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32
약먹는 천재마법사 1332화(1332/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32화
설계된 초월성(10)
어스름이 내려앉은 고요한 저택.
거실 창문 밖으로 주홍빛 노을이 펼쳐진 황혼 속.
파직!!
저택의 벽면에 설치된 전선을 타고 새파란 전류가 번뜩이며, 두꺼비집이 들썩였다.
푸른 빛의 뇌광이 일렁이던 두꺼비집이 요동치며 살짝 흔들리다 딸깍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우정령이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윽,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걸렸잖아. 이래서 유기체들이란…….]투덜투덜대면서도 착실하게 흔적이 남지 않도록 두꺼비집 주변의 전선과 장치들을 정리한다.
아리스를 따라 49구역에 방문해 쇼핑을 보고 돌아온 지 어느덧 반나절 가까이가 지난 상황.
다비는 저택 내부를 타고 흐르는 전선을 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뇌정령은 현실과 전뇌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양쪽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영체.
필요하다면 언제든 전선을 타고 의지의 속도로 움직이며 도시 전역을 넘나들 수 있다.
다비가 아리스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레녹을 혼자두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
[마스터는…… 아직 안 일어났겠지…….]결계를 걸어돈 2층 위쪽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다.
다비의 주인은 보통 낮에 깨는 것이 아니면 그대로 하루를 더 자고 다음날 일어나곤 했으니 안심해도 될 터.
그렇게 생각한 다비가 살금살금 2층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타고 몰래 침실로 향했다.
중요한 일이었다곤 해도 잠시나마 레녹의 곁을 비웠으니, 그 벌로 오늘은 하루 종일 레녹의 침실에서 함께 잘 생각이었던 것.
다비에게 그게 벌인지 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그런 기준은 다비가 아니라 레녹이 정해주는 것이니 괜찮다.
그렇게 생각한 다비가 발바닥을 바닥에 문질러 소리를 지우며 조용히 침실에 데구루루 굴러 들어온 그 순간.
침대 창가에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는 레녹을 보자마자 제 자리에 딱 얼어붙었다.
[……아.]휘오오오……!!
창 바깥으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
저물어가는 하늘 저편에서 쏟아지는 주홍빛의 노을.
침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레녹이 다비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돌아온 거 아니야?”
[마, 마스터…….]“모처럼 바깥에 나갔는데, 더 놀다오지 그랬어.”
레녹이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딱히 더 놀다 온다고 해서 뭐라 하지는 않았을 텐데.”
설마, 다비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레녹이 잠에서 깨어난 건가.
다비가 깨워주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던 레녹이 혼자 일어나 있다는 초유의 상황.
근래 일을 마치고 발칸에 돌아온 이후로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변칙 패턴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비가 답지 않게 말을 버벅이며 잔뜩 움츠러들었다.
[마스터. 그게, 그러니까…….]“오래 전부터 아리스를 알고 지냈지만,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면에 놀라곤 한다.”
레녹은 그런 다비를 향해 손을 뻗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게 관심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따로 너를 불러서 대화를 하고싶어 할 줄이야. 이런 부분에서는 묘하게 행동력이 좋단 말이지.”
[…….]아리스가 다비를 데려갔다는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던 것인가.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다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레녹의 손짓을 따라 침대에 올라왔다.
머뭇거리며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레녹의 무릎에 얼굴을 부빈 다비가 쭈굴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해요…… 함부로 자리를 비워서…….]“별로. 혼내려고 말하는 건 아닌데?”
레녹이 다비를 끌어안았다.
“언제든 내 곁에 돌아올 수 있잖아. 저택의 보안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하지만…….]“다만 내가 네게 시킬 수 없던 일을, 아리스가 부탁하고 네가 수락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을 뿐이야.”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돌린 레녹이 중얼거렸다.
“결국, 진정한 가능성이란 건 나 자신의 손을 벗어난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일지도 모르지.”
[…….]레녹은 다비가 인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사실도, 어쩌면 그 이하의 감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짐작하고 있다.
다만 다비의 존재가 레녹에게도 큰 의미였기에, 굳이 정령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강요하진 않았던 것.
하지만 다비는 오늘 아리스의 부탁을 받아들여 그녀와 함께 단 둘이서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고 왔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 하지만 레녹은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다비의 ‘자립’이라는 건, 레녹이 직접 조종하거나 강요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레녹이나 다비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니까.
[마스터는…….]머뭇거리던 다비가 조용히 물었다.
[제가, 언젠가 마스터의 곁을 떠나기를 바라는 건가요?]“……아니.”
