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42
142화
하루 세끼 (7)
다음날.
회사에서 새벽 운동을 폭풍같이 한 태주.
잡생각을 없애는 데는 운동만 한 것이 없었다.
어제 회식의 여파를 완벽히 씻어낸 건 덤이었다.
오늘 아침, 윤수안의 문자를 받고는 더욱 상쾌해졌다.
-제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 것 같은데, 혹시 태주 씨한테 무슨 실수…한 건 아니죠?
태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답을 보내며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나은 거라고.
물론, 옆에서 신득연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듣기는 했다.
[아, 윤수안 팬으로 딱 한 번이라도 데이트해보는 게 평생소원이었는데…. 태주 씨 찬스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를 아쉬워서 어쩌나!]이중협이 어이가 없는 듯 그에게 대꾸했다.
[너 확실히 말해봐. 그게 네 진짜 한 아니었지? 안 그럼 네가 이렇게 태연할 리가 없잖아?] [어어, 그런가요?] [지금도 봐, 태연한 거! 너, 태주 이용해서 사리사욕 채우려는 것 같은데?]남자 귀신 둘이 투덕거리는 걸 뒤로한 채, 운동을 마친 태주는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사서 3팀으로 향했다.
이제 막 출근한 차용석이 흐암, 하품하며 그를 맞이했다.
그가 보던 모니터 앞에는 연예 기사들로 가득했다.
“미안하다, 태주야. 회사까지 너 혼자 왔지?”
“괜찮아요. 형도 어제 밤새 달려서 피곤하잖아요.”
“넌 어째 안 피곤해 보인다? 역시 젊음이 명약인가.”
“여기 숙취해소제요.”
“오, 땡큐. 역시 너밖에 없다니깐.”
차용석은 태주가 건넨 약을 한 번에 들이켰다.
“아, 맞다. 너 이번 주에 패션위크 스케줄 잡힌 거 있다.”
“동대문에서 열리는 거요?”
“어. 이번 주 토요일에 브랜드 ‘이브’라고 여성복하고 남성복 둘 다 다루는 브랜드인데. 거기서 윤수안하고 널 초대했거든.”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태주를 바라보았다.
“낭만 고양이 때문에 너희 둘을 초대한 거 같아.”
“그럼 의상은 그쪽에서 협찬하는 건가요?”
“그렇지. 안 그래도 오늘 오후에 그쪽 디자이너들이 와서 피팅 할 거야. 그리고…….”
서랍을 뒤적거리던 차용석이 그에게 얇은 파일을 건넸다.
태주가 파일을 확인하자 그 안에는 여러 시놉이 있었다.
“아니, 저 이제 막 드라마 끝냈는데 무슨 제안을 이렇게…….”
“너 차기작 확정하기 전에 얼른 자기들 작품 들이미는 거지.”
찬찬히 보던 태주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들어왔다.
“어, 양군보 감독님 작품이 있네요? 좀비 영화인가 봐요?”
작년에 부국제에서 만났을 때 영화 준비하는 게 있다고 하시더니.
이 영화인가 보다.
“아, 그거.”
차용석이 태주 곁에 서서 유심히 시놉을 들여다보았다.
“저번에 독립영화가 잘돼서 그런지, 이번에 상업영화로 데뷔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소재가 너무 마이너하지 않은가 싶다.”
“왜요? 저는 이런 좀비 영화 좋아하는데.”
태주가 시놉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영화의 가제는 ‘탈출(Runaway)’.
한국 최초의 좀비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굵은 글씨로 명시되어 있었다.
“좀비 블록버스터? 할리우드처럼 규모를 크게 가려는 건가? 한국에서는 이 정도 규모의 좀비 영화를 본 적이 없긴 한데.”
차용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였다.
“그런데 태주 너한테 들어온 역할이 애 아빠야. 애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 아빠인데, 직업은 소방관이고.”
시놉을 넘기던 태주가 눈썹을 씰룩였다.
“흐음. 어렸을 때 부잣집 아가씨랑 사고 쳐서 애 낳은 설정이네요. 홀로 아이를 키우다가 부잣집 처가댁에서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데리고 오라는 말에, 가난한 자신보다는 그쪽이 아이에게 더 나을 거로 생각했고요. 그래서 아이를 엄마한테 데려다주려 서울행 열차를 탔다가 거기서 좀비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래요.”
“20대 미혼부라는 거구만. 흠, 너 소화할 수 있겠냐? 아빠의 감성을?”
“태희를 키운 전적도 있는데,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긴, 네가 아이 돌보는 데는 도사지.”
“예전에 염수정 선배님도 23살에 이혼녀 역할 연기하셨는데, 그 드라마 잘 됐잖아요.”
