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33
약먹는 천재마법사 1333화(1333/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33화
설계된 초월성(11)
[동방 외뢰족의 승천자, 다담(茶淡)이 발칸 방문을 예고했던 당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현재 발칸 정부청사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다담의 방문을 지켜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며…….] [천견(穿見)의 방문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승천자의 방문에 시정부 역시 대대적으로…….]거대도시 발칸. 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5번 구역.
이른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도 청사 앞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광장을 가득 메우다 못해, 도로 저편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잔뜩 몰려 있는 모습.
하지만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괴로움이나 짜증보다는 묘한 감정이 가득했다.
마치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대해 희미한 기대감이나 설렘을 품은 것처럼.
[발칸 중심구역 전체의 통행이 마비되며 중앙의회에서 이례적으로 조치에 나섰습니다.] [5번 구역을 중심으로 차량을 통제하고 있음에도 중심구역 인근의 교통체증을 해결할 수 없어…….]“으악, 사람 진짜 많잖아…….”
5번 구역의 최심부 번화가 상공을 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비행선.
비행선 최상층에 위치한 VIP 대기실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딜런이 질린 듯이 말했다.
“어떻게 보면 개선식 때보다 더한 것 같은데. 역시 승천자가 발칸을 방문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라 이건가.”
“반의 개선식은 토벌전의 결과를 수습하고 정리하기 위한 결과에 가까웠으니까.”
대기실의 화려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이벨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무릎 위에 미리 포장해 온 채소스틱을 까먹으며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개선식과는 다르게 이번 일은 현재 진행 중인 문제니 주목도가 더 높은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무엇보다 승천자잖아?”
느릿하게 이동하는 부유선의 창밖을 바라본 이벨린이 말했다.
“개인으로서 세계의 정점에 도달한 구도자…… 고금을 막론하고 승천자란 언제나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었어. 그 의미가 어느 시대에서든 퇴색되는 일은 없겠지.”
“…….”
승천자는 9레벨에 올라 정식으로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손에 넣은 존재.
이미 필멸의 굴레를 반쯤 벗어던진, 미답의 경지에 도달한 구도자들이다.
공식적으로 현세에 단 열 명조차 남지 않은, 세계의 역사에 영원토록 이름을 새긴 초월자들.
때와 시대를 막론하고 승천자란 언제나 모든 이들에게 경외 받는 정점의 상징이었다.
초인이나 구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 해도 그 위상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터.
그렇기에 승천자의 공식적인 발칸 방문을 앞두고 이렇게나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이겠지.
“지금도 봐. 아직 발칸에 도착하지도 않은 그녀를 향해서……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어.”
이벨린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레녹도 알 수 있었다.
광장 아래 구름처럼 몰려 있는 사람들 중, 기도를 하거나 절을 올리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으니까.
양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거나,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라듯이 엎드려서 참배를 반복한다.
이 도시에 찾아오는 것이 구도자가 아니라 신이라 여기는 듯한 사람들의 열망 어린 태도.
그 숨겨지지 않는 경외와 동경의 감정 앞에는 딜런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천견이 공식적으로 발칸을 방문한 것도 근 백 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어. 승천자의 방문이란 어떤 도시에서든 화제가 될 수밖에 없지.”
이벨린의 녹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야.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그 여파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할 테고.”
“어느 쪽이든 개선식에 비견되는 대규모 행사가 되리란 건 틀림없다는 말이군…… 하지만 그런 중요한 자리에 고작 우리 셋으로 괜찮겠어?”
딜런이 뺨을 긁적였다.
“이 딜런 오케이시. 그렇게 자존감이 낮은 편은 아니다만, 이런 자리에 끼기에는 아주아주 살짝…… 아쉬운 파트너가 아닐까 싶은데.”
천견의 사망 이후 9레벨의 승천자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발칸을 방문하는 이 순간.
하지만 다담을 맞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멤버는 레녹과 이벨린, 딜런 세 명뿐이다.