레녹이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실패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네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어쩌면, 만에 하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실패를 지금부터라도 대비하고 싶은 것뿐이야.”
나직하게, 레녹이 말했다.
“그렇게라도 네가 살기를 바라니까.”
이 세계에 살아가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다비는 레녹이 자신의 의지로 창조해 낸 유일무이한 존재.
오로지 레녹 자신이 원하고 의지하여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전뇌정령이다.
어쩌면 언젠가 다가올 이 세계의 결말에 레녹의 잘못이나 귀책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레녹은 다비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큰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다비가 이 세계에 태어나 남들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레녹의 의지였으니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전뇌정령은 언제나 레녹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 훌륭한 동반자였으니까.
하지만 레녹이 도전하는 이 모든 일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실패하게 된다면.
언젠가 다가올 결말 앞에 레녹 역시 저항하지 못하고 무릎 꿇게 된다면.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레녹은 다비가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만약 결말이 찾아온 이후 다비가 그렇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허수차원이나 전뇌공간에서라도 남아 결말 이후를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레녹은 지금껏 살아온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라도 다비가 레녹의 답이 되어준다면 충분하다고, 이제는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싫어요…….]다비가 중얼거렸다.
지금껏 드러내지 않았던 속내를 고백하듯.
처음으로 레녹의 명령에 거역하려는 것처럼, 힘겹게.
[저는, 마스터가 없으면, 싫다구요…….]“……그래.”
한참 동안, 말없이 레녹의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비 역시 입을 꾹 다물고 레녹의 무릎에 머리를 부볐다.
노을이 저물고 하늘이 어두워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감정을 갈무리하듯 눈을 뜬 레녹이 웃으면서 다비의 볼을 주물렀다.
“나도 딱히 그런 게 좋아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
[브헤으으읍.]“됐으니까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일어난 뒤에 생각해 봤는데,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고는 하지만 이 저택에 너무 오래 머물렀어.”
침대 옆에 놓여 있는 태블릿을 끌어당긴 레녹이 말했다.
“그동안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겨왔던 걸 생각하면 슬슬 새로운 은신처로 이사를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무조건 찬성이에요!]순식간에 기운을 차린 다비가 꼬리를 바짝 곤두세우고 펄쩍 뛰어올랐다.
[그 엘릭서. 감히 허락도 없이 마스터의 둥지에 멋대로 방문했다구요!! 두 번 다시 이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되죠!!]“아니. 딱히 아리스의 방문이 신경 쓰여서 이사를 하려는 건 아니다만…… 애초에 내 집은 둥지가 아니라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릎 위에서 날뛰는 다비를 바라보던 레녹이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어쨌든, 그래서 네가 없는 동안 카탈로그를 보면서 후보지를 찾아뒀어. 같이 보면서 이야기를 해보자. 그동안은 예산이나 여러 조건 때문에 합의점을 찾아야 했지만, 마탑이 안정화된 이후 이쪽 형편도 많이 좋아졌잖아?”
[좋아진 수준이 아니긴 하죠.]거칠게 콧김을 훅훅 뿜은 다비가 눈을 번뜩이며 태블릿을 노려보았다.
[어리석은 유기체들의 주식시장을 갖고 놀며 돈 놓고 돈 먹기를 해온 지 어언 3년……!!! 총알은 얼마든지 있다구요. 모든 것은 전부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거예요!!!]“……미안한데, 일단 좀 진정하지? 슬슬 조금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마탑의 아이템 사업이 안정되고 발칸의 증시가 우상향을 그리는 상황.
토벌전의 승리과 네 번째 논문의 발표로 인해 거대도시에 몰리는 자금의 규모는 이미 천문학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다.
자연스럽게 발칸에 꾸준히 투자를 반복해 온 레녹의 자산현황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이중 일부를 현금화해서 새로운 거처에 투자하는 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
하지만 다비가 생각하는 ‘새로운 둥지’란 고작 그 정도 가치가 아닌 것 같았다.
[지금보다 규모는 세배 이상 늘려야 해. 마스터의 연구실과 병행으로 운용이 가능하면서도 여차할 경우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구역 자체 개조가 가능한 지구를 선정해서…….]“다비?”
[반중력 엔진을 탑재해서 여차할 경우 이동이 가능하게 만들고, 저택의 모든 시설과 부품이 분해와 조립이 가능하게 설계해서 아예 궁전 같은 형태로 만들어 버리면…….]“다비, 일단 내 말을 좀 듣고-”
[아, 안 되겠어요. 둥지를 제대로 꾸미려면 아직 한참이나 자금이 더 부족해……!!!]벌떡 일어난 다비가 네 발을 딛고 꼿꼿이 선 채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마스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마스터를 위해 예산을 더 가져올게요……!!!!]“아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파앗!!!
