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0
10화
대역배우, 주목을 받다 (2)
[결국은 돌아오지 못했어.]최무백이 씁쓸하게 말했다.
[궁에서 나가 그 길로 독립운동에 투신했지. 그때만 해도 몇 번 편지도 했었는데, 운명도 참 얄궂지. 해방 직전에 폐병으로 죽었다네.]‘결국, 만나지 못하셨군요.’
[내가 이승에 머물러 있는 것도 한이 맺혀서겠지. 성 나인과 꽃이 피면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조했는데, 지키지를 못했으니.]이중협이 옆에서 궁금한 듯 끼어들었다.
[귀신이 되어 늘 이곳을 지킨 거 아닙니까? 그동안 성 나인이 이곳에 온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없소. 혹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아니면 이게 당연한 건지…….]곰곰이 생각하던 태주가 입을 열었다.
‘오셨는데 무사님께서 못 알아보신 게 아닐까요?’
[내가 성 나인을 못 알아봤다고?]‘무사님께서 기억하시는 성 나인은 파릇파릇한 열일곱의 소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성 나인도 많이 변하셨을 겁니다.’
최무백은 돌을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했다.
[내가 왜 그걸 잊었을까,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는데.]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벌써 죽었을 수도 있겠군……. 세월이 부질없이 지나갔어…….]‘아직 살아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세요, 그분께서 무사님을 위해 표식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한참을 괴로워하던 최무백이 고개를 들었다.
[맞아, 자신이 여기에 다녀갔다는 표시로 붉은 댕기를 나뭇가지에 매어둔다고 했었어. 계속 그걸 찾고 있었던 거야.]태주는 몸을 움직여 꽃이 만발한 나무들을 살폈다.
혹시라도 댕기가 걸려 있을까 해서였다.
열심히 나뭇가지를 살피고 눈으로 훑었지만 붉은 댕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중협은 태주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세월이 너무 오래 흘렀어. 성 나인이 살아있을 리 만무해.]‘연인이 돌아온다고 약조를 했으니, 그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몰라요.’
태주는 저쪽에서 나무를 훑는 최무백을 바라보았다.
절박하고 절실한 표정이었다.
부모님을 잃었던 그때의 자신이 겹쳐졌다.
‘좀 더 해보고요.’
땀으로 머리가 젖고 입술이 말라오던 그때.
아까부터 그를 지켜보던 직원이 곁에 다가왔다.
“폐장 시간입니다. 곧 나가셔야 하는데요.”
‘아, 이렇게 허망하게 갈 수는 없는데.’
다급했던 태주는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부용지 근처 나무에 붉은 댕기가 매달린 것, 못 보셨나요?”
“댕기요?”
“기억나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게는 아주 중요한 거라서 그렇습니다.”
직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일단 사무실로 따라오시죠.”
곧 도착한 사무실.
직원은 서랍을 뒤지더니 먼지 묻은 물건을 꺼냈다.
낡지만 정갈한 댕기였다.
최무백의 얼굴이 요동쳤다.
“매주 이곳을 방문하시던 할머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매어두신 댕기입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는데, 이 댕기가 있어야 만날 수 있다나 뭐라나.”
“그분을 여기서 만날 수 있나요?”
“아니요. 몇 년 전부터 통 안 보이시더라고요.”
태주가 가슴을 짓누르는 절망감을 느낄 때였다.
직원이 무언가 생각난 듯 그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자기 찾는 사람 있으면 전해달라며 연락처를 남기셨어요.”
* * *
그날 저녁.
경기도 인근의 요양원에 방문했다.
태주는 복도를 걸으며 직원과 대화를 나눴다.
“이모님께서 정말 많이 기다리셨다고 들었어요. 정정하실 때는 매주 금요일마다 그곳을 들르셨다고요. 뭐, 쓰러진 후에는 못 간 지도 꽤 되셨겠네요”
여자가 태주를 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한 번도 기다리는 분을 만난 적은 없으신 거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이 낡은 댕기를 나무에 걸어두셨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학생은 그분과 어떤 관계라고 했죠?”
