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확신 있는 모험 (4)
앤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국에서 앤드류는 워낙에 흔한 이름이니까요. 아무튼, 편하게 앤디라고 불러주세요. 다들 그렇게 부르거든요.”
한동안 태주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예상외로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케이팝은 잘 모르지만, 폴라리스는 알아요. 내 친구가 엄청난 팬이라서요.”
“영화배우 중에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피셔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질주’의 이선우 연기를 인상 깊게 봤어요. 한 번에 에너지가 폭발하는 그 연기는 정말 굉장했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그에게 태주는 점점 친밀감을 느꼈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와는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연기를 해온 배우들은 일종의 획일화된 무언가가 있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맡아 연기를 해도 깰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래서 일반인을 캐스팅하려고 했던 겁니까?”
“네, 맞습니다.”
그가 커피를 마시며 새파란 눈을 반짝였다.
“제 영화에 진부한 연기는 필요 없으니까요.”
[도대체 자기 영화가 얼마나 좋길래 저러는 거냐? 아무리 런던 필름 출신이라고 해도 졸업생일 뿐인데.]피셔의 자신감에 이중협은 투덜거렸지만, 태주는 호기심이 생겼다.
세상에 천재는 많고 좋은 작품은 더 많다.
특히 예술이라는 건 나이를 가리는 게 아니니까.
“혹시 동양인 스테레오 타입이 적용된 캐릭터를 원하시는 건가요? 공부벌레라든가, 연구원, 박사, 아니면 무술인?”
“왜 그렇게 생각하죠?”
“할리우드에서 90% 이상 동양인을 소비하는 방식이 그러니까요.”
그 말에 피셔가 피식 웃었다.
“할리우드 시장을 정확히 보셨군요. 하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고, 저는 당신을 그렇게 소비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얇은 시놉을 태주에게 건넸다.
“한번 읽어보시죠.”
“괜찮겠어요?”
“당신 같은 프로 배우가 내 시놉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서요.”
‘신기한 사람이네.’
태주는 재빨리 시놉을 읽어 나갔다.
제목은 ‘나의 미래’.
미래에서 온 당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진’.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남자 ‘리’가 그와 의문의 1박 2일의 여정을 함께하는 스토리였다.
영화 초반부는 감동으로 이어지지만, 곧 충격적인 반전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감동 스토리에서 스릴러로 반전되는 영화의 완성도에 태주는 감탄을 삼켰다.
단편 영화 시놉을 보자, 동락과 찍은 ‘마지막 승부’가 생각났다.
‘마지막 승부’가 투박하지만 힘이 있었다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짜여 정교했다.
같이 시놉을 보던 이중협도 옆에서 감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확실히 재능이 있네. 단편에서 이런 기승전결과 메시지 보여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영화 자체가 정말 좋아요. 인물이 단둘밖에 안 나오지만. 이 두 캐릭터가 이끌어가는 힘이 독보적이에요.’
‘그리고 한 번도 내가 해보지 않은 종류의 역할이야. 이 ‘진’이라는 캐릭터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들에서 돈을 갈취하는 사기꾼까지, 다양한 롤을 소화해야 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점차 스토리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거듭해서 시놉을 읽던 태주가 반짝거리는 눈을 들었다.
“당신이 제게 제안하려던 역할이 뭐죠?”
“뭐일 것 같아요?”
태주는 망설임 없이 ‘진’을 가리켰다.
“이 역할이요.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엉뚱함, 신비로움, 그리고 낯섦. 이런 건 이방인의 분위기를 풍기는 제가 제격이죠.”
“빙고! 당신은 감독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배우군요!”
피셔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태주가 물었다.
“그럼, 여기서 리는 누가 하는 거죠? 이 영화의 절반은 리가 이끌어가는데.”
“접니다.”
생각을 정리한 피셔가 태주를 보며 제안했다.
“당신이 진을 맡아준다면, 내가 리를 맡아 연기하고 싶습니다.”
* * *
[너 그거 진짜 할 거냐?]‘하고 싶어요.’
피셔와의 대화를 끝내고 전화번호까지 교환하고 오는 길.
태주는 아까 그와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촬영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런던에서 총 2회 정도 찍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장소 협찬과 그 외 촬영에 필요한 요소는 걱정 안 해도 돼요. 장소는 내 집에서 찍을 거고 촬영은 내 친구가 스태프로 합류할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투성이였다. 이 앤디 피셔라는 사람.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도 그렇고, 마치 거장인 듯 여유가 넘치는 태도도 그렇고.
