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하루 세끼 (1)
간호사가 호기심을 채 풀기도 전, 깊은 캡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옆에 쓱 지나갔다.
몰래 듣고 있었던 걸 들킬까, 화들짝 놀란 간호사는 얼른 길을 터 주었다.
그러면서 마주한 예상치 못한 얼굴에 눈을 깜빡였다.
“뭐야, 저 사람이 여긴 왜 온 거지?”
* * *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핸드폰에 가사를 띄워놓고 태주는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당장 다음 주 경연이니, 가사부터 완벽하게 외워야 했다.
원어는 이탈리아어지만, 이번에 그는 한국어로 부르기로 했다.
가사의 의미를 시청자들에게 더욱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 노래는 시청자 이전에 천경실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었기 때문.
노래가 귀에 익을 때쯤, 가사를 안 보고 마스크 스타 합주팀이 보내온 백뮤직을 토대로 열심히 연습했다.
어서 무대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이제껏 노래가 마음의 해묵은 때를 벗길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그였기에, 정말 놀라웠다.
11년 동안, 자신이 묵혀둔 감정을, 이 노래로 날려버리는 것 같았기에.
그동안 자신이 참았던 고통, 슬픔을 이 노래로 승화시키는 것 같았기에.
[야, 이거 공짜로 들어도 되는 퀄리티냐? 진짜 잘하는구만.]이중협은 그의 노래를 감상하기에 바빴고, 오히려 가사 틀린 걸 말해주는 건 천경실이었다.
[여기, 슬프게, 가 아니라 슬픈 이에요.]조심스럽게 태주가 틀린 곳을 집어주는 그녀.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올바른 가사로 바꿔 외웠다.
두 귀신과 함께 노래를 연습하는 지금, 더욱이 천경실을 옆에 두고 평온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11년 전 사고의 원흉인 그녀를, 곁에 두는 건 불가능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같은 공간 안에 있다.
그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과정인 걸까?
어쩌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는 ‘울게 하소서’의 가사 한 자락처럼.
괜히 먹먹해진 태주는 헛기침을 했다.
“큼큼. 아, 목소리가 왜 이렇게 갈라지지.”
[좀 쉬면서 해라. 넌 발동 걸리면 너무 푹 빠지는 게 문제야.]‘하하. 열심히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침대에 벌렁 눕는 태주의 너스레에 이중협이 피식거렸다.
[그런 말도 하는 것 보니, 당장 퇴원해도 되겠구만.]그때, 누군가 드르륵,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안으로 들어왔다.
“용석이 형?”
회사에 들렀다 온다던 차용석일 거로 생각한 태주.
침대에 누운 태주가 배를 벅벅 긁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설마 또 급똥이라 화장실 들린 거예……”
[야……, 야!]‘왜 그래요?’
이중협이 숨을 참으며 태주의 뒤로 물러섰다.
이상함을 느낀 태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게 웬걸.
품 안에 붉은 장미꽃을 가득 품은 윤수안이 서 있다.
태주에게 고정됐던 얼굴은 타는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잠…, 잠깐만요!”
태주는 얼른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고쳤다.
가슴 가까지 풀어졌던 병원복 단추를 단정히 잠그고 더벅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그런 태주를 머뭇거리며 본 윤수안.
대뜸 그에게 장미꽃 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받아요.”
“아, 예. 감사합니다.”
태주는 얼떨결에 품 안에 가득 꽃다발을 받았다.
코끝을 찌르는 꽃향기에 그가 고개를 들어 윤수안을 힐끗했다.
그녀는 작은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검은 캡모자에 넉넉한 카키 야상, 그리고 헐렁한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같이 ‘낭만 고양이’를 찍던 여배우라고는 믿기 힘든,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그때, 윤수안이 조심스러운 한 마디를 내뱉었다.
“태주 씨, 몸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정말이죠?”
