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03
약먹는 천재마법사 503화
중간결산(4)
두 사람 모두 힘과 지성으로는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이들이지만, 레녹의 존재를 확인한 둘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흑요석 가면을 알아본 소류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고, 마이야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무시한다.
지금 레녹이 위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빅터의 신분.
마이야 렌슬릿은 레녹을 미궁에서 에반의 이름으로 마주쳤던 만큼, 빅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었다고 해도 밀림의 작전에 예의 술사가 참가했다는 정보 정도일 터.
소류 역시 레녹의 존재를 인지한 것 치고는 이내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오히려 이쪽을 돌아본 것은 네 명 중 다른 두 사람이었다.
“늙은 살인귀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그쪽이었어?”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신상의 무릎 위에 올라타 이쪽을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활동성이 강한 복장을 했지만, 레녹은 오히려 그것으로 그녀가 육체능력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저런 행색을 하고 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움직임을 크게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
술식계통. 신상에 가까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관계자겠지.
그녀가 버논과 그 뒤에 서 있는 레녹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것도 웬 이상한 손님을 하나 데려왔군. 거기 가면쟁이도 우리 쪽 사람이야?”
“사브리나, 아무렴 내가 일면식도 없는 놈을 멋대로 데려왔겠나!”
버논이 들고 있던 술병을 뒤로 홱 젖혀 레녹을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모여드는 날카로운 시선.
“밀림에서 있던 일은 대충 들었지? 우물에서 마지막 멤버로 참여했다는 그 친구다.”
술병에 남아 있는 술을 깔끔하게 비운 버논이 병을 휙 던지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하는 주위의 분위기.
“그렇군, 네가 바로 예의…….”
“굉장히 강력한 특질계 술사라고 들었는데.”
사브리나의 뒤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던 근육질의 남성이 하품을 하며 시선을 휙 돌렸다.
“흥미롭군. 좋은 상대가 되겠어.”
상반신을 완전히 탈의한 것도 모자라, 온몸에 빼곡하게 문신을 새겨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흑색의 장발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데다 신발도 제대로 신고 있지 않다. 문명의 이기를 전혀 누리지 않은 듯한 야성적인 외모.
버논이 그 말에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광대랑 같이 일해보고도 멀쩡히 살아나왔으니 자격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불만 있으면 그놈한테 물어보던가.”
“그 미친 새끼가 토커퍼즈에 눌러앉아 나오지를 않는데 누가 물어봐? 보나 마나 부작용을 관리한답시고 지랄하고 있겠지.”
“사브리나. 그가 위계를 관리하는 방식은 굉장히 섬세하고 정교한 인과조정작업의 일종이다.”
그 말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2m를 훌쩍 넘기는 마네킹에 가까운 인형.
인간의 형태를 불쾌하게 본뜬 얼굴 사이로 부품이 나뉘어 턱을 덜그럭거렸다. 인형이 턱을 삐걱거리며 중얼거렸다.
“말 한두 마디로 우습게 치부할 일은 아니지…… 어쨌거나 결국 그는 밀림의 일을 성공시키지 않았나……?”
“체비엔. 넌 그 자식이랑 같이 일해본 적도 없으면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사브리나라 불린 여자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꾸했다.
“몇 년 전에 같은 작전에 나갔다가, 지 마음대로 날뛰는 바람에 내 ‘언령주(言領柱)’ 여섯 개가 망가졌다고.”
“…….”
“행여나 같이 일할 생각이라면 적당히 몸 사리는 게 좋을 거야. 앞뒤 가리지 않는 걸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놈이니까.”
으름장을 놓듯이 사브리나가 말했지만, 이 자리에서 그 조언을 귀담아듣는 이가 오히려 적다.
소류나 마이야, 근육남은 말할 필요도 없고 버논조차 귀를 후비적대는 상황.
인형만이 내키지 않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저기 저 노친네보다 어떤 의미로는 훨씬 더 위험하거든.”
그렇게 말한 그녀가 극장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손짓했다.
철퍽……!!
그와 함께 복도 끝자락에서 들려오는, 피가 떡져서 떨어지는 듯한 불쾌한 소음.
