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27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7화(1327/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7화
설계된 초월성(5)
휘오오오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드높은 상공.
새하얀 뭉게구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실시간으로 풍경이 바뀌어 나간다.
발아래 펼쳐진 산맥과 초원을 넘어 중앙전선을 주파하는 기관의 모선. 수정체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모선의 최상층 전망대.
칼리엔과 함께 [두 번째 관문]의 정체를 확인한 다음 날. 레녹은 홀로 전망대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관문에 대한 확인이 끝났으니 곧바로 전선 바깥으로 이동할거라 했던가…….”
타락한 삼대공 중 하나, 포악의 결말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당장 두 번째 관문을 공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칼리엔 역시 두 번째 관문 탐사 계획 자체는 최소한 몇 분기가 더 지난 뒤의 일이 될 것이라고 했으니.
그 사실을 레녹에게 말해준 것은 일전에 말했던대로 기관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레녹에게 제공하기 위해서였겠지.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레녹 역시 포악의 존재에 대해 보다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특히, 삼대공 포악이 다름 아닌 반궁과 같은 조작술사이자, 그와 다른 관계로 엮여 있었던 초월자라면 더욱-
“아, 연결됐군.”
스크린 상단 바에 네트워크 연결 표시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녹색 불이 들어온다.
중앙전선 깊숙히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끊겨 있던 통신망이 연결되며 가동되기 시작한 것.
이렇게 빠른 모선을 타고 꼬박 하루 넘게 중앙전선 밖으로 이동한 뒤에야 얻어낸 성과인가.
스크린에 손가락을 대고 옆으로 넘긴 순간, 밀려 있던 뉴스들이 엄청난 속도로 갱신되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밧!!!
[(특보)사천사화마경 공략 성공]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던 죽은 자의 지옥이 무너지다.] [중앙전선 일각의 완전 붕괴. 예상할 수 있는 대륙의 동향은?] [주문연맹과 귀도교단의 패퇴에도 불구하고 마경이 공략에 성공한 이유.]실시간으로 중앙의 소식을 표기하는 뉴스란이 버벅이며 마비될 정도.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시뻘건 글씨들이 연달아 떠오르며 서로를 밀어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레녹의 육안으로는 제목 몇 개를 놓쳐 버릴 정도.
하지만 그 사이에도 지금 중앙에서 어떤 소식이 들리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천사화마경 최외곽에서 관측된 염열지옥의 주인은?] [첫 번째 관문의 화염꽃과 유사한 영속성을 각계 마탑에서 관측 완료.] [천번 에반 마르티네스가 사천사화마경 공략에 성공한 것으로 추정.]“…….”
타락한 마경이 무너지기 시작한 지 아직 이틀도 채 되지 않은 시점.
하지만 이미 중앙전선 전역에 그에 관한 정보들이 발 빠르게 풀리고 있는 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대장군의 소멸과 동시에 밀림 전역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며 땅이 바다처럼 흐르고 있었으니.
실시간으로 중앙전선을 관측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 이변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허나 그 과정에서 공략에 성공한 당사자가 천번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의외였다.
레녹이 마경에서 터트린 불꽃의 성분을 첫 번째 관문에 남겨둔 화염꽃과 대조해 확정 지은 것도 그렇지만.
마치 처음부터 레녹이 이 사태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흘린’ 것처럼 발 빠르기 그지없는 속도.
[전 아니에요.]“……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진짜 아니라니까요. 제가 퍼트렸으면 이렇게 아마추어같이 흘리지 않는다구요.]귀신같이 레녹의 생각을 읽은 다비가 툴툴거렸다.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하지만 모두가 알 수 있게 확실하게 했겠죠. 저 같은 프로들은 그런 사소한 위화감까지 절대 놓치지 않는다구요!]“그런 녀석이 딥웹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분탕을 치고 다녀?”
[흐에에엡~]다비의 볼따구를 양쪽으로 쭉 잡아늘렸다 놓아준 레녹이 태블릿을 잡고 스크린을 넘겼다.
[주문연맹과 귀도교단에서 에반 마르티네스를 대상으로 공식적인 추살령을 선포.] [중앙전선 최심부 탐사 집중하던 공략파 조직들의 대대적인 회군을 확인.] [일각에서는 사천사화마경 공략자와 접촉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을 우려하며…….]“연맹과 교단 측에서도 마경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는 대충 알고 있는 것 같아.”
레녹이 태블릿을 내려다보며 턱을 짚었다.
“파견 보낸 전력이 전멸했음에도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을 남겨놓고 있던 거다. 단순히 신녀의 존재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대장군과 충돌한 신녀의 영성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레녹의 뇌광에 통째로 삼켜졌던 바.