발칸을 방문하는 승천자를 만나러 가는 것 치고는 꽤나 간소하고 이례적인 구성.
당장 견뢰의 마탑에 어떤 초월자들이 소속되어 있는지 아는 딜런으로선 살짝 헛기침이 나오는 팀 편성이 아닐 수 없었다.
“왜, 반이 부탁했을 때 좋다고 덥석 물 때는 언제고.”
이벨린이 채소스틱을 입에 문 채로 피식 웃었다.
”아니면 갑자기 이제 와서 쫄아버리기라도 한 거야? 용병답지 않은걸.”
“그, 딱히 하기 싫다는 건 아니고. 물론 반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만. 우리 셋 뿐인 줄은 몰랐지.”
팔짱을 낀 딜런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 뭐냐…… 실험체 출신이니까. 어떻게 봐도 뭔가 예의를 차린 느낌은 아니지. 승천자를 만나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겠어?”
“아니. 그런 부분을 걱정하는 거라면 딱히 상관없어.”
이벨린이 채소스틱을 까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만나러 가는 승천자는 지나치게 오래 살아 정신이 식물에 가까워진 존재니까. 어떻게 봐도 평범한 구도자는 절대로 아니지.”
“…….”
“다담의 마력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특수한 성질을 띠고 있는 데다, 예전에는 인간을 기꺼워하지 않는 성정으로 유명했어. 그래서 수행원을 가능한 비인간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었고.”
승천자 다담(茶淡).
현시대에 열 명도 남지 않은 승천자 중 하나이자, 중앙도시가 멸망한 뒤로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은거자.
하지만 그 말은 다담이 천견이나 진둔처럼 인간에게 호의적인 승천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외뢰족의 승천자로서 오랫동안 살아온 그녀의 정신은 이미 반쯤 식물의 영역에 접어든 차.
그제서야 어째서 오늘 이 자리에 자신이 불려온 것인지 알게 된 딜런이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그래서 나를 수행원으로 삼았다 이거냐? 고민하던 거랑 완전히 반대되는 이유였구만!!”
“반, 너는 좀 어때?”
투덜대는 딜런의 말을 칼같이 끊어낸 이벨린이 시선을 돌렸다.
“승천유적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있던 것 같은데. 아직 정리가 안 됐으면 일정을 뒤로 미룰까?”
“……아니.”
대기실 한쪽 끝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던 레녹이 대답했다.
“사천사화마경의 붕괴와 동시에 발칸 어딘가에서 상고시대의 유적지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황성에서 금제를 걸어 승천유적을 감춰두고 있었다는 것도.”
발칸 어딘가에 숨겨진 승천유적을 이용해 새로운 승천자가 되지 않겠냐는 오르메온 시장의 제안.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지만, 예의 유적지가 그만한 기적이나 신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겠지.
하지만 레녹은 승천유적이 쿤다라에서 마주한 진둔의 승급법진과는 궤가 다른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레온이 사용한 승급법진이 자기 자신을 ‘재창조’하는 힘이었다면, 승천유적은 승천의 ‘자격’을 내려받는 의식제단.
“오르메온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지만, 예의 유적이 승천의 자격과 관련이 있다면 조사해볼 필요는 있어.”
당장 승천자가 될 생각은 없지만, 승천의 자격이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레녹 역시 흥미가 있다.
승천유적을 조사하다 보면 그에 대해 무언가 확실하게 감을 잡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
발칸 인근에 도착했다는 다담을 만나러 이동하고 있는 것 역시 그와 같은 이유였다.
고민하던 것은 시장의 제안 때문이 아니라, 지금 레녹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
막연하게 승천의 개념을 더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수단과 방식을 고민하고 있는 이 순간이 생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으니.
부유선의 창 밖을 내려다본 레녹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준비가 됐다면 슬슬 움직이지. 저쪽도 이제 곧 도착할 모양이다.”
“곧 도착한다고?”
