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24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4화(1324/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4화
설계된 초월성(2)
쿠구구구구……!!!!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격해진다.
귀청을 멀게 만드는 아득한 굉음이 커져 가면서, 천지를 뒤흔들고 요동쳤다.
사천사화마경 초입부에 위치한 주문연맹의 주둔지 폐허.
방금 전까지 자리하고 있던 폐허의 풍경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던 아일렌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요. 여기까지 물러났는데도 진동이 가실 기미가 없네요.”
후욱!!
흔들리는 고목 위에서 가뿐하게 뛰어내린 아일렌이 옷을 털며 말했다.
“잠깐 도망치는 정도로는 저 소멸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겠어요. 대체 저 마경에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예요?”
“…….”
레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풀이 우거진 바위에 걸터앉아, 말없이 자신의 팔을 주무르는 일에 열중했을 뿐.
대장군과의 결전을 끝내고 사천사화마경을 이탈해 아일렌과 재회한 직후.
레녹은 아일렌과 함께 아더를 끌고 주둔지 폐허에서 한참 더 뒤로 물러나 있었다.
사천사화마경이 무외의 빛에 휩쓸려 사라져가는 이 순간.
시공간 축이 지워지며 지각이 뒤틀리는 충격을 마경 초입부에 위치한 주둔지에서는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
“마경이 무너지는 속도가 생각보다도 더 빨라요. 갈수록 피해규모가 더 커져가고 있네요.”
“마경 바깥까지 소식이 닿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겠군…….”
천천히 주물러서 풀어준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넣던 레녹이 말했다.
그 옆에는 이미 투여를 마친 앰플이 벌써 십수 개는 넘게 널브러져 있었다.
찰칵, 바늘을 밀어 넣고 앰플을 작동시킨 레녹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뒤에 물었다.
“붕괴규모는 어떻지? 지진강도를 감안하면 이곳까지 여파가 미치는 것도 금방일 듯한데.”
“틀린 말은 아니네요. 마경이 무너지면서 안쪽의 환경 전체가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아일렌이 대답하며 레녹을 향해 걸어왔다.
“아직은 시간이 있겠지만, 지진이 심해지면 우리도 지금보다 더 멀리 이동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 전에 간단하게라도 정비를 끝내야겠군.”
“일단 그쪽의 투약이 끝나야만 가능하겠지만 말이죠.”
그렇게 말한 아일렌이 레녹의 옆에 주르륵 늘어진 주사기를 질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약을 많이 꽂으면 부작용 때문에 수명이 깎여나갈 것 같은데…… 괜찮은 거 맞아요?”
“반대다.”
레녹이 태연하게 대꾸하며 앰플을 쇄골에 꽂아 넣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남겨두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어처구니가 없네요. 견뢰랑 싸운 뒤로 이상한 재주를 배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천번의 스카웃을 위해 정보를 모아온 기관이라면, 천번이 견뢰와 충돌한 뒤로 꾸준히 약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아일렌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레녹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젓기만 할 뿐, 딱히 놀라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육신으로 근원심상을 휘두르고 있었는데도, 대장군의 의지는 홀로 세계의 법칙을 뒤틀고 있더군.”
투약을 마치고 팔뚝에 붕대를 감아 지혈하며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상대였고, 그만한 자격이 있는 초월자였다. 결착을 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니 이 정도 대가로 끝난다면 싸게 먹힌 셈이군.”
“그게 대체 무슨…… 오히려 그쪽이 더 고대의 장군처럼 말하고 있는 거 알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가 레녹의 반대편 상자에 걸터앉았다.
연이은 격전으로 날이 다 빠진 건블레이드를 어깨에 기댄 아일렌이,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흔들리는 지진 속에서, 비로소 겨우 마경 공략이 모두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는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 땅을 바라보던 아일렌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대장군께서 안식을 원하셨다면 그걸로 됐어요. 어쩌면 일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
“어쩌면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그것뿐일지도 모르죠.”
대장군이 아일렌을 돌려보낸 순간, 이미 두 사람이 충돌할지도 모른다고 직감하고 있었던 것인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이성적인 도살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처음부터 결말을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일렌은 그러한 감상을 풀어 설명하는 대신 복잡한 표정으로 꽃안개가 씻겨 내려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난 어떻게든 살아서 우리의 고향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봐야겠어요. 그런 미련조차 간단히 버릴 수 있을 만큼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라.”