후줄근한 행색의 노인, 혈노가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극장 안쪽이 침묵에 잠긴다.
그제서야 극장 위 십수 미터 위 조명 사이에 걸터앉아 있던 마이야가, 자리한 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시간이 됐군. 박사를 불러오지.”
그렇게 말한 마이야의 손목에서 언제 뽑았는지 알 수 없는 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석상의 바로 앞에 떨어져 내린 피 한방울이 그 자리에서 극장 바닥에 펼쳐져 자그마한 혈법진으로 화한다.
파아아앗!!
“…….”
혈노가 줄줄 흘리고 다니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단 한 방울로 그 자리에서 정교한 혈법진을 그려내는 기예.
저 멀리 떨어진 천장에서 핏방울을 떨어뜨려 법진을 완성하려면 대체 어느정도로 숙련되어야 할까.
술식전개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레녹조차 놀랄 정도로 세련되기 그지없는 혈마법.
항하사미궁의 끝, 진둔의 요람에서도 마이야는 혈마법을 통해 문을 열고 단장을 불러내지 않았던가.
엄청난 수준의 육체능력자인 것과는 별개로, 혈마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사실이 마이야 렌슬릿이라는 존재를 위험하게 만든다.
이런 상대가 아직까지 판데모니엄에 남아 힘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레녹이 느낀 것을 다른 멤버들도 다르게 느끼지는 않았겠지.
그사이 만개한 혈법진이 급격하게 수축되더니, 마치 3D 프린터를 그리듯이 솟아올라 무언가를 조형해 냈다.
끼이익……!!
기이한 소음을 내며 그 자리에서 피육을 구성하고, 하나의 생명체로 변한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크기로 살아 움직이는 새하얀 털뭉치.
꿈틀거리며 골격과 근질을 가다듬은 그것은 이내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외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좋은 밤이군. 아니, 발칸 근처는 지금 낮이던가?”
“밤이야, 박사.”
사브리나의 말에 털뭉치가 폴짝 뛰어올라 신상 위로 기어올랐다.
“그렇군. 한 달간 밖에 나간 적이 없다 보니 영 바이오리듬이 이상해서 말이지…… 그래도 공전주기는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사실 헷갈릴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박사가 낮게 웃으며 물었다.
“지난번이랑 또 얼굴이 몇 명 바뀌었군. 다들 바쁜 모양이야.”
“캉가라랑 프란셀은 죽었고, 아길론은 행방불명이다. 아마 죽었겠지.”
소류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사가 그 말에 살짝 놀란 것처럼 중얼거렸다.
“프란셀이야 그렇다쳐도, 캉가라와 아길론이…….”
“주문연맹이랑 군벌 쪽 작전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더군. 두 조직의 기강을 생각하면, 아마 지금쯤 그쪽의 실험체로 해부되고 있을 거다.”
차가운 소류의 대답에 박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일이군. 그 희귀한 능력을 생각하면 시체라도 건져오는 게 좋았을 텐데.”
“…….”
지인들의 안위보다는 능력 자체에 신경이 맞춰져 있는 건가.
하기야 그러한 무신경한 태도야 말로 이 조직에서는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조직력이나 팀워크, 화합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범죄조직.
하물며 이들이 하는 일을 생각한다면 누군가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밀림에서 있었던 작전 역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인원이 죽어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격전이었다.
“뭐,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의외인 상대는 따로 있지만 말이야.”
생각에 잠긴 레녹을 향해, 털뭉치의 시선이 정확하게 떨어져 내린다.
그 투명한 눈은 정확하게 레녹의 가면을 향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빅터. 아그네타와 광대, 프레이야 모두가 그쪽에 대해 말하더군.”
“…….”
“명의 추천을 받아 입단했다지? 개인적으로 정말 의외였어.”
“뭐가 말이지?”
“솔직히 말해서 난…… 명이 자신의 기준에 걸맞은 사람을 한 명도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거든.”
박사의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자연스럽게 레녹을 향해 모이기 시작한다.
명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인지, 박사를 불러낸 이후로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마이야까지 이곳을 지켜보는 상황.