창문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서 있던 딜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안한데 내 기감에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며칠째 하늘에 떠 있는 이상한 초승달밖에 안 보인다고.”
“다담은 물리적인 방식이나 이동수단을 사용해 발칸에 도래하려는 것이 아니야.”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의지가 곧 존재에 가까우니. 저건 자신의 의지를 물질계에 내려보내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지.”
“일종의 ‘과녁’이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걸 보는 것만으로도 승천자가 와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거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가까워지는군…….”
극뢰마법을 깨우치고 초월성을 손에 넣은 뒤로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비대한 영성.
사천사화마경에서 얻은 의사권능, 타락한 황금률을 사용해 그를 비춰 본 레녹이 말했다.
“지금 나가면 대충 시간이 될 거다.”
철컥!!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것과 동시에, 부유선 복도에서 대기하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시정부 직속 특무기관의 초인과 고위 공직자, 파견된 수행원들이 말없이 레녹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숨 막힐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레녹은 사람들이 가득 찬 복도를 지나 걸음을 옮겼다.
슈우우웅……!!!
부드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착지한 부유선의 문을 열고 땅에 내려선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도시 최외곽에 위치한 미개발지구의 어느 이름 모를 유령도시.
새벽하늘 위에 떠오른 은색 초승달과, 그 사이로 휘감긴 청록색의 오로라가 발광하는 정경.
그를 제외한 그 어떤 기척이나 생명체도 미리 모두 자리를 비우고 치워진 거리 앞에 선 그 순간.
상공에 떠오른 수십 대의 카메라가 레녹을 비추고, 화면 너머 뒤덮인 노이즈를 본 사람들이 함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오…… 이거 뭔가 좀 되게 어색한데.”
레녹의 뒤에서 걷고 있던 딜런이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을 듣고 과장된 몸짓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토벌전 이후로 뭔가 대접이 달라지긴 했군. 아니면 승천자의 방문 앞에서는 태도가 변할 수밖에 없는 건가?”
“딱히 거창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닐걸. 사람들은 그냥 이 순간 자체에 흥분하는 거지.”
옆에서 걷고 있던 이벨린이 고개를 저었다.
“다담의 방문을 앞두고 반이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가, 승천자와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전력이 발칸에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마르시아. 아까부터 계속 딴지 좀 걸지 마.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기분 좀 내보자고.”
딜런이 투덜거렸다.
“그런 불편한 팩트는 필요 없어! 난 지금 승천자를 직접 만나러 간단 사실만으로 살짝 오줌이 마렵단 말이야!!”
“그딴 불쾌한 사실이야말로 눈곱만큼도 알고 싶지 않은데.”
폐허가 된 미개발지구의 거리 사이를 걸으며 이벨린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천견이 지난번에 발칸을 방문한 이유를 시민들도 기억하고 있어. 시정부가 그때 얌전히 천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을 테고.”
“…….”
“이 거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난번과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잖아?”
마드레아 팔시어가 발칸을 방문했던 것은 발칸과 필레놈 자치령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당시 시정부는 사태를 중재하는 천견의 의사를 존중해 자치령에 유리한 쪽의 협정을 받아들였다.
레녹이 막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했던, 지금은 너무나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오래전의 일.
그때 천견을 만나 닫힌 세계에 대해 듣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레녹은 그 순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레녹을 힐끗 돌아본 이벨린이 한발 늦게 자신이 한 말을 수습하듯 말했다.
“그, 물론 그렇다고 반이 발칸을 대표하거나 외뢰족의 승천자와 적대할 필요는 없지만-”
“오늘 이 사태가 사람들에게 굉장히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되기엔 차고도 넘친다는 뜻이죠.”
미개발지구 외곽지대에 위치한 거대한 폐허 끝자락.
먼지가 흩날리는 버려진 구역 앞에, 어린 소년이 세 사람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동대륙 최고의 마법사와 현존하는 승천자가 만나는 겁니다. 어느 쪽이든 화제가 되기엔 충분하지 않을까요?”
“오르메온.”
