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336
약먹는 천재마법사 1336화(1336/1341)
약먹는 천재마법사 1336화
설계된 초월성(14)
“토벌전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기 전에, 난 그곳에서 그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었지.”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걸으며 레녹이 말했다.
“그가 지나온 회귀를 돌아보면서 이 도시에 어떤 인과가 엮여있는지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
“그의 기억에 의하면 이 회차…… 마지막으로 회귀한 현재의 시간선에서 아르스노바가 발칸과 직접 교류한 건 몇 번 되지 않았어.”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제니를 향해 힐끗 시선을 돌린 레녹이 말했다.
“좌승상 유성이 카이세를 만나러 왔던 그날의 기억. 그때 있었던 거래가 중앙도시와 거대도시 사이에 있었던 교류 중 하나였지.”
“…….”
“그렇다면 황성에서 카이세를 위해 준비했다는 승천유적이란 그들이 나누었던 거래의 증거. 다시 말하자면-”
“프로젝트의 실패로 인해 중앙도시가 멸망할 수 있었던 ‘계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런 셈이지.”
잠시 뜸을 들이던 레녹이, 제니의 뒤에 바짝 서 있는 페이샤를 보며 픽 웃었다.
“잠깐 못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됐군. 그렇게 똑똑한 말도 할 줄 알았던건가?”
“입 닥쳐, 견뢰.”
피처럼 붉은 창날을 강하게 움켜쥔 페이샤가 두 눈을 번들거렸다.
“제니시아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네놈과 이딴 일을 또 같이 하고 있지는 않았을테니까.”
광인처럼 번들거리는 두 눈동자와 짙은 살기.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풍겨오는 혈향.
하지만 페이샤의 모습은 토벌전이 막 끝낸 당시와는 판이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헝클어져 산발이 되어 있던 머리를 싹둑 잘라내고 빗어 내린 단발.
피와 먼지에 절어있던 넝마 대신 어두운 외투를 걸친 깔끔한 모습.
동굴에서 생활하던 야인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했다면 이런 느낌일까.
“자꾸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반.”
레녹의 옆에서 걷고 있던 제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일에 데려갈 사람을 고르자면 프로젝트나 발칸 내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애초에 승천유적이 발견된 건 수십 년 전의 일이기도 했으니까.”
“…….”
“귀희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데드라이즈 출신인 만큼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자문을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살짝 내 판단착오였던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 페이샤가 뭐라 떠들어대든 상관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걸으며 레녹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보다 난 저 살인귀를 저렇게까지 멀쩡하게 만들어놓은 게 더 신기하군. 못 본 사이에 범죄자 교화 프로그램이라도 보내둔 건가?”
“토벌전이 끝난 뒤로 귀희의 신변에 대해서도 내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거든. 일단 의식주 쪽을 신경 쓰고 있어.”
어색한 표정으로 페이샤를 돌아본 제니가 말했다.
“강요하기는 어려워서 필요한 생필품을 주고 최소한의 스케줄 관리만 부탁했는데…… 생각보다 이쪽의 말을 잘 따라주더라.”
“네 편을 들어주려고 군단에게 창을 겨누기까지 했던 살인귀다.”
레녹이 웃었다.
“네 말이라면 그런 귀찮은 부탁이라도 들어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닥쳐, 닥쳐, 닥쳐!!!”
입에 거품을 문 페이샤가 창대를 휘두르며 소리 질렀다.
“애초에 제니시아의 편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던 건 네놈이었잖냐!! 나한테 모조리 떠넘기지 마!!”
“별 의미도 없는 일에 발작하는 건 여전하군……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레녹이 걸음을 휙 돌렸다.
“토벌전이 끝난 뒤로 여러가지를 내려놓은 것 같은데, 그 반동으로 지능이 좀 높아졌다면 그것대로 나쁜 일은 아닐거다. 최소한 대화할때 짜증나는 일은 적어지겠군.”
“이 자식이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계속 참아주니까 누굴 진짜 개새끼로 알고 있는거냐……!”
“귀희의 존재가 네게 쓸데없이 방해가 되거나 거슬리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할게.”
옆에서 으르렁대는 페이샤를 무시한 제니가 조용히 말했다.
“다만, 이제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 우리들 뿐이니까. 적어도 나를 위해 싸워준 사람은 신경을 써주고 싶었어.”