박사는 자신이 만들어낸 묘한 분위기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레녹에게 이어서 말했다.
“자신과 타인을 같은 기준에서 놓고 바라보는 남자야. 어지간한 재능이나 규격으로는 그가 정한 선 앞에 서는 것도 어렵지. 그런 그가 단장의 허가조차 받지 않고 입단을 추천해 성사시켰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
침묵하는 레녹을 투고 털뭉치가 들썩거리며 낮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어디까지나 여흥에 그칠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 일은 참 알 수 없단 말이지…… 그토록 찾아 헤매도 나오지 않던 공간조작계 술사를 데려올 줄이야.”
박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쉴새없이 꾸물거리며 신상의 머리 위까지 기어오른다.
“결국 확률과 통계, 계산과 연구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까. 그 논리를 이해하면서도 공감해 본 적은 없었지만, 위대한 혈통에서 태어난 대마법사라면 능히 그리 생각할 만해.”
킬킬거리며 웃은 박사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 생각을 직접 이뤄내는 자격과 능력 역시 갖춘 것도 사실이고.”
“하등 쓸모없는 감상은 그쯤이면 다 끝났나?”
레녹이 팔짱을 낀 채로 박사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쪽이 명이나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크게 관심은 없는데.”
“…….”
“필요한 사전작업이 있다면 빨리 끝내주면 좋겠군. 시답잖은 제물 따위랑 오래 떠들고 싶지는 않아.”
살벌하게까지 느껴지는 레녹의 발언.
다분히 오만하다고 알려진 빅터의 성정에 맞춘 대답이지만, 여기서 그 말에 불편함이나 거슬림을 드러내는 사람 따위는 없다.
흡사 재밌다는 표정으로 레녹을 구경하는 근육질의 남자,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 인형 체비엔.
정작 그 말을 들은 박사 역시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을 뿐.
“틀린 말은 아니군. 더 타박을 듣기 전에 빨리 시작해 볼까?”
우웅……!!
박사가 올라탄 신상의 정수리를 두들기는 것과 동시에 신상의 거체가 강렬한 마력광에 휩싸여 빛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머리와 여덟 갈래 팔을 지닌 신상이 천천히 움직여 굳어 있던 자세를 천천히 바꿔 세운다.
쿠구궁……!!
두 얼굴로는 살짝 입을 벌린 표정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여덟 개의 팔은 가지런히 바닥에 내려놓아 한 자리에 도열.
마치 여기 모인 이들을 향해 준비된 것처럼 손바닥을 활짝 펼친 모양새.
고대문자가 빼곡하게 음각되어 빛나는 손바닥의 모습을 보며 레녹이 힐끗 주위를 살폈다.
레녹과 소류, 마이야와 버논. 체비엔과 사브리나. 어느새 극장 안에 들어온 혈노와 근육질의 남자까지.
이것만으로 여덟. 박사까지 합하면 아홉.
버논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 소리를 질렀다.
“박사, 이거 맞냐? 영 머릿수가 안 맞는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라, 주정뱅이. 결산이 처음인 사람을 위해서라도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다시 설명해 줄 생각이니까.”
박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신상의 머리 위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구세계의 유물을 수집하는 일은 꽤 오래전부터 진행해 왔지만, 결산 자체는 마냥 간단한 작업이 아니야.”
“무슨 뜻이지?”
“1세계와 2세계의 결말 너머에서 흘러들어온 유물들은, 이 세계의 기본적인 법칙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신상의 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술식의 원리, 인과의 균형, 기적의 양면성과 같은 근원적인 부분이 바뀐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런 본질은 암흑의 바다와 직접 엮여 있으니.”
“그렇다면?”
“예를 들자면 지금 이 세계에서 주술이라고 불리는 술식이, 과연 1세계와 2세계에서도 같은 이름과 체계 아래 존재하고 있었을까?”
다분히 간접적으로 돌려말하면서도, 일말의 진실을 건드리는 듯한 현묘한 어조.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겠지.”
박사는 대뜸 이쪽을 올려다보는 레녹을 향해 시선을 홱 돌렸다.
“빅터, 어떻지? 그쪽의 의견을 듣고 싶군.”
