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29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9화(1329/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29화
설계된 초월성(7)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늦은 오후.
오가는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 한산한 주택가.
그중에서도 유달리 깔끔하고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저택 복도.
일곱 개의 꼬리를 두른 전뇌정령이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이건 사고…… 이건 팔고…… 이건 버리고…….]꼬리 세 개를 사용해 태블릿을 잡고, 다른 꼬리 둘로는 몸을 굴리며 복도를 데구루루 구른다.
남아 있는 꼬리 두 개를 사용해 태블릿을 건드리자 붉고 파란 그래프가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삐비비비비빅-
실시간으로 가파르게 치솟으며 금액을 늘려나가는 숫자.
남아 있는 잔액을 보지도 않고 미리 열어둔 주식창을 수십 개씩 닫았다 열면서 매도와 매수를 반복한다.
출렁이는 시장 속에서 헤엄을 치듯 초당 수천 번에 달하는 단타를 치며 차익을 쓸어 담는 다비의 모습.
[따라붙는 세력이 있네. 일부러 반대 포지션을 잡는 것 같은데,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소파 앞까지 굴러온 다비가 태블릿을 보며 꼬리를 바짝 세웠다.
[우후후후, 차트를 조금만 흔들어줘도 우수수 털려 나갈 유기체들이 감히…… 돈을 잘못 걸었으면 손해를 봐야겠지?]실시간으로 막대한 금액이 오가는 주식시장에서 주문처리 속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매도와 매수 버튼을 언제 누르냐에 따라 오가는 금액의 자릿수가 변하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으니.
단 1ms라도 처리속도를 줄이기 위해 매 분기마다 최신식으로 장비를 갈아치우는 투자자들은 온 도시에 널려 있지만-
아무리 성능 좋은 기계를 사용한다 해도, 전뇌공간에 직접 드나드는 정령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토르번 마탑 매도 주문 체결] [올리닉 철강 매수 주문 체결]……
삐빅, 삐비빅.
전뇌공간을 오가는 데이터의 신호를 누구보다 먼저 읽고 리액션을 보낸다.
서버에 필연적으로 가해지는 딜레이를 0에 가깝게 줄여 작은 이득을 끊임없이 굴려 나가고.
그렇게 늘어난 차익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실시간으로 자릿수를 바꿔가던 순간.
[아, 재미없네…….]따라붙던 포지션마저 모두 사라졌음을 깨달은 다비가 태블릿을 휙 던져버린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심심풀이 삼아 놀고 있었을 뿐, 애초에 다비가 레녹의 계좌를 관리하는 방식은 그런 쪽이 아니었으니까.
짧게 하락장에 걸어 돈을 딸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결국 상승장에 타는 것이 정석.
다비는 레녹의 계좌를 맡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리스크가 높은 모험을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장난을 칠 때마다 다비에게 말을 걸어주는 주인이 없으면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보자. 마스터는…….]소파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다비가 레녹의 기척을 확인하고 축 늘어졌다.
[……아직 자고 있잖아. 잠꾸러기.]외뢰족의 승천자, 다담(茶淡)이 발칸에 강림하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제니의 권유를 받아 저택에 복귀한 레녹은 하루 넘게 2층 침실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사천사화마경에서 돌아온 이후 탑의 업무를 처리하고 돌아와 그대로 잠에 빠진 상황.
이번 여정이 워낙에 힘들었던 탓인지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도 잠이 길다.
최근까지도 레녹이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
그래서 다비도 평소에는 레녹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잠들 수 있도록 지켜보곤 했지만, 지금처럼 레녹이 깊게 잠들고 중앙 네트워크가 버벅이는 시기에는 드물게 할 일이 없어지곤 했다.
[……유기체의 수면효율을 높이는데 필요한 영양소가 뭐가 있더라?]삑, 꼬리를 까닥하는 것만으로 거실의 TV가 켜지며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칸 내 존재하는 수백 개의 방송국에서 제작해 송출하는 토크쇼와 드라마, 영화와 다큐멘터리.
채널이 휙휙 바뀔 때마다 눈길을 잡아끄는 떠들썩한 장면이나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요란한 화면을 지켜보는 정령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흥도 떠오르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TV 화면 너머에서 어떤 사람이 웃고 떠들어도 다비에게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사고하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이렇게 종종 유기체의 유희를 관찰하는 것조차, 레녹과 함께 놀 수 있는 핑계를 찾기 위해서일 뿐.
