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80
약먹는 천재마법사 380화
미련과 숙원(5)
쿠구구구구!!
무너져 내리는 미궁의 파편 사이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유섬에서 뛰쳐나와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인가.
지엘과 래퍼드, 렌스와 선명, 눈이 붉은 흡혈귀와 금발 소년을 위시한 7레벨의 성위능력자들이 각기 주시자들을 이끌고 전면에 선다.
그런 그들의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그리샤의 부축을 받은 라피스가 천천히 부유섬 아래로 내려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에게 송구스럽지만, 이 미궁에서 일어난 일은 여기서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그런 그리샤의 앞에 나선 라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승천자의 운명이 확정된 이상 항하사미궁이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은 필연. 소득 없는 난전에 힘을 빼는 대신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말없이 발락과 대모, 붕대를 감은 남자를 한 번씩 비춘다.
“그 전에 먼저 어르신들의 허락을 구하고자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린 친구가 말은 아주 청산유수군.”
발락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은 듣기 좋게 하지만, 그쪽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좀 더 과격하게 나올 테지?”
라피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발락을 조용하게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을 뿐.
대신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성위능력자들이 말없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상대가 8레벨의 괴물임을 알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이렇게 요동치는 환경, 떨어진 컨디션과 머릿수의 균형을 감안하면 승산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발락은 그런 주시자들의 면면을 쓱 둘러보고는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발치에서 숨이 끊어진 전사의 시체를 들어 올린 그가 품 안에서 꺼내든 목줄을 뒤집어씌우자, 시체가 발락의 등 뒤에 떠오른다.
비슷한 방식으로 새롭게 다섯 구의 시체를 억제구로써 다시 만들어낸 그가 허리를 편 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난 그만 손을 떼겠네.”
[이능개화전단. 이제 와서 꽁무니를 뺄 셈인가?]시커먼 안개를 줄줄 흘리는 붕대의 말에, 발락이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귀신아. 이 자리에서 서로의 영역이고 소우주고 전부 보여주며 죽을 때까지 붙어보자 이건가?”
[…….]“아니, 아니지……. 그건 상책이 아니야. 난 이런 미궁에서 밑천을 털어낼 생각은 없네. 전단을 위해서라도, 내 힘은 최대한 오랫동안 보존해야 해.”
아작난 왼쪽 팔뚝에 대충 근처에 버려진 부목을 덧댄 발락이 라피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우리를 곱게 보내주셨으면 좋겠소, 등대지기여. 내 전단의 이름을 걸고……. 이번 일에는 언젠가 보답할 것을 약속드리지.”
그제서야 상황이 애매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붕대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레녹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서 그를 몰아붙이던 세 사람 역시 전력을 다했던 것은 아니다.
각기 영역과 소우주를 전개하고 심상을 휘두른다면 이 자리에서 어느 정도 승산을 점치는 것은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붕대 자신에게도 무의미한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발락은 청의 눈이 나타나자마자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요르타의 천귀. 군령도시에서 이 이름을 대고 날 찾아와라.]붕대를 감은 남자는 서슴없이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궁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우리 수령의 앞에서 다시 하기로 하지.]두 눈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도, 생명반응이 사라지는 그 감각을 막을 수 없다.
직접 감지하고 확인하고 있음에도 점차 그 감각권에서 사라져가는 고절한 수준의 은신술.
레녹은 그것이 단순히 기척을 숨기는 수준에서 이어지는 기예가 아니라, 아예 자신의 존재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치환하는 영술의 일종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라피스 역시 천견의 눈으로 그 진가를 알아보았는지, 살짝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군령도시 요르타…… 진둔과 은원이 남아 있는 유일한 도시라 들었는데, 그곳에서 온 존재였군요.”
“저런 음침한 놈들은 출신을 뒤져보면 뻔하지.”
시큰둥하게 대꾸한 발락이 말했다.
“만귀야행의 실패에 대한 대가를 받으러 온 모양이야. 미궁의 유물을 탐낸 놈들을 죽여버릴 생각이었을까. 그런 것 치고는 생각보다 얌전히 돌아갔군…….”
그렇게 중얼거린 발락 오에돈이 꺽 트름을 했다.
“승천문 프로젝트를 내팽개친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난 이만 가보겠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정확하게 카바힘 기사단의 데인이 사라진 방향을 더듬어 걷기 시작했다.
그 역시 마지막 관문에 도달하기 직전 자운 오디스와 거래를 했던 만큼, 그래도 그를 찾기 위해 일단은 움직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호수 위를 걷는 것처럼 중력의 파문이 회오리친다.