발칸 시장의 이름을 부른 레녹이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이 올 줄 알았는데. 나와 있었군.”
“예. 원래는 일이 너무 바빠서 상원의원에게 넘기고 싶었는데…… 역시 그렇게 하기엔 너무 큰 일이라서.”
수백 명의 수행원들 사이에 서 있던 오르메온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레녹을 올려다보았다.
저편에서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는데도 소년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잘 들렸다.
“무려 승천자가 도시에 방문했는데, 시장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잖아요? 뭐 어디 갇혀서 일을 못 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
“저쪽에서 준비가 되면 바로 시작할 듯 한데, 데려오신 분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꽤나 재미있는 조합을 고르셨군요.”
레녹의 뒤에 서 있는 이벨린과 딜런을 번갈아 바라본 소년이 웃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하신 듯한데, 제 제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 보셨습니까?”
“승천유적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지만, 그걸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군.”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승천자를 만나서 그녀의 목적에 대해 직접 듣고 판단하겠다.”
“신중하시군요. 뭐, 덥석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소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좋습니다. 다담을 만나고 나면 생각이 변할지도 모르니까요. 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이상할 정도로 다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오르메온의 언행.
그녀의 도착은 물론이고 그 목적조차도 미리 알고 레녹에게 말해준 이유.
하지만 레녹은 더 이상 오르메온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부유선 바깥까지 따라 나온 수십 명의 수행원을 지나쳐 세 사람이 폐허가 된 거리를 걷는다.
하늘에서 범람하는 오로라의 권역으로 진입하는 것과 동시에, 소리가 희미해지며 감각이 이격되는 듯한 이물감.
“이렇게 걷고 있으니까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이 나는데.”
위화감을 억지로 떨쳐내려는 듯 딜런이 중얼거렸다.
“반, 기억나냐? 우리 예전에 악어 영감을 만나 뒤질 뻔했을 때, 이렇게 셋이 있었잖아.”
“……그랬었지.”
“X발,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내가 어떻게든 용기를 내서 그 괴물을 물리쳤기에 망정이지…….”
“오케이시, 공포에 질려서 머리가 맛이 가버린 거야? 말도 안 되는 기억 왜곡을 하고 있어.”
당시 크로켄을 물러나게 했던 진짜 공헌자가 황당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꾸 딴지걸지 말라니까, 마르시아.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그냥 기분만 좀 내자니까?”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게 누군데. 애초에 넌 그냥 내가 반을 도와준 일을 네 공으로 만들고 싶은 것뿐이잖아.”
“아니지. 따지자면 내가 영감의 힘을 조금이라도 빼놓았기 때문에 늦게 도착한 네가 거드름을 피울 수 있던 것 아니겠냐.”
“뻔뻔한 정도를 넘어서 그 입을 화살로 꿰매주고 싶어지는 변명이네.”
의외로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뒤로 하고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샬로테 사의 공장에서 크로켄을 만난 뒤로 이렇게 셋이 움직인 적이 또 있었던가.
함께 프리랜서 일을 하며 밑바닥을 구르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발칸에 방문한 승천자를 만나러 가고 있다.
사천사화마경 공략과 함께 동시에 대륙 전역이 격동하며 한계를 넘어선 괴물들이 움직이는 이 순간.
레녹이 마지막까지 중심을 잡고 있다면 지금과 같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대장군의 앞에서 결의했던 그때처럼, 결국 끝까지 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
그렇기 때문에라도 지금은 상념을 내려놓고 할 일이 있었다.
“……온다.”
미개발지구의 상공에 떠오른 거대한 은빛의 초승달.
날카로운 은빛의 대궁(大弓)처럼 휘어진 현월을 올려다본 레녹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은 그 순간.
거대한 초승달을 중심으로 휘감긴 장엄한 오로라가 일제히 한곳으로 집속되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이잉-!!!!
“뭐, 뭐야?!!”
