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Bush's Great America RAW novel - Chapter (192)
조지 부시의 위대한 미국-191화(192/377)
< 191화 >
“세상이 어둡다. 어두워.”
미국에서 저격수 존 도라고 불리는 노인은 프랑스의 한 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본디 독일로 가려고 했으나, 수술을 집도할 담당의에게 불행한 사태가 닥쳐오는 바람에 현지에서 긴급하게 물색한 결과 저명한 외과의 한 명과 접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비행기 납치 사건이 벌어졌는데, 덕분에 전 지구급 대규모 군사 작전이 벌어졌다던가. 이상한 바이러스가 창궐해서 라트비아의 대도시 리가가 완전히 망가졌다던가, 그 바이러스를 박멸하겠다고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가 두 팔 걷고 나섰다던가.
사람들은 지금 시대를 중세 이후로 제2의 암흑기니, 바이러스가 신벌이니 웃기지도 않는 말들을 지껄이면서 세상이 곧 멸망할 것처럼 가십거리 삼아 왁자지껄 떠벌리고 있지만, 기도 차지 않는다. 노인이 생각하기엔 지금 세상은 한참 황금기였다. 인류 역사에 다시 없을 황금기 말이다.
“불을 켜드릴까요?”
노인의 혼잣말에 반응한 여성 간호사가 성심성의껏 응대했다. 갈색 머리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아니, 이대로면 좋겠소. 늙으니 빛을 오래 보고 있으면 불편해서.”
말이 끝나자 기침이 제멋대로 나왔는데, 그것만으로도 허리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노인의 몸을 지배했다. 그러나 고통이 신체를 지배할 수는 있어도 노인의 강철과도 같은 의지는 종속할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누비면서 많은 교훈을 배워왔고, 몸에는 남에게 보여주지 못할 훈장이 그려졌다.
좀 젊었을 적이면 모를까, 통달하고 완숙하여 삶에 제법 초연한 자세를 가지게 된 노인에게 고통은 그저 신체의 자극에 불과했다.
‘그래도 삶에 미련이 있으니 여기로 찾아왔겠지.’
삶을 유지하려는 것은 생명체가 가지는 당연한 자세이자 본능이다. 어렸을 적에는 지천명을 넘어가면 의지가 본능을 넘어설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더라. 의지는 본능을 극복할 수 없고, 본능은 의지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둘은 하나이자 여럿이니···.’
다시 한 번 기침이 올라왔다. 통증이 전신에 느릿하게 흐르고, 흐릿하게 변해가는 자아가 형태를 갖췄다.
‘나도 나이를 처먹으니 개소리가 제법 늘었군.’
“될 수 있으면 저 커튼도 쳐주면 고맙겠소만.”
프랑스 태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유창한 프랑스어에 간호사는 짐짓 놀란 눈치였다.
“프랑스어가 굉장히 유창하시군요.”
“음,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럴만한 일이 많이 있었다. 아직도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럼 혹시 영어도 할 수 있으신가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영국 억양의 영어였다. 애당초 영어는 영국이 원조인 만큼 영국 억양이라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어쨌든 오늘날에는 어딘가 영어임을 알리려고 할 땐 성조기와 유니언 플래그를 병용할 정도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영어를 들은 노인은 무언가 일이 꼬였음을 직감했다.
“자네 간호사 아니지?”
“아뇨. 간호사는 맞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린 간호사 명찰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노인이 저것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알 방도는 없었다.
“취업한 지 이제 이틀이지만, 간호사는 간호사죠.”
그렇게 말한 그녀는 키득거렸다. 그리고 ‘다중직업종사자이긴 하지만요.’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국식 영어라는 점에서 저 간호사의 정체를 비밀정보부 소속으로 유추할 법도 했지만, 노인은 영국 소속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노인의 경험에 따른 편견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만약 영국놈들이었으면 지금쯤 납치해서 영국 지하 어딘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인의 안에서 영국인은 대영제국 시절에 멈춰있었다. 오만하고 방자하며 세상 모든 것이 자신들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아는 인간들의 집합체. 인종이 다르면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을 희생하는 인간들.
“그래, 이 보잘것없는 앉은뱅이 노인에게 무슨 일인가?”
노인의 입에서 나온 건 중동억양이 강하게 묻어나는 영어였다. 현지어와 거의 차이가 없는 프랑스어보다는 떨어졌지만,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행이군요. 사실 아랍어는 별로 자신이 없어서.”
“나는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자네가 진짜 간호사라면 지금이야말로 진정 간호사다운 일을 할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 올려 문을 삿대질했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 들어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요? 원래는 독일 쪽이라서 독일에 있었는데, 갑자기 프랑스로 바뀌는 바람에 난감했단 말이에요. 긴급하게 신입이 필요해서 망정이지.”
“본론만 말해.”
“저희랑 협력해보실 생각 없으세요?”
“누구인지부터 밝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나는 영국놈들이랑 일 안 해.”
영국인이라는 말에 웃는 인상에 금이 갔다.
“지금 확실히 해두겠는데, 전 아일랜드인에요. 망할 잉글랜드가 아니라.”
그녀는 명백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본래부터 성질을 잘 감출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작은 도발에 흥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 상사는 영국인이 아니라서요.”
“흥, 아이리시나 브리티시나 내 입장에선 거기서 거기야. 그래서 그 아일랜드인이 나한테는 무슨 용건이지?”
“미국과 함께해보시지 않겠습니까?”
“CIA로군. 미국인이라. 내 인생에 한 번도 없었던 인종인데.”
