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3
13화
대역배우, 주목을 받다 (5)
몇 번이고 촬영을 거듭했다.
“컷! 오케이!”
드디어 기다리던 그 단어가 들렸다.
태주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진짜 현장이지. 동락이가 지휘했던 현장은 너무 착했었어.’
윤이도 감독이 연기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한 스타일이라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배우가 해낼 때까지 쥐어짜는 감독.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 눈앞에 나올 때까지 거듭하는 설계자.
그가 바로 윤이도인데.
“허우, 죽겠다.”
강재하가 그의 옆을 황급히 지나갔다.
태주도 서둘러 모니터링을 하러 따라갔다.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던 강재하의 입가가 묘하게 떨렸다.
“거참…….”
윤이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강 배우, 태주가 앞에서 연기하니까 훨씬 몰입이 잘 된 것 같던데? 표정이랑 연기도 훨씬 좋고.”
“그러네요.”
윤이도의 말에 강재하의 시선이 태주에게 향했다.
강재하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수고했다, 후배님.”
태주는 고개를 숙였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화면에도 안 보일 연기였지만, 죽어라 한 게 개고생은 아니었구나.
자신의 연기에 강재하가 충실히 반응해준 것이 좋았다.
혼자서 연기할 때는 절대로 느끼지 못했을 희열이다.
정말 즐거웠다. 그동안 자신이 원했던 그림이었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자신이 열심히 연기했던 게 화면에 보이지 않아서.
[네 연기가 쓸모없었다고 생각하지 마. 네 연기는 강재하의 연기를 살리는 데 일조했어.]이중협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아쉬움에 한숨을 삼켰다.
‘쓸모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에요. 다만, 아쉬울 뿐입니다.’
비록 뒷모습 대역이었지만, 많은 것을 준비했다.
왕과 호위무사, 1인 2역의 연기.
그리고 무술까지.
귀신 최무백이 그에게 남겨준 귀중한 능력이었으니까.
적어도 이 중에 하나로 영화에 발자취를 남기고 싶었다.
* * *
태주는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어느덧 밤 9시가 다 되었다.
원래는 7시면 끝나기로 한 촬영이었는데, 이렇게 늦어지다니.
“좀만 기다려봐요, 오늘 출연료 드릴게요.”
“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태주는 촬영장 구석 빈자리를 찾았다.
“아-함.”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소심하게 하품을 했다.
곧이어 다음 촬영이 있어 다들 정신이 없었다.
“다음이 공중 습격씬, 맞지?”
“무술감독님 지금 기합 빡세게 들어가 계시겠네.”
“하, 오늘 촬영은 새벽 3시쯤 끝나겠다. 며칠째냐, 이런 극한 스케줄.”
듣기만 해도 살벌한 일정이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고모에게서 온 문자였다.
-촬영 잘하고 있냐고 태희가 물어보란다. 오늘 우리는 공원 나들이 다녀왔어.
그리고 화면 가득히 띄워진 사진.
브이를 한 태희의 통통한 볼에 핀 보조개가 귀여웠다.
오늘 하루 쌓였던 촬영의 여파가 싹 사라졌다.
옆에서 이중협이 장난스럽게 이죽거렸다.
[아주 입이 귀에 걸리겠어. 그렇게 동생이 좋으세요, 태주 오라버니? 나도 좀 그렇게 좋아해 봐라!]태주는 재빨리 고모에게 전화했다.
-태주야, 너 촬영하는 거 아니야? 전화해도 돼?
“촬영은 조금 전에 다 끝났어.”
-그럼 빨리 집에 오지. 지금 어디야?
“오늘 출연료 정산해 준다고 조금만 기다리래. 곧 갈게, 걱정하지 마.
고모는 조심히 오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이곳 파주 촬영장에서 집까지는 지하철로 2시간이 훌쩍 넘는다.
자칫하면 집에 못 갈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여기에 좀 더 남아있고 싶기도 했다.
“더 할 수 있는데…….”
아쉬움을 삼키던 그때.
저 멀리 보이는 광경.
연출부 스태프가 박우돈에게 뛰어갔다.
“조감독님. 저희 이따가 궁중 습격씬 찍는 거, 한 명이 빕니다.”
“그게 왜 비어?”
“한 명이 리허설 중에 삐끗했는데, 인대파열이랍니다.”