날카로운 뇌광과 함께 눈앞에 사라진 전뇌정령의 모습.
그 자리에서 전뇌공간에 접속해버린 다비의 빈 자리를 바라보던 레녹이 뺨을 긁적였다.
다비에게 자립심을 키워주고 싶긴 했는데, 좀 이상한 방향으로 발현이 된 게 아닌가 싶다.
“나중에 아리스를 한번 만나보든지 해야겠군…….”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레녹이 저택 1층으로 내려와 부엌을 뒤졌다.
다비가 전뇌공간에서 돌아오면 레녹의 곁으로 알아서 소환될 터.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저녁에 가까워지는 늦은 시간. 뒤늦게나마 세안을 끝내고 외출 준비를 마친 뒤 저택을 나섰다.
대장군과의 결전에서 소모된 마력과 의념이 모두 회복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천사화마경의 붕괴와 함께 풀려난 금제에 대한 이야기라.”
레녹을 위해 다비가 요약해 둔 메일함의 사안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히는 소식.
스케쥴표를 확인한 레녹이 은빛의 지팡이를 소환해 움켜쥐며 걸음을 옮겼다.
저택을 나선 레녹의 시선이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을 향하고, 느릿하게 마력을 끌어올린 그 순간.
날카로운 뇌광과 함께 레녹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금지 개척 사업 관련 서류는 이제 모두 담당 부서에 할당해 주세요.”
“49구역에서 관리 인원을 계속해서 필요로 하고 있다는군요. 유동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만큼, 시정부에서도 집중관리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분기마다 정부 산하 채용 인원을 계속해서 늘리고 있어요. 조만간 인력이 보충되는 대로 교육을 마치고 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시급히…….”
거대도시 발칸 5번 구역에 위치한 시정부 청사.
광활하기 그지없는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금발의 소년이, 웃는 얼굴로 사방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열대의 전화기를 하나씩 받았다 내려놓고, 다른 손으로는 끊임없이 서류를 확인하고 서명한다.
책상 위에 서명을 마친 서류가 쌓일 때마다 수십명의 비서관들이 바쁘게 오가며 각 부처에 서류를 나르고-
어느새, 시장의 뒤에 서 있는 흑발의 청년을 보는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제 자리에 멈춰 섰다.
“…….!”
“겨, 견뢰!!”
“아, 이제야 온 겁니까?”
창백한 표정으로 변한 비서관들이 흠칫 놀라는 것과는 별개로,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채 힐끗 돌아보는 소년의 모습.
머뭇거리는 비서관들을 한 손으로 물린 발칸 시장, 아르지스 오르메온이 무표정한 마법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공문을 보내 접선을 부탁한지 이틀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아슬아슬했어요. 아, 대마법사에겐 그런 시간관념이 아예 없으려나?”
“제니가 시정부 측의 회선을 차단해두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게 좋겠군.”
레녹이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오르메온을 내려다보았다.
“개선식 이후로 네게 항상 화가 나 있는 것 같던데.”
“아, 탑의 관리자는…… 그럴 만하죠.”
오르메온이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49구역 관할 인력부족으로 현재 마탑에 위임해둔 업무가 좀 많아서. 권한까지 같이 넘겨줬다곤 해도 꽤 버거운 상태일 겁니다.”
“…….”
“성깔이 좀 더럽긴 한데, 제가 함께 일해본 사람 중에서는 손에 꼽힐만큼 유능하더군요. 역시 카이세의 핏줄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소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서무작업에서까지 혈통을 따지고 싶진 않은데, 나이를 먹다 보면 쓸데없이 편견이 강해져서. 불쾌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락가락 헛소리를 해댈 만큼 업무량이 많아보이긴 하는군.”
집무실에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더미를 돌아본 레녹이 말했다.
“이것들을 전부 너 혼자서 처리하고 있는 건가?”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쌓인 업무들이라서 말입니다. 시장의 권한으로만 결재가 가능한 일들도 있고요.”
오르메온이 웃으며 펜을 들어올렸다.
“뭐, 다 제 업보려니 생각하고 얌전히 처박혀 일만 하고 있는 중이지만, 평범한 인간이 감내할 만한 노동강도는 아니긴 하죠. 저도 이 몸이 아니었다면 애 좀 먹었을 겁니다.”