당연하지만 그 정도로 훼손된 우레카의 의식이 제정신이거나 멀쩡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수준까지 떨어졌을텐데, 그럼에도 교단 측에서 정황을 읽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뉴스 란에 연달아 새로운 소식들이 경쟁하듯 갱신되어 떠올랐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도시국가들이 움직이다.] [영원히 뚫리지 않을 것 같던 난공불락의 마경이 열린 지금 대륙의 정세가 격변하고 있으며…….] [사천사화마경이 붕괴된 현장으로 파견된 조사팀의 숫자가 이례적인 규모로…….]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는 즉시 이권다툼이 이어질 것으로 추정되어…….]“다른 도시국가들마저 움직이고 있는 건가.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는군…….”
대륙 전역에서 사천사화마경의 공략을 인지하자마자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건가.
갱신되는 뉴스를 보아하니 그동안 중앙전선에 개입하지 않던 초대형 도시국가들마저 개입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사천사화마경 공략을 성공시킨 시점에서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던 중앙전선 공략에 성과가 있었다는 정황 하나만으로, 그 너머에 있는 아르스노바까지 생각이 닿는다면.
잊고 있던 중앙도시의 유산에 대해 모두가 다시 한번 손을 뻗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올라오는 뉴스들 역시 그러한 동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사천사화마경의 공략이 아르스노바 탈환의 효시가 될 수 있을까.] [에반 마르티네스가 중앙전선 공략의 새로운 불씨가 되다.] [(칼럼)천번이 사천사화마경 공략에 성공했다는 의미.]…….
하지만 대륙 전역에서 사천사화마경의 붕괴를 조사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소식에도 레녹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그 마경에서 레녹이 얻어야 했던 것은 대부분 손에 넣고 돌아온 상황.
광성대장군이 레녹을 위해 열어준 길의 좌표조차 마커를 통해 오직 레녹만이 지니고 있다.
마경 전역에 지각변동이 일어나 뒤집힌 지금에 와서는 그 위치를 찾으려면 말 그대로 지각 아래를 뒤져야 할 터.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아일렌.”
어느새, 모선의 전망대 위로 올라온 아일렌이 레녹의 뒤에 서 있었다.
붕대를 감고 팔에 링거를 꽂은 파리한 안색. 외투 안쪽으로 푸른 빛의 환자복이 흔들렸다.
“곧 있으면 당신을 안전하게 내려줄 수 있는 중앙전선 경계지대에 도착할 거예요.”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온 아일렌이 난간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구름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그녀의 푸른 머리칼이 흔들렸다.
“가능한 그쪽의 위치가 들키지 않게 적당한 장소를 잡긴 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귀찮은 일을 원하는 만큼 피해 다닐 수 있는 건 마법사의 특권이지.”
태블릿을 쓸어넘기며 레녹이 대답했다.
“적당한 장소에 내려주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이제 당신의 안위에 대해 걱정같은 건 안 해요. 걱정되는 건 오히려 이번 일에 대한 여파나 반응 쪽이죠.”
레녹의 손에 들려 있는 태블릿을 힐끗 바라본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천사화마경이 뒤집히고 대륙 전역에 여진이 퍼지면서 난리가 났어요. 현재 모든 도시국가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성명을 연달아 발표 중이고요.”
“…….”
“뭐, 일이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괜찮겠어요?”
파리한 안색으로 수액이 꽃힌 팔을 문지르면서, 슬쩍 레녹의 눈치를 보는 아일렌의 모습.
하지만 레녹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력이 이전에 비해 안정되었군. 그쪽이야말로 컨디션은 괜찮아졌나?”
“…… 기관의 의료시설은 중앙에서도 굉장히 수준이 높은 편이거든요.”
아일렌이 픽 웃으며 자신이 맞고 있는 수액을 가리켰다.
“중앙전선 최심부를 탐사하는 게 일이라, 부작용이나 부상도 괴상한 것들이 많아서. 모선에서는 그런 부분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기도 하고요.”
“모선 내부에 사람이 우리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저 같은 경우에는 어깨의 관통상과 과다출혈이 문제였으니 형편이 나은 셈이에요. 물론 이 정도로 끝난 건 저보다는 당신 덕분이었지만…….”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두고 아일렌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이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저와 당신만이 아니게 되겠죠.”
“…….”
“앞으로는 대륙 전역에서 당신을 찾을 거예요.”
아일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을 마경의 안내자로 삼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 하겠죠. 중앙전선 너머에 존재하는 아르스노바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혹시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글쎄…… 해야 할 일은 많지만, 지금 당장 정해둔 건 없군.”