“아놔, 일이 왜 또 이렇게 꼬이냐? 그 씬, 미루면 안 되는데! 정규범 감독님은 어떻게 하신대?”
“일단은 한 명 뺀 대열로 액션씬 전면 수정하신답니다. 그래야 촬영이 지장 없다면서요. 아니면 회복되는 거 기다렸다가 나중에 40명으로 촬영을 하신다고…….”
“이번 씬, 더는 미루면 안 되는데. 제작비도 여기에 몰빵했고…….”
곧 무술감독 정규범과 윤이도 감독이 상황을 수습하러 모였다.
상황을 전해 들은 윤이도는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아니, 그거 40명으로 완벽하게 세팅 다 해놓은 씬이었잖아. 한 명 비면 대열도 바뀌고, 액션 라인도 전체적으로 수정해야 할 텐데…….”
“그렇다고 오늘 씬을 통으로 날릴 수는 없잖아. 일단 한 명 빼고 다시 라인 수정해 볼게.”
무술감독의 말에 윤이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40명 대열로 찍으면 안 될까? 그게 화면도 꽉 차고 모양새가 좋다고.”
“윤 감독. 걔 인대가 완전히 나갔어. 진통제 먹고 부목 달아도 우리가 원하는 그런 액션은 안 나올 거야.”
“하……. 하필이면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이런 사고가 터지냐…….”
윤이도가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촬영장의 분위기가 술렁거리는 상황을 태주가 지켜보고 있는데, 스태프 하나가 그의 팔을 두드렸다.
“여기 출연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나요? 감독님들이 다 모이셨길래요.”
스태프가 한숨을 쉬었다.
“이따가 궁궐 액션씬 큰 거 하나 촬영할 거 있거든요. 근데, 리허설 하다가 한 명이 인대가 완전히 나갔나 봐요. 그 정도 액션이 가능한 대타를 당장 어디서 구하겠어요?”
“현장에서 바로 맞출 수 없는 액션인가요?”
“바로 못 맞추죠! 단역 배우들 40명이 3달간 합 맞춰서 연습한 습격씬이에요. 그런데 한 명이 나가니 대열도 다시 맞춰야 하고, 무술감독님만 머리 아프게 됐죠, 뭐.”
혀를 차던 스태프가 곧바로 현장으로 뛰어갔다.
태주는 느리게 촬영장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나가 집으로 가면 된다.
분명 그러면 되는데…….
그의 눈이 번뜩였다.
“대타로 또 연기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는 아직 연기에 목말랐다.
연기를 할 수만 있다면.
뒷모습보다 더한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의 연기를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일단 검이라도 빼 들었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는 게 인지상정.
‘귀신 최무백을 만나 검술과 관련된 능력을 받은 게 이를 위해서가 아닐까?’
그는 방향을 돌려 무작정 뛰었다.
자신을 뜻을 비쳐야 했다.
꼭 연기하고 싶다는.
“감독님, 제가 해보겠습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태주.
윤이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 소리야?”
“액션씬 대타가 필요하신 것 같아서요, 저, 검술도 제법 할 줄 압니다. 물론 연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우돈, 윤이도, 그리고 무술 감독의 눈이 차례로 스쳤다.
무술 감독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얘 누구야? 뭔데 이렇게 깝치는 거야?”
“강재하 뒷모습 대역 맡은 앤데…….”
“강재하 뒷모습 대역했다고 연기를 장난으로 보냐? 이건 액션씬이야, 가만히 서 있는 뒷모습 대역하고는 차원이 달라.”
윤이도와 태주의 입이 동시에 달싹였다.
하지만 태주가 한발 빨랐다.
“정말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많습니다.”
“윤 감독.”
정규범이 윤 감독을 부르며 고개를 까딱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초짜 배우는 얼른 돌려보내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윤이도는 태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실된 눈빛이 그를 잡아끌었다.
그가 허튼소리를 할 배우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늘만큼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진지하게 연기했으니까.
한 명이 사고로 빠진 이 상황.
액션씬을 수정할 것이냐.
아니면 한태주를 대역으로 넣어 볼 것이냐.
책임을 지는 것도, 결정을 하는 것도 감독의 몫이다.
한참 동안이나 고민에 빠졌던 윤이도는 고개를 들었다.
‘안전빵이냐, 도전이냐.’
윤이도는 보다 끌리는 쪽을 선택했다.
