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25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5화(1325/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5화
설계된 초월성(3)
“……그렇군.”
침묵하던 레녹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세계를 부수고 신이 되는 방법이라……”
레녹을 신으로 섬기겠다며 고개를 숙여오는 갑작스러운 야차의 전언.
하지만 레녹은 그런 야차를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대는 암흑의 바다를 방황하며, 멸망한 세계를 몇 번이나 지나쳐온 외계의 존재.
태양선의 항해사로서 외해를 주유하는 동안 범우주적인 지식이나 인과를 몇 번이나 보아왔겠지.
그렇기에 야차가 외신이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본 적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야차가 그런 지식을 이용해 맹주의 조언자로서, 연맹의 수뇌부로서 존재해 온 것 역시 납득 가능했기에.
그저, 언젠가의 교단이 이런 식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레녹 자신조차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
놀라거나 당황한 것은 아니다. 그저 궁금했다.
언젠가의 자신은 이렇게 고개를 숙여오는 상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언젠가의 교주는 이렇게 자신을 숭배하는 존재를 보며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
한때는 분명 자기 자신이었던,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우연이 겪어온 길을 따라 걷는다면.
그때는 레녹도 교주가 어떤 심정으로 두번의 승천을 지나 그곳에 서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면서도 자꾸 다른 이야기를 하는군.”
턱!!
쓰러진 야차의 어깨를 밟고, 그의 몸을 짓누른 레녹이 차갑게 말했다.
“외계의 존재이기 때문인지, 멸망에서 도망친 존재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큭……!!”
“너희들이 패배했다는 제국 황성과의 전쟁. 사천사화마경이 타락한 연유와 그곳에 사용된 기술.”
서늘한 시선으로 야차를 내려다보며 레녹이 고개를 비틀었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런 시답잖은 감상 몇 마디로 대신할 수 있을 줄 알았나?”
“공양의식을 통해 외신을 불러 내가 간청하려던 소망은 가라앉은 황성에 도달하는 것이었지…….”
사지가 결박당한 채 쓰러진 야차가 힘겹게 말했다.
“맹주에게 영묘을 넘겨주고 이 세계를 이탈하려 했지만…… 너 같은 존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
“이 세계를 떠나는 대신, 네 발아래 엎드려 신도가 될 수 있다면 어떤 수단이든 마다할 필요는 없지.”
검게 물든 역안으로 레녹을 올려다본 야차가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주면…… 무엇이든 대답하지. 무엇을 알고 싶나?”
“어처구니가 없군.”
레녹이 냉소했다.
“넌 주문연맹주와 결탁한 존재였을 텐데. 이제 와서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소속을 바꾸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태양선의 항해사로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배회하며, 살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연명해 왔지…….”
야차가 몸을 비틀었다.
“죽어간 동족들을 위해서라도, 그 모든 고통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난 살아야겠다.”
“…….”
“뭐라고 말해도 좋아. 구차하다고 비웃어도 괜찮다.”
레녹을 바라보는 야차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말해봐라. 내가 살아남으려면 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지?”
순전히 살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연맹을 배신하고 레녹에게 붙으려는 건가.
이렇게 노골적인 대답을 듣는 건 오랜만이었지만, 레녹은 정작 야차를 비웃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레녹 역시 그런 마음 하나만으로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며 지금에 이르지 않았던가.
자신들의 세계가 멸망한 뒤로도 살기 위해 끊임없이 태양선을 타고 방랑하던 악령들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 남아온 야차의 갈망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마르티네스, 잠깐만.”
야차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던 아일렌이, 주저하다 레녹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거, 생각과는 좀 다른데.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글쎄. 야차가 지껄이는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야차의 목적이 생존에 국한되어 있다면 이용하지 못할 것도 없군.”
야차가 한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흥미롭긴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레녹은 그가 한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야차는 레녹 같은 존재를 처음 본다고 말했지만, 레녹이 아는 교주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니까.
태어난 세계를 부수고 신이 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
황제가 이 세계를 떠나 외신이 되었음을 알고 있는 레녹의 입장에서 야차의 말은 그리 신뢰가 가지는 못했던 것.