“그렇게 쌓인 업무들 중에서 금제에 대한 안건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서명을 멈춘 오르메온을 보며 레녹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뭐지? 회선을 통하지도 않고 직접 이야기해야 할 정도라면 평범한 안건은 아닐 텐데.”
“흠, 그러지 않아도 먼저 설명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탁, 펜을 내려놓고 의자를 돌린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슬슬 시간이 된 모양입니다.”
“시간?”
“이 도시는 물론이고 동대륙 전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벤트가 하나 있잖아요.”
오르메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집무실 뒤쪽에 위치한 탁 트인 발코니로 향했다.
“외뢰족의 승천자가 발칸 근처에 상륙했습니다.”
파아아아아아아-!!!!
정부 청사 건물 위로 펼쳐진 어두운 밤하늘.
원래라면 별빛이 반짝이고 있어야 할 밤하늘 위에, 신비로운 청록색의 오로라가 펼쳐져 있었다.
극지에서만 나타난다는 빛의 커튼이 발칸 상공에 드리운 채 도시 전역을 뒤덮은 장엄한 형상.
그 광대한 오로라의 장막 사이로 거대한 은빛의 초승달이 느릿하게 회전하며 발광하고 있다.
오르메온을 따라 걸어나온 레녹조차도 무심코 시선을 빼앗길 만큼 상서로운 빛을 품은 서광.
“저건…….”
은빛의 현월이 오로라에 휘감기며 서광을 품고 회전한다.
마치 거대한 은빛의 활 안에 오로라의 빛을 담아, 화살처럼 시위에 매기는 듯하다.
초승달을 자신의 활로 삼아 시위를 당기고, 그 의지를 발칸의 상공에 오로라처럼 풀어헤치는.
자연현상을 방불케 하는 그 압도적인 초월성에 레녹이 나지막히 감탄하고 있던 찰나.
“다담의 마력은 거울처럼 투명하고 호수의 물결처럼 깨끗하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고 하지요.”
발코니 난간을 붙잡고 선 시장이 말했다.
“오랫동안 살아온 식물처럼 자연의 정수를 품고 있어 그 마력을 쬔 이들은 자신의 본질을 일부 드러내게 된다고도 합니다.”
“…….”
“마치 지금의 제 모습처럼 말이지요.”
난간에 기대 서 있던 소년이 웃으며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킨다.
오로라의 빛에 비춰져 길게 늘어진 소년의 그림자는, 어린 소년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기묘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마치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처럼, 혹은 인간의 형상을 벗어던진 것처럼 부드러운 유체처럼 흔들리는 그림자.
하지만 레녹은 그런 소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승천자가 발칸에 오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게 금제에 대한 안건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그야, 다담이 발칸에 오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드려야 했던 사안이니까요.”
소년이 시선을 돌렸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조금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설명하면 괜찮을 겁니다.”
“아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주제에 뭔가 해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뭐, 구체적으로 메일을 적지 않은 제 책임도 있기야 하겠습니다만.”
시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본론부터 말하죠. 최근에 사천사화마경이 공략되었다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그건 왜 묻지?”
“에반 마르티네스라는 천재가 공략에 성공했는데, 그 과정이 꽤나 요란했던 모양입니다. 사천사화마경 전역을 엎어버린 여파로 대륙 전역이 들썩이고 있죠.”
“…….”
“덕분에 그 소식이 발칸까지 퍼지면서 세간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긴 한데…… 문제는 그 여파가 단순히 국제정세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장이 웃었다.
“사천사화마경이 소멸하며 그곳에 묶여 있던 황성의 금제들이 대거 풀리고, 봉인과 구속이 사라지며 대륙 각지에서 숨겨져 있던 유적지들이 드러나고 있죠.”
“……황성의 금제?”
그 순간, 오로라를 올려다보던 레녹의 움직임이 살짝 멎었다.
마경의 붕괴와 함께 풀려난 금제가 황성의 것이라면. 그리고 그걸 지금 오르메온이 입에 담는 이유라 한다면.
“예. 바로 그쪽이 생각하는 그 케이스가 거대도시에도 발생했습니다.”
팔짱을 낀 시장이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사천사화마경의 붕괴와 동시에 발칸 어딘가에서 황성이 남긴 [승천유적(昇天遺蹟)]이 발견되었습니다. 다담이 지금 발칸에 방문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죠.”
“…….”
“알아본 결과 승천유적은 좌승상 유성이 발굴한 뒤 아르스노바의 금제로 묶어둔 상고시대의 유적지…… 이른바 승천의 자격을 내려받는 의식제단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한 소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 안부인사를 건네듯이 툭 물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혹시 당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승천자가 될 생각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