천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군.]하지만 추기경들 앞에 서 있던 캄로달의 인형은 그들의 생각을 뻔히 알면서도 동조하지 않았다.
[망가진 라리아타조차 정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할 만큼 강대한 불꽃이다. 사도 중에서도 가장 생환능력이 뛰어난 흡혈귀가 당했는데, 간단한 비책 따위로 해결이 될 리가 없지.]“캄로달 님. 하지만……!!”
[그러니 여기서는 일단 부재중인 신녀의 자리부터 다시 채워 넣는 게 좋지 않겠는가?]“……예?”
순간적으로 멈칫한 추기경들을 뒤로하고, 캄로달이 느릿하게 박수를 쳤다.
동시에 새하얀 신전의 기둥 뒤편에서 창백한 안색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10살조차 되어보이지 않는 어린 나이. 그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나 의지가 없는 것처럼 무표정하다.
옷이 아니라 넝마를 걸치고 있는 볼품없는 몰골. 마치 어딘가의 고아원에서 버려진 듯한 초라한 자태.
하지만 그 얼굴에서 기억속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린 추기경들이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이 아이는……!!!”
“이럴 수가, 캄로달 님!!!”
[현대의 신녀가 자리를 비운 이상, 그 역할을 대신 맡아줄 수 있는 건 이미 무대에서 물러난 신녀뿐이겠지.]얼굴에 촉수가 뒤덮인 사제가 천천히 소녀의 곁으로 걸어와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이 아이는 세이나 나이드리의 유전정보를 이용해 만들어둔 대체품이다.]“……!!!!”
[역대 신녀들 중에서도 제사장의 재능만으로는 가장 뛰어났던 10대 신녀의 복제. 하지만 그 내면은 텅 비어 있는 인형이지.]문어다리가 꿈틀거리며 소녀의 팔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소녀는 그것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외부의 감각이나 감촉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을 뿐.
그 전혀 인간같지 않은 기묘한 모습에, 당황해 물러나던 추기경들이 하나둘씩 평정을 되찾았다.
[제사장의 권한이 소실되었다 해도, 10대 신녀의 그릇이라면 11대가 하던 일을 이어받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다. 이건 11대와는 달리 진짜로 ‘완성’되어 있던 그릇이니까.]“그건…….”
캄로달이 묘하게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두사도가 직접 공언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피, 필두사도께서……!!!!”
그 순간, 만신전에 있던 모든 이들이 더할 나위 없이 놀란 기색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이나 나이드리의 대체품을 만든 일 자체가 8사도의 독단이 아니라, ‘그’의 묵인이 있었다는 증거.
그렇다면, 그 말은 즉-
[사천사화마경이 공략당하며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중앙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천천히 세이나의 그릇에게서 손을 뗀 캄로달이 걸음을 옮겼다.
[한계를 초월한 괴물들이 깨어나고, 준신의 경지에 달한 악마들이 세계를 오시하겠지. 그렇다면 교단 역시 마땅히 응할 뿐이다.]“설마, 그 말씀은-”
[에반 마르티네스가 보여준 기지에 위대한 의지께서 응답하셨다.]음울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눌러담으며, 캄로달이 속삭였다.
[이제 곧 2사도께서 직접 움직이실 것이다.]* * *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던 협곡이 무너지며 암반이 으스러진다.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먼지에 뒤덮여 파묻히고,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을 내뿜었다.
사천사화마경 초입부에 위치한 주문연맹의 주둔지.
막사와 물자들이 널브러진 폐허 속에서 아일렌이 심각한 표정으로 신호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안돼. 신호는 가는데 연결이 닿지 않아……!!”
쿠과과과과과!!!!
신호기의 회선을 조작하는 와중에도 지면이 미친 듯이 흔들리며 뒤집어진다.
눈에 보이는 마경의 광대한 밀림 전체가 흑백의 빛에 뒤덮여 일그러져가는 섬뜩한 정경.
그 흑백무상의 광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까지 뻗칠 것을 알면서도 조작을 멈추지 않는다.
삑, 삑!!
신호가 울림에도 마경의 상공을 통과하지 못하고 막혀버리는 현상.
흔들리는 눈으로 신호기를 붙잡고 있던 아일렌이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옆에 세워둔 건블레이드를 붙잡고 마지막으로 남은 탄창을 확인.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팔뚝에 칼날을 가져다 댄다.
그렇게 최소한의 준비를 끝낸 아일렌이, 저 멀리서 뻗쳐오는 흑백의 폭발광을 향해 몸을 돌리고.
망설임 없이 자신이 탈출해 나온 마경을 향해 다시 들어가려던 그 순간.
“자살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겠군.”
“……!!!”
아일렌이 블레이드를 떨어뜨릴 정도로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막사 천막 사이에 기대 선 레녹이 피곤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일렌이 떨어진 검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마, 마르티네스!! 어떻게……?!!”
“이쪽의 일은 거의 다 끝났어.”
레녹이 힘겹게 장대를 짚고 주둔지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흔들리는 지면을 따라 고개를 푹 숙인 레녹의 몸이 같이 비틀거렸다.
“당분간 저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소멸해 외해 바깥으로 쓸려나갈거다.”
“소멸, 한다고요……?”
“미리 눈치채고 바깥에 빠져 있었나……?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어.”
무너진 막사 기둥을 잡고 버틴 레녹이 지친 표정으로 아일렌을 돌아보았다.
“이런 부분에선…… 판단이 확실해서 좋군. 애매하게 마경 안에 남아 있었다면 휩쓸렸을 거다.”
“……그건, 저…… 미리 알고 피해 있던 건 아니에요.”
아일렌이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말했다.
“두 사람의 일에 제가 끼어드는 것보다는, 기관을 호출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주둔지의 회선을 이용하려 나와 있었는데…….”
“……그런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이다 우연히 운이 닿았던 걸까.
아일렌이 영묘에서도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왔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우연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레녹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힘겹게 숨을 골랐다.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이는, 전신의 마력과 의념이 텅 비어 있는 듯한.
허나 그럼에도 아일렌은 레녹의 공허한 기척을 마주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사천사화마경 전역을 통째로 소멸시키는 흑백의 정취. 그 중심부에서 지친 표정으로 걸어 나온 마법사의 존재.
그 사실 자체가 영묘 저편에서 있었던 모든 인과를 마무리 짓는 하나의 결과에 가깝다는 것을.
그렇다는 것은, 즉-
“이럴 수가…….”
아일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 대장군을 상대로……?”
“애초에 처음부터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었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군.”
“……그건.”
“뭐가 궁금한지는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그렇게 말한 레녹이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모든 일을 끝내기 전에, 한가지 확인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지 않았나.”
“…….”
막사 천막 구석에 전신이 단단하게 결박된 채로 쓰러져 있는 아더의 모습.
아일렌이 구속해 주둔지까지 끌고 나온 아더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레녹이 말했다.
“태양선의 항해사. 사천사화마경의 타락에 일조한 외계의 악령. 맹주의 조언자.”
그 육신 안에 깃들어 있는 야차의 영성을 꿰뚫어 보듯 레녹이 시선을 가라앉혔다.
“멸망한 다른 세계와 외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 자와 먼저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