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35
약먹는 천재마법사 1335화(1335/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35화
설계된 초월성(13)
거대도시 발칸 49구역. 견뢰의 마탑을 대신해 임시로 사용 중인 빌딩 최상층 회의실.
수백 명을 수용 가능한 대강당에서 주티야가 스무디를 홀짝이며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거대도시를 방문한 승천자 다담과 견뢰의 회담이 무사히 종료된 지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미개발지구에서 조우한 두 사람은 중앙대륙의 정세에 대해 몇가지 사안을 주고받은 것으로 밝혀져…….] [회담이 끝난 미개발지구 앞에는 승천자를 만나기 위해 대륙 전역의 사절단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으며…….]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여러 도시국가와 세력의 깃발과 휘장이 연이어 거리 사이로 이동한다.
예식을 갖춘 채 질서정연하게 특무기관의 안내에 따라 순서를 기다리는 대륙 각지의 사절단.
두꺼운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나른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고 있던 주티야가 중얼거렸다…….
“다들 고생이 많네…….”
어쩌면 현시점에서 유일하게 활동을 재개했을지도 모르는 외뢰족의 승천자.
인간을 기꺼워하지 않는 성정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녀를 만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초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속세와 연을 끊고 구도를 추구하던 수련자, 혹은 발칸이나 동대륙과는 전혀 연이 없는 세력이나 집단의 고위계 초월자들.
다담이 그들을 만나줄지 알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발칸을 찾아올만큼, 승천자를 만나고 싶어 애가 타는 걸까.
몇몇 승천자들이 떠나고 사라진 이 시대에서조차, 9레벨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상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
빨대를 씹으며 느긋하게 채널을 돌리려던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콕콕 두들겼다.
“하이베르크.”
“……아하, 당신이었구나.”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흑발의 소녀를 돌아본 주티야가 졸린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네, 포혈공. 견뢰를 위한 인공혈액 연구에 바쁘다고 들었는데. 진전은 좀 있었어?”
“전혀. 토르번 그 유감스러운 인간이 없으니까 성과가 잘 안 나오는 걸.”
주티야 옆의 의자에 앉은 포혈공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견뢰의 피는 여러모로 해석이 난해해서 정량분석이 안 돼. 여러 계통의 마력과 불순물이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특징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재현’ 자체를 방해하고 있거든.”
레녹이 쿤다라의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당시, 포혈공은 주티야와 토르번, 이벨린을 끌어들여 견뢰의 건강관리를 위한 소모임을 만든 적이 있었다.
쿤다라의 진혈종, 아르스노바의 귀족, 토르번 마탑주와 시정부의 에이전트가 지닌 능력과 인맥을 이용해 레녹의 건강 증진을 꾀해보겠다는 시도.
특히 최근 포혈공은 머피가 확보해 둔 견뢰의 혈액샘플을 분석해 오직 레녹에게만 수혈 가능한 인공혈액을 제조하는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혈마법의 대가인 그녀는 어떤 생명체의 혈액이나 성분이라도 어렵지 않게 분석하고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바.
만약 레녹에게 수혈 가능한 인공혈액을 만들 수 있다면 모든 종류의 사고에 대처가 가능해진다…… 그렇게 생각하고 야심 차게 시작한 연구였지만.
“흥미로운 말이네. 견뢰의 혈액이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부분이 많아서 인공혈액 제조가 어렵다는 거야?”
“반대야. 그만한 경지에 오르고도 견뢰의 피는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 오히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지.”
포혈공이 착잡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위계에 도달한 존재는 신진대사나 세포구성부터 평범한 인간과는 달라지니까. 그러한 차이점이나 개성을 잡아내 특정한 초인에게 맞는 인공혈액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거든.”
“……헤에.”
“견뢰의 혈액 성분 자체는 평범한 인간과 유사한데, 용종을 뛰어넘는 복잡다단한 마력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유하고 있어. 어떻게 그만한 경지에 오른 뒤에도 육신 자체는 인간과 다르지 않은 건지, 이미 부서진 그릇 안에 그렇게 강대한 초월성을 담아둘 수 있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네.”
