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악귀 (5)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럼 중협이 형이 악귀로 변했던 것도, 그런 일환인가?
사랑하던 연인, 염수정 선배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서?
그럼 그녀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건가?
[아니야.]이중협이 태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수정이는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았어.]그 말에 태주의 눈이 크게 흔들리던 순간.
염수정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태주 씨, 괜찮은 거죠?”
“네?”
“아까부터 날 빤히 쳐다만 보길래, 걱정돼서요. 비진도에서 드라마 촬영하다가 겨울 바다에 빠졌다면서요. 몸은 정말 괜찮은 거예요?”
염수정이 태주의 이마 위에 유난히 차가운 손을 살짝 올렸다.
덕분에 이중협과 염수정, 그 사이 인연을 고민하던 태주의 머리가 식으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중협이 형이 아니라는데 믿어야지.’
멋대로 생각하지 말자, 저번에 그러다가 악귀한테 당했잖아.
지금은 촬영에만 집중하자.
“네, 괜찮아요. 선배님, 혹시 저랑 같이 대본 맞춰보실래요?”
“그래요.”
태주가 싱긋 웃으며 염수정과 함께 한곳으로 향했다.
이중협은 그런 그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태주가 자신의 한을 풀어주려 고민하는 것을 알았기에,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악귀 박철중의 케이스를 본 지금.
태주에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신 또한 그런 이유로 악귀가 된 게 아닌가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고, 자신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고민하던 이중협이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기억만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도…….]그러나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내 고민보다 태주의 촬영이 더 중요해.]태주의 뒤를 따라가는 그의 얼굴에 의연함이 가득했다.
* * *
“자, 자. 리허설 해 봅시다.”
이탁원 감독의 힘찬 외침으로 리허설이 시작됐다.
태주는 무술 감독의 보조를 받으며 줄타기 연습에 돌입했다.
오늘 찍을 장면은 광대 효원이 궁에 초청받아 줄타기하는 씬.
왕과 효원이 서로를 처음으로 보는 장면이다.
신분은 낮지만, 누구보다 자유로운 효원과 누구보다 높은 신분이지만, 꽉 매여있는 왕의 대면.
그래서 오늘 씬은 영화의 첫 번째 클라이맥스였다.
촤라락.
태주가 부채를 펴면서 줄을 타기 시작했다.
두 발로 줄을 밀어내며 하늘 위로 점프했다.
줄을 타는 것만이 아닌, 표정도 신경 썼다.
줄 위에서 효원은 자신을 열렬히 바라보는 왕을 발견했으니까.
그런 왕에게 흥미를 갖고, 왕을 좀 더 재밌게 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 곡예를 펼쳤으니까.
퉁, 줄을 세게 튕겨 좀 더 높이 올라간 태주.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아 사뿐하게 줄에 안착했다.
주변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멋있어, 멋있어!”
“와, 이걸 스턴트 배우를 안 쓰고 직접하네.”
성공적으로 리허설을 마친 태주.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탁원 감독에게 향했다.
“괜찮았어요, 감독님?”
이탁원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런데 주변 반응이 좀 이상하다.
‘다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자꾸만 뒤를 보는 게 누굴 기다리는 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태주가 이탁원에게 슬쩍 물었다.
“오늘 누가 오나요? 혹시 취재진이라든가?”
그 말에 이탁원이 펄쩍 뛰었다.
“아니요. 오늘 올 사람들은 다 왔어요, 태주 씨. 그냥 오늘은 편하게, 아주 편~하게 촬영하면 된다고.”
“아, 네.”
태주는 이탁원의 의뭉스러운 태도에 의문을 품었지만, 금세 촬영에 몰입했다.
이탁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서 조감독이 귀엣말했다.
“지금 신 대표님하고 김 본부장님 여기로 이동 중이시랍니다.”
“그럼 그분들 오면 명수 네가 잘 안내해 드려. 나는 촬영하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감독님…….”
조감독이 궁금한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현필름 대표님과 TL 영화투자 본부장님은 왜 비밀리에 이곳을 방문하시는 겁니까?”
“이유는 모르겠는데. TL 쪽에서 배우들이 자신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더라.”
“그냥 지금이라도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분들 온다고. 그래야 배우들이 실수 덜하려고 긴장할 거 아니에요.”
“아니야,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괜히 긴장해서 더 실수하면 어떡하냐.”
이탁원이 눈이 느리게 배우들을 훑었다.
도도한 얼굴의 염수정, 근엄한 포스의 주세진, 예민하지만 기대에 가득 찬 임강현.
그리고 우아한 모습으로 줄 위에 올라탄 한태주.
완벽한 앙상블 그 자체였다.
곧 이탁원이 마이크를 들었다.
“슛 들어갈게요. 쓰리, 투 원…… 액션!”
* * *
상석에 앉아 있던 왕이 대비에게 예민한 표정을 지었다.
“번거롭게 이런 일을 벌이시다니요, 어마마마. 요즘 제가 몸이 안 좋다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두 다 주상을 위해서입니다. 허약한 몸으로 매일 침상에 누워만 계시니, 이런 놀이라도 보며 재미를 붙이시라고요.”
대비는 저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광대 효원에게 명했다.
“그럼 한판 재밌게 놀아 보거라.”
“예, 대비마마.”
“잠깐. 네놈에게 할 말이 있다.”
창백한 얼굴에 짜증이 가득 서린 왕이 끼어들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잔치에 억지로 참석해 짜증이 나 있던 그였다.