솔직하게 말해, 다비에게 있어 인간종이란 레녹과 같은 종이라는 것 외엔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흐음.]인간에 대한 다비의 생각을 알게 되면 그의 주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위로해 줄까, 아니면 그럴 줄 몰랐다고 실망할까.
어느 쪽이든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라 다비는 레녹에게 그러한 생각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다비의 창조주는 강한 마음을 가진 만큼, 위태로운 면모를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이기도 했으니까.
굳이 이런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혹시나 실망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다.
지금처럼 생각 없이 투정을 부리다 가끔 혼이 나서 볼따구가 늘어나는 정도면 괜찮을 텐데.
세계의 멸망이니 결말이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도,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왁자지껄한 TV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다비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요즘 들어 사고회로가 지나치게 발달해서 이상한 생각으로 자꾸 빠지는 것 같다.
처음 레녹이 다비를 만들어주었을 때는 이렇게까지 자유롭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분명,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다비를 만들어준 그의 주인이 누구보다도 위대한 마법사이기 때문이겠지.
레녹의 의지로 인해 태어난 정령이, 그 재능의 편린이나마 보유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울 일일 테니까.
다른 어떤 인공지능과도 궤를 달리하는 강대한 자아. 정령의 범주조차 반쯤 벗어나 있는 지성과 연산력.
다비에게 이렇게나 큰 자율성을 선물해 준 것 역시, 다비가 단순히 레녹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비는 자아와 영성이 발달할수록, 자신의 바람이 레녹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혼자 독립적인 정령으로 성장해 자립하는 것도, 마스터를 제외한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두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처음 레녹의 손안에서 만들어진 그 날처럼, 골방에 함께 앉아 투닥거리며 마법을 연구하고 딥웹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일이나 미리 해둘까.]재미없는 TV를 끄고 다시 태블릿을 켰다.
메일함을 열자 실시간으로 수십 통씩 쌓여가고 있는 새로운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비가 직접 메일함에 필터를 강하게 걸고 쓸데없는 소식이나 키워드를 걸러냈음에도 이 정도다.
[에노머스 마탑…… 라바테논 대학…… 마키나 위원회…… 82915번째 제휴 요청…….]메일을 열어보지도 않고 내용물을 확인한 뒤 실시간으로 선별해 삭제와 보관을 반복.
나중에 잠에서 깨어난 레녹에게 보여줄 수 있게 내용 요약까지 해서 데이터베이스에 집어넣는다.
[또 중앙의회네. 요 녀석들은 왜 이렇게 자주 메일을 보내는 거야.]발칸 시장이 복귀한 뒤로 시의회의 업무량이 폭등하기라도 했는지, 레녹이나 마탑을 거쳐 들어오는 소식들이 꽤나 방대하다.
심지어 대부분이 마탑 재건이나 관리기구 승격처럼 중요한 안건이라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어려운 것뿐.
주인의 일을 돕는 그 미역머리 유기체 역시 그렇기에 고심하다 일단 레녹에게 메일을 전달한 것이겠지.
[군단 소속 포로들의 처우 보고 정황…… 49구역의 사업 활성화 개선방안…… 어라?]중앙의회에서 보낸 안건을 확인하던 다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사천사화마경의 소멸로 인해 풀려난 금제 사항……?]딩동-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저택의 거실에 맑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카메라 회선에 진입한 다비의 의식이 순식간에 인터폰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향했다.
레녹이 기거하고 있는 한적한 주택가, 저택의 정문 앞에 배낭을 멘 채 서 있는 금발의 여성.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린 다비가 화면 너머 은은하게 빛나는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확인하고 멈칫했다.
인간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않는 다비라고 해도, 지금 저택을 찾아온 여성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엘릭서?]=레녹.
라바테논 마법 대학의 석좌교수. 오래전부터 마스터와 알고 지낸 고위 마법사.
싱클레어 마탑에서 레녹의 마탑으로 적을 옮긴 엘릭서의 제작자.
다비 자신보다도 먼저 레녹과 만난 사람.