쿤다라의 진혈종인 그녀가 평생 동안 보아온 누구보다도 거대한 재능을 지닌 마법사.
그보다 강한 초월자도, 그보다 앞서나간 구도자도 얼마든지 있을지언정 그보다 더 재능 있는 마법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육체 구성성분을 조사하다보면 그 재능에 기원하는 특이점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까지는 수확이 마땅치 않았던 바.
육신이 무너지고 있음에도 아직 그만한 재능을 품고 있는 건지, 아니면 부서진 육신을 품었기에 그만한 재능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그 순서를 이해할 수 없는 인과와 연관성이 외려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나마 토르번 그 인간이 견뢰에 대해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어서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는데, 골치 아프게 됐어.”
“그거참 안된 일이네. 토르번 마탑에 전언을 보내 그 인간을 다시 보내 달라고 할까?”
“됐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이베르크는 날 놀리고 싶은 거야?”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은 발칸에 머무를 당시에도 레녹 외에 모든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광인.
벼락에 미쳐 있는 그 노마법사가 레녹을 떠났다면, 어쩌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각오를 하고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만한 각오를 마치고 발칸을 떠난 이상 토르번은 어떤 이유로든 다시 이 도시에 돌아오지 않을 터.
주티야와 포혈공 모두 그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것보다 오늘 회의는 왜 모인 건데?”
나른하게 웃고 있는 주티야를 무시한 흡혈귀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회의장을 돌아봤다.
“어지간히 큰 일이 아니고선 이렇게 모이는 일은 거의 없잖아. 견뢰가 직접 부른 거야?”
레녹의 마탑이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구성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탑의 모든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대부분이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타인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다, 같은 탑 안에서도 판이한 연구와 사업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기 때문.
당장 포혈공과 주티야 역시 혈성연구와 회계업무라는 완전히 다른 분야에 몸을 담고 있어, 소모임이 아니면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지 않다.
토벌전처럼 탑의 존망을 뒤흔들만큼 큰 일이 터지거나, 레녹이 직접 관계자 전원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고선 이렇게 모이는 일이 없어진 바.
“발칸에 그동안 못보던 승천자가 한 명 찾아왔어.”
스무디를 홀짝인 주티야가 태연하게 말했다.
“뭔가 도시에 문제가 생겨서 견뢰랑 대화를 했나봐.”
“…….?”
순간, 주티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포혈공이 고개를 갸웃거린 직후.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쾅!!!
“아니, 거래는 무슨 거래야?! 당연히 그 다담이라는 승천자에 대한 조사부터 마저 끝내야지!!”
“유적에 대한 정보 수집이 더 중요해. 저쪽에서 뭘 대가로 걸고 거래를 제안했는지 못 들었어?”
“중앙도시가 건재하던 시절에도 승천자로 존재해 온 초월자야. 그녀에 대한 사료는 이미 수집이 끝났다고. 더 찾아보지 않아도 돼.”
[은거한 지 수십 년이 넘어 잠시 잊혀졌을 뿐, 오래전에는 유명했던 거물이다. 이제 와서 성향이 크게 변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이는데.]“모르는 일이지. 인간이 아니라 아인종 승천자라며? 다른 종족을 이끄는 초월자라면 대외적인 상황에 따라 입장이 변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무인과 용병, 수인과 로봇, 마법사와 초능력자가 뒤섞여 시끄럽게 떠들면서 들어온다.
고요하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떠들썩하게 변하면서 사방의 공기가 부산스러워졌다.
자기들끼리 한참 말다툼을 벌이다가도 주티야와 레이시를 보며 한마디씩 던지고 가는 초인들의 모습.
“주티야!! 나 혼자 연말정산하다 좆됐는데 좀 도와줘! 49구역에서 매기는 과징금이 진짜 미쳤다니까?”