위계를 초월한 8레벨의 초능력자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무너진 돌덩어리들을 짓밟으며 미궁 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피스는 이 자리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대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모님, 당신은?”
꿈틀거리는 거대 지네의 머리 위에 서 있던 대모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견의 아이……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자랐군.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어린아이였건만.”
그녀는 라피스의 뒤에 묵묵히 서 있는 구릿빛 피부의 주술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샤. 하릴없이 떠돌아다니던 네가 자리 잡은 곳이 거기일 줄은 몰랐구나. 그 아이가 말하는 대답이 진정으로 올바르다 믿고 있느냐?”
“정답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법이지, 노라.”
라피스의 어깨에 자신의 망토를 풀어 덮어준 그리샤가 대답했다.
서슴없이 대모의 이름을 부른 그녀가 담담한 눈빛으로 대모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저 어디에 설지 결정할 수 있을 뿐이야. 난 후회하지 않기로 했어.”
“…….”
대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그리샤를 올려다보다, 가만히 손을 휘저었을 뿐.
그 손짓에 따라 지네를 제외한 다른 두 소환수가 흐려지듯 공간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성위급 초인에 비견되는 소환수의 출현과 퇴장을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신기.
그 간단한 이적만으로도 대모의 힘이 이 자리의 어느 누구에 비교해도 꿇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결정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진둔이 남긴 유물에 장난질을 쳐두었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친히 발걸음을 했지만, 역시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라피스의 뒤에 서 있는 그리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태껏 험악한 표정만을 짓던 노파의 얼굴에 떠오른, 보기 드문 장난스러운 미소.
“내 오랜 친구가 저만한 실력의 마법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되었다. 이 미궁에서 일어난 일은 여기에 묻어두고 물러가마.”
“감사합니다, 대모님.”
“건강 조심해, 노라.”
쓴웃음을 지은 그리샤의 말. 등을 돌려세우던 대모가 멈칫거렸다.
그리샤는 그런 대모의 등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이제 너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많이 남지 않았잖아.”
“……그리샤, 네가 이상한 거야. 나처럼 시간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정상이고.”
위엄있는 말투는 잊어버린 듯한 대모의 대답. 그녀가 그리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뭐, 그래도 저 마법사를 너희가 얼마나 아끼는지 대충은 알겠네.”
“노라…….”
“내 아이들에게 웬만하면 주시자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전해둘게. 특히 에반이라는 마법사. 잘 기억해 두라고 말이야.”
쿠구구궁!!
그녀의 발밑에서 한가롭게 꿈틀대던 거대지네가 몸을 한번 크게 비틀고, 이내 부서진 미궁 잔해 사이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키에엑!!]외마디 괴성을 내지른 지네가 그대로 땅 밑을 파고들며 거대한 땅굴을 그리고 사라진다.
대모의 기척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라피스가, 차갑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일이 잘 풀려서 너무너무 다행이에요…….”
“고생했어, 라피스.”
그리샤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라피스는 그리샤가 덮어준 외투를 꼭 여미면서 다가오는 레녹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에반!”
“……일부러 노렸다고 해도 좋은 시점에 와 줬군.”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힘겹게 이벨린을 부축한 채 말했다.
“진둔의 사망을 알아차리자마자 달려온-”
“이야기는 나중에!!”
두 사람의 대화를 칼같이 끊어버린 그리샤가 주력을 확 끌어올렸다.
“다같이 돌덩이에 깔려 죽고 싶은 게 아니면 지금 탈출한다……!!”
“하늘을 난다!”
“그리샤 선장, 갑시다!”
때아닌 주시자들의 환호성을 깔끔하게 무시한 그리샤가 순식간에 막대한 주력을 때려 박아 부유섬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흙더미가 미친 듯이 떨어져 내리면서 무너지는 미궁 사방을 틀어막고, 그 잠깐의 틈을 타고 부유섬이 하늘 위로 높게 치솟았다.
후우우우웅!!
솟아오르는 부유섬의 자태와 달리 쉴 새 없이 무너지며 완전한 붕괴를 앞둔 미궁의 모습.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잔해 더미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들며 떠오른 부유섬이, 어느 순간 탁 트인 창공으로 뛰쳐나오며 굉음을 터트렸다.
콰아아앙!!
레녹은 말없이 시선을 돌려 순식간에 멀어지는 무너진 미궁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후우…….”