“…….”
“특질계 술식을 익힌 이들은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났거나, 후천적으로 특수한 환경에서 자라오며 적합한 그릇이 만들어진다고 하지.”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보며 박사가 물었다.
“자네 같은 술사들은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필터가 완전히 다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맨정신으로 공간조작을 해낸다는 건 불가능하거든.”
“직접 해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마도공학에 손을 댄 연구자들중에 그 위업을 탐낸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레녹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사가 낮게 웃었다.
“기존의 방식이나 체계로는 말도 안되는 마력소모를 감당해야해. 연비로는 최악에 가까운 공간조작계통을 직접 다루고 있다면, 결국 답은 두 가지뿐.”
막대한 마력소모를 직접 감내할 능력을 갖췄거나, 아니면 기존의 공간조작에 대한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손에 넣었거나.
박사는 레녹의 특질계 술식이 후자쪽이 아니냐고 은근히 돌려 묻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결산에 대해 설명하다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린다는 것 자체가, 박사가 레녹의 술식에 대해 얼마나 큰 흥미를 보이는지에 대한 방증.
하지만 레녹은 이 자리에서 굳이 그 주제에 대해 박사와 토론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박사가 내민 질문에 대한 정답을 곧바로 내놓을 수밖에.
“규칙의 호환성 때문이겠지.”
가면을 슬쩍 고쳐 쓰면서 레녹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구세계의 법칙은 이 세계의 것과 호환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세계의 유물들을 모아 호환성을 검증하고 비교하려는 것 아닌가?”
“……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신상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지.”
레녹이 힐끗 신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구세계의 유물이나 정보를 분석해 정보를 추출, 보존하는 방식이라면, 저런 물건을 바이루츠까지 가져다 놓아야 할 이유로는 충분할 테니까.”
그리고 판데모니엄에서 그렇게 번거로운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는 이유도, 그 일을 박사 같은 존재가 관리하고 있는 이유 역시 대충 짐작은 간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구세계의 유물이 지닌 법칙이나 체계에 대한 패턴과 일관성을 발견해 그것을 이론화시킬 수 있다면.
구세계의 유물을 찾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할 터.
그것은 단순히 구세계의 유물을 직접 생산해서 손에 넣는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다.
“이미 한 차례 결말을 지나온 구세계의 법칙을 직접 이 세계에 재현하는 것.”
레녹이 박사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 세계 안에 구세계의 모형정원을 만들기라도 할 생각인가?”
“…….”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먹잇감을 보듯, 가만히 레녹을 내려보기만 했을 뿐.
1세계와 2세계의 법칙을 수집해서, 그 법칙으로 만들어진 모형정원을 구현.
그렇게 이 세계의 어딘가에 구세계의 일부를 직접 재현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면.
지금 이 중간결산이 이렇게 체계적이고 밀도 높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참동안 레녹을 흥미롭게 내려다보던 박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다.
“굉장히 흥미로운 발상이지만 정답은 아니다.”
박사가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네 말은 어떤 의미로 보자면 핵심을 찌르고 있지만, 지나치게 비효율적이고 무모하지.”
“위험하다고?”
“하지만 마냥 틀렸다는 건 아니야. 그것 역시 어떻게 보자면 이 장구한 계획의 목적들 중 하나니까.”
레녹의 가면 너머로 빛나는 안광과, 박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때론 상대방의 승리를 막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다면 어떨까?”
“…….”
“단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대비하려 하고 있지. 때로는 그 남자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야.”
입을 다문 레녹을 대신해서 박사가 조용히 웃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싶어서 지금까지 손을 빌려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박사, 아까부터 무슨 선문답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레녹과 박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브리나가 표정을 확 찌푸렸다.
옆에서 그 대화를 지켜보던 다른 이들 역시 하나둘씩 의견을 보탰다.
“빅터한테 결산에 대해 설명해 줄 거 아니면 빨리 시작하자고, 왜 갑자기 퀴즈를 내고 있어?”
“동의한다. 결산의 최종목적에 대해서는 애초에 설명할 수도, 납득시킬 수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른 멤버들의 불만스러운 말에 박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이만큼 심도 있는 질문이 들어올 줄은 몰랐으니까.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군. 본론으로 들어가지.”