“말했지만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좋다. 애초에 페이샤는…….”
말만 저렇게 시끄럽지, 따지자면 레녹에게 가장 부려먹기 편한 장기말 같은 존재였으니.
하지만 레녹은 그러한 감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말을 삼켰다.
페이샤가 제니를 따르고, 제니가 페이샤를 존중해 주는 이상 간섭할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다담이 언급한 승천유적이 그 사람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제니 역시 레녹의 반응을 눈치채고 슬쩍 말을 돌렸다.
“이번 일에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서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데? 이미 유적의 위치를 찾은 거야?”
“승천유적이라는 키워드 하나만 가지고 탐색을 진행하기엔 이 도시가 너무 넓지.”
레녹이 대답했다.
“추론과 소거법을 통해 후보지를 좁힐 수는 있겠지만, 그런 식이라면 굳이 이쪽에서 직접 할 필요는 없으니까.”
“후보지를 추려줄 만한 사람을 이미 구해두었다는 뜻이야?”
“비슷해. 유적의 위치를 알고 있을 법할 관계자를 찾아가고 있다.”
“승천유적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다기엔 정작 레녹과 제니가 걷고 있는 이 복도는 굉장히 어둡고, 광대하며 감각이 이격되어 있기까지 하다.
사람이 살고 있다기엔 터무니없이 가혹한 환경. 마치 누군가를 가두거나 벌을 주려고 격리시켜 둔 듯한 공간.
그에 대해 제니가 무언가 묻기도 전에, 어둠에 잠긴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빛의 정장을 입은 금발의 장년 남성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웃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반.”
“……헤이번 상원의원?”
시정부 중앙의회 상원의원 콘라드 헤이번. 그 옆에 서 있는 인자한 인상의 노인.
존 메이어와 함께 상원 내에서 레녹에게 호의적인 시의원이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의회 측 관계자들 중 하나다.
제니가 그를 알아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멈춰선 사이, 콘라드가 제니를 향해 힐끗 시선을 돌렸다.
“탑의 관리자님도 함께 오셨군. 이런 자리에서 뵙는 건 처음이었던가?”
“…….”
“콘라드 상원의원은 시정부의 어두운 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관계자들 중 하나다.”
떨떠름한 제니의 반응을 두고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실각당한 정치인이나 권력가, 혹은 시의회가 통제하는 많은 정보들이 그의 손을 거치고 있지. 이런 안건을 논의할 때는 적임자다.”
레녹이 콘라드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두 번째 논문 발표 당시 박람회장에서 예고된 테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레이센 상원의원이 실각당하고 멸목(滅木)의 파편에 대해 전해 들을 당시에도 그가 레녹을 안내해 주기도 했었다.
청문회 당시 레녹에게 조언을 건네거나, 토벌전 직전 전쟁을 경고해 주기도 했던 만큼 그가 어떤 분야를 관장하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바.
“제니시아 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
콘라드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견뢰의 곁에 있는 인재들 중에서도 가장 유능한 관리자라 들었지. 반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파트너라는 이야기가 자자하던데.”
“…….”
“귀하의 일처리가 워낙 악랄…… 흠흠, 철저한 것으로 명성높아 시의회 내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더구려. 시정부에선 귀하를 스카웃해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들리더군.”
“……시정부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아주 잘 알겠네요.”
헛기침을 하는 콘라드를 보며 피식 웃은 제니가 그와 짧게 악수한 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49구역의 일에 대해서라면 나중에 이야기하죠. 오늘은 그런 일을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
“그렇지. 나도 이런 자리에서까지 일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 애초에 오늘은 반의 청탁을 받고 잠시 시간을 낸 것뿐이니.”
콘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옆에 서 있는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움직이기 전에 먼저 이분부터 소개해도 괜찮을까? 러치먼 님이라고 하네. 이번 일을 도와주실 원로원의 일원이시지.”
“소문으로만 듣던 발칸의 마탑주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구려.”
러치먼이라 불린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탑주께서 출입하실 수 있도록 격벽의 관리권한을 모두 해제해두었으니, 마음 편히 일 보시길.”
“…….”
레녹이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의 신형이 격벽의 그림자 너머로 사라진다.