“손자 비슷한…… 대리인? 뭐, 그런 관계입니다.”
태주는 옆에서 긴장된 듯 따라오는 최무백을 슬쩍 바라보았다.
벌써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지난 반세기를 그렸던 연인을 만난다는 기대감.
그녀와의 약속을 못 지켰다는 죄책감.
이 모든 것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숨도 못 쉴 만큼 묵직한 그리움이었다.
* * *
병실에 들어가니 아무런 미동 없이 누워있는 노인이 보였다.
“정말 오래 사셨죠, 100세를 넘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장수하셨군요.”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예요. 갑자기 쓰러지셔서는……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다네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여자는 태주의 눈치를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안되셨어요. 결혼도 안 하고 홀로 늙다가 저렇게 되시고. 정말 곱고 예쁘셨는데.”
“그 기다리신다는 분이요. 혹시 성함을 알고 계십니까?”
“최무백, 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새벽에 물 떠다 놓고 기도하는 걸 우연히 봤는데, 그때 들었어요.”
기구한 사연에 태주는 고개를 수그렸다.
“다행히 찾으시는 분이 맞는 거 같네요. 그럼 이모님과 대화 잘 나누세요.”
여자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태주는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마주했다.
눈앞에 있는 건 곧 숨을 거둘 것 같은 노인이다.
검버섯이 가득 핀 얼굴은 고통에 찌든 듯 쭈글쭈글했다.
간신히 숨만 붙어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를 보니.
안타까웠고, 미안했고, 죄스러웠다.
가슴을 짓누르는 이 감정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최무백의 감정이었다.
귀신과 동화된 태주는 온전히 그의 감정을 느꼈다.
[다시 만나서 기쁜데……, 너무 좋은데…… 마음이 너무 아프오.]최무백이 흐느끼며 노인을 안았다.
투명한 실루엣이 노인을 그대로 통과했다.
[하지 못한 말들도……, 못 해준 것들도 많은데.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산 자에게는 죽은 자의 외침이 닿지 않는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하오.]그가 고개를 돌려 태주를 마주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자네가 성 나인에게 대신 좀 전해주게.]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고 눈시울이 붉어진 지 오래였다.
태주는 생명이 다해가는 노인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연인을 죽도록 그리워한 최무백의 감정과 완전히 동화된 채였다.
[성 나인, 내가 왔소. 꽃이 만발한 부용지에서 그대의 댕기를 발견해서 가져왔소.]터지기 직전인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늦게 돌아와서 미안하오. 이제야 온 나를, 목숨을 그대가 아니라 나라에 바친 나를 용서하지 마시오.]태주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손을 잡고 있던 할머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우리가 부용지에서 약조했던 그날, 내가 부끄러움을 핑계로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소. 궁에서는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내 마음, 이제라도 솔직하게 내놓고 싶소.]태주는 주름진 성 나인의 손을 자신의 볼에 대었다.
나비가 두근거리는 심장에 내려앉은 듯했다.
[연모하오, 성 나인. 어떤 말로도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대를 은애하오. 매 순간 그대만을 생각했고, 오직 그대만을 마음에 담았소.]그때, 힘없이 늘어졌던 노인의 손에 온기가 돌아왔다.
[그대가 날 기다렸던 것처럼, 나 또한 그대를 기다리겠소. 천수를 다하고 저세상에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곳에서 백년해로하며 삽시다. 그대를 내 원 없이 사랑할 테니.]살짝 열린 할머니의 눈이 초승달로 휘어진 게 보였다.
말은 못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통했다고.
연인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
최무백의 온몸에서 터질듯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거대한 바람이 태주를 덮쳤다.
* * *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저잣거리.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을 지나 좁은 골목길에 조그마한 여자가 들어섰다.