그럼에도 레녹이 야차의 처우를 고민하는 것은, 그만큼 야차에게서 뽑아먹을 수 있는 이득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연맹과 협력하며 조언자 역할을 맡아온 외계의 악령이다. 연맹 내부사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물론이고, 중앙에 대한 정보도 전해 듣고 있었겠지.”
무심한 눈길로 야차를 내려다본 레녹이 말했다.
“태양선의 항해사인 만큼 본인부터 뛰어난 패스파인더인 데다, 기함의 조작법에 대해서도 능통하더군. 앞으로의 여정에서 패스파인더를 구하기 어려워질수록 야차의 이용가치는 높아질 거다.”
“아, 그렇군요. 패스파인더가…….”
아일렌 역시 아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야차가 어째서 영묘 공략을 주도할 수 있었는지를 뒤늦게 기억해냈기 때문.
현재 중앙에서 활동하는 패스파인더는 극소수인 데다, 대부분이 파이오니어에 묶여 있어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
이 시점에 연맹의 패스파인더를 빼 올 수 있다면 레녹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연맹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을 터.
“야차의 신병을 구속하고 그 능력만을 뽑아 사용하는 형태라면 굳이 마다할 것도 없군.”
손목을 매만지며 시선을 돌린 레녹이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 안전을 장담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슬슬…… 결론이 나온 것 같군.”
쓰려져 있던 야차가 역안을 느릿하게 돌렸다.
“그럼, 자비로우신 신의 은혜에 따라…… 이 야차가 천번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봐도 괜찮겠나?”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 어떻게 불러도 네 취급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
레녹이 웃었다.
“하지만 네 신변을 거둬들이는 건 우선 아더의 몸에서 나온 뒤의 일이 될 거다.”
야차의 신변을 거두는 건 그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능력이나 지식에 이용가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
그렇기에 레녹은 굳이 야차를 풀어주거나, 그를 천번의 휘하에서 자유롭게 놓아둘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태양선을 빼앗겠다고 레녹과 적대한 외계인을 곧이곧대로 신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
하지만 야차는 그 말만으로 충분했는지 쓰러진 채 눈을 감았다.
“좋아……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겠지. 다시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었으면 좋겠군…….”
“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겠지.”
“후후, 나의 신이시여…….”
흐릿해지는 의식을 붙잡고 고개를 비튼 야차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부디, 믿는 자에게 광명을 주시길.”
“…….”
그 말을 끝으로 야차의 머리가 푹 기울어지며 땅에 처박혔다.
섬뜩하던 인외의 기척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하게 변하는 모습.
쓰러진 아더의 목에 손을 갖다 댄 아일렌이 힐끗 레녹을 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어요. 아더와 야차가 동시에 깨어나 있던 게 의식에 무리가 간 것 같네요.”
“깨어났을 때 어느 쪽이 먼저 의식을 차릴지 모르겠군. 아예 기절시켜두는 게 좋겠다.”
“일단 이 쓰레기의 신병을 챙겨서 이동하죠.”
아더의 목을 퍽퍽 두들겨 혼절시킨 아일렌이, 그 멱살을 잡고 그대로 일어섰다.
“마경이 소멸하는 여파가 더욱 거세지고 있어요. 곧 있으면 여기까지 도착할 거에요.”
“……틀린 말은 아니군.”
콰과과과과과과!!!!
해일처럼 범람하는 암반과 흙더미의 파도가 지상을 휩쓸고 천지를 뒤집어엎었다.
지평선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지각변동이 마경을 넘어 바깥까지 퍼져나오는 모습.
아더를 심문하기 위해 잠시 거리를 벌려두었음에도 벌써 여기까지 도달한 건가.
미친 듯이 흔들리는 숲을 앞장서서 걷는 아일렌을 따라 속도를 높이며 레녹이 물었다.
“사천사화마경을 이탈하는 건 좋지만, 영묘의 일을 정리하고 수습할 장소가 필요할 거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나?”