레녹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우선 이번 일에서 내가 얻은 것과 알게 된 것부터 다시 정리해야겠지. 그럼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거다.”
영묘를 탐사하며 손에 넣은 축퇴로의 핵. 대장군에게 넘겨받은 의사권능 타락한 황금률.
중앙전선 깊숙이 들어가는 마커의 좌표와, 광성대장군이 레녹에게 남긴 경고의 의미.
마경견문록을 저술한 에단 바쥬르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까지.
“마경에서 있던 일은 하나같이 예상할 수 없는 것뿐이었지만…… 한편으론 일이 편하게 흘러간 부분들도 있었어.”
레녹이 눈을 감았다.
“다음번에도 그렇게 일이 풀릴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거다.”
사천사화마경에서 있던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성과를 수습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그저 이곳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며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릴 뿐.
“이제 슬슬…… 도착한 것 같네요.”
흘러가는 지상의 풍경을 내려다보던 아일렌이 손목에 꽂고 있던 링거의 바늘을 빼버렸다.
외투에 걸어둔 블레이드를 잡은 그녀가 난간에 올라타며 레녹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죠. 남은 이야기는 아래쪽에서 해도 될 테니까.”
“……아래쪽?”
무심코 시선을 돌린 레녹이, 어딘가 묘하게 익숙한 지상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바다 위에 떠오른 새하얀 얼음의 섬.
그 위에 철로를 이어붙여 새롭게 건조되어 있는 거대한 해상터미널의 풍경.
팟!!
모선의 공간전이가 작동하는 것과 동시에 레녹은 아일렌과 함께 터미널 앞에 내려와 있었다.
철로 사이로 인부들이 바쁘게 오가며 얼음의 섬 위에 새로운 터널을 쌓아 올리는 모습.
그 앞에는 화사한 꽃다발이 함께 놓여 있는 작은 묘비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
그곳이 누구를 위한 공간인지는 레녹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레녹 역시 해저터미널에서 교단의 전 9사도가 습격을 저질렀던 사태를 잊지 않았으니까.
인간을 살덩이 괴물로 만들어 공양하던 사도의 학살. 그때의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추모공간.
“해저터미널이 무너진 뒤로 안전성의 우려를 인지한 당국에서 터미널을 재시공하기로 했다고 해요.”
아일렌이 묘비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당신이 만든 얼음의 섬이 워낙에 튼튼해서 별다른 기반공사가 필요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랬나.”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 처음 만났던 장소 근처에서 마무리를 짓는 게 깔끔하잖아요?”
그렇게 말한 아일렌이 공사현장 근처에 마련된 추모공간 앞에 블레이드를 꽂아 넣었다.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조용히 묵념에 잠긴 그녀의 모습.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녹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자재를 운반하는 인부들. 정상운행을 개시한 터미널과 열차. 분주하게 드나드는 승객들 사이로 레녹과 아일렌이 침묵을 지키고.
“미안해요, 영감님.”
묵념을 마친 아일렌이 블레이드를 뽑아 들며 나직하게 말했다.
“다음번에 누군가와 파워랭킹으로 토론할 일이 있으면, 한 번 정도는 천번이 아니라 흑예의 편도 들어볼게요.”
“헛소리를…….”
“아핫, 혹시 열 받은 건 아니죠?”
아일렌이 레녹을 향해 돌아서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당신은 그런 부분이 잘 어울려요. 그렇게 초월적인 권능을 갖고도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사람이기에 대장군께서도 당신을 기억하고 계셨던 걸지도 모르죠.”
“…….”
순간, 레녹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대장군이 레녹에게 하는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레녹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이 순간.
아일렌 나름대로 이 여정에 매듭을 지으려 한다는 사실을 레녹 역시 직감할 수 있었기에.
선글라스 너머로 그런 레녹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 아일렌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황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이든 괜찮아요. 중앙도시의 멸망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제가 그 내막을 들을 자격은 없었을 테니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하지만 그 모든 사정을 제쳐두고서라도, 당신이 이 중앙전선을 공략할 수 있는 극소수의 능력자라는 건 분명하겠죠.”
그녀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고작 안내인 한 명을 데리고 마경에 들어가, 영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살아나온다는……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여럿 있지는 않을 테니까.”
“…….”
“그러니까 저는 당신을 도운 걸 후회하지 않아요. 몇 번이고 죽을 뻔했지만, 저 중앙의 마경이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세계의 결말이 오기 전에 어쩌면 정말로 우리의 고향이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아일렌이 선글라스를 내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제 피에 기아스를 걸고 맹세할게요. 당신에 대해 전해 들은 그 모든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그 어떤 형태로도 당신에 대해 전하거나 이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아일렌.”