윤수안이 두 손을 쭈뼛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감싸려다 괜히 태주 씨가 더 크게 다쳤다는 거 알아요. 혼자서 피했으면 병원에 입원까지 안 해도 되는데, 괜히 나 때문에 이렇게 돼서 너무 미안해요.”
“수안 씨가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어차피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그리고……”
태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 자리에 수안 씨가 아니라 감독님이 계셨더라도. 저는 똑같이 감독님을 감싸고 차를 피했을 테니까요.”
“……네?”
태주의 말에 이중협과 천경실이 동시에 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 병문안까지 온 여자한테 눈치가 너무 없네!] [……저도 동의해요.]윤수안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포착한 태주.
흡사 그가 눈치 없는 말을 했을 때의 고모의 표정과 비슷하다.
“그래요, 태주 씨한테 나는 늘 그렇죠. 옆에 있으니까 구했고, 드라마 파트너이니까 같이 연기하고. 그뿐이죠.”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빵빵해진 볼은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그만 갈래요.”
“잠깐만요, 수안 씨.”
태주가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이 순간을 평생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일전에 사고 났을 때, 수안 씨가 다칠까 정말 걱정됐어요. 제게 수안 씨는 아무나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태주를 향해 빛을 발하는 초롱초롱한 눈동자.
머리를 수능 때보다도 더욱 열심히 굴리던 태주.
신중한 입이 마침내 열렸다.
이제껏 머릿속에서만 간직하던 생각을 내뱉었다.
“특별하죠, 수안 씨는.”
그 말에 윤수안이 새초롬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퇴원해서 보자는 말을 남긴 윤수안이 그 자리를 떠났다.
태주는 그녀에 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침대 위에 뒹굴뒹굴하느라 아까 못다 한 노래 연습을 계속했다.
오히려 이중협이 옆에서 드릉거리며 그를 닦달했다.
[뭔 소리야, 특별한 사이라고?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데?]‘나도 몰라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에잉, 요즘 애들은 뭐가 이렇게 복잡해!]그때, 문이 또다시 드르륵, 열렸다.
반사적으로 태주가 벌떡 일어나자, 차용석이 코를 훔치며 들어왔다.
“어휴, 차가 왜 이렇게 밀리던지. 대표님이 너 몸보신하라고 인삼 보내셨다.”
그의 눈에 태주의 반듯한 모습이 보였다.
“좀 누워서 쉬지!”
“그럴 예정이에요.”
살짝 실망한 듯한 태주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때, 카톡, 소리가 났다.
-직접 얼굴을 보니 이제야 안심이 돼요. 그럼, 잘 자요.
윤수안의 메시지에 태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빠르게 ‘수안 씨도 잘 자요’ 하고 답장을 치고 있는데.
차용석이 그를 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소속 연예인의 연애를 관리하는 것도 매니저의 덕목이었기에.
* * *
병원에서 퇴원한 태주는 언제 다쳤냐는 듯 원래의 왕성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런데 연예 기사란에서는 아직도 그와 관련된 사고를 다루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가장 많이 띈 기사는 스타뉴스의 기사.
그 어느 것보다도 자세하게 해당 사건을 다룬 기사였다.
홍은지가 쓴 이 기사는 윤수안을 인터뷰해 그녀의 심경도 적어 놓았다.
정말 큰 사고가 날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에, 한태주가 그녀를 구해 줬다고.
자칫하면 드라마가 조기 종영될 수도 있는 상황에,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은 건 기적이라고.
그리고 기사 말미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한편, 드림액터스의 배우 관리에는 주의가 필요할 듯하다. 배우 이중협이 스턴트 사고로 죽은 게 불과 6년 전이다. 그때도 드림액터스가 제작하는 드라마였고, 이번 ‘낭만 고양이’도 드림액터스가 제작하는 드라마.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드림액터스가 제작사로서의 환경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게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본다.
“하아, 홍은지 이거 진짜, 내가 그렇게 쓰지 말라고 했는데!”
기사를 보던 장희재가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안 그래도 이 기사 때문에 오늘, 팬들에게서 항의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홍보팀은 한태주 팬들의 열성적인 항의로 종일 북새통이었다.