“거기에는 이선우도 같이 캐스팅됐었으니까 그렇지. 이번 영화는 아직 캐스팅도 완전 미정이고…….”
생각에 잠겼던 차용석이 고개를 들어 태주와 마주쳤다.
“아직 시놉이 소속사에 많이 안 돌아서 그런 것 같은데. 일단 시놉은 좋으니까 좀만 기다려 보자, 다른 배우들 누가 붙는지도 좀 보고.”
* * *
같은 시각.
충무로의 영화 제작사, ‘모브픽쳐스’에서 마주 보고 앉아있는 두 남자가 있었으니.
제작사 대표 이제국과 양군보 감독이었다.
이제국은 담배를 한 모금 머금더니 후, 내뱉었다.
“그래, 이번에 한태주한테서 연락 왔어? 시놉 돌렸다며.”
담배 연기를 얼굴에 직격탄으로 맞은 양 감독이 콜록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아직입니다. 그쪽도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의 말에 이제국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내가 남도경 주연으로 하자고 했잖아. 괜히 이거, 한태주가 튕기는 거 아냐?”
“한태주 씨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자네는 그게 문제야, 양 감독. 사람이 너무 우유부단하잖아!”
이제국은 재떨이에 담배를 세게 비볐다.
살짝 짜증이 난 듯 그의 미간에는 주름이 파여 있었다.
“한태주가 누구야, 요즘 최대의 대세 배우잖아. 그런 한태주를 출세시켜 준 건 또 누구고, 자네 아니야?”
“아니요, 그건….”
“솔직히 자네 독립영화 때문에 한태주가 여기저기서 연기 잘한다는 소리 듣게 된 건 맞잖아. 그럼 이번에야말로 은혜를 갚아야지. 자네 상업영화 데뷔작에 냉큼 출연해서!”
이제국의 거듭되는 주장에 양군보는 한숨을 삼켰다.
그 또한 자신의 첫 상업영화에 한태주를 주연으로 쓰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건 온전히 한태주의 몫이다.
영화에 출연하기를 부탁할 수도, 강권할 수도 없다.
배우가 스스로의 의지로 작품에 출연해야 최고의 연기가 나온다고 믿는 양군보였으니까.
“양 감독,이번에 좋은 기회 잘 물은 거야. 나이 40 안 돼서 상업영화로 데뷔하기 쉽지 않다?”
“대표님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양군보가 고개를 숙이자 이제국은 거만한 얼굴로 받아쳤다.
“내가 말야. 이번 영화를 위해서 200억 정도 끌어올 수 있다고.”
“예?”
“중국 헤븐 리조트 있잖아 거기서 우리 영화에 관심을 보이더라고.”
“감사합니다, 잘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좀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 로맨스가 부족하다고 투자자들이 난리거든. 열차에서 마냥 좀비만 퇴치하는 것도 질려요, 그러니까 내려서…….”
양군보는 이제국이 이어가는 내용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런데 양군보의 얼굴이 점점 난감해졌다.
‘무슨 좀비 영화에 베드신을…. 그리고 중간중간에 신파를 넣자고?’
시놉시스 문제로 여러 갈등이 있을 줄 알았지만, 초장부터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대표님, 이건 좀비 블록버스터입니다. 뜬금없는 로맨스나 신파가 들어가면 맥락이 흩어질 겁니다.”
“뜬금없다니. 캐릭터들 간에 감정선을 덧대자는데, 무슨 소리야? 아무튼 시놉부터 고치자. 원래 상업영화는 원안 그대로 가는 경우 없어.”
그 말에 양군보는 입이 쩍쩍 말랐다.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일이 흘러가고 있다.
아니, 애초에 상업 영화판이 이런 건가?
제작사 입맛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 * *
그 주 토요일.
유독 많은 사람이 동대문 플라자에 모인 지금.
포토타임을 끝낸 태주는 윤수안과 함께 패션쇼장으로 항해 VIP 지정석을 찾아 나란히 앉았다.
이런 곳이 익숙한 듯 차분한 태주에게 윤수안이 물었다.
“패션쇼가 처음이 아닌가 봐요?”
“네. 예전에 모델 알바할 때, 쇼핑몰 사장님이 이런 곳에 많이 데리고 와주셨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때 패션쇼를 많이 다녔네.’
유독 열정적인 사장님은 이런 것도 보면 공부가 된다며, 자신과 같이 다니셨었다.
“잠깐만요, 지나갈게요.”
그때, 태주의 옆 빈자리에 앉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 한태주?”
당황한 듯한 여자의 목소리에 태주가 고개를 돌렸다.
‘얘를 왜 여기서 만나지?’
태주는 머리가 잠시 정지되는 것 같았다.
예전에 6개월 사귀고 헤어졌던, 아니 차였던 여자친구, 민소예.