=요양에 도움이 될 법한 영약이나 약재를 가져왔어요.
인터폰 앞에 선 아리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있다면 들어가도 될까요?
[…….]순간, 다비가 답지 않은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저택 내 전기신호나 알림은 2층에 닿지 않게 차단해둔 상황.
아리스의 방문이나 초인종 소리가 깊게 잠에 빠진 레녹에게 닿을 일은 없다.
다만 여기서 레녹을 깨우고 아리스의 방문을 알리는 것이 옳은 일일지.
아니면 레녹이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무시하는 것이 맞을지.
[……끄응.]결국, 고민하던 다비가 꼬리를 휙 돌리고 총총걸음으로 2층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버려 두고 싶지만, 저 유기체는 주인이 마음을 터놓은 극소수의 관계자들 중 하나다.
다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레녹의 의사였으니. 저택을 찾아온 아리스의 방문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다비가 레녹이 잠들어 있는 침실로 폴짝폴짝 뛰어 올라가려던 그 순간.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들리지 않는 모양이네요.
아리스가 인터폰 앞에서 한발 물러섰다.
배낭을 멘 채 서 있던 그녀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신호가 끊기지 않는 걸 보면 누군가 있다는 건 분명한데…….
[…….]=혹시, 정령님이 대신 신호를 받고 계신 걸까요?
순간, 다비의 걸음이 제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인터폰을 누른 아리스의 신호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갑작스럽게 다비 본인을 지칭하는 아리스의 말에, 전뇌정령의 꼬리가 곤란한 기색으로 마구 파닥거렸다.
라바테논 마법대학을 오가는 도중 다비 역시 아리스와 마주친 적은 꽤 있지만, 직접 대화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외부적으로는 다비 역시 에반 바일런의 정령으로 알려져 있지만, 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밝혀진 적이 없으니.
여기서 아리스의 말에 대답하거나 반응하면 그 사실을 아리스 역시 알게 될 터.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연락을 무시해버리면 아리스가 돌아가 버리게 된다.
[……어쩔 수 없나.]아리스를 돌려보내면 레녹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다비가 말을 이해할 줄 안다는 것을 여기서 밝히기도 어렵다.
어쩔 수 없지만 아리스가 찾아왔다는 사실만 기록해두었다 레녹이 깨어나면 추후 전해주는 것이 최선이겠지.
다비가 그렇게 생각하며 인터폰의 신호를 끊고, 그대로 없던 것처럼 기척을 숨기려던 그 순간.
=정령님.
아리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 당신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레녹이 잠들어 있다면 굳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다만…….
인터폰을 바라보며 아리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시간이 되신다면 잠깐, 저와 이야기라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 * *
사람이 오가지 않는 한산한 주택가.
유달리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조용하고도 깔끔한 어느 이름 모를 2층 저택.
대문 앞에 서 있던 아리스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인터폰을 뒤로하고 힐끗 시선을 돌렸다.
“…….”
한참 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을 텐데, 저택의 주변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기만 하다.
인터폰과 대문, 담벼락 위에 어떠한 이물질도 없는 것은 물론, 풍화나 손상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
하지만 그보다 더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감을 펼쳐도 저택에서 어떠한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저택 내부의 기척이나 반응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는데, 정작 그 과정에서 어떠한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결계가 아리스 리첼렌의 안목으로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고도화되어 있다는 증거.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는 저택 안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레녹이 그간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종종 이렇게 찾아와 저택의 초인종을 눌러보고는 했으니까.
레녹이 깨어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겠지.
부재중이었다면 인터폰의 신호가 이렇게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답 없이 신호가 오래 유지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저택 안에서 누군가 아리스를 보고 있다는 증거.
그리고 아리스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다비. 레녹이 에반 바일런의 신분으로 활동할 때 소환해 데리고 다니는 전격계 정령.
그의 첫 번째 논문이었던 전격과 마력 치환이론에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고 알려진 존재.
특유의 귀여움으로 인해 라바테논 원소학부의 마스코트와 같은 존재로서도 유명한 여우.
사실은, 에반 바일런의 신분만이 아니라 언제나 레녹의 곁에 함께하고 있는-
팟.
순간, 인터폰의 신호가 그대로 끊기면서 화면이 픽 꺼졌다.