당황한 딜런이 퍼뜩 시선을 들어올리고, 이벨린이 착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온 상공을 뒤덮은 오로라의 광채가, 은빛 현월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격렬하게 회전한다.
청록색의 광채가 번뜩이며 초승달의 중심부에서 솟구치고, 마치 시위에 매겨진 빛의 화살처럼 변한 순간.
초승달에서 쏘아진 오로라의 화살이 미개발지구 폐허 한복판에 내리 찍히며 아득한 광채를 터트렸다.
파아아아아아아앗!!!!
“큭-!”
“……!!!!”
의식을 휩쓸어 날려버리는 강렬한 파문에 딜런과 이벨린이 고개를 숙였다.
눈을 아리게 만드는 오로라의 빛이 폐허 위로 떨어지며 시공간을 개변해 나간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사이로 수풀과 잎사귀가 자라나고, 수천 년을 살아온 고목이 솟구쳤다.
버려진 폐허에 가까웠던 미개발지구 구역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방대한 대수림으로 뒤바꾸는 압도적인 모습.
쿠과과과과과과과과!!!!
“미친, 이게 뭔……!!!”
“특정한 시공간을 자신의 [사상]으로 물들여 법칙을 강제로 덮어씌우는 거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그 말도 안되는 현실조작에 딜런이 경악하는 사이,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물질세계의 법칙을 자신만의 세계로 개변하는…… 침식영역의 아득한 상위호환에 도달한 힘이지.”
“……치, 침식영역?”
고대의 술사들이 자성영역을 전개하기 위해 사용했던 오래된 방식.
말 그대로 시공간을 침식해 자신의 근원심상을 전개하는 지금은 실전되어버린 고대의 기술.
“하늘의 오로라에 자신의 의지를 담아 화살로 쏘아내고, 직격한 시공간을 사상전역으로 강제 개변하는 건가.”
레녹이 중얼거렸다.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이 정도의 기적을 행사할 수 있다니…… 초월적인 궁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군.”
“…….”
쿠우우웅!!!
먼지가 쌓인 오래된 폐건물이 즐비한 거리가, 굵직한 거목들이 늘어선 거대한 숲으로 변한다.
굳게 닫혀 있던 격벽은 어느새 나뭇잎으로 뒤덮여 햇살이 쏟아지는 요람이 되고,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텅 비어 있는 미개발지구 외곽구역을 자신만의 세계로 변질시켜 요람으로 화한 자격을 얻은 초월자의 존재.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르른 초목으로 격변하는 세계 속을 세 사람이 걷는다.
“이, 게…… 승천자의 사상전역이라고…….”
레녹의 뒤를 따라 걷던 딜런의 몸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위계를 완성시킨 딜런 역시, 이 시공간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말도 안 돼. 의지를 보내는 것만으로…… 이런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니…… 대체…….”
“……가자.”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저쪽 역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니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전 발칸에서 처음으로 승천자를 만났던 그날을 생각한다.
수천 미터 바깥에서 천견과 눈을 마주치고, 거부할 새도 없이 말을 걸어왔던 그 순간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겪고, 오랜 시간을 지나 또 다른 승천자를 만나기 위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레녹은 이 도시를 찾아온 승천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아득한 수목의 정원. 나무 뿌리가 뒤엉켜 만들어진 거대한 요람.
오로라의 광채가 내리찍히는 사상전역 중심부. 시간이 멈춘 것처럼 햇살이 머무는 그곳에.
발아래까지 닿는 연녹색의 머리칼을 늘어뜨린 묘령의 여성이 잠들듯이 기대앉아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길쭉한 귀가 튀어나온, 인간과는 다른 핼쑥하고도 메마른 인상.
바깥 대륙에서 기원했다는 외뢰족. 세간에서는 엘프라고 불리는 아인종.
그중에서도 종족의 정점에 이른 9레벨의 승천자.
다담(茶淡)이 레녹을 보며 초점 없는 눈을 떴다.
“……세 번째와 네 번째의 경계선 사이에 우리가 서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