우리 배우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말라면서.
아무도 없던 대표실 구석에 처박힌 핸드폰이 투두둑, 미끄러지던 순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표님, 시준입니다.”
“어, 들어와.”
탁시준이 안에 들어오자 그의 발길에 핸드폰이 걸렸다.
그는 익숙한 듯 핸드폰을 집어 장 대표에게 건네주었다.
“아직 약정 남으셨잖아요, 좀 참으시지.”
“스타뉴스의 홍 기자가 기어코 기사를 썼는데. 내가 참을 수가 있나?”
“아, 봤습니다. 안 그래도 스타뉴스 측에 경고해 놨어요.”
“걔가 여병래한테서 진짜 뭐 전해 들은 거 아냐? 둘이 친하나?”
탁시준이 혀를 끌끌 차며 덧붙였다.
“아닙니다. 알아봤는데 둘이 접점이 없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여병래는 지금 한국에 없답니다. 출국기록 확인했습니다.”
“확실해?”
“……예.”
다소 느린 대답이었지만 장희재를 만족시키기에는 충족했다.
장 대표는 편해진 표정으로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홍은지는 왜 이번 기사를 그렇게 쓴 거야?”
“뭔가 있어 보이게 쓰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사실 6년 전에도 중협이 일로 저희 제작사, 안전불감증이네 뭐네 해서 공격 많이 받았잖아요. 그래도 이번에는 스턴트 외주 쪽 문제라 저희한테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그래도 중협이 때하고 비슷하게 사고가 났잖아. 그게 문제라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장희재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한태주가 멀쩡해서 다행이야. 걔한테 걸린 프로젝트가 몇 개인데, 아프면 안 되지.”
“오늘도 촬영장 무사히 출근했답니다. 영화 무대인사도 돈다고 하던데요.”
“일전에 제안받았던 캠핑 패밀리 말야. 그건 어떻게 됐어? 류 피디한테 슬슬 언질을 줘야 하잖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 팀장을 통해 할 거라고 답이 올 겁니다.”
탁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회사에서 자기 키워주는 거 뻔히 알 텐데, 그런 좋은 기회를 걷어찰 애가 어딨습니까.”
“그렇지, 특히나 캠핑 패밀리 같은 국민 예능은 더더욱.”
장희재가 강인한 턱을 쓰다듬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겠지.”
* * *
며칠 후, ABS 방송국.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기실에서 태주가 태양왕 가면을 쓰고 앉아 있다.
저번처럼 프릴이 풍성하게 달린 중세 옷차림을 한 건 물론이다.
핸드폰 메모장에 적힌 가사를 보며 다시 한번 점검하는데.
카톡.
설채빈에게서 문자가 왔다.
화면 한가득 채운, 아주 정성스러운 답이.
2일 전, ‘블루밍’이 컴백해서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냈었다.
-감사해요, 저희 컴백도 축하해 주셔서. 저희 정말 이번에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컨셉은 나르키소스 컨셉이고 노래도 정말 좋아요. 그런데 오빠 몸은 좀 괜찮으세요?
곡 자랑으로 시작한 문자는 곧 그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직접 병문안을 가고 싶었는데 매니저가 막았다느니, 그래도 마음으로는 늘 걱정과 응원하고 있으니 알아달라느니.
여동생 같은 귀여운 말에 태주는 히죽거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 그럼 이런 바보 같은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뻔했으니까.
옆에서 불쑥 이중협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야, 넌 3줄 써줬는데 얘는 화면 가득 써 줬네. 좀 성의있게 써주지 그랬냐, 얘처럼.]흐뭇함에 취해있던 태주가 화들짝 놀랐다.
얼른 핸드폰을 숨기고는 노래를 연습하는 척했다.
“울게 하소서~”
[뭐야, 왜 갑자기 딴짓이야.]그때, 밖에서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양왕 님, 리허설 들어가겠습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