“레이시, 네가 저번에 만들어준 인공혈액 진짜 유용하더라. 덕분에 죽을 걱정 안 하고 실전처럼 대련할 수 있어서 좋던데?”
“웨이안. 대련하면서 처맞지 않을 생각을 해야지 뭔 개소리를 하는거냐? 그것보다 너 반의 소환수 님에게 그딴 부탁이나 하고 있었어?”
“닥쳐, 밀라! 아티야 중장에게 훈련받는 병아리는 이해 못 해. 난 귀희를 만날 때마다 매번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다고.”
“뭐 임마? 진짜 병아리가 누구인지 여기서 한번 확인해 볼까?”
주티야와 레이시에게 인사를 나누다가도 시끄럽게 떠들고 싸워대는 용병들.
밀라와 웨이안이 서로의 멱살을 잡는 것과 동시에 레녹이 제니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왔다.
“모일 사람은 대충 다 모였군.”
표정을 찌푸린 채 파일철을 휙휙 넘겨보고 있는 제니를 두고 회의실의 단상 앞에 선다.
레녹이 회의실을 쓱 둘러보는 것과 동시에, 시끄럽게 떠들던 수십명의 초인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한참 투닥대던 용병들이나, 논문에 대해 토론하던 마법사들, 수련의 성과를 주고받던 무인들이 침묵을 지키고.
“다들 여러모로 바쁠 테니 짧게 하지.”
조용해진 회의실 앞에 선 레녹이 말했다.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 있는데, 토벌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 불렀다. 혹시 이 중에서 지금 일에 대해 모르는 사람 있나?”
“…….”
순간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르는 사람이 있는지 알지 못해서 찾아오는 미묘한 침묵.
무표정한 레녹의 시선이 일행을 돌아본 순간, 주티야가 태연하게 포혈공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자연스럽게 레녹의 눈길이 포혈공을 따라간 뒤에야, 흡혈귀가 투덜거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이거, 혹시 손들어서 직접 말해야 되는 거였어?”
“부끄럽지만 약방에서 자주 나오질 않아서…… 중요한 일인가?”
“너희들이 허구한 날 내 병동에 실려 오지만 않아도 뉴스 정도는 볼 시간이 있을 거다.”
약선이 헛기침을 하고, 대외활동을 하지 않는 머피를 비롯한 몇 명이 손을 든다.
그 모습을 확인한 제니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현재 외뢰족의 승천자가 발칸에 찾아와 미개발지구 인근에서 머무르고 있어. 현세에 열 명도 남지 않은 9레벨의 초월자 중 하나인데, 수십 년 넘게 은거하다 굉장히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지.”
“…….”
“현존하는 승천자가 공식적으로 도시국가를 방문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사태라 시정부에서 빠른 대응에 나섰고, 반이 직접 다담을 만나러 갔어. 딜런과 현궁이 현장에 동행해서 반과 함께 이야기를 들었고.”
회의실 벽에 기대선 이벨린과, 용병들 사이에 구겨져 있는 딜런을 힐끗 돌아본 제니가 말했다.
“문제는 다담이 발칸을 방문한 목적 그 자체야. 그녀의 전언에 의하면 이 도시 어딘가에 상고시대의 승천유적이 존재한다고 하더군.”
“……승천유적?”
제니는 사태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짧게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다담의 방문과 그녀의 목적. 승천유적의 파괴를 위해 제시한 대가와 유적의 의미.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포혈공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하고, 주티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승천자의 방문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용병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발칸 어딘가에 존재하는 승천유적을 찾아서 없애 달라…….”
“확실히, 그만한 물건이 도시에 멀쩡히 남아 있다면 위험하기는 하겠네.”
“상고시대에 존재했던 승천의 자격을 내려받기 위한 의식제단이라. 어처구니가 없군.”
“이 X 같은 도시에 갑자기 승천자가 잠들어 있다고 해도 이젠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어.”