유령이나 허깨비처럼 느껴질 만큼 공허하면서도 텅 비어있는 듯한 묘한 기척. 원로원 소속답게 평범한 인간은 아닌 건가.
“러치먼 님은 과거 중앙의회 의장을 역임했던 전관이자, 원로원이 관장하는 금구(禁區)의 관리자이시기도 하네.”
콘라드가 레녹의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설명을 했다.
“내가 주선해 줄 안내인을 제외하면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을 유일한 관계자이니 안심해도 좋을 거야.”
“안내인이라…… 만나야 할 사람이 더 있을 줄은 몰랐네요. 헤이번 의원이 직접 안내를 맡지는 않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격벽 너머는 과거 원로원이 직접 금구로 지정하여 출입을 금한 봉쇄지역일세.”
제니의 차분한 질문에 콘라드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발칸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이자, 애초에 도시 구역에 포함되지 못할 만큼 위험한 곳이라 나 같은 평범한 시의원이 안내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야.”
“…….”
“그러지 않아도 대책위원회의 일 때문에 겨우 시간을 낸지라, 나보다 훨씬 더 적합한 안내인을 구했으니 안심하도록 하게나.”
어두운 복도를 걷다 보니 어느새 깊고도 넓은 거대한 격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연환경을 인위적인 장벽으로 가로막아선 듯한 공동.
끼익!!
걸음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바퀴 소리가 들리고, 바이크 한 대가 반대 방향에서 미끄러져 들어왔다.
라이더 자켓을 입은 비쩍 마른 체구. 헬멧을 벗어 던지는 것과 동시에 튀어나오는 뾰족한 귀.
격벽 그림자 바깥으로 걸어 나온 그녀의 시선이 레녹을 마주하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겁을 먹은 듯 움찔거리는 그 얼굴을 확인한 레녹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이름을 내뱉었다.
“레이지 미스트라.”
시스테마 아우룸의 일원이자, 8레벨의 가속능력자. 레이지 미스트라.
위성도시에서 벌어졌던 회담의 참가자이자, 아나테마의 편을 들었던 이유로 압송당한 범죄자.
차후 원로원의 주구로 이용당하며 신변이 억제당하고, 일전 개선식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던-
“승천자 다담과 같은 종족 출신이자 고위계 초월자. 원로원의 금구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으면서도 발칸 내전과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는 관계자.”
팔짱을 낀 콘라드가 웃었다.
“이번 일에서 그녀만큼 가이드를 맡아줄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 * *
“콘라드 헤이번에게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대책위원회의 일로 바쁜 콘라드가 떠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차가운 격벽의 앞.
어색한 자세로 바이크에 걸터앉은 레이지 미스트라가 힐끔 레녹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다담께서 너를 찾으셨다고, 이번 일에서 널 도와줄 생각이 있냐고 묻더라.”
“…….”
“……그래서 하겠다고 했지.”
묘하게 움츠러든 기색으로 레녹의 눈치를 살피듯 힐끔대는 미스트라의 모습.
하지만 레녹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미스트라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다.
가죽 자켓을 걸치고 바이크 헬멧을 든 모습. 움직임을 구속당하지는 않은 듯한 자유로운 태도.
“회담이 끝난 뒤로 그렇게 가혹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원로원의 일에 부려 먹히는 용도로만 사용되어 온 건가?”
“위성도시에서 날 때려눕힌 주제에 그 뒤에 있었던 일은 거의 모르는 모양이네.”
미스트라가 황당한 듯 고개를 저었다.
“원로원은 발칸의 규율을 수호하는 존재가 아니야. 나와 슬레인을 데려간 것도 회담의 일을 문책하거나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지.”
“…….”
“회담의 문제를 핑계 삼아 누구든 적당히 부려먹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을걸? 애초에 그조차도 그들이 가진 ‘시나리오’를 원활하게 가동시키기 위한 수단에 가깝지.”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꽤 오랫동안 원로원의 밑에 순순히 잡혀있는 것 같은데.”
환수종 슬레인의 주도로 위성도시에서 열렸던 극위능력자들 간의 회담.
그곳에서 부활하는 것과 동시에 6사도가 되어 날뛰었던 아르마스 폰 아나테마의 변절과 죽음까지.