그렇다고 시놉이 이상하냐, 그건 아니다.
이제까지 본 스토리 중 손꼽힐 만큼 재밌었으니.
“여기 와서 캐스팅 제안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태주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호텔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서자 차용석이 핸드폰을 들고 그를 맞이했다.
“이제 막 전화하려는 참이었는데. 어딜 갔다 왔길래 이렇게 늦었어?”
“카페 갔다가 영화감독이랑 만나서 얘기 좀 했죠.”
“영화감독? 이야, 용케 널 알아봤네, 역시 한태주야!”
“영화감독이긴 한데, 아직 대표작은 없어요. 상업영화 연출부에서 여기저기 일했던 적은 있고요.”
“뭐야, 그럼 아직 송사리잖아.”
태주가 핸드폰을 꺼내 아까 찍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이름이 익숙한데, 혹시 형은 아세요?”
“앤드류 피셔……”
차용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이 사람 피셔 감독 팬이냐? 아니다, 부모님이 팬인가?”
“네?”
“할리우드의 거장 앤드류 피셔라고 있잖아. 얼마나 팬이었으면 얘 부모님이 아들 이름을 그렇게 지었겠냐고.”
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영화제 구경하러 온 사람인데, 런던 필름 스쿨 졸업생이래요. 그리고 자기가 단편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절 주연으로 쓰고 싶대요.”
“길거리 캐스팅?”
태주의 말을 듣던 차용석이 진지한 표정을 했다.
“런던 필름 스쿨 출신이면 실력은 있는 거 같네. 그런데 태주 네가 단편 영화 찍을 위치는 아니잖아. 그리고 런던에서도 ‘탈출’ 로케 촬영도 있고.”
“로케 촬영하고 한국 가기 직전에 3일 정도 비잖아요. 그때 찍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때는 같이 런던 구경하기로 했잖아.”
“그렇지만…. 이 영화,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단편 영화인데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대단해요. 여기 시놉 좀 봐보세요.”
거듭되는 태주의 설득에 차용석이 두 손을 들었다.
“거참, 얼마나 재밌길래 네가 이러는 거야?”
별 기대 없이 태주가 번역해 놓은 시놉을 넘기던 차용석.
심드렁했던 그의 표정이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들자, 태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된다.’
* * *
동 시각, 스타뉴스 본국.
사무실을 급히 빠져나가는 홍은지의 곁으로 우성림이 따라붙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 정말 로카르노 영화제 가고 싶었거든요, 국제영화제의 그 열성적인 열기도 느낄 겸!”
홍은지는 의욕 넘치는 후배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는 둘이 가기로 했던 영화제 취재였지만, 사정이 생겨 우성림만 혼자 보내게 되었다.
“하, 걱정된다. 너 혼자 보내려니까.”
“걱정은 넣어 두세요, 제가 겁나게 잘 취재할 테니까요!”
“우성림. 너, 그냥 해외 나가는 게 좋은 거 아냐? 해외 출장을 해외여행쯤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닙…, 아닙니다! 저는 한태주 씨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선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할 뿐입니다!”
뜨끔한 우성림을 본 홍은지가 피식거렸다.
“그래, 네가 해외 출장이 처음이라 설레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도 이번에 태주 씨 사진은 기막히게 찍어와야 해!”
“당연하죠! 그리고 거기에 유명한 사람들도 여럿 오던데, 그 사람들도 찍어올게요.”
“그래. 이번에 할리우드 감독들 몇몇도 거기에 진출했다며? 근데 너 앤드류 피셔라고 아냐?”
“당연하죠!”
우성림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할리우드의 거장, 영화계의 대부 앤드류 피셔. 80년대에 ‘지옥’ 시리즈로 아카데미 다 휩쓸었잖아요. 그런데 왜요?”
“이번에 피셔 감독이 이글맨 신작 연출한다고 해서.”
이글맨 시리즈.
미국의 ‘DK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슈퍼 히어로 물 중 하나로, 미국에서는 제법 인기 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이글맨의 파이널 편은 피셔 감독이 세운 제작사, ‘피셔 스튜디오’와 합작해 제작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피셔 감독이 그런 프랜차이즈를 제작한다고요? 에이, 말도 안 돼요. 피셔 감독이 얼마나 예술적인 감각을 따지는데요.”
“진짜야!”
주변을 살피던 홍은지가 비밀을 말하듯 귓속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피셔 스튜디오가 드림액터스에 접촉했다는 소리가 있더라고. 아무래도 드림액터스 소속 배우 중에 누구랑 계약해서 본격적으로 할리우드 진출시킬 계획인가 봐.”