“가까운 도시에 도착해서 기관이랑 연락을 취할게요. 호출이 닿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전송’을-”
쿠구구구구!!!!
사방에서 땅이 진동하고 나무가 뽑혀 나오며 바위가 굴러다니는 혼란 속.
뒤편에서 다가오는 땅의 해일을 피해 도망치던 아일렌의 말이 뚝 끊겼다.
“잠깐, 앞에……!”
“벌써 추적자들이 붙었군.”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절벽 저편에서 수백에 달하는 초인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각자 수십 개의 분대나 편대로 나뉘어 방향과 소속을 구분하게 빠르게 접근해 오는 기척.
기감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채 마경 안쪽을 살피려는 노골적인 의념의 잔재.
“사천사화마경의 이상을 눈치챈 인근의 초인들이 먼저 움직였군.”
대번에 저번에서 다가오는 서슬 퍼런 의념을 읽어낸 레녹이 말했다.
“살기가…… 아주 지독한데. 마경이 무너지는 혼란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 하는 건가?”
“바깥에선 아직 구체적인 정황이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마경 공략자를 확보하려 혈안이 되어 있을 거예요.”
기절한 아더를 둘러업은 채, 한 손으로 건블레이드의 탄창을 장착한 아일렌이 빠르게 말했다.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고 있다는 건 여차할 경우 무력행사를 불사하겠다는 뜻이겠죠.”
“지금처럼 안팎으로 난리가 난 상황에선 바깥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니.”
쿠구구구구!!!
전방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신원을 알 수 업는 초인전력의 존재.
뒤편에서 지평선을 휩쓸고 솟구치며 마경 안팎을 쓸어버리는 국지규모의 지각해일.
양쪽에서 인간과 자연이 거리를 좁혀오는 상황을 두고 레녹은 망설이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앞으로 돌파한다.”
화륵!!
손가락 끝에 작은 불꽃을 피워올린 레녹이 말했다.
“대놓고 전방위로 살기를 흩뿌리면서 이쪽의 반응을 찾고 있어. 마주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뻔하군.”
“제가 할게요. 뒤로 물러나 있어요.”
기절한 아더를 바닥에 내던진 아일렌이 빠르게 대답했다.
“당신, 이미 마력을 모두 썼잖아요. 그쪽 같은 마법사에겐 가장 위험한 시점이라고요.”
레녹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직전까지 죽은 승천자와 싸우다 나온 상황이다.
사천사화마경 전역을 불태우고 소멸시킨 만큼 소모한 마력과 의념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일 터.
이미 진작 싸울 수 있는 동력이 고갈되어 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연전을 이어나가도 괜찮을 리가 없다.
“마력이 없으면 없는 대로 싸울 방법이 있지.”
아일렌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손가락 끝에 피워올린 불꽃을 세운 채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 이쪽을 감지하고도 서슴없이 살의를 뻗어오는 방향을 향해 레녹이 손을 뻗은 그 순간.
[위대한 업적을 세운 공략자께서 미천한 들개들과 어울려 놀 필요는 없겠지요.]하늘에서 차갑기 그지없는 전성이 울려 퍼졌다.
[여기서는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우우우우우웅!!!!!
대기가 떨리는 강렬한 진동이 울려 퍼지고, 하늘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려진 수풀 아래서도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기척. 직경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수정체가 상공에 떠올라 부유하고 있었다.
수정체를 중심으로 유려한 금속성의 기함이 공전하며 무리를 이루고 있는 신비로운 형상.
기감에 들어오는 범위로 따지면 레녹의 태양선조차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저만한 체급의 부유체가 하늘 위에 나타나기 직전까지 일체 기척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레녹이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아일렌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관의…… 모선이에요.”
“……모선?”
“평소에는 미공략지역을 탐사하느라 바쁠 텐데, 어떻게 벌써-”
[아일렌. 찾고 있었습니다.]수정체를 중심으로 퍼져나온 의념이 강하게 진동하며 소리를 흘렸다.
[일단 올라와서 이야기하도록 할까요?]파앗!!!