“…….”
“서두르지 않고,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닿게 될지도 모르죠. 그쪽의 말대로 지금의 내가 뭘 원하는지가 중요하다면-”
철컥!!
건블레이드에 탄창을 장착한 아일렌이, 총구를 홱 틀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총신이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쏘아진 탄환이 엄청난 속도로 막사 구석을 향해 내리꽂히고.
온몸이 묶인 채 엉금엉금 기어가던 아더 메이슨의 움직임이 제자리에 딱 멈춰 섰다.
차가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일어난 아일렌이 탄창을 회전시키며 말했다.
“일단 저 쓰레기를 최대한 빠르게 심문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죠.”
“심사숙고한 것 치곤 나쁘지 않은 결론이군.”
“으으읍!!”
팔다리가 묶인 채 막사 구석에서 몸부림치는 아더의 모습.
눈동자가 충혈되어 있긴 하지만, 적어도 검게 물든 역안은 아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더가 현재 야차에게 몸을 빼앗긴 건 아니라는 증거.
아더의 앞에 선 레녹이 수술을 앞둔 의사처럼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린 채 말했다.
“아더 메이슨의 상태는?”
“전신의 뼈가 부러졌고, 온몸의 근육이 파열되어 있긴 하지만 목숨이 위험한 수준은 아니에요.”
아일렌이 레녹의 옆에서 차가운 시선으로 아더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부상의 경중을 따지자면 영묘 공략 도중에 무리를 했다 정도? 내장의 파열이나 중추신경의 손상은 일절 없어요.”
“놈이 처음부터 야차와 손을 잡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군.”
“으으으읍!!!”
그 말을 들은 아더가 발작했지만 레녹은 본체도 하지 않았다.
“아더를 제압해 둔 방식은? 대장군이 목을 부러뜨린 뒤로 따로 손댄 부분이 있나?”
“기관에서 사용하는 속박진언을 썼으니 안전할 거예요. 살령이문마경을 탐사하다 발견한 저주의 일종인데, 인간에게 특화된 업 같은 거라 고위계 초인에게도 잘 먹히죠.”
찰칵.
아일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레녹이 품 안에서 앰플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약물이 채워진 주사기의 날카로운 바늘이 번뜩이고, 그 끝에 맺혀 있는 방울이 떨어졌다.
치이이익!!!
지면에 닿는 것과 동시에 그 주변의 흙더미를 녹여버리는 약물 방울의 흔적.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며 땅을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막사를 벗어나기도 전에 아일렌이 아더의 어깨를 밟아 멈춰 세우고, 레녹이 무릎을 굽혀 목을 눌렀다.
턱!!
“가만히 있어라. 이제 와서 널 죽이려는 건 아니니까.”
“끄끄끄끄끕!!!”
레녹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불신의 눈빛으로 노려보는 아더.
하지만 레녹은 아더의 목에 주삿바늘을 가져다 대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 몸 안에 야차가 깃들어 있는 이상 무슨 수작질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지. 그러니 풀어주기 전에 심신의 저항능력을 조금 빼앗을 뿐이다.”
“으으으읍!!”
“방금 막 대장군을 상대하고 오는 길이라 좀 피곤하거든. 그렇게 날뛰면 바늘이 네 척수나 신경을 찌를지도 모르는데.”
“-읍?!”
레녹이 대장군을 상대하고 왔다는 말에 놀란 것인지, 순간 아더의 몸부림이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레녹이 주삿바늘을 아더의 경동맥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푹.
“……!”
앰플 안에 든 약물이 혈관을 타고 스며드는 것과 동시에 아더의 몸이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레녹이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더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풀어주었다.
“이, 씨, 바, 아아알…….”
흐리멍텅한 눈으로 레녹을 올려다본 아더가 가장 먼저 쌍욕을 토해냈다.
“나한테… 뭘…… 주사한 거냐…….”
“특별한 약물은 아니고, 지옥불이라는 음차원의 불꽃이다.”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우주를 강제로 폭주시키는 힘을 지녔는데, 야차가 네 소우주를 빌미삼아 숨어 있는 이상 딱 좋은 회초리가 되겠지.”