그 말과 동시에, 아주 강력한 무형의 속박이 그녀의 내면을 옥죄는 것이 레녹에게도 느껴졌다.
아르스노바의 중앙귀족이 자신의 진혈에 걸고 맹세하는 기아스.
그것이 아일렌의 내면에서 유의미한 형태로 그녀의 피와 영성을 얽매이며 실시간으로 구축되고 있던 것.
“역시 마지막에는 이런 식으로 둘이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잖아요.”
할 말을 잃은 레녹을 보며 아일렌이 웃었다.
“우리, 이 정도면 그래도 나름 깔끔하게 마무리를 한 것 같지 않아요?”
“…….”
아일렌은 영묘 안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레녹이 처음부터 색적기관에 들어갈 생각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기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로 레녹의 비밀을 지키겠다 맹세했던 것.
만약 레녹이 이 혼란스러운 중앙전선에서 유일하게 중앙도시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다른 이들은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성과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면.
아일렌은 기관을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레녹을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 이번에는 빚을 졌군.”
말없이 아일렌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난 기관에 들어갈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이나 정보까지 경시하는 건 아니야.”
“…….”
“칼리엔은 내게 중앙전선 공략을 위해 다음으로 예정될 목적지에 대해 알려주려 했다. 그건 아마 사천사화마경의 붕괴 이후 다른 이들의 시선이 어디로 쏠릴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레녹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슈우우웅……!!!
터미널의 상공에 자욱하게 퍼진 구름 너머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모선의 형상.
“서로가 중앙전선 공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아일렌을 데려가기 위해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모선의 그림자를 보며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도 안내를 부탁한다.”
“……그렇네요.”
아일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기관은 계속해서 마경 공략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탐사를 이어나갈 거예요. 언젠가, 아르스노바에 닿는 그 날까지 계속…….”
“…….”
“그러니 당신도 다음에 다시 만날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 있어요.”
“걱정하지 마라.”
레녹이 웃었다.
“그거야말로 내가 가장 바라마지 않는 일이니까.”
해상열차 위에서 시작되었던 여정을, 다시 돌아온 터미널 앞에서 마무리 짓는다.
격변하는 세계 속에서도 처음과 끝을 잡고 있다면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아일렌이 이곳에 레녹을 내려준 것은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레녹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눈부신 서광을 품고 멀어지는 모선을 구름 너머로 응시한다.
얼어붙은 섬 위에서 부서진 터미널이 완공되어가는 모습. 그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
한차례 파괴된 문명 위에서도 끊임없이 재건을 꿈꾸며 다음으로 나아가는 지상의 정경.
레녹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망설임없이 해상열차가 오가는 터미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뿌우우우-
뱃고동처럼 울려퍼지는 무거운 열차의 경적 소리.
사천사화마경 공략이 비로소 끝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발칸 위성도시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탄다.
승객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산한 좌석 쪽에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다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스터. 지금 발칸 중앙 네트워크 전체가 터진 거 알아요?]“……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딥웹도 아니고, 중앙 네트워크가 터졌다고?”
[네. 아무래도 이번 일 때문에 천번 관련에서 발칸에서 엄청 화제가 된 것 같다구요.]다비가 답지 않게 싱글벙글 웃는 기색으로 꼬리를 마구 털었다.
[빨리 돌아가서 확인해 보죠. 진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기관에서 대강 설명을 들어왔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중앙전선의 일각이 무너진 이상, 아일렌의 말대로 대륙 전역에서 초월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터.
그와 관련해서 대륙 전역에서 여파나 반응이 거세게 일어나며 정보가 폭주하고 있는 것이겠지.
변화를 대비하기 위해서 레녹 역시 발칸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열차 내부에서 중계되는 TV채널을 조작해 발칸 쪽의 뉴스를 확인한 순간.
“……잠깐.”
뉴스 채널이 모조리 붉은 글씨의 특보로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본 레녹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단순히 사천사화마경의 공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긴박해 보이는 분위기.
도시 곳곳을 비추는 뉴스 화면에서 무수한 인파가 움직이고, 화려한 사절단이 연달아 비춰진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피로마저 잠시 잊어버린 레녹이 빠르게 뉴스란을 돌리며 정보를 확인하고.
이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을 접하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사천사화마경의 붕괴와 동시에 대륙 전역에서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 실종되었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던 초월자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연이어 성명을 발표하고 있으며…….] [특히 발칸에서는 거대도시 방문을 공식적으로 예고한 승천자의 일정에 맞춰 동대륙 전체가 긴장상태에 돌입해…….]“……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