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6
16화
전혀 예상치 못한 역할 (2)
“태희야! 무슨 일이야?”
예상치 못한 사촌 동생의 전화.
‘이 시간에 웬일이지?’
-오빠, 지금 뭐 해? 카메라 앞에 있어?
살짝 들뜬 듯한 태희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어, 카메라 앞에 있어. 그런데 왜? 수업 시간 아니야?
-지금 쉬는 시간이야. 내가 오빠 배우라고 하니까 애들이 궁금해해서.
이따금 태희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이렇게 자신에게 전화하고는 했다.
애들한테 나를 자랑하고 싶다나 뭐라나.
-얘들아! 우리 오빠한테 질문하고 싶은 사람 줄 서! 오빠, 지금 카메라 앞에서 배우 하느라고 바빠!
수화기 저 너머에서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태희 오빠가 배우야? 모델 아니었어?
-나 태희 오빠 본 적 있어! 완전 잘생겼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야?
-배우가 정확히 뭐 하는 건데요?
아이들의 속사포 같은 질문들이 마구 쏟아졌다.
그런데 맨 마지막 질문이 태주의 가슴을 쿡, 찔렀다.
“배우가 뭐 하는 거냐고?”
매우 원초적이고 단순한 질문이다.
그리고 복잡한 현재의 심경을 꿰뚫는 질문이기도 했고.
그가 이렇게 복잡미묘한 기분이 드는 이유.
분명 연기가 하고 싶어 다시 배우가 되었다.
그런데 임강현의 존재를 권기도에게 들었다.
임강현은 아역 시절, 그와 라이벌로 꼽혔던 친구였다.
같은 작품에서는 한 번밖에 마주친 적 없었지만.
그 애가 연기를 잘하길, 또 언젠가 같이 연기하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들과 합을 맞추고, 같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즐거웠기에.
그러나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임강현은 자신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
그는 한창 연예계에서 주목하는 라이징 스타.
자신은 열심히 배역을 찾아 연기하는 쌩 신인.
솔직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쉰 게 후회가 되기도 하고, 이제라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조급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배우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사람이야. 난 그게 즐거워서 배우가 됐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사람? 그게 왜 즐거워요?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면서 대신 느낄 수 있으니까. 나는 태희 오빠기도 하지만 백설공주의 난쟁이가 돼보고도 싶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가 돼보고도 싶거든.”
이 모든 답을 하는데 단 한 번의 막힘이 없었다.
그제야 태주는 깨달았다.
‘그래, 나는 연기하는 게 좋아서 배우가 된 거야.’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스타성? 성공? 물론 좋지.
하지만, 그것보다 나는 연기가 재밌어.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마음껏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된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다른 거에 흔들리지 말자.’
찬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거울에 비치는 물에 젖은 얼굴을 보며 외쳤다.
“열심히 하자! 할 수 있잖아, 한태주! 너는 할 수 있어!”
히끕!
소리가 들려 황급히 밖에 나가보니, 심은설이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아 있다.
“하하…….”
그녀가 무안함과 감동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가볍게 쥐어 보인다.
“저도 화장실 다녀오다가……. 암튼 파이팅하세요!”
태주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 * *
화장실에서 돌아온 태주가 현장을 바쁘게 오가던 동락과 마주쳤다.
“왔어? 어디 보자…….”
동락이 태주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후련한 얼굴인데? 혼자서 파이팅하고 있었다며? 충분히 한 거야?”
태주가 멋쩍은 듯 동락을 바라보았다.
“아주 파이팅 넘친다.”
“오케이, 다들 모여!”
중국집 홍콩반점 앞에 스태프와 배우들이 다들 모였다.
오늘 촬영은 배달부로 일하던 명현석이 옛 친구를 마주치는 장면.
함께 체육관을 다니던 친구는 승승장구해서 선수로 성공했다.
반면, 명현석은 현실에 부딪혀 선수를 그만두고, 현재는 배달부로 일하는 상황.
그런 친구와 명현석이 우연히 그가 일하는 중국집에서 마주치게 된다.
“사실 오늘 촬영이 우리 영화의 클라이맥스나 마찬가지야.”
“그렇지. 명현석이 어떻게든 권투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하게 되는 씬이니까.”
“자, 태주야 준비됐어?”
