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Bush's Great America RAW novel - Chapter (291)
조지 부시의 위대한 미국-290화(291/377)
< 290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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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길었던 서이라크 전쟁이 끝났다.
종전 직전까지 SAS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서이라크 대통령은 작전지역에서 SAS 대원 둘과 함께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쿠데타의 중심이자 이번 전쟁의 주축인 아바스 대령은 격전 끝에 결국 구속되었다.
아바스 대령은 전범 재판에서 목적 달성에 유럽 연합을 실컷 비웃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서 유럽은 유럽 나름대로, 서이라크는 서이라크 나름대로 각자 잃은 것과 얻어 가는 것이 있었다.
유럽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전투에서는 이겼으되 전쟁에서는 진 꼴이 되었다. 전쟁의 본질은 유럽 연합 지배에 대한 반발이었고, 서이라크 군부. 정확히는 아바스 대령의 목적 또한 유럽 연합의 영향력으로부터의 탈피였다.
그렇기에 전쟁이 났다는 것만으로도 회원국 각국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으며, 아들이나 아버지를 잃게 된 가정에서는 그것이 더욱 도드라졌다. 서이라크를 전진기지 삼아서 장차 중동 전체에 천천히 EU의 영향력을 뿌리내리게 하려던 계획은 완전히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이라크는 진정한 의미에서 완벽한 자주국으로서 독립했다. 단지 이것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 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서이라크 내에서 다소 이견이 있었다. 조국으로부터 외세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맞지만, 서이라크의 산업과 경제를 지탱하고 있던 기업이 전부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전쟁통인지라 실물 자산이 외국으로 빠져나가진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대부분 빠져나갔다. 전쟁의 여파로 민간인이나 외국인이 죽었을지언정,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통합군의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전범 재판받고 감방 가기 싫어서였고, 서이라크군의 경우에는 민간인을 잘못 건들면 여론이 등을 돌릴까 두려워서였다. 그나마 여파로 가장 많이 죽은 것을 구태여 꼽으라면 미군의 토마호크 세례일 정도였다. 어쨌든 여러 가지로 복잡한 전쟁이었다.
미국이 이 전쟁에서 얻은 것은 아직 명확한 게 없었다. 실전이라고 해 봤자 기껏 하루 이틀짜리 데이터였고, 잃은 것은 109기의 무인기와 900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이었다.
‘다른 나라는 사실관계가 명확한데, 미국만 모호하단 말이야.’
탁탁.
그는 신문사 사무실에서 키보드의 ‘a’만을 메트로놈처럼 연타해 대며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이 경우 구태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상황’을 추측하면 다음과 같지.”
이를테면 조만간 유럽과 붙어 있는 곳.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에서 전쟁이 난다거나, 그것조차 아니면 이번에는 미국 주도로 중동에서 전쟁을 치러야 한다거나. 그것조차 아니면 혹시 남미나 아시아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남극이나 북극은 아니겠지.
만약 얻은 이득으로 수행해야 할 게 전쟁이 아니라면, 기자 나부랭이 따위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정치적인 무언가가 있었으리라. 아니, 필시 그러할 터였다.
어디 수십억 달러를 날리는 일이 동맹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립되겠는가? 그렇다고 꺾인 EU의 자존심 하나로 삭치기에는 미묘했다. 최근 들어 미국이 여기저기 패권 확보 및 유지에 쓰일 영향력 심는답시고 돈 뿌리고 다닌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왜 전쟁이어야만 하는가?’
역발상. 그것이 추리의 기본이었다. 그는 애당초 현 행정부가, 더 나아가 현 대통령이 노리는 것이 ‘어떠한 전쟁’이라는 가정 아래에 새로운 사고의 지평선을 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현 대통령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던가? 그야 적국이 어떤 나라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공통점은 있을 터였다. 무조건은 아니어도 보편적인 공통점은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민하니 금세 답이 나왔다.
‘지지율인가.’
재선이 확정되고 자연스럽게 지지율은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려 가고 있었다. 이 자연스러운 현상은 개헌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 대통령에게 이보다 껄끄럽게 보일 수 없을 정도였을 터였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국민의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대충 정의로운 전쟁으로 포장하면, 아주 잠깐이지만 급상승하게 되리라.
그렇지 않아도 유일의 3선 대통령도 다름 아닌 전시를 명목으로 3선을 기어코 밀어붙인 전례도 있고 하니, 마침 상황이 딱 들어맞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헌법을 건드리기 위해서 간을 보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인데, 이상하리만치 소식이 없군.’
원래 이런 건 대놓고 드러내 놓는데, 이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좀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심지어 수정 헌법 22조에는 마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 현 대통령을 관찰하는 사람들로 하여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아니라 무대나 할리우드에서 배우를 했어도 대성했으리라. 어쩌면 국민 자신의 의지로 3선을 떠먹여 주길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공공연하게 3선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정치인도 있는 마당에 국민이 작정하면 뭔들 못 하겠는가?
“이런 젠장. 이래서야 음모론이랑 다를 게 없잖아.”
예전이라면 이미 써먹었을 만한 자극적인 기삿거리에 잠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제 황색 언론은 반쯤 죽은 좀비나 다름없었다. 현 대통령이 재임하면서 언론의 숨통도 같이 트였는데, 황색 언론은 반드시 황색 언론이라는 사실을 대문짝만하게 명시해야만 했다.