대답은 없었다.
숲속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초인들의 전력. 저편에서 범람하는 지각변동의 파도.
그 모든 것이 레녹과 아일렌을 덮치기 직전 하늘에 떠오른 부유선이 강렬한 빛을 발하고.
이내 레녹과 아일렌을 감싸 안은 채 그 자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 * *
슈우우우우웅!!!!
투명한 수정처럼 깔끔하고 정갈한 공동의 중심부. 푸른 빛의 장식물이 부유하며 회전하는 내벽.
발아래로 비치는 마경 바깥 지대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며 흐릿하게 변한다.
순식간에 저편으로 멀어지는 초인들과 해일의 기척을, 레녹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
주둔지에 올라타 있던 일행을 단 한 번에 부유선의 안쪽으로 강제전이시킨 것인가.
혹시 몰라 미리 대상지정저항을 풀어두지 않았다면 일이 귀찮아질 뻔했다.
느릿하게 주변을 돌아보던 레녹의 시선이 이내 공동 끝에 서 있는 존재를 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반 마르티네스.”
연원을 알 수 없는 정갈한 제복을 입은, 무표정한 여성이 레녹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만히 서 있음에도 단정함이 느껴지는 인상.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분위기.
서 있는 자세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일렌을 아득하게 상회하는 수준의 강자다.
“통상규약 예하 인류영속 보호정찰 및 색적기관.”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 앞에 멈춰선 여성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칼리엔 퀸젤이라고 합니다. 늦게나마 정식으로 귀공께 소개를 드립니다.”
“……그쪽이 날 이 부유선으로 전이시킨 장본인이었군.”
귀공이라, 묘하게 익숙한 존칭에 침묵하던 레녹이 물었다.
“네가 바로 색적기관을 이끄는 리더인가?”
“귀공께는 갑작스럽게 무례를 저지르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정중한 말투와는 달리 표정에서는 전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영묘에서 상대했던 연리술주를 연상케 할 정도로 고저 없는 목소리.
자신을 칼리엔이라 소개한 여성이 아래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설명할 시간이 많지 않아, 조금만 늦었어도 귀공께서 계시던 지역이 휩쓸렸을지라.”
“…….”
쿠과과과과!!!!
실시간으로 이동하는 부유선의 아래쪽에서 협곡이 무너지며 잔해물이 쏟아져 내린다.
산맥이 무너지며 뒤집히다 지반이 갈라지고, 용암이 솟구치며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졌다.
주둔지가 위치해 있던 지형 전체가 사라지고, 암석과 흙더미가 해일처럼 출렁이는 기묘한 모습.
“붕괴는 이곳에서 끝나지 않고, 중앙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대규모 지각변동을 일으킬 겁니다.”
마경 전역을 타고 흐르는 흙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칼리엔이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이 사천사화마경의 일부였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겠지요.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의 칼리엔이, 레녹을 향해 돌아서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귀공께서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마경을 홀로 답파하셨다는 사실만큼은 모든 이들이 알게 될 겁니다.”
“…….”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설명하는 듯한 무심한 태도.
허나 외려 그렇기에 칼리엔이 이번 사태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이 건재하던 시절에도 이 정도 위업은 역대 대장군들에게나 허락되던 것이었습니다.”
칼리엔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몇 번의 시대가 바뀌는 동안 뛰어난 이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으나, 세기를 초월하는 재능이란 쉽게 만나기 어려운 법.”
“…….”
“귀공께서는 본 색적기관이 존재해 온 이래 그 어떤 구도자보다도 이례적인 존재입니다.”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보며 그녀가 담담하게 물었다.
“저희 색적기관에서 마경의 공략자를 안전한 장소까지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거창한 명분을 이것저것 잘도 갖다 붙이는군.”
털썩!!
바로 옆에 쓰러진 아더의 몸을 밟은 레녹이 칼리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일단 이 자의 신병을 적당한 곳에 구속해 줄 수 있겠나?”
“귀공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부탁이라도.”
칼리엔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다른 조치를 우선해도 괜찮겠습니까.”