우웅!!
하늘을 바라보고 누운 여덟개의 손바닥 사이로 음각된 고대문자의 빛이 천천히 희미해지며, 조용하게 가라앉는다.
“빅터의 말대로 오늘 이 자리는 그간의 성과를 결산하는 자리이자, 구세계의 법칙 호환성을 검증하기 위함이다.”
박사가 말했다.
“이 신상은 구세계의 법칙을 유물에서 추출해, 그에 대한 인과를 정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
“…….”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세계의 인과가 조정되는 현상 자체를 관측해서, 그 오차범위를 좁혀 구현률을 높이기 위한 작업이지만……. 이쪽 분야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설명해 봤자 이해하지는 못할 거다.”
“쉽게 가자고. 저번처럼 구세계의 유물을 신상에 올려놓으면 된다는 거잖아?”
“엄밀히 말하면 유물만은 아니다. 구세계의 법칙과 관련된 정보라도 상관없지.”
버논의 말에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상에 해당 데이터를 입력하면 자체적으로 인과의 변동성을 판단해, 그것이 어느 세계의 법칙과 관련이 있는지 판단을 내릴 거다.”
유물이 아니라 정보나 실마리라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는 말인가.
“인과 변동성에 대한 이야기는 뭐지?”
“너희들이 가져온 성과가 그간의 결산을 통해 모집된 법칙의 호환성에서 얼마나 벗어난 데이터인지. 구세계에서 얼마나 특별하고 강력한 인과였는지를 확인하는 거다.”
박사가 그렇게 말하며 털뭉치를 꾸물거리더니, 이내 허공에 마력을 퉤 뱉었다.
어두운 극장의 상공에 길쭉하게 떠오른 마력의 실선. 수평으로 떠오른 선이 마치 심박수 그래프처럼 크게 요동친다.
“쉽게 말하자면 ‘세상의 결과값을 얼마나 많이 바꾸었던 정보인가’. 이 정도를 모집 데이터 평균치와 비교해서 변동성의 절댓값을 측정하는 셈이지.”
“……전혀 쉽지 않은데.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 맞나?”
상반신을 문신으로 뒤덮은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릴 정도로 박사의 설명은 난해하기 그지없다.
레녹 역시 인과의 개념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 만큼, 박사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만 짐작할 수 있었을 뿐.
박사도 그런 반응에 익숙했는지, 굳이 여기서 더 설명하지 않았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한 번 보여주는 것보다 못하겠지. 잘 봐라.”
신상의 정수리를 탁탁 두들긴 박사가, 느닷없이 마력을 실은 전성 한마디를 토해냈다.
[생명이 맞이할 수 있었던 결말은 본디 죽음을 제외하고도 세 가지 방법이 더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레녹이 멈칫하며 시선을 들어올린 그 순간.
그 말을 받아들인 신상의 눈동자가 그 자리에서 천천히 뜨이기 시작했다.
키이잉……!!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며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감청색의 눈동자.
도합 네 개의 눈동자가 반개한 채로 극장의 너른 관객석을 비추는 모습.
박사는 그런 신상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말을 이었다.
“이렇게 측정된 인과의 변동성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신상의 눈이 차례대로 뜨일 거다.”
“…….”
“지금 예시는 중요도에 비해 변동성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이미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고……. 일반적으로 변동성이 클수록 중요한 정보인 경향이 높지.”
신상에 자리한 두 개의 얼굴. 얼굴마다 다섯 개의 눈이 자리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두 합해 열 개의 눈동자.
눈동자가 몇 겹 뜨이느냐를 통해서 얼마나 중요한 유물이나 정보를 가져왔는지 확인하겠다는 말인가.
“당연하지만 얼마나 변동성이 큰 성과를 가져왔느냐에 따라, 그만한 대가를 정산받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박사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신상의 눈동자가 다시 천천히 감기기 시작하고.
가지런히 바닥에 도열한 신상의 여덟 갈래 손바닥이 나즈막히 꿈틀거렸다.
“그럼 지금부터 결산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