“물론이지!”
태주가 자신 있게 대답하고는 오토바이 위에 앉았다.
“레디……, 액션!”
* * *
“하아…….”
아침부터 열심히 배달 다니는 명현석.
오토바이 뒷자리에 실은 철가방에는 ‘홍콩반점’이 적혀 있다.
홀어머니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권투를 그만두고 시작한 알바였다.
가난해 꿈을 접었으니, 돈을 벌어야 했다.
“오전에만 10탕을 뛰었더니 피곤하네.”
오토바이를 주차하려던 중 중국집 앞에 세워진 고급 승용차를 발견했다.
현석은 본능적으로 차에서 멀찍이 오토바이를 세웠다.
애써 하품을 참으며 오토바이에서 빈 철가방을 내리던 순간.
중국집에서 나오는 세 남자 중 하나가 그를 발견했다.
“어? 너, 현석이 아니냐?”
익숙한 목소리에 현석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티셔츠에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멘 남자가 보였다.
현석을 알아본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맞네, 명현석! 너 권투 그만두더니 여기서 배달하고 있었냐? 나 참, 어디 갔나 했더니만!”
현석은 자신도 모르게 철가방을 뒤로 숨겼다.
고단함이 느껴지던 얼굴이 파스슥 굳어졌다.
애써 숨겼던 자존심이 가루가 되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남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과거를 아는 이에게는 더더욱.
예전에는 함께 체육관을 다니던 동료였지만, 지금은 위치가 달랐다.
그는 나가는 대회마다 승승장구한 성공한 선수.
그러나 자신은 중국집 배달부.
“관장님한테는 얘기 들었다. 뭐, 개인 사정 때문에 권투 그만뒀다면서.”
“어, 그렇게 됐다.”
말을 시키는 남자에게 태주는 애써 자존심을 세웠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어깨를 펴며 애써 몸을 커 보이게 했다.
남자는 태주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현석아. 친구니까 한마디 하겠는데, 넌 의지가 부족해, 의지가. 나 봐라. 열심히 하니까 이렇게 잘 나가고 있잖냐.”
“야, 가자! 시간 맞추려면 지금도 빠듯해!”
고급 승용차에 탄 남자의 일행이 크게 소리쳤다.
남자는 현석을 보며 그의 팔을 탁탁 쳤다.
“암튼 고생해라.”
그리고 차로 가더니 안에 있던 쓰레기 몇 뭉치를 들고나왔다.
“이것도 좀 버려주고. 그럼 수고!”
매캐한 매연을 내뿜으며 차가 자리를 떴다.
현석은 들고 있던 쓰레기를 그대로 땅에 내팽개쳤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지금 자신의 처지도 서러운데 남에게 모멸까지 받다니.
현석은 한참 울분을 터뜨리다 정신을 차리고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눈에 띈 신문 쪼가리.
“권투 생활 체육대회?”
쓰레기 더미에서 재빨리 신문 쪼가리를 꺼내 들었다.
오늘로부터 한 달 뒤에 열리는 권투대회의 공고가 나 있었다.
무시하려 했지만, 자꾸 공고에 눈이 꽂혔다.
‘안돼, 정신 차려. 난 돈을 벌어야 하잖아.’
마음이 요동쳤다.
‘아니, 지금. 돈이 문제야? 내 꿈을 이룰 기회인데!’
“내가 왜 못해? 나도 할 수 있어!”
태주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 속 열망과 승부욕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할 수 있다고! 해낼 거야! 꿈을 이룰 거야!”
멀리서 그를 조명하던 카메라.
천천히 페이드 인했다.
화면을 가득히 채우는 태주의 얼굴.
이를 악무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촉촉이 반짝이더니, 이내 눈물이 번졌다.
* * *
다음날 오후.
태주는 영화 스태프들과 함께 한국예대 영화과 과실에 있다.
오늘은 피르마 단편영화제에 작품을 제출하는 마지막 날.
“오케이, 이게 최종본이야.”
“오후 5시야, 제출 기한까지 1시간밖에 안 남았어!”
“그만 좀 재촉해. 마지막으로 최종본, 한 번만 더 확인하자고!”
동락과 스태프들이 잔뜩 긴장한 지금.
