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울게 하소서 (3)
“도대체 왜… 당신이…….”
태주가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미안해요, 태주 군.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이중협이 서둘러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태주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도대체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나타난 거지?] [죄송해요, 대장 귀신님. 하지만 태주 군에게 저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한 거야? 태주한테서 떨어지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지금 얘한테 중요한 시기라고.]둘의 얘기를 듣던 태주의 머릿속이 점점 어지러워진다.
그럼 아까 이중협이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은, 이 여자를 쫓아버리기 위함이었던 건가?
[지금 저한테는 대장 귀신님보다는 태주 군이 더 중요해요.]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여자가 태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저 나는… 태주 군한테 용서를 빌고 싶어서…….]태주는 뒷걸음질을 쳤다.
지난 10년간 이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생각하기도 싫었고.
그저 이 사람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죽었다, 그 생각뿐이니까.
* * *
11년 전.
전날 눈이 내린 추운 겨울날.
차가 빽빽하게 들어찬 사거리에서, 자그마한 경차에 탄 세 식구가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아빠, 아직 멀었어요?”
“20분만 더 가면 돼. 그런데 차가 이렇게 막혀서야 원…… 길은 또 왜 이렇게 미끄러운지.”
잘생긴 남자의 말에 아이의 투정이 날아온다.
“아빠, 나 오디션 늦으면 안 되는데! 나 여기 꼭 합격해야 한단 말이야! 강현이한테 밀리면 안 되는데, 이거!”
뒷좌석에 앉은 열한 살 난 아이가 대본을 흔들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아이의 이름은 한태주.
아역배우 중에서도 톱으로 꼽히는 배우였다.
백미러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이 미안하다는 듯 흔들렸다.
“미안해, 아빠가 회사에서 늦게 나와서.”
“오디션 늦으면 다 아빠 책임이야! 아빠 미워할 거야!”
“태주 너, 아빠 요즘 바쁘신 거 알면서 그렇게 떼쓰면 돼, 안돼?”
옆에 있던 여자가 태주를 붙잡고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사실 오늘 오디션도 엄마랑 둘이서 가기로 했었는데, 네가 떼써서 아빠까지 모시고 가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엄마, 아빠 둘 다 있어야 네가 오디션을 잘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렇게 같이 가는 거고. 그렇지?”
아들과 똑 닮은 시원한 눈매의 그녀.
태주는 엄마의 눈빛에 쓱 입을 다물고 대본에 코를 처박았다.
그러나 입은 아직도 툭 튀어나온 채였다.
아빠를 쏙 빼닮은 입매가 씰룩거림에 엄마는 남몰래 피식거렸다.
아이는 아빠의 외모만 빼닮은 것이 아니다.
아빠의 욕심, 그리고 아빠가 이루지 못한 꿈까지 쏙 빼닮았다.
연기, 그리고 배우.
아이 아빠가 현실적인 문제로 못 이뤘던 꿈을, 아이만큼은 꼭 이루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연기에 욕심을 낼 때마다, 성과를 이룰 때마다 그들 부부는 기분이 좋았다.
스케줄을 따라다니고 오디션장을 동행하는 피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태주가 즐겁게 연기를 할 수만 있다면.
“안 되겠다, 조금 속도를 내야겠어.”
시간을 확인한 아빠는 도로를 쓱 훑고는, 옆 차선으로 변경했다.
그런 남편을 보던 아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여보, 길도 미끄러운데 너무 밟는 거 아니야?”
“괜찮아, 이 정도는. 태주야, 이제 5분 내에 오디션장 도착한다.”
“네.”
짧은 대답을 하는 태주는 아직도 대본에 몰입한 채였다.
그런 아들이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
그리고 운전에 몰두하며 속도를 낸 아빠는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때.
“뭐, 뭐야, 저거!”
운전대를 잡은 아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저쪽에서 커다란 차량이 그들이 탄 차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태주가 눈을 크게 떴다.
상대 운전자가 자신들을 향해 운전대를 튼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빠-!! 엄마!!!”
쿵!
순식간이었다.
아빠가 서둘러 운전대를 돌렸지만 차가 그들을 크게 들이받은 건.
차가 뒤집히고, 엄마가 태주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은 건.
콰드득- 콰득- 쾅!!!
차가 데굴데굴 구르다 가로등을 들이받고 멈춰 섰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 뼈가 부러진 듯 온몸에 부닥치는 고통으로 태주는 정신을 잃었다.
* * *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지난 2월 15일경, XX사거리에서 카니발 차량이 레이 차량을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카니발 차량의 운전자와 레이 차량에 탑승한 일가족 3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1살 한모 군만 살아남은 것으로 전해…….”
뚝.
한유경은 서둘러 리모컨으로 병원 티비를 꺼 버렸다.
그녀가 들고 있던 핸드폰에는 이미 수많은 문자가 와 있었다.
지인들, 그리고 기자들.
몇몇 이들은 인터뷰를 부탁한다며 문자를 보냈다.
“미치겠네,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이렇게 연락하다니.”
그녀는 입 밖으로 조그맣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1인실이라 뭐라고 할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웅크리고 있는 태주를 힐끔거렸다.
