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확신 있는 모험 (8)
송도준이 태주의 품에 뛰어들자 수많은 구경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설마 저 아이, 진짜 한태주 아들은 아니겠지?”
“뭔 소리 하는 거야. 쟤 이번에 한태주 아들로 캐스팅된 아역배우잖아.”
“근데 한태주하고 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저렇게 잘생기고 젊은 아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쁘게 플래쉬를 터뜨리던 사람들의 시선은 곧 태주에게로 향했다.
그때, 스태프 속에서 도준이의 엄마가 튀어나왔다.
“도준아, 형한테 그게 뭐야. 예쁘게 인사해야지!”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진 도준의 엄마.
한결 여유도 생긴 것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태주가 꾸벅 인사했다.
“괜찮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도준이는 제 아들이나 마찬가지인걸요.”
“맞아. 우리 아빠야, 태주 형이!”
도준이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태주에게 와락 달려들자.
태주는 태희에게 해주는 것처럼, 도준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형도 도준이 봐서 너무 좋아.”
태주의 말에 아이의 볼이 사과처럼 붉어지는 모습에 구경꾼들의 눈은 더욱 반달로 변했다.
“아, 진짜 사랑스럽다.”
“이번 영화에서 한태주 대박이겠는데. 아역배우하고도 케미가 좋네.”
그들은 누가 뭐랄 것 없이 동시에 말했다.
“이번 영화 진짜 기대된다.”
* * *
호텔에서 쉴 새도 없이, 태주는 곧바로 촬영을 위해 나왔다.
영국 지리에 익숙한 양군보 감독은 능숙하게 제작진과 배우들을 이끌었다.
“트라팔가 광장은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촬영하는데 용이하지 않으니, 일단 교외로 나갈게요.”
여러 대의 차를 빌려 그들이 간 곳은 킹스턴이란 동네.
런던 번화가는 아니지만 제법 발전한 곳이었다.
태주는 송도준을 데리고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무리의 동양인들이 촬영 장비를 가지고 이동하자 주변에 지나가던 영국인들이 신기한 듯 그들을 쳐다본다.
송도준은 양군보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여기 큰 도시예요?”
“흠…. 우리나라로 치면 뭐랄까…… 경기도 분당 같은 곳?”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번화가네요.”
“아무튼, 좋은 곳이에요. 내가 예전에 영국 유학했을 때 홈스테이 했던 곳이기도 하고.”
“감독님 영국 유학파셨어요?”
양군보의 말에 태주가 놀라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생긴 건 토종 한국인이어도 제법 외국 경험도 있다고요. 아, 저기 오네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헤이, 군보!”
인도계, 동양계, 북유럽계 등등 여러 인종이 섞인 그들은 양군보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양군보는 그들을 태주에게 소개하며 씩 웃었다.
“내가 일전에 런던에서 공부했을 때 만났던 친구들이에요. 지금은 다들 영화 쪽에서 일하고요. 오늘은 내가 촬영한다니까 현지 스태프로 도와준다고 왔어요.”
양군보의 친구들이라는 그들은 태주를 보고 놀란 듯 악수를 청했다.
“군보가 당신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는 소식에 매우 놀랐습니다. 당신은 군보의 영화가 아닌 더 좋은 영화로 갈 수 있는 급이잖아요.”
다소 짓궂은 어조에 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양 감독님 영화가 제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그의 말에 남자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군보, 네 배우와 스태프들이 다들 자부심이 가득하네.”
“그럼 반은 성공한 셈이지. 자, 우리도 어서 군보를 도와 보자고.”
양군보의 친구들 덕택에 현장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촬영한다고 미리 그들이 구청에 신고해 준 터라 아무런 제재 없이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카키 잠바와 낡은 청바지를 입은 태주는 대본을 보다가 도준을 힐끔거렸다.
역시나 대본에 푹 빠진 도준이였지만 이따금 주변을 살피며 긴장하는 듯했다.
“도준아.”
“네?”
“긴장되니?”
그 말에 도준이가 그의 허리를 와락 안았다.
아이의 덜덜 떨리는 볼이 그에게 오롯이 전해져 왔다.
태주는 도준이를 안아 등을 토닥였다.
“긴장하는 건 당연한 거야, 도준아. 그러니까 나를 진짜 아빠라고 생각하고 기대도 돼.”
“…정말로요?”
도준이가 큰 눈을 빼꼼히 내밀자 태주가 씩 웃었다.
“너 아까 형 봤을 때 아빠라고 했잖아. 형은 너 아들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아니었어?”