어딘가 뜨겁고 답답하던 미궁을 벗어나자마자, 차가우면서도 탁 트인 바깥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장엄한 형태를 유지하던 새하얀 미궁 외벽이, 끝없이 무너지면서 지하 균열 사이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
주인을 잃은 사상전역이 무너져내리며 설원을 가득 메우는 충격파를 내뿜었다.
잠깐 레녹과 같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리샤가, 곧바로 주력을 틀어 부유섬을 움직였다.
슈우우웅!!
항하사미궁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부유섬이 그대로 설원 밖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라피스가 레녹을 향해 다가와서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에반. 혹시 너무 늦었을까 봐…….”
“아니, 내 생각보다는 훨씬 빨랐다.”
레녹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됐건 혼자서라도 이벨린을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으니.”
“미궁 안에서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만큼 최대한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좀 단순무식한 방법을…….”
“단순무식하다기엔, 이 녀석이 자치령에서 마약왕을 처리할 때 똑같은 방법을 썼었잖아.”
부유섬의 방향을 조작하는데 집중하던 그리샤가 타박했다.
“부유섬을 자치령의 거주지지, 전술병기로 써먹는 물건이 아니라고.”
“아니, 훌륭했다.”
그리샤의 말을 끊은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려면 역시 체급으로 찍어누르는 게 좋지. 잘 배운 것 같군.”
“헤헤.”
“……”
살짝 뿌듯한 표정으로 웃는 라피스의 모습을, 다른 주시자들이 황당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레녹은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라피스의 판단이 굉장히 날카로웠다 생각하고 있었다.
부유섬을 그대로 들이박아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극적인 판단.
압도적인 충격량 자체로 이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을 멈춰 세운 한 수, 그 와중에 다른 주시자들을 끌어모아 전력을 최대로 부풀린 것까지.
미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피스가 이보다 더 좋은 순간과 판단을 골라잡았을 수 있었을까.
진둔의 사망을 인지하자마자 결정을 내리고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내린 판단이 더없이 기민하고 날카로웠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충격적인 등장과 서슴없는 무력시위.
8레벨의 극위능력자와 군령도시의 귀인이 별다른 충돌없이 물러간 것에 그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벨린은 괜찮아?”
다른 주시자들을 따라 부유섬에 올라탄 지엘이 레녹을 잡아주면서 물었다.
“과로로 잠깐 의식을 잃기는 했지만, 큰 외상은 없다.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영약을 먹였으니, 오래지 않아 의식을 차릴 거다.”
레녹은 그렇게 대답한 뒤, 부유섬 끄트머리 나무 등걸에 이벨린의 몸을 조심스레 눕혔다.
잠든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
코끝으로 작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만이, 이벨린이 무사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일러주고 있었다.
쿠우웅!!
한순간 찾아온 평온함을 날려버리는 거친 충격파. 부유섬의 아래쪽을 두들기는 듯한 충격에 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청의 눈이 도망치고 있다!!”
“잡아, 저만한 덩치라면 틀림없이 보물을 손에 넣은 거야!!”
“흙더미를 쏘아서 없애버려!!”
미궁 밖에서 기회를 노리던 다른 세력들이 부유섬의 모습을 보자마자 이쪽에 공세를 집중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레녹이 곧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뒤에 서 있던 라피스가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괜찮아요, 에반. 고생했으니까 좀 쉬고 있어요.”
“라피스, 하지만…….”
“이 순간을 위해서 일부러 주시자 전력을 분리해 역할을 나누어 놓았으니까요.”
라피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기회에 저희 청의 눈에 모인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
어딘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
라피스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부유섬에서 뛰어내린 주시자들이 사방에서 밀려드는 공세를 힘으로 찍어누르며 전진한다.
콰아아아앙!!
설원 밖을 벗어날 때까지는 섬의 형태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하면서도, 길을 가로막는 세력들은 정면에서 돌파해 길을 열기 시작한다.
미궁에서 한번 얼굴을 봤던 7레벨 성위능력자들 역시 힘을 보태면서 지상에 빠르게 힘을 투사하고.
움직이는 공중요새가 되어버린 부유섬이 눈밭을 낮게 부유하며 빠르게 전진했다.
레녹은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라피스의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반?”
“괜찮은 방법이 떠올라서 말이다. 한번 실험해 보는 게 낫겠군.”
레녹은 설원의 일대 풍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지상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진둔만큼은 못하겠지만…… 승천자 흉내, 이 자리에서 조금 따라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