그녀는 자신의 국적이 영국이라는 것을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 양반하고 말하고 있으면 어째선지 자신의 인적사항을 넘어 기밀까지 모조리 떠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 접선에 저희 CIA가 쓰인 건 이게 비공식적인 접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독일에 갔다가 프랑스로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대통령 탓이고 말이다. 해외여행 한 번 하나 했더니, 무슨 워킹홀리데이도 아니고 팔자에 없는 간호사 일만 죽어라 했다. 덕분에 전문지식의 폭이 살짝 늘어나긴 했지만, 그럴 바에는 그냥 고향에 있는 바(BAR)에서 칵테일이나 더 마시고 말지.
“난 너희 같은 인종을 아주 잘 알고 있지. Give&Take. 나는 네놈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너희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 그리고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내가 원하는 건 네놈들이 가진 것 중에 하나도 없어. 알아들었으면 좀 나가주겠나?”
그녀는 노인의 항의를 무시하고 그녀가 해야 할 걸 하기로 했다. 그녀는 의사들이 들고 다니는 코르크 보드 위에 있는 정보들을 읊기 시작했다.
“본명 미상. 가족 없음. 참전 전쟁 다수. 모든 전쟁에서 저격수로 활동. 모든 활동은 비공식으로 움직임. 돈이나 명예는 중시하지 않음. 몇몇 정치인 암살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한 의혹 있음.”
“꽤 자세하게 알고 있군.”
노인은 두 눈을 감고 자신의 과거를 회고했다. 가장 첫 번째 기억은 처음으로 손에 총을 쥐었을 때였다.
‘내가 처음으로 사용했던 소총은 암시장에서 구한 르벨 소총이었다. 프랑스제였지. 개머리판에는 금이 가 있었고 총열은 미묘하게 휘어 있었다. 그땐 내 조국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책임을 물고 그로 인해 갈가리 찢겨 져 있을 때였다. 나라 자체가 해체된 것은 아니었지만,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바스에는 거만한 프랑스인들이 자리 잡았고 그렇지 않아도 패전의 여파로 혼돈과 혼란이 지배하고 있었던 터키에는 암운이 드리웠다. 멸망의 그림자가 정부의 통제를 넘어서 국민에게도 타오르는 월성기(月星旗)가 눈에 선하게 그려질 무렵이었다.
청년의 첫 전장은 조국의 독립전쟁. 그중에서도 안텝 전쟁이었다. 남부 전선에서 손질조차 되지 않은 고물 총으로 프랑스 군인 다섯 명을 죽였을 때 농사일이나 도우며 집에서 빈둥거리던 청년은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재능과 운명을 드디어 발견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중세시대에서나 쓰일 법한 아쿼버스(Arquebus)부터 프랑스 군인으로부터 빼앗은 최신식 르벨 소총까지 실로 다종다양한 총기를 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청년은 가장 빼어난 무장수준을 자랑했다. 노획한 르벨 소총과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모를 독일제 MP18을 들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공식적으로 수백 명을 학살했다.
다른 사람들은 조국을 위해서 혹은 아르메니아 민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참전했지만, 청년을 전쟁터로 잡아 이끈 것은 묵직한 방아쇠에서 나오는 압력과 양손에 배어든 비릿한 화약 냄새였다. 그는 천박하게도 살인행위에서 쾌감을 느끼는 천성을 지니고 있었다.
노년에 들어선 회의감이 들었는지 쾌감을 더는 느끼지 않게 되었지만, 사람 죽이는 건 여전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온갖 전쟁을 누비고 다녔다. 비록 살인에서 쾌감을 느끼긴 했으나 신께서 내려주신 재능과 이 뒤틀린 쾌감을 그래도 제법 올바른 곳에 썼다고 자부했다.
그는 이 기나긴 세월 동안 전쟁 범죄 한 번 저질러 본 적이 없으며, PTSD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서이라크의 자택에서 노인을 간호하던 이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늘고 늘어 노인의 삶은 풍족하지는 않을지언정 충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다시 돌이켜보아도 정말이지 충실한 삶이었다.
“중요한 건 여기부터죠.”
그녀는 코르크 보드에 붙어 있는 서류를 1장 뒤로 넘겼다. 아주 작은 폰트로 빽빽하게 영어로 노인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는 게 눈에 띄었는데,
“그렇게 양지로 나오는 일 없다가 돌연 신인 정치가 유세를 도움. 대가로 다음 선거에 출마할 자격과 뒷배를 얻음.”
“잘도 거기까지 조사했군.”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라본 듯한 철두철미함에 노인은 혀를 내둘렀다. 이야기는 별로 길지 않았지만, 핵심만은 정확히 짚어냈다.
“왜죠? 갑자기 양지로 나온 이유가?”
“이 허리를 고치기 위해서라고 하면 믿겠나?”
“아니요.”
“서운하구먼. 진짜인데.”
이것만큼은 진짜였기에 오로지 실소를 머금고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 할 말이 남았나? 예로부터 외척의 도움을 받아 흥한 나라는 외척의 힘으로 망하고 말지. 미안하지만 나는 그 전철을 밟을 생각이 없다네.”
“어차피 서이라크 정계는 이미 EU판인데요?”
서이라크 정계가 EU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괴뢰국이나 다름없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사실 그전에는 정계 자체가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기도 했고, 그 편린이 정신 나갈 정도의 인플레이션과 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높은 세금 책정 문제였다. 실제로 국회의원 중에는 제대로 된 교육이라곤 하나도 받지 못한 문맹도 있었고 절대로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강경파도 얼마든지 있었다.
“글쎄. 꼭 그렇지만도 않을걸.”
“뭐, 일단은 마저 들어보시죠. 썩 그렇게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좋다. 하지만 네 말이 끝나는 즉시 이 방에서 나가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