“끄, 읍…….”
“적당히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회복된 것 같으니 묻지.”
부들부들 떠는 아더의 몸을 내려다보며 레녹이 천천히 어깨를 풀었다.
아더와 같이 레녹의 몸에도 슬슬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는지 조금씩 고통이 가라앉는 상황.
진통제의 효과로 근육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레녹이 빠르게 던져야 할 질문을 골라냈다.
“야차와 언제부터 동행하고 있었지? 놈에게 육체를 내준 시점을 말해.”
“추, 축퇴로 앞에서…….”
“축퇴로 앞? 이미 거기까지 야차와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는 건가?”
영묘 내부에서 축퇴로까지 도달하기 위해 레녹 역시 여러 괴물들을 연달아 상대해야 했던 바.
아더가 그 시점까지 야차와 행동을 함께하고 있었다면 역시 허투루 넘길 일은 아니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더가 목을 떨면서 힘겹게 대꾸했다.
“영묘에 들어온 뒤로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공략속도가 빨랐다…… 그래서, 의심은 하고 있었는데…….”
“하고 있었는데?”
“야차가, 갑자기… 상장군에게 뛰어들어…… 자살을…… 그 때문에 나도… 다른 장군과 싸우다 그대로…….”
“…….”
축퇴로를 지키고 있던 제국의 상장군은 둘. 주변을 지키고 있던 사화나 시체들의 숫자는 몇백에 달했다.
갑작스레 전투가 벌어지고 야차가 자살한 직후 아더 혼자 상장군 둘을 상대해야 했다면, 육신을 빼앗긴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까 여기라고…… 씨발…… 억울하다고……!”
처절하게 피를 토하는 아더의 말에 레녹과 아일렌이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딱히 신뢰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아더 메이슨 본인은 야차와의 결탁을 부정하는 상황.
결국, 야차에게 육신을 내준 것 자체가 아더 자신이 원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건가.
“발칸 내전에서도 활약한 용병이다. 그만한 베테랑이 손도 쓰지 못하고 허무하게 몸을 빼앗겼다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글쎄요. 굳이 믿어야 해요?”
아일렌이 싸늘한 표정으로 아더의 미간에 총구를 겨누었다.
“거짓말이면 고민할 필요도 없고, 설령 사실이라도 몸을 빼앗긴 건 맞는데. 어느 쪽이든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게 깔끔하잖아요?”
“죽일 거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 내가 궁금한 건 야차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개입했는지의 여부다.”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야차가 말한 대로 사천사화마경을 타락시킨 기술이 외계 문명의 것이라면, 제국 황성이 그를 이용한 정황을 그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그렇기에 그가 가장 먼저 대장군의 묘실 앞에 도착한 게 아니겠나?”
“…….”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놈도 회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나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대장군의 묘실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봐야겠다.”
“크, 악……!!”
화륵!!
그 순간, 아더의 체내에 주입된 지옥불이 레녹의 마력에 동조해 그 전신을 불태웠다.
아더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화염이 뜨겁게 일렁이며 육신을 불사르고 심상을 자극한다.
음차원의 불꽃이 한계까지 소우주를 폭주시키다 못해 뒤집어버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존재를 강제로 끄집어낸 그 순간.
벌벌 떨며 경련하던 아더의 두 눈동자가 검게 물든 역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고개를 푹 숙인 아더의 입에서, 한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아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척이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으로 돌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이러니한 일이군.”
“…….”
“등대지기의 총애를 받는 주시자가…… 황실의 대장군을 단신으로 쓰러뜨릴 정도로 강대한 초월자였다니.”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야차가 나직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레녹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추는 역안이 묘한 감정을 품고 번들거렸다.
“이런 비현실적인 변수까지 예측하고 계획을 짜라는 건, 나 같은 보잘것없는 악령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나?”
“나오자마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레녹이 손목을 매만지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걸 못했으니 네가 지금 거기 있는 것 아니겠나?”
“후후…… 그렇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순순히 수긍한 야차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그렇게 흘러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네가 공양의식을 그런 식으로 멈춰 세울 줄은 몰랐지.”