신호가 이어지던 화면이 검게 변하며 아리스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추었다.
“아…….”
무심코 손을 뻗었던 아리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리스가 메고 있던 배낭을 고쳐잡으며 수긍하듯 물러나, 천천히 걸음을 돌린 그 순간.
“……어?”
철컥.
굳게 잠겨 있던 대문이 열리면서 정원 안쪽으로 향하는 길을 드러냈다.
아무런 말 없이 저택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대신하는 대답.
묘한 표정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던 아리스가, 천천히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았음에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드넓은 정원.
초목과 이파리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거의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발아래 밟히는 싱그러운 풀밭조차도 어색할 정도로 생생한 생기를 머금고 있을 뿐.
끼익-
미리 열려 있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저택의 넓은 복도를 지나 눈앞에 펼쳐지는 햇빛이 쏟아지는 거실의 풍경.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스가, 소파 앞에 앉아 있는 전뇌정령과 시선을 마주쳤다.
“…….”
[…….]순간적으로 흐르는 미묘한 침묵.
차분한 눈길로 시선을 주는 아리스와, 말없이 꼬리를 파닥거리는 다비의 그림자가 교차한다.
아리스를 저택에 들인 뒤에도, 2층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듯이 앉아 빤히 시선을 주는 정령의 형상.
라바테논 마법대학에서부터 오랫동안 얼굴을 봐 왔음에도, 레녹 없이 단 둘이서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 순간.
탁, 탁.
다비가 느릿하게 꼬리를 두들기는 것과 동시에, 그 제스쳐를 이해한 아리스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서로 말을 꺼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어렵사리 입을 뗀 것은 아리스 쪽이었다.
“네 번째 논문의 발표 준비를 위해 연구실에 방문했을 때 저택의 위치를 알게 되었죠.”
[…….]“동시에 이 저택에 연구실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섬세한 결계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저는 물론이고 다른 초월자들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불가침의 요새…….”
아리스가 힐끗 시선을 들어 올렸다.
“레녹이 직접 설계한 그 모든 시스템을 총괄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정령님이라는 것도.”
[…….]“그건 레녹이 자신의 안전이나 신변에 대한 문제를 전적으로 맡겨둘 만큼 정령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다비를 보며 아리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쯤 이렇게 대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검증할 기회가 없었을 뿐, 정령님이 굉장히 뛰어난 고등 지성체라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도 아닌 레녹이 언제나 곁에 두고 있는 정령이라면 공용어를 이해하는 것도, 레녹에 버금가는 특이적성을 가진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그 순간, 소파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다비가 입을 열었다.
청아하면서도 방울처럼 울리면서, 깊은 의념이 어려 있는 맑은 음색.
처음으로, 다비의 대답을 들은 아리스의 몸이 순간적으로 제 자리에 굳어버렸다.
상대가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고등 지성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명확한 의사가 담긴 대답을 전해 듣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차원이 다른 놀라움에 가까웠기 때문.
[엘릭서. 마스터가 너를 믿고 있는 거 알아.]하지만 다비는 아리스의 머뭇거리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네가 혼자서 마스터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마스터가 그걸 인정했다는 것도.]“……그건.”
[네가 이제 와서 마스터에게 해악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야. 뭐가 더 필요해?]“…….”
[마스터의 앞에서라도, 너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아무런 감정이나 고민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의문.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리스 역시 다비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레녹이 항상 곁에 두고 있는 이 정령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숨어지내거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을 뿐.
그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아리스가 나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그런 거짓된 유대를 원해서 정령님을 만나려던 게 아니에요. 애초에 레녹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을 테죠.”
[…….]“다만…… 역시 레녹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역시 정령님일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해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어서.”
[도움?]“우리는 서로 많이 다르지만, 유일하게 같은 관심사가 하나 있잖아요.”
아리스가 웃으며 자신이 메고 있던 배낭을 가리켰다.
“레녹을 위해 구매하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정령님의 조언을 받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침묵이 흘렀다.
웃는 얼굴로 반듯이 앉은 아리스와, 꼬리를 붕붕 휘두르는 다비의 모습.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오랫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러니까…….]그제서야 아리스의 말을 이해한 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너랑 같이 쇼핑을 해달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