태주는 그들 뒤에서 초조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무사히 제출하기 전까지는.
모두가 노트북 가득 재생되는 영상에 집중했다.
영화는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니는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중국집 앞에서 모멸을 당하고, 신문에 난 권투대회 공고를 보게 된다.
그리고 곧장 훈련에 들어가는 명현석.
열심히 뛰며 주먹을 내지른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작아지더니 희망찬 트럼펫이 희망의 선율을 노래했다.
태주가 복싱대회에 참가하고, 이내 결승전에 오르는 장면이 지나갔다.
땀에 젖은 경기복을 입고 이를 악무는 게 간절해 보였다.
동시에 빛나는 눈은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상반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연기였다.
“하…,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찼다.
태주는 이를 악물고 그저 팔짱을 끼었다.
두 번 다시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의 응원을 받으며 연기했고, 또 작품을 완성했다.
다시 연기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이라 뜻깊었다.
뜨거운 감정을 삼키는 태주를 이중협이 다독였다.
[시작이 반이야, 잘했어. 앞으로도 이대로만 하면 돼.]결승전에서 이긴 태주가 포효하는 거로 영화가 끝났다.
숨죽이고 보던 스태프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좋아. 이건 무조건 된다.”
“이제 10분 남았어, 얼른 제출해!”
“그럼, 제출한다.”
마우스를 몇 번 달칵거렸을까.
마침내 제출되었다는 표시가 떴다.
“됐다!”
그때 과실 문이 열리고 낯선 여자가 등장했다.
“얘들아, 영화 제출했니? 이제 10분밖에 안 남았어!”
태주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낯선 여자의 등장에 동락이 소곤거렸다.
“우리 과 조교 누나.”
“안녕하세요.”
“아, 그쪽이 이번에 대역으로 투입된 신입 배우?”
여자는 태주를 빤히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알아보겠네.”
“예?”
태주의 물음에 여자가 별것 아니라는 듯 미소 짓더니 손뼉을 친다.
“아니에요. 아 참! 학과장님이 너희 저녁 사준다고 나오래. 다른 애들도 있으니까 긴장 말고 편하게 나와.”
조교의 말에 태주는 짐을 챙겼다.
“그럼 난 가볼게.”
그러나 그때.
“함께 가실래요? 특별히 주연배우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학과장님께서 이 영화에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 * *
한국예대 근처 고깃집.
가게 전체가 연화과 학생들로 꽉 찼다.
이형곤 학과장이 ‘피르마 영화제’ 영화 제출로 고생했다며 데려온 학생들이었다.
태주는 ‘마지막 승부’ 스태프들과 함께 앉았다.
다들 무사히 영화를 제출했다는 기쁨에 한마디씩 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영화를 무사히 완성했다는 데 의미를 둔다!”
“솔직히 나는 처음에 조성복 선배 기흉으로 쓰러졌을 때, 진짜 영화 망하는 줄 알았다.”
“그래도 태주가 곧장 주연으로 대체해서 연기를 잘해줘서 다행이지.”
“태주가 큰일 했지.”
“고맙다, 한태주. 너 아니었으면 우리 영화, 엎어졌을지도.”
친해져 말도 편하게 하기로 했지만, 갑자기 칭찬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자 부끄러웠다.
태주가 멋쩍어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모두가 한 작품을 완성하려 노력한 덕분이지. 조명, 음향, 각본, 촬영 담당한 스태프들. 그리고 무엇보다 서동락 감독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다.”
“뭐야, 남우주연상 수상한 것 같잖아! 아주 술술 나오네, 그냥!”
동락이 킬킬거리며 건배를 제안했다.
“마지막 승부 팀. 우리는 인간 대서사시, 전화위복의 대명사다! 그러는 의미에서 건배!”
“건배!”
다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한 건장한 남자가 빈자리에 앉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군. 영화는 잘 제출했나?”
“당연하죠, 학과장님.”
서동락이 넉살 좋게 웃으며 이형곤을 맞이한다.
동락에게 들어 그가 누군지 알고 있던 태주도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이름이 뭐라고?”
이형곤이 흥분한 눈빛을 애써 감추었다.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름을 묻는 그였다.
“한태주입니다.”
그립고도 익숙한 이름.
온몸에 흐르는 전율이 짜릿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