같은 과 동창이었던 그녀는 별안간 더 나은 남자를 찾았다며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었다.
애써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려는 태주에게 이런 말까지 남기면서.
-솔직히 너하고 사귄 게 시간 낭비였어. 너 같은 시시한 남자하고 사귄 시간이 아깝다.
옆에서 윤수안이 태주를 톡톡 두드렸다.
“누구예요?아는 사람?”
은근히 기대하던 민소예의 얼굴을 태주는 처참하게 박살 내버렸다.
“대학 동창이에요.”
“아,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아, 네…….”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사이.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 * *
몇 시간 후.
패션쇼가 끝나고 수많은 연예인과 셀러브리티들로 바글거리는 가운데.
태주와 윤수안은 오늘 패션쇼를 총괄한 디자이너에게 붙들려 있다.
그녀의 이름은 우아림.
커트 머리에 시크한 외모가 인상적인 그녀는 태주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태주 씨도 우리 쇼 모델로 서면 좋겠어요. 프로포션이 너무 좋아서 탐이 나네. 옷 태도 잘 살고.”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서 윤수안이 자랑스럽게 끼어들었다.
“선생님, 예전에 태주 씨 모델도 했었어요. 패션모델이요.”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정말 다음 우리 쇼에 모델로 초대해야겠네!”
맹수처럼 눈을 빛내던 디자이너는 태주에게 연신 말을 시켰다.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간 건 무려 20분 뒤였다.
“하, 목이 탄다, 목이 타. 저한테 엄청 말을 시키시네요.”
“선생님께서 태주 씨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시나 봐요. 원래 1초 컷으로 인사만 하고 가시는 분인데……”
윤수안이 문뜩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옆에 지나가던 모델을 불렀다.
“이진 언니! 오랜만이에요!”
“안녕.”
마른 체구의 모델이 윤수안을 보고 반가워했다.
모델치고는 작은 편인 170cm를 살짝 넘는 키.
백스테이지에서 막 화장을 지우고 나온 그녀는 쌍꺼풀 없는 말간 눈에 갸름한 얼굴, 군데군데 난 주근깨가 인상적이었다.
“태주 씨, 이쪽은 채이진 언니. 우리 회사 모델팀 소속이에요.”
“안녕하세요, 배우 한태주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모델 채이진입니다.”
드림액터스 4팀이라 해서 소속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배우들은 잘 모르는, 모델로만 구성된 팀이 있다.
태주와 채이진이 어색한 인사를 나누자, 윤수안이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 저번에 우리 연말 파티할 때 왜 안 왔어요? 나 언니 진짜 기다렸는데.”
“아, 그날…….”
채이진이 무언가를 숨기는 듯 우물거렸다.
“내가 가서 할 것도 없고. 대표님 얼굴 보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도 같은 식구잖아요.”
윤수안의 말에 채이진은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요즘 쇼도 많이 캔슬되고,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 우리 팀도 곧 해체된다는 말이 있더라.”
씁쓸한 표정의 그녀는 곧 자리를 떴다.
뒤에 남겨진 윤수안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언니 반가워서 말 건데, 괜히 인사했나 봐요.”
“우리 회사에 모델 팀도 있었어요?”
“한때 대표님이 가수, 모델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 하던 때가 있으셨죠. 그때 아이돌 팀하고 모델 팀을 만들었었는데, 아이돌 팀은 데뷔도 못 하고 해체됐고. 모델 팀은 그나마 쇼도 서면서 잘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윤수안이 속상한 듯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웅얼거렸다.
“언니가 요즘 많이 힘든가 봐요.”
* * *
윤수안이 채이진이란 모델을 데리고 온다기에 태주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 구석에서 차용석과 박인우를 기다리고 있는 그때.
뒤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벌써 가게? 나랑 술이나 한잔 하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민소예의 출현에 이중협이 흥미로운 눈빛을 빛냈다.
[쟤 너한테 관심 있나 본데.]‘그런 악담은 하지 마세요.’
이중협의 설레발에도 태주는 냉담했다.
“시간 없어.”
“너 정말…….”
할 말을 잃은 민소예가 애써 얼굴을 가다듬었다.
“요새 티비에서 많이 보이더라. 너 같은 범생이가 배우 된 게 신기하네. 별로 끼도 없었잖아, 너.”
“…….”
별 반응이 없는 태주에게 민소예가 자존심을 바짝 세웠다.
“야, 너 나 이렇게 대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거만한 얼굴의 민소예가 말을 이었다.
“이거 우리 아빠 회사 계열 패션 브랜드 쇼야. 여기 디자이너 선생님하고도 잘 알아. 너희 배우들 협찬 많이 해주는 브랜드라고.”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