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Bush's Great America RAW novel - Chapter (61)
조지 부시의 위대한 미국-60화(61/377)
< 60편 >
‘이거 원래 2003년에 터질 논란 아니었나?’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논란은 1993년에 ‘에반 챈들러’를 공갈로 고소하면서 시작된다. 에반 챈들러는 자신의 의붓아들 ‘조단 챈들러’를 성폭행했다는 이유로 마이클 잭슨에게 2천 달러의 합의금을 요구했고 마이클 잭슨은 에반 챈들러를 고소했다.
물론 돈을 목적으로 한 새빨간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증거불충분으로 마이클 잭슨은 당연히 무죄 판결이 난다.
마이클 잭슨은 당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친구라고 생각했던 조단 챈들러가 거짓을 진술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조단 챈들러는 부모님에게 거짓 진술을 강요받았다는 점에서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첫 번째 논란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마이클 잭슨은 10년 뒤 다시 한번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2000년 당시에 마이클 잭슨이 ‘개빈 아르비조’라는 소년을 찾아가면서 두 번째 논란이 불타오르게 된다.
저번에는 가족이 말썽이었다면, 이번에는 언론이 말썽이었다. 2002년에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이 다큐멘터리를 편집할 때 마이클과 개빈을 원조교제 사이처럼 악의적으로 편집. 아니, 편집을 넘어서 아예 단어 사이를 짜깁기하여 창조까지 하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다만 이후 개빈 가족이 돈에 혹하기라도 했는지 말을 바꿔 성추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또한 93년도 사건처럼 사실무근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논란은 그가 머레이 박사의 약물 과다 투여 사고로 사망하는 2009년 이후에도 쭉 계속되어왔고 10년이 지난 2019년도에서조차 새로운 논란거리를 만들어왔다.
‘역사가 바뀌고 있군. 내가 모르는 방향으로. …인가.’
김갑환이던 시절에 읽었던 대체 역사 소설에서 나온 문구였다. 참으로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이보다 적절한 문구도 없었다. 이번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논란이 김갑환이 알고 있던 역사에서처럼 가짜 다큐멘터리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운명이라는 게 존재라도 하는 건가?’
부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장르는 달랐으나 등장인물이 같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똑같이 개빈 가족이었고,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논란 매체를 만든 사람은 똑같이 마틴 바셔였다. 다만 이번에는 매체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마이클 잭슨의 발언과 개리 가족의 증언을 짜깁기한 ‘악의적인 편집 동영상’이었을 뿐이었다.
「제가 아는 마이클은 결단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경찰은 이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며, 이후 조사로 인해 죄가 입증되는 쪽이 누구든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무고죄를 비롯한 적용할 수 있는 죄를 모조리 박아넣어 최대형량까지 적용하겠다는 소리였다.
이렇듯 사건의 전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던 부시는 바로 극대노하여 마이클 잭슨을 옹호했다.
그러나 진짜로 화가 난 건 마틴 바셔의 저질스러운 편집 동영상이 아니라, 자극적인 가십거리만 나오면 진실은 판단하지 않고 일단 질릴 때까지 사골을 끓여 물고 뜯는 이 나라의 언론이었다. 물론 마틴 바셔에 대해서 화가 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언론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대통령님. 폭스를 제외하고 대통령님께서 하신 마이클 잭슨 옹호 발언으로 기사와 뉴스가 물밀 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몇몇 언론은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과감하게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문구로 부시 대통령의 섣부른 발언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미 알고 한 발언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무감각했다.
다만 부시로서도 의외였던 점은 김갑환이 알고 있던 역사에서보다 수천 배나 많은 수의 마이클 잭슨 옹호론자가 생겨났다는 점이었다. 애당초 마이클 잭슨은 흑인 예수라 불릴 정도로 충실한 콘크리트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지도가 85%가 넘는 대통령이 옹호하고 나니까 일종의 면죄부처럼 작용하게 된 것이다.
9월 11일 이후로 뉴올리언스 제방 재건이나 공공주택 지역 재개발 약속, 재난과 소방 예산 확충 등 묘할 정도로 친서민적인 정책을 펼친 부시의 약발은 죽여줬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드라지는 건 겁이 없다는 점이었는데, 언뜻 보면 무례하게 보일지 몰라도 일부 무리에겐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텍사스에서 거의 폭동 수준의 지지 반응이 있었는데, 이는 텍사스 지방이 극심한 마초 주의자의 천국이었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시면 샌님 소리를 듣고 남자가 애를 보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믿는 인종들이었는데, 매번 외교에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부시는 거의 현실적인 타협 수준에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지도자였던 셈이다. 덕분에 거의 숭배 수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언론은 이러한 내용을 다루며 국민의 눈을 가리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리고 이것만큼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중립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 직접 움직였으니까.
“그런데 니들이 할 말은 아니지.”
그러시단다.
“다소 경솔한 처신이었습니다.”
‘하긴 모르는 상태에서 옹호하면 주변이 의아해하긴 하겠지. 그런데 결국 죄다 중상모략이었고 무죄였잖아.’
“나는 미국이 법치국가인 만큼 내 기분에 따라서 개인의 판결까지 좌지우지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저 버러지 같은 언론은 좀 화가 나는군.”
미국의 언론은 언제나 이익 창출과 흥미에 편향되어 있었다. 특히나 거대 언론사의 뉴스 독점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복합적으로 부시가 당장에 마음을 먹었다면, 모든 행정부를 움직여서 재판 자체를 무산시켜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엄연히 위법행위였기 탓에 그리하지 않았다. 단일 행정부론을 근거 삼아 합법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후일 뒷맛이 좋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나 혼자만 ‘와! 잘했다!’하고 땡 치고 내려오면 끝이 아닌 자리다. 후임 대통령이 이를 악용하리라는 전재까지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하는 자리였다.