현존하는 승천자가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유적의 힘이나 능력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도 없겠지.
유적을 사용해 승천자가 될 수는 없더라도 위계의 상승이나 성장, 혹은 각성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최소한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기만 해도 유적을 노리는 이들이 도시 안팎에서 구름처럼 몰려들게 될 터.
그렇기에 승천유적을 찾아 없애 달라는 다담의 제안 자체는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상고시대의 승천유적이라니…… 내가 프로젝트에 합류했을 때는 그런 [시나리오]가 아예 없던 것 같은데.”
포혈공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관계자였던 흡혈귀조차 승천유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
“애초에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진행되던 계획이나 안배의 일종이었을지도 모르지.”
제니가 차분한 표정으로 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반, 어떻게 생각해? 이것도 그 사람이 계획한 일의 일부였을까?”
“……아니.”
레녹이 잠시 말을 고르고 천천히 대답했다.
“토벌전에서 모두 끝난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직접 이 시간선에 개입할 일은 없겠지.”
“…….”
“지금 발칸에 남아 있는 승천유적은 그가 계획한 일이라기보단…… 황성이 그를 위해 준비한 안배 중 하나가 아닐까 싶군.”
토벌전의 최종결전에서 레녹은 카이세 바쥬르에게 결말을 정해주었다.
극뢰마법을 사용해 모든 시간선에서 카이세 바쥬르의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이제 와서 카이세의 유지나 인과가 이 세계에 어떤 식으로든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겠지.
그러니 승천유적은 카이세가 아닌 다른 존재가 유사의 월식을 위해 안배한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프로젝트가 끝나갈 시점에 카이세는 이미 사상전역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사의 월식을 준비했다는 건…….’
이미 9레벨에 올라 자신의 의지로 회귀를 반복할 수 있었던 카이세를 위해 준비된 승천.
교주와 단장을 만난 삼자회담에서 그들이 언급했던 유사의 월식과 축쇄식.
“…….”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유사의 월식이 가리키는 의미가 카이세를 승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그 개념 자체가 카이세를 그보다 훨씬 더 높은 ‘레벨’로 밀어 올리기 위한 시도였다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승천유적을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판단을 끝낸 레녹이 말했다.
“카이세가 소멸한 현시점에서 그를 위해 준비된 안배가 변질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다담의 제안은 그다음에 고민해 봐야겠군.”
“동의해. 다담이 승천유적에 손을 댈 수 없는 건지, 대고 싶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좌시하기는 어려운 문제라고 봐.”
생각에 잠긴 탑의 동료들을 두고 제니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정보가 새어나가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승천유적을 확인하고 형태와 구조를 조사하는 것이 먼저겠지. 혼자 할 거야?”
“탐색이나 조사가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겠지.”
레녹이 대답했다.
“다만 이번 일을 위해 도시 전체를 뒤질 필요는 없어. 필요한 인원을 두셋 정도만 추려 움직일 생각이다.”
“탑의 관계자들이 우르르 돌아다니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끌겠지. 쓸데없이 눈에 띄는 걸 피하려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다들 들었지?”
제니가 회의실을 휙 돌아보며 손을 까닥였다.
“반이 오랜만에 고기방패가 필요하대. 혹시 지원하고 싶은 사람?”
“제니, 무슨 말을 그렇게…….”
레녹이 어이없는 듯 고개를 젓다가, 회의실의 태반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프리실라나 야누시카처럼 탑의 내근직 관계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자원하고 나선 상황.
“나, 반이랑 같이 일해본 지 너무 오래됐는데. 이제는 진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틀렸어, 웨이안. 쓸 만한 전위가 필요한 거잖아? 그렇다면 반이랑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춰본 적임자가 있다고.”
“저리 꺼져, 딜런. 난 우리 프리실라를 마탑에 취업시켜 준 은혜를 갚아야 하니까.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언니, 제발…….”