“네? 그럼 윤수안이 이제 할리우드 진출한다는 거예요?”
“그건 모를 일이지. 의외의 인물이 될 수도 있고.”
* * *
“어때요?”
태주는 긴장된 마음으로 차용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앤디 피셔의 시놉을 보던 차용석이 황홀한 한숨을 내쉬었다.
“와, 이거 미쳤네.”
좋은 스토리를 볼 때만 나오는 반응이었다.
“좋아, 진짜 좋다. 야, 어떻게 단편에서 이런 완성도 있는 반전이 완성되냐?”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는 태주와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쳤다.
“그런데. 일단은 대표님 의견을……”
“저, 이거 진짜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형이 대표님 좀 잘 설득해 주세요.”
태주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차용석을 바라본다.
“저 진짜 이 작품, 꼭 하고 싶거든요.”
차용석은 태주와 시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촬영 일정도 뺄 수 있었고, 영화감독의 정체도 확실했으며. 영어로 연기하는 경험을 하고 싶다던 태주의 목표에도 부합했다.
그리고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한다는 목적도 좋았고.
작은 영화로 시작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초석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얼마 전 장희재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한태주 말야, 어중이떠중이 같은 영화에는 출연하지 못하게 해.
-예? 그런 영화가 도대체 뭐길래….
-알면서 딴소리야. 이번에 양군보랑 같이 하는 ‘탈출’도 그래. 괜히 거기 발 들였다가 ‘조선패션왕’만 놓쳤잖아.
잔뜩 예민해진 장희재는 차용석에게 당부, 또 당부했다.
-이제 한태주는 친구 단편 영화나 도와주는 군번이 아니라고. 급에 맞는 작품을 찍어야지! 용석이, 네가 책임지고 그런 거 못 찍게 막아.
‘내가 이런 거에 환멸 나서 이 회사를 떠난 거였는데.’
그렇지만 이 시놉, 너무 좋단 말이야.
차용석은 태주가 가져온 앤디 피셔의 시놉을 보고, 또 보았다.
단편 영화지만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충분히 태주가 매력을 느낄 만했다.
그리고 감독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될지도 몰랐다.
할리우드의 거장들도 다들 송사리 시절이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한 달 걸리는 것도 아니고, 2회차 촬영이면 뭐.
천년 같은 1분을 생각한 그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래, 하자.”
태주는 차용석의 승낙에 환히 웃었다.
“역시 형은 날 이해할 줄 알았다니까! 역시 내 매니저예요!”
“대신, 런던에서 관광 시간은 없어. 그 시간 빼서 이 영화 찍는 거야. 그리고….”
차용석이 엄격한 표정으로 태주에게 말했다.
“조만간 앤디 피셔한테 좀 만나자고 해. 삼자대면 좀 하자고.”
* * *
동시각.
드림액터스 대회의실에 모여있는 수명의 직원들.
그리고 상석에 앉아 있는 장희재 대표.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건 커다란 스크린이었다.
화면 속 새파란 눈의 중년 남자가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몇 년간 베일릭스에서 괜히 한국 콘텐츠가 상위권을 차지했던 게 아니죠. 그 이면에는 한국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페이소스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에 떨어뜨려 놓아도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한국 배우들의 노력은 정말 인정해 줘야 합니다.”
커다란 방 안에 그의 목소리만이 크게 울려 퍼지는 순간.
장희재도 홀린 듯 피셔의 말을 경청했다.
이번 회의는 드림액터스의 할리우드 진출 재시도와 한류 시장을 노린 피셔 감독의 니즈가 맞아떨어진 협상 자리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드림액터스 대 피셔 스튜디오가 협상하는 자리였다.
피셔 스튜디오.
할리우드의 거장, 앤드류 피셔 영화감독과 그의 아내인 프로듀서 수잔 라일리가 공동 대표인 영화 제작사이자 에이전시였다.
10여 년 전 세워진 피셔 스튜디오에서는 피셔 본인이 감독한 영화뿐만이 아닌,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들도 제작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에 좋은 배우들이 많습니다.”
장희재가 모니터에 들어갈 것처럼 열성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김결이라는 친구는 남성적인 매력에 마스크가 좋고요. 윤수안은 동양과 서양의 미를 동시에 갖춘 마스크에 액션 연기도 하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한태주는요?”
피셔는 동그란 안경을 벗으며 형형한 눈빛을 드러냈다.
“저희는 한태주를 원하고 있습니다만.”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