“날 재밌게 하지 못하면, 네 목을 칠 것이야. 내 소중한 시간을 네놈 광대짓을 보는 데 낭비한 것이니, 이 정도는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신하들이 웅성댔지만, 대비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효원이라고 했느냐? 어찌할 테냐? 주상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
왕의 황당한 말에 효원은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대비의 명으로 이곳에서 공연하는데, 재밌게 하지 못하면 제 목을 친다니.
그의 헛웃음에 왕이 눈썹을 씰룩였다.
“이것 봐라, 네놈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그렇사옵니다, 전하.”
효원이 왕에게 도발적으로 맞섰다.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을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중이었사옵니다. 그럼, 해보겠나이다.”
왕의 얼굴이 붉어지며 흥분에 휩싸였다.
생전 아무도 자신에게 이런 도발을 한 이가 없었기에.
한편, 효원은 줄에 올라가 묵직한 부채를 촤르륵, 펼쳤다.
그리고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높이 있으니 왕도, 대비도, 고관 나리들도 다 제 밑에 있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퉁, 하고 줄을 튕겨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마치 하늘을 건널 기세의 효원을 본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어찌 저런 기예가 가능한 거요?”
“맨날 먹고 하는 짓이 저런 것 아니겠소. 그래도…… 대단하오.”
사람들의 시선이 줄 위에서 자유자재로 노니는 효원을 따라갈 때, 왕도 열렬히 그를 감상했다.
맨 처음에는 달갑지 않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그에게 빠져 있는 그였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그래서 행복해 보이는 그에게.
그런 왕을 묘하게 바라보던 대비가 슬쩍 몸을 기울였다.
“재밌습니까, 주상?”
그제야 왕은 평소의 차분한 가면을 썼다.
“저 오만불손한 광대가 어떻게 발악하나 지켜보는 중이었습니다, 어마마마.”
그때, 효원이 부채를 촤락, 펼치며 말했다.
“잔노름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살판을 벌이겠습니다.”
살판, 곡예의 끝이자 정점.
줄에서 일어선 다음 뒤로 뛰어올라 공중회전을 한 바퀴 하고, 줄 위에 앉는 동작이다.
매우 위험하여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웬만큼 기량이 뛰어나지 않다면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고난도의 기예였다.
모두가 숨을 죽여 효원을 바라보는 가운데.
대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잘하면 살판이요, 잘못하면 죽을 판이로구나.”
그녀는 왕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저 광대 말입니다, 주상. 제 명을 제가 재촉하는 꼴이로군요.”
그러나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퉁!
효원이 강하게 줄을 튕겨 그대로 뒤로 공중제비를 넘었다.
* * *
촬영장 문이 조용히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쪽에서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죠.”
현필름의 신 대표가 챙기는 이 남자는 김인석.
TL 엔터의 한국영화투자 본부장이다.
XJ 엔터테인먼트, 골드 엔터테인먼트와 더불어 3대 투자배급사로 꼽히는 TL 엔터테인먼트.
완성도 높은 스토리, 감각적인 연출의 이탁원 감독. 그리고 좋은 배우들의 조화로 이번 영화에는 제법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여 투자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평가했다.
가장 끌리는 건 주연 한태주의 스타성과 연기력이었다.
3천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도 그렇고.
최근 20대 아니, 모든 남자 배우 중 가장 가파를 기세로 성장하는 배우였기에.
그는 투자하기 전, 마지막으로 현장을 점검하러 온 거였다.
신예지 대표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오늘 그의 결정으로 70억이란 추가 투자가 이루어지냐, 마냐가 결정된다.
그 돈이 있다면 퀄리티 있는 CG를 써, 영화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신 대표는 옆에 있는 김인석 본부장을 슬쩍 훑었다.
“어떠세요, 본부장님?”
그런데 이게 웬걸.
그는 신 대표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멍하니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태주를.
더욱 정확히 이야기하면,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광대 효원을 담았다.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 김인석.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지금 찍는 씬이 뭐죠?”
김인석의 질문에 신예지는 어깨를 폈다.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는 그녀의 표정은 누구보다 자부심이 가득했다.
“오늘 찍는 씬은 저희 영화의 상징과 같은 부분입니다. 광대 효원이 허약한 왕 앞에서 자유롭게 줄타기를 하며 하늘을 나는 장면이죠.”
그들은 계속해, 구석에서 촬영 현장을 지켜보았다.
바로 지척에서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가슴에 팍팍 꽂히는 연기가 한두 개가 아니다.
염수정의 서늘한 눈빛 연기, 주세진의 묵직한 손짓, 임강현의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몸짓.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건 한태주였다.
늘씬한 몸에 걸친 하얀 저고리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이때.
손보다도 큰 부채를 한 손에 들고 두 발로 가볍게 줄을 한번 퉁, 튕겼다.
휘릭!
그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내려와 또다시 퉁, 하고 줄을 튕겼다.
몸이 구름처럼 가볍게 넘어가더니, 태주가 줄 위에 사뿐히 앉았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지미집 카메라.
화면 가득히 태주의 미소가 잡혔다.
자유로워서 아름다운, 하늘에서 훨훨 나는 듯한 미소가.
김인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뺐다.
그냥 평범한 줄타기일 뿐인데.
그 장면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한태주의 연기 때문일까?
그의 홀릴 듯한 몸놀림 때문인 걸까?
긴장감과 기대감에 가득 찬 눈동자가 한태주에게 고정되었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신예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 또한 태주에게 정신이 팔린 건 마찬가지였다.
“신 대표.”
“네……, 네?”
신예지는 후닥닥 김인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말했다.
“같이 합시다, 이번 영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