“…….”
“깨어난 대장군이 그곳에 모인 인간종 중에서 네 편을 들어줄 거라고도, 그가 너와 원래부터 알고 있던 관계라는 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말을 멈춘 야차의 역안이 레녹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쩌면 야차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럼에도 끝까지 레녹의 얼굴을 눈에 담아두고 싶다는 것처럼.
“그 어떤 계획보다도 나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던 건…… 공양의식을 통해 내려온 외신이, 너를 그렇게나 끔찍이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었겠지.”
“…….”
레녹에게 당해 나가떨어진 뒤에도 묘실 안에서 벌어진 일을 지켜보고 있던 건가.
대장군에게 제압당해 끌려나가기 전까지 수작을 부리려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아일렌과 힐끗 시선을 교환한 순간, 그녀가 야차의 시야 바깥에서 조용히 탄창을 장전했다.
여차하면 아더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 육신에 깃든 야차의 영성을 회수한다.
타락한 황금률을 사용하면 야차의 영성을 회생불가능한 수준으로 박살 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행여나 그가 이곳에서 본 비밀들이 영묘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
하지만, 야차의 감상은 레녹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고 심오한 것인 듯했다.
“암흑의 바다를 방황하며 많은 세계를 돌아보았지만…… 난 외신이 특정한 개인에게 그렇게 반응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총구를 겨누고 있는 아일렌을 뻔히 알면서도 야차가 말했다.
“바다의 신들은 애초에 대화가 가능한 존재가 아니야. 우리는 그들에게 애원하고 욕망을 자극해, 그들이 영원토록 꾸고 있는 꿈의 편린을 빌려올 뿐. 그들의 초월적인 지성과 존재에 닿는 것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도 감히 허락되지 않는 일이지.”
“…….”
“무한한 우주 저편에서 내려온 모든 신들이 그러했다. 대화하지 않고, 비웃으며, 혐오하고, 오직 같은 동족을 잡아다 바치는 배덕만을 받아먹으며 영원히…… 그렇게,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야차의 멍한 눈동자가 레녹의 무표정한 얼굴을 비추었다.
“인간을 잡아먹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위대한 종말이, 네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더군.”
“…….”
“너와 잠깐이라도 대화하는 그 순간을 위해 이 세계의 언어를 익히고, 물질의 형태로서 존재하려 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야차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던 아일렌의 표정 역시 복잡하게 변해 있었다.
아더의 몸을 빼앗은 이 외계의 악령이 이 순간 어떠한 수작을 부릴 생각조차 없음을.
오직 레녹과 대화하기 위해 그 육신을 빌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직감했기 때문이겠지.
“에반 마르티네스. 넌 대체 뭐지? 넌 대체 어떤 존재인 건가? 어째서 너만이 바다의 외신 앞에서 그런 식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무릎 꿇고 레녹을 올려다본 야차가 공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우리의 세계가 멸망할 때는…… 신들은 그런 식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은 거지?”
“…….”
순간, 레녹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 불합리와 불공평함에 대해서는 레녹 역시 마땅한 이유를 붙일 수 없었으니까.
레녹이 가진 것은 천부적인 마법사의 재능이지, 외신의 사랑을 받는 재능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레녹이 지닌 재능 안에 그러한 소질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외신의 힘이란 그러한 재능이나 운명에 묶여 있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소질이라는 말로 그들의 관심을 끌어당기기엔, 외신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초월적인 것이었기에.
모르겠다. 레녹이 가진 모든 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선택했기에 레녹이란 결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레녹이라는 결과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선택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게 앞뒤가 바뀐 고민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흐려지지 않는 의문을 짊어지고 있을 뿐.
하지만 야차는 그런 레녹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우주 전체를 통틀어 오직 너만이 다르다면, 이 세계에서 오직 너만이 그들의 관심을 받는 등불과도 같다면…….”
사지가 결박당한 채 천천히 무릎꿇은 야차가 말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나의 신으로 섬기고 싶다.”
“……뭐?”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능력을 네게 공양하겠다. 태어난 세계를 부수고 영원을 설계하여…… 외신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야차가 레녹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에반 마르티네스. 나를 너의 신도로 삼아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