쓰개치마를 쓴 성 나인은 종종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무려 6개월 만에 하나뿐인 혈육인 언니를 보러 갔다 온 날이다.
일제가 조선에 들어온 이후, 궁의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윗전들의 불안감을 느낀 궁녀들은 그분들을 모시는 데 집중했고, 그래서 가족을 함부로 보러 갈 수 없었던 것.
“이렇게 늦게 입궐하다니! 분명, 한 상궁님께 혼날 거야. 그래도 선물을 드리면 좀 풀리시겠지?”
걱정스러웠던 얼굴이 꾸러미에 가득한 선물을 생각하니 조금은 펴졌다.
“무사님은 오늘 보초를 서신다, 하셨으니. 문을 지키고 계시겠구나.”
동동거리던 걸음이 점점 빨라지자 길게 늘어뜨린 붉은 댕기가 흔들렸다.
저 멀리 궁이 보이는 이때.
그녀에게 커다란 그림자들이 덮쳤다.
[고운 아가씨가 밤늦게 혼자서 어딜 가시는가.] [예사 여자가 아니야. 행색을 봐봐. 양갓집 규수는 아닌 것 같고, 궁녀인가?] [왕의 여자구만!] [역시 조선 여자들이 피부도 곱고 예쁘군.]거친 술 냄새가 나는 여러 명의 남자가 그녀를 에워쌌다.
상투를 튼 조선 남자와는 달리 머리를 이마 저편까지 밀어 머리가 반들거렸다.
‘설마…….’
불안했던 성 나인은 안고 있던 꾸러미를 꼭 끌어안았다.`
언니가 일전에 몸조심하라며 경고했던 말이 생각났다.
-요즘 길거리에 일본인 낭인들이 그리 많이 돌아다닌단다. 그자들이 밤에는 궁 주변에도 어슬렁거린다고 하니. 괜히 눈에 띄지 말고, 조심히 피해 다니거라.
성 나인의 눈이 두려움으로 점점 커졌다.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도…… 도와주세요! 꺅!”
큰소리로 구조요청을 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붙들려 버렸다.
남자들의 거친 손이 그녀의 얼굴에서 목, 그리고 어깨를 타고 내려갔다.
온몸에 느껴지는 불쾌감에 성 나인이 그들의 손을 콱 깨물었다.
[크윽. 이 여자가 진짜!]“깍…!”
그들은 성 나인을 바닥에 거칠게 패대기쳤다
성 나인은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제발, 누…… 누가 좀 도와줘. 어, 엄마. 무사님.’
그때, 저 멀리서 커다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도 알아차리기도 전.
성 나인은 한 남자의 품에 안겨 그들한테서 멀리 떨어졌다.
“성 나인, 괜찮으시오?”
“…..무사님?”
눈을 뜨자 그녀를 구하러 온 최무백이 있었다.
“아직 성 나인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걱정돼 나와봤더니……. 왜인들이 있을 줄이야.”
성 나인을 감싼 최무백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당장 이곳에서 꺼져라. 팔다리 하나 잘리기 전에.”
[뭐라는 거야, 이 조센징이.] [조센징이 감히 대일본 무사에게 대들어?]낭인들이 동시에 칼을 빼들었다.
두려움에 떨던 성 나인이 최 무사에게 애원했다.
“무, 무사님, 어서 도망가요.”
“괜찮소, 성 나인. 내가 다 해결하겠소.”
최무백은 성 나인을 뒤로 보냈다.
“눈을 감고 숫자 100까지 세시오, 그 안에 끝내겠소.”
그녀는 순순히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뒤에 있던 남자들이 화가 난 듯 칼을 휘둘렀다.
[이놈이 건방지게! 덮쳐!]스릉.
최무백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덤벼라.”
분노로 활활 타오르던 눈이 번쩍 빛났다.
“격이 다른 검술을 보여주마.”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