당시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고, 미스트라와 슬레인이 원로원에게 압송당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개선식 전까지는 두 사람이 아직까지 원로원에게 신변이 잡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바.
하지만 미스트라는 그 사실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잠깐 머뭇거렸다.
입술을 깨물고 레녹을 바라보던 그녀가 힘겹게 대답했다.
“너…… 때문이었지.”
“무슨 뜻이지?”
“네가 회담이 끝난 이후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럴 바엔 원로원의 밑에 묶여 있는 게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
“아나테마를 죽인 뒤에도 네 마음대로 날뛰고 다녔잖아. 이 도시를 실컷 때려 부수면서. 난 그런 마법사와 두 번이나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
묘한 표정으로 레녹과 제니를 번갈아 바라본 미스트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개선식에 끌려갔다 온 뒤에야 네가 ‘아직까지는’ 멀쩡하단 사실을 알았지만.”
“말 조심해, 엘프.”
그 순간, 레녹의 옆에 앉아 있던 제니가 표정을 팍 찌푸렸다.
“회담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여기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반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거야?”
“……미안, 내가 잘못했어.”
미스트라가 움찔하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정말 더 이상 그쪽이랑 척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거야. 오늘 여기에 나온 것도 그 때문이고.”
“…….”
“근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그쪽은 내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데?”
제니의 옆에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노려보는 페이샤를 본 미스트라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물었다.
“우리, 내전에서 몇 번 마주친 것 말고는 접점도 없잖아. 애초에 난 군단 측이랑 싸워본 적이 거의 없다고.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
“……아니.”
페이샤가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견뢰 놈에게 두들겨 맞은 개새끼 같은 네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뭐?”
“자기혐오 같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내버려 둬라.”
레녹이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 비루먹은 태도에서 누군가를 비춰보고 갑자기 불쾌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원래 저런 식이니 무시해.”
“닥쳐, 닥쳐!! 이 개자식이 아까부터 자꾸 무슨 헛소리를……!!”
“레이지 미스트라. 네 처지는 대충 알겠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지. 네가 이번 일에서 안내를 맡았다는 건 이해했다.”
버튼을 눌린 것처럼 발작하는 페이샤를 무시하고 레녹이 미스트라를 향해 시선을 기울였다.
“같은 아인종 출신이라면 다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지. 그녀가 언급한 승천유적을 찾을 방법이 있겠나?”
“……아마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높은 후보들이 몇 군데 있어. 다담께서 직접 움직이셨다면 더욱 그렇지.”
미스트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서는 식물에 가까워진 뒤로 의미 없는 선택이나 행동을 거의 하지 않으시거든. 스스로 자각이 없으시더라도 미개발지구에 걸음을 하신 것 자체가, 유적지가 발칸 외곽에 있다는 뜻일 거야.”
“…….”
“금제가 풀린 다음에도 도시 안팎에서 그 흔적이나 낌새를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면 더더욱 그래. 내전 당시 상황과 엮여있으면서도 관계자들 중 누구도 이변을 감지하기 어려운 외진 금역…….”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미스트라가 격벽의 출입구 쪽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발칸 바깥에 위치한 원로원이 관리하는 금구였지.”
쿠구구궁……!!!
격벽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서 풍겨오는 비릿한 바다 내음.
아련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 너머,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 어둡고 비좁은 감옥과 격벽 너머에 존재하고 있으리라곤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해안가.
그 해안가 위에 레녹이 본 그 어떤 비행선보다도 거대한 크기를 지닌 방주가 반파된 채 쓰러져 있었다.
쿠우웅!!!!!
“……이건.”
해안가에 망가진 배가 버려져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말 그대로 반파된 전함 자체가 이 드넓은 해안가를 통째로 뒤덮고 있는 듯한 어마어마한 크기.
육안으로 보이는 길이만 해도 가히 수천 미터에 달하는, 함선이나 기함의 기준을 아득하게 초월한.
가히 하나의 산맥과도 같은 크기를 자랑하는 말도 안 되는 크기의 방주 한 척이 해안가에 떠밀려 온 듯한 모습.
꿀럭, 꿀럭…….
반파되어 망가지고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기함의 측면으로, 상처를 입은 것처럼 붉은 피가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내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자,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던 마지막 전장.”
미스트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발칸 최강의 대적자라 불리던 가가메온이 패배해 죽은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