“…….”
“아일렌.”
칼리엔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일렌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무심한 시선이 창백하게 질려있는 아일렌의 손끝을 향하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군요. 체온이 과도할 정도로 많이 낮아져 있어요.”
“…….”
“영묘 공략을 위해 진혈을 얼마나 사용한 겁니까.”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았어요.”
아일렌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에반을 도와줄 정도로는 충분히-”
“칼리엔이라고 했나?”
레녹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영묘에서 죽기 직전까지 피를 소모했어. 가능하다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아니, 마르티네스-”
팟!!
칼리엔이 손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아일렌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세 사람을 모선 안으로 이동시킨 것처럼 모종의 능력을 사용해 다른 곳으로 전송시킨 건가.
레녹이 기감을 뻗어 아일렌의 기척을 찾는 사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칼리엔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주시자들 중에서도 굉장히 강직한 성정으로 알려져 있다 들었습니다만, 친절하시군요.”
“……아일렌이 진혈을 많이 소모한 것에는 내 책임도 있었으니.”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레인저가 아니었다면 영묘 안에서 상황이 어려워질 법한 순간이 몇 번 있었지. 억지로 모른 척할 생각은 없다.”
영묘 안팎에서 그녀가 안내를 맡아주지 않았다면. 현세에 내려온 외신과 소통하기 위해 진혈을 촉매로 삼지 않았다면.
레녹이 대장군을 깨울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끝나지는 못했을지도 모르지.
사천사화마경을 공략하는 도중 많은 난관이 있었음에도, 아일렌은 한 번도 발을 잡거나 방해가 된 적은 없었다.
마경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것 치고는 굉장히 뛰어난 안내자이자 탐사자였다.
“그녀는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도 굉장히 뛰어난 레인저였습니다.”
칼리엔 역시 레녹의 감상에 공감하는지, 처음으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우수함에 도움을 받은 제국 군인들이 적지 않았으니, 귀공의 말씀이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재미있는 대답이군.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도 레인저와 아는 사이였다?”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당장 본인부터 제국 출신이란 사실을 내게 알려주고 싶기라도 한 건가.”
“색적기관의 초창기 멤버들은 황성이 몰락하기 전부터 알던 인연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칼리엔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국이 멸망한 옛 터전. 타락한 마경이 도사린 유적지를 탐사하기 위해선 그만한 신뢰와 능력이 동시에 필요했기 때문이죠.”
“너희 기관이 현재 중앙전선에서 가장 앞서 있는 공략파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다.”
천천히 어깨를 주무른 레녹이 말했다.
“며칠간 아일렌과 협력을 해왔으니 최소한으로는 신뢰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기관의 구성이나 기원이 아니라, 마경 최전선을 탐사하며 쥐고 있다는 정보 그 자체다.”
“…….”
“사천사화마경 공략이 끝난 지금, 그쪽에서 먼저 나를 찾아왔다면 대답할 수 있겠지.”
칼리엔을 바라보는 레녹의 시선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떠난 황제와 사라진 삼대공…… 마경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나?”
“자격이라…… 그렇군요.”
레녹의 질문에 칼리엔이 중얼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은 한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해했습니다. 귀공께서 그만한 위업을 보여주신 만큼, 저희 기관 역시 귀공을 모시기 위한 자격을 보여드려야 한다면.”
“…….”
“본 기관이 어떤 취지를 갖고 만들어졌는지 설명해드리려 했지만, 귀공께서 궁금해하실 부분은 그런 것이 아닌 듯합니다.”
칼리엔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려세웠다.
“따라오시길.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기관은 오랫동안 중앙전선을 탐사해 오며 제국의 멸망 전후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해 왔습니다.”
레녹의 질문에 칼리엔이 담담하게 말했다.
“적어도 귀공께서 궁금해하시는 것에 대해 편린이나마 알려드릴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죠.”
“그건-”
“황제를 따라 아르스노바를 통치했던 제국의 세 공작.”
칼리엔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중앙의 최전선에서 삼대공의 결말이 어떠했는지를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