그리고 가짜 뉴스를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러한 뉴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이 철저히 결여되어 있었던 탓인데, 이러한 부류의 뉴스에서 나오는 수익은 예전의 반의반만도 못 했다.
대신 실제로 일어난 일 중에 좀 자극적이다 싶으면 무슨 찻물에 사골 우리듯 새로운 가십거리가 생길 때까지 우리고 또 우려먹었다. 실로 언론의 암흑기였다.
정작 정부에서는 미국 언론이 가장 깨끗한 시기라면서 자화자찬하고 있었지만, 기자들이 느끼기는 바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이게 나라냐?’였다.
‘깨끗은 얼어 죽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언론의 가장 기본인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았는데, 이딴 게 무슨 언론이란 말인가. 자유와 방종은 구분되어야 한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설령 더 많은 가짜 뉴스가 만들어져서 보는 사람마다 현혹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유는 지켜져야만 했다. 그것이 언론의 본질인 탓이다. 기자들의 주장은 다소 어처구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미국 역사상 지금만큼 권언유착이 이뤄진 적도 없었다.
현 정부는 언론을 탄압하여 가짜 뉴스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왜곡이 생겨날 여지를 제거하면서 잠정적으로 여론을 장악했다. 지금 언론에서 나오고 있는 재미없는 뉴스는 대부분이 전부 편집되지 않은 진실이었다.
반대로 말해서 정부가 언론 조작을 시도할 경우, 이미 진실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대중에게 정부의 목소리는 내용이 어떻든 조작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참이었다. 그렇기에 기자들은 차라리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래저래 증거를 모아서 때를 기다리다가 터뜨리면, 이 야만적이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탄압도 끝을 보리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물론 자유와 방종에 선을 그은 장본인인 대통령이 이 개소리를 듣는다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기자들을 직접 잡아서 찢어 죽이려 할 터였다. 게다가 왜곡이 아니더라도 여론은 조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보화 시대에 언론 조작의 기본은 ‘던져 주기’였던 탓이다. 있는 사실을 조금만 강한 단어로 치환해서 던져 주기만 해도 알아서 서로 물고 뜯는다. 이 시대의 언론은 과거와는 달리 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요즘 갑자기 부흥하고 있다는 SNS만 봐도 이 사실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했다. 가짜 뉴스니 황색 언론이니 하는 것은 대부분 SNS로 유입되었다. SNS에서 개인이 올린 것은 뉴스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견이었기 때문에, 이는 정부도 쉬이 건들지 못하고 있었다.
언론이야 어찌 되었든. 이게 개인의 영역까지 침범하게 되는 순간 진실로 ‘자유의 나라’의 종말을 의미함이었고, 동시에 이는 이 나라가 진정으로 빅 브라더의 품 안에 안기는 순간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골목마다 촘촘하게 설치되고 있는 CCTV를 보면 아마도 조만간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확 늘어난 CCTV와 경찰력의 효과는 확실히 있긴 있었다. 덕분에 날마다 범죄율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국가 제일 가치인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얻어지는 안보에 의미는 있을까 싶었다.
질서인가, 자유인가?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유를 어디까지 희생해야만 하는가? 자유를 희생해서 얻어지는 안전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정작 헌법에 적혀 있는 자유에 대한 보장은 이미 몇 번이고 어그러지고 있지 아니한가?
그야말로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고작 해 봐야 기자 나부랭이 하나가 수천 년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갑론을박에 대한 대답을 딱 하고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의회에서 상원의원하고 있지, 고작 이런 중소 신문 회사에서 기자를 하고 있겠는가?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앞으로 내 생활이 어떻게 변할지 전혀 모르겠군.’
그를 괴롭히는 것은 전적으로 전자였지만,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건 대부분 후자였다. 국민은 여론이고 나발이고 당장 자신의 생활수준에 의해 정부에 대한 친근감과 반감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TV에 나오는 새로 제정되고 개정되는 정책이니 법률이니 하는 것들에 시위하는 것인데, 당연히 세상만사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탓에 이것들이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정치의 정의는 지지도를 의미했다. 그런데 기자씩이나 되니까 관심이라도 있는 거지. 중산층이나 빈민층은 그딴 거 없고 그냥 국가가 돈만 많이 벌게 해 주면 장땡이었다.
자본주의의 나라에서 돈 싫어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 있었고, 특히 화이트 푸어 같은 이들은 남부에 몰려 있었다.
단지 대통령의 출신 성분이 성분인지라 이것저것 남부에 집중되고 있었으며, 특히 칡 제거 작전으로부터 시작된 대화재로 인해서 국제사회의 주목도 제법 받고 기부도 적당히 받은 덕분에 여기저기 개선되고 있긴 했다.
‘앞으로 내가 사는 남부에는 별일이 없기를. 내 생활에 극적인 변화가 오기를. 언론이 자유를 되찾는 날이 오기를.’
그렇게 온점을 찍음으로써 한편의 기삿거리가 완성되었다.
‘하긴 현 언론을 비판하면서 그 언론에 아직도 붙들려 펜조차 꺾지 않은 사람이 월급 꼬박꼬박 타 먹으면서 자조하고 있으니 웃기긴 하군.’
시간은 흘러 이윽고 드디어 8월.
미국의 부드러운 배, 남부 해안에 허리케인 카트리나. 그녀가 다가왔다.
원 역사보다 10일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