“그들이 나하고 싸우고 싶어 하는 모양이지?”
“알고 계시겠지만, 언론을 건드리면 지지율이 바닥까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비서실장. 언론이 무섭나?”
“예, 무섭습니다. 무척이나.”
매번 부시의 기분에 맞춰주던 비서실장은 이번만큼은 가감 없이 자신의 의사를 표출했다. 21세기의 언론이란 곧 국민의 목소리였고, 이는 정치인이 항상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언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은 언제나 몰락했다.
비서실장도 결국엔 명예욕을 쫓아 이 자리에 앉은 사람이었던 만큼 언론이 두렵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렇군. 나는 말이지. 하나도 두렵지 않아.”
부시는 코웃음 쳤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은 뭐 두렵지 않은 일들인 줄 아는가? 어제는 제 몸 아까워서 한 번이라도 사린 적이 있던가? 허, 집어치우라지.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즐긴 적은 있어도 지키려고 했던 적은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 돈 때문에 억울한 사람을 만드는 ‘그딴 국가’ 따위 없어도 좋아.”
그 말을 들은 비서실장의 입안에 사막이 도래했다. 침을 삼키면 삼키는 대로 혀가 황무지처럼 쩍쩍 갈라졌고, 위장으로 들어간 침은 마치 태양을 삼키는 듯 괴로울 정도로 뜨거웠다. 과다한 스트레스를 받은 몸이 드디어 이상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땐 농담이라 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못 들었다고 하더니 잘만 들었군.”
비서실장은 속으로 깊게 탄식했다. 그의 뇌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임계점에 닿은 팝콘처럼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다.
“국가는 개념과 싸울 수 없다고 하더니, 이젠 개념 그 자체와 싸우려 하고 계시군요.”
오, 신이시여.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단 말인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을 때 거절해야 했다. 나 같이 죽는 거 아니야? 등 오만가지 생각이 겹치고 또 겹쳤다. 늙으면 돈보다는 명예를 중히 여긴다더니, 비서실장이 딱 그 꼴이었다.
그러나 비서실장이 꺼낼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십중팔구는 그 끝이 파멸임에도 불구하고 비서실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
“가짜 뉴스를 배포할 경우 징역에 벌금을 물게 해야지. 반드시 정정 보도를 하도록 법으로 만들어야 하고.”
“의회에서도 상당한 반발이 있을 겁니다만.”
“오, 그런가? 그럼 언론이 뭐 하는 건지 말해보게. 아니지! 내가 직접 말해보지! 여론 형성, 정보전달, 오락제공, 환경감시, 의제설정!”
흥분을 주체못한 부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비서실장은 그렇지 않아도 장신인 부시가 오늘따라 더 거대해 보였다.
“현 언론이 이것 다섯 가지 중에 부합되는 게 ‘오락제공’ 말고 하나라도 부합되는 게 있는지 말해보게.”
“너무 비약하신 것 같습니다. 멀쩡한 보도도 존재합니다.”
그야 지금은 그렇지. 그러나 부시는 알고 있었다. 고작 수년 뒤면 일반인은 구분할 수 없는 정교한 합성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 이윽고 편집 수준에서 벗어나 아예 창조하는 수준으로 넘어감을. 이런 식으로 가짜 뉴스는 점점 교묘해질 터다. 지금 잡아두지 않으면 훗날이 두려웠다.
“이익과 흥미성만을 추구한 뉴스를 뉴스라고 부를 수 있나?”
“하지만 자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언론을 제한하면 생길 문제가 상당히 많습니다.”
문제가 많긴 했다. 대표적으로는 국민의 목소리인 언론을 정부의 입맛대로 뉴스를 제한하고 검열할 수 있는 ‘힘’. 즉, ‘무제한적인 권력’을 대통령이나 의회가 가질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진실과 거짓을 무슨 수로 구분한다는 말인가? 결국은 기존의 가짜 뉴스의 성향이 추측성 가짜 뉴스로 바뀔 뿐이었다.
“알고 있지. 그런데 그 이상으로 죄악은 알면서도, 그걸 실행할 힘을 지녔음에도 그리하지 않는 거야!”
진정으로 분노한 부시가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쓸어내렸다. 수십만 달러짜리 필기구들과 누구라도 탐낼 일급 기밀 서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부시가 되고 나서 여기까지 화가 난 적이 있었던가?
애당초 대통령이 마음을 먹었다면, 뉴스를 제한하는 일은 다른 수단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달러와 로비스트가 미국을 움직인다고 하지만, 결국 실제로 미국을 움직이는 건 대통령과 의회의 의지다.
애당초 언론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언론이 바로 국민을 움직일 수 있는 선동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은 정치인을 움직이고 정치인은 국가를 움직인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언론이 부패하면 정치인도 부패하고 이에 따라 국가도 부패한다.
“뉴스란 무릇 논평보다 보도에 집중해야 해.”
2016년 크리스토프가 대선 당시 언론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부시가 구태여 이를 인용한 건 이보다 정확한 말도 더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재미없는 뉴스는 죄악이라지만, 그 재미를 위해서 진실성까지 희생하면 그건 더는 뉴스가 아니다. 그저 악의적인 예능일 뿐이지. 그런 부류의 재미는 장르 소설에서나 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럼 법을 어떻게 통과시키겠습니까? 결국은 법이란 건 의회가 통과시키고 행정력을 갖춰야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는 겁니다.”
“간단하지.”
흥분이 식은 부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격하게 다룬 덕분에 수천 달러를 호가하는 초고급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불쾌한 쇳소리가 났다.
“국민의 정의감을 자극하면 되거든.”
사람이 가장 당당하게 움직일 때는, 본인이 정의라고 믿고 있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