그새를 못 참고 서로 다투는 용병들과 그 사이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프리실라의 모습.
하지만 도움이 될 거라 주장하고 나서는 건 탑의 용병들 만이 아니었다.
“탑주의 은덕을 입어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경지에 진전이 있었지. 능히 힘이 될 수 있을 듯 하오.”
“반, 내가 보유하고 있던 술식병장의 복원이 거의 끝났어. 내가 가면 화력이 부족할 일은 없을걸?”
“외뢰족의 승천자가 부탁한 일이야. 당연히 그쪽과 관련이 있는 내가 끝까지 동행하는게 맞을 것 같은데.”
“반.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번 사태는 아나테마의 일과도 유사한 부분이 꽤 있네.”
펠릭스가 특유의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 사고의 여파로 금제가 풀리고 이 도시에 숨어 있는 무언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지. 그렇다면 그 자체로 이번 사태가 아나테마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지 않겠나?”
“…….”
“자네와 함께 아나테마의 저택에 다녀온 건 나와 페이샤 두 사람뿐이었지. 그렇다면 이번 일에서는 내 도움이 필요할 걸세.”
탑의 동료들과 함께 일해본 지 꽤나 오래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열성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고위계 초월자들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용병들도 적극적으로 동행을 자처하는 상황.
“토벌전이 끝나고 네가 가르쳐준 ‘기술’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도움이 된 것 같더라.”
그런 레녹의 생각을 눈치챈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제니가 몰래 다가와 속삭였다.
“그때 이후로 다들 훈련강도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났어. 기회가 될 때 네 옆에서 휘둘러보고 싶은 것 같은데?”
“그렇군…….”
“다들 나서지 못해서 안달인 것 같으니까, 적당히 골라가. 어차피 네가 알아서 다 하겠지만.”
토벌전이 끝난 이후 탑의 동료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기술이라.
그때 우로보로스의 새로운 형태라며 알려주었던 사도화가 초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 건가.
하지만 레녹은 회의실 곳곳에서 투닥대는 동료들을 두고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쪽에서 탐사 준비를 미리 끝내놓을 테니, 편성이 끝나면 바로 말해줘. 네가 차출한 인원에 따라 49구역의 스케쥴을 조정해야-”
“아니.”
대신 지금껏 레녹의 옆에 계속 서 있던 탑의 관리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을 뿐.
“이번에 같이 가는 사람은 네가 되야 할 것 같다.”
“……어?”
“아무래도 이번에는 우로보로스 마법체계를 익힌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
순간, 어울리지 않게 멍한 표정을 짓는 제니를 보며 레녹이 웃었다.
“한 사람만 네가 직접 골라라. 네 호위를 맡을 전위 하나만 챙겨서 출발하자.”
“반, 그 말은…….”
“오래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지금 바로 승천유적을 찾으러 가야겠다.”
* * *
“제니. 난 분명히 한 ‘사람’을 더 골라서 출발하겠다고 했을 텐데.”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비교적 네 의견을 존중하고 싶지만, 이번 일에 꼭 개를 데려가야겠나?”
“그 입 다물지 못해, 마법사?”
철컥!!
채비를 마치고 걸어나온 페이샤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레녹을 노려보았다.
“뭘 죽이는 일이라면 네 주변의 얼간이들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네놈도 부정할 순 없을 텐데.”
“…….”
“오랜만에 네놈이랑 같이 일을 하려니까 제니시아도 확실한 인선을 필요로 했던 거지.”
페이샤가 뻐기듯이 으스대며 창대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분의 핏줄답게 현명한 판단을 한 거다. 가는 동안에는 얌전히 따라갈테니 출발해.”
“얌전히는 무슨…… 길가다 엄한 사람을 보고 짖지만 않아도 다행이군.”
“닥쳐!!”
“봐. 벌써부터 짖어대고 있지 않나?”
으르렁대는 페이샤와, 시큰둥한 레녹을 지켜보던 제니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죽이 잘 맞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