다행히 태주는 잠이 들었는지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한유경은 태주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 사고로 그녀의 새언니와 오빠는 죽었고, 태주는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아이는 부모의 장례식에서도 울지도 않은 채, 그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만 있었다.
그날 사고로 충격을 받아 실어증에 걸린 거였다.
“언니랑 오빠는 어떻게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세상 남겨두고 눈을 감았을까…….”
그녀는 고개를 숙여 태주의 볼에 입을 맞췄다.
하나뿐인 조카가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때.
끄응, 거리는 소리와 함께 태주가 일어났다.
통통했던 볼이 살이 빠져 핼쑥했다.
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옆에 있던 고모를 발견했다.
자그마한 아이가 그녀의 품에 안기자, 한유경은 그를 토닥였다.
“좀 더 자지, 일어났어?”
끄덕.
태주의 끄덕임에 한유경은 그에게 물었다.
“저녁 시간 다 됐는데, 밥 먹을래?”
도리도리.
“입맛이 없어도 밥 먹자, 태주야.그래야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지.”
태주의 망설임에 그녀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빨리 병원 퇴원하고 싶다고 했지? 그러려면 밥 먹고 얼른 건강해져야 의사 선생님이 나가고 된다고 허락해주셔.”
끄덕, 끄덕, 끄덕.
잠시 고민하던 태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유경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곧 따뜻한 밥상이 들어오고 태주는 수저를 뒤적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모는 이따금 아이가 흘리는 반찬을 먹여 주었다.
침묵이 계속되던 도중, 전화가 왔다.
한유경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난감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고모 잠시 통화하고 와야 하는데. 혼자 먹을 수 있지, 우리 태주?”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혼자 있는 건 무서웠다.
그러나 임신한 고모에게 계속 아기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임신 6개월 차인 고모는 요즘 배가 불러와 부쩍 힘들어했으니까.
고모는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럼 고모 통화 한 통만 하고 올게.”
끄덕.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
곧이어 전화를 받은 고모의 목소리가 복도 저 너머로 흩어졌다.
“저기요,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요? 우리 조카는 한순간에 부모님을 잃었다고요. 아직 11살밖에 안 된 애예요. 애가 그때 사고로 충격을 받아서 말도 제대로…….”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주.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 세상에 엄마, 아빠가 없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없는 세상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냥 다 놓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무력한 11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뒤집어쓰는 게 전부였다.
눈을 질끈 감아 암흑이 찾아온 순간.
눈앞에 그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옆을 들이받는 거대한 차.
순식간에 뒤집혀 데굴데굴 구르던 차.
귀를 찌르는 비명.
자신을 감싸는 엄마에게서 배어 나오는 피 냄새.
운전석에 축 늘어진 아빠의 머리.
그리고 점점 힘이 빠지던 엄마의 쉰 목소리.
-태주야……, 우리 태주……
피 흘리던 엄마를 보던 태주의 눈앞이 암전되었다.
* * *
허억!
마음속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하자.
몰려오는 고통스러움에 태주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놀이터에서 벗어나 근처 정자의 기둥에 머리를 기대었다.
“하…, 하아…….”
10여 년간 잘 다독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난 아직도 그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그때 사고만 생각하면 마음이 저렸다.
그리고, 분명 잊었다고 생각한 저 여자를 마주하니, 죽일 듯 증오가 넘쳐흘렀다.
점점 진해지는 슬픔에 태주는 숨을 들썩였다.
분노가 가득한 숨이 점점 그를 짓누르는 그때.
[태주야, 숨 쉬어!]이중협이 태주를 다독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옆에서 천경실이 태주에게 가까이 다가와 안절부절못했다.
[태주 군, 괜찮은 건가요?]태주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이게 다 저 여자 때문이다.
겨우 잊고 있었던 악몽을, 저 여자가 일깨웠다.
‘도대체 왜 나타난 거예요. 겨우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극복한 줄 알았는데, 왜……!’
정중한 말투였지만 한이 담긴 증오감이 배어 나왔다.
태주에게서 처음 느껴보는 분노에 이중협은 흠칫했고.
여자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빌었다.
[미안해요. 정말 용서를 빌고 싶어서 그랬어요.]‘용서를 빌려면 진작에 빌었어야죠.’
태주의 눈에 핏발이 섰다.
‘우리 엄마, 아빠 영전에서 빌었어야죠.’
[물론… 용서를 빌었어요. 죽자마자 귀신이 되었고, 그 길로 태주 씨 부모님 장례식부터 갔어요. 그분들한테는 용서를 빌었는데, 정작 태주 씨를 보니까 용기가 안 나서…….]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진다.
태주는 가빠오는 숨을 간신히 참았다.
그날의 사고가 자꾸만 눈앞에서 회오리치려 한다.
그때, 여자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어요. 그 사고를 내고 싶어서 낸 게 아니에요. 정말로…….]‘우리 쪽으로 운전대를 돌렸잖아요. 그게 고의가 아니고 뭡니까.’
태주의 말에 여자는 흠칫 놀랬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절하게 말했다.
[왼편 차로에서 달려오는 어린이집 승용차를 피하느라 그랬어요. 나도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튼 거예요. 그런데 그쪽에…… 태주 군과 가족들이 있을 줄은 정말…, 정말 몰랐어요.]여자가 태주를 보며 손을 모았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