이건 순간의 변덕이 아니다.
한태주가 연기하는 것을 본 감독으로서, 그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감에 기인한 것.
윤이도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검은 얼마나 쓸 줄 아냐?”
* * *
밤 9시 반.
태주는 일단 고모에게 늦는다고 연락했다.
그다음은 서동락.
당장 내일 오후에 ‘마지막 승부’ 마지막 촬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밤샘 촬영이라는 말에 동락이 펄쩍 뛰었다.
-야, 너 내일 촬영인 건 알지?
“알아, 오후 3시, 한국예대 근처 홍콩반점 앞.”
-밤샘 촬영하고 그 컨디션으로 내일 촬영한다는 게 말이 되냐?
“우리 영화에는 지장 없게 할게.”
-뭐가 우리 영화야? 금세 딴 거에 한눈파는 주제에.
목소리는 툴툴거렸지만, 동락은 진지했다.
-아무튼, 이왕 그렇게 된 거, 열심히 해라. 어떻게 해서든 감독 눈에 들어서 한 컷이라도 더 따보려고 노력도 하고.
“예썰!”
전화를 끊고 태주는 두 볼을 찰싹거렸다.
“정신 차리자.”
기회는 도전하는 자에게만 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그저 뒷모습 대역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풀샷으로 나오는 단역으로 또다시 촬영이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다시 한번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그가 가진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의상팀에서 받은 무사복으로 갈아입고 가발까지 썼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보니 각오가 남달랐다.
[어때? 진짜 무사가 된 느낌이냐?]‘최무백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태주는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다듬었다.
‘싸움 전에는 늘 단정하게 있다가, 검을 들기만 하면 야생마로 돌변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대규모 액션씬에 대타로 들어간다는 거, 생각보다 쉬운 거 아니다. 원래 있던 동선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야 하고, 혼자서 튀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어려운 동선이나 검술 동작은 최무백의 힘을 빌려서 익힐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 최무백의 검술인데 어련하겠어.]이중협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된다, 어떤 그림이 나올지.]* * *
얼마 후.
태주는 스태프의 안내로 또 다른 세트장에 도착했다.
커다란 궁 세트장의 한 편이 은은한 조명으로 빛나는 가운데.
실제와 비슷한 크기로 세워진 건물들의 위용이 돋보였다.
태주는 감탄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와, 저런 곳에서 찍으면 진짜 멋있게 나오겠다.”
텅 빈 촬영장을 보며 잠시 상상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화면.
그 속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어 칼을 휘두르는 장면.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걸어간 길.
세트장 한편에 수십 명의 액션 배우가 보인다.
“재진이 그놈, 괜히 까불대다가 배역만 날아갔네. 3달을 준비했는데 아까워라.”
“그래도 더 큰 부상 아닌 게 어디예요.”
“하필이면 에이스가 펑크 났냐. 걔 자리도 맨 앞쪽이잖아? 그 자리를 누가 소화할 수 있을까?”
“글쎄요. 아마 대열 수정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지금 정 감독님 머리 빡시게 굴리시던데.”
태주는 깍듯이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의 말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준다.
옆에서는 수군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재진이 대타로 들어온 애야? 몇 살이래?”
“그래도 이 밤중에 대타 구한 게 기적이네.”
“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 경험도 없는 보이는데, 뭐 제대로 액션씬이나 찍겠냐.”
“감독님은 도대체 뭔 생각이래. 여기가 자리만 채우는 자리는 아니지 않아?”
주변에서 의심의 눈초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태주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한태주, 이리로!”
정규범 무술감독의 호령이 떨어졌다.
“일단은 전체적인 시퀀스 맞추기 전에, 너 검을 얼마만큼 쓸 수 있는지부터 좀 보자. 앞에 배치할지 뒤에 짱 박을지 결정하게. 자, 받아.”
태주는 그가 건네주는 장검을 받아들었다.
묵직하니 손에 착 하고 감겼다.
한번 휘둘러 보았다.
휘익.
집에서 연습했던 장난감 칼과는 느낌이 달랐다.
손에 잡히는 무게감에 날카로움까지 더해졌다.
온몸의 신경이 덩달아 예민해졌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소음, 보이지 않던 움직임이 보였다.
그런 그를 유심히 쳐다보는 한 무리의 시선들이 있었으니.
“뭐야, 저 움직임은?”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