“아뇨…. 맞아요, 아빠!”
도준이가 씩 웃자 태주는 아이의 볼을 슬쩍 잡아당겼다.
“귀여운 녀석.”
“자,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양군보 감독의 큐 사인이 울리자, 태주는 도준이의 손을 잡고 쇼핑거리가 펼쳐지는 시작점에 섰다.
태주는 숨을 차분히 골랐다.
옆에서는 이중협과 데보라가 구경꾼처럼, 그를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양 감독의 사인.
“레디…, 액션!”
* * *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영국의 한 거리.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한 부자가 있었다.
“맛있냐, 아들?”
“응! 엄청 맛있어!”
남자의 손을 꼭 잡은 남자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아이의 입가에는 조금 전까지 먹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아이의 입가를 손으로 훔쳤다.
“응?”
“초콜릿이 묻어서 아빠가 닦았어.”
아이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못내 다정했다.
잠시 걷던 그들은 길거리의 한 벤치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음악을 감상하며 대화 없이 가만히 있던 남자를 아이가 툭툭 건드린다.
“아빠, 우리 오늘처럼 이렇게 지내면 안 돼요?”
“응? 무슨 소리야?”
아이가 망설이듯 말했다.
“아빠 평소에 너무 바쁘잖아요. 근데 앞으로도 이렇게 나랑 둘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유성아. 이것도 겨우 온 거야.”
남자가 한숨을 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하도 영국 여행 오고 싶다고 해서. 아빠가 정말 열심히 돈 모아서 온 여행이잖아. 그러니까 응석 부리지 마.”
“아빠…….”
“그리고 외할머니한테 전화 드려야지.”
남자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외할머니가 네 전화 기다리고 계실 거야. 영국에서 잘 놀고 있다고, 전화해.”
아이가 잔뜩 불퉁해진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전화하는 대신, 아빠에게 머리를 들이받았다.
“아! 야, 너 뭐하는 거야!”
“아빠는 나랑 있으면서 왜 딴생각만 해요? 난 아빠 생각만 하고 있는데!”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아이 엄마를 꼭 닮은 아이를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부잣집 외동딸이었던 아내와 만나 생긴 아이.
자신과 사랑에 빠져 동거한 아내는 그 덕에 친정과 연이 끊겨버렸지만. 그래도 행복한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간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친정과의 단절과 아껴 써야 하는 살림에 지쳐버린 아내와 자주 갈등을 빚기 전까지는.
처녀 때의 사치스러운 씀씀이를 잊을 수 없던 아내는 남자에 대한 분노가 나날이 쌓였고.
결국, 잦은 부부싸움으로 번져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친정으로 떠났다.
친정에 돌아간 아내는 아이마저 귀찮다며 그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장인 내외는 아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고, 부잣집인 자기들에게 넘기라 했다.
위험한 소방관이란 직업을 가진 남자는 자신보다 부잣집 외가댁에서 자라는 게 아이에게 좋을 거라 판단했다.
하여 마지막으로 아이와 여행을 온 것이다.
아이가 그렇게 오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런던에.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아이만큼이라도, 꼭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가 그를 잊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를 악물던 남자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앞으로 유성이, 아빠 생각하지 마. 외갓집에서 잘 살아야지, 아빠는 너한테 걸림돌만 될 뿐이야. 그러니까……”
눈이 동그래진 아이에게 남자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매정하게 말한다.
“아빠는 이만 잊어.”
* * *
“와, 태주 씨 감정선 봐.”
카메라 화면을 뚫어져라 보던 양군보가 혀를 내둘렀다.
“원래 굴곡 있는 연기보다 이런 잔잔한 연기 잘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하잖아. 그런데 태주 씨는 역시나, 잘한다.”
옆에 있던 서동락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준이랑 연기 합이 잘 맞을까, 좀 걱정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둘이 진짜 아빠와 아들처럼 합이 척척 맞아요.”
“저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만 몇 개야. 사랑, 죄책감, 강경함…… 감정선이 제법 복잡한데 잘 소화하고 있어.”
만족스러운 표정의 양군보가 손을 올렸다.
“오케이, 컷!”
길거리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태주와 아역배우 송도준은 생각보다 잘 맞는 파트너였다.
서로의 감정을 배려하는 건 물론, 진짜 아빠와 아들처럼 서로를 대했다.
서로에게 투정을 부리고 서운한 표정으로 입을 비죽 내밀면서도 서로를 힐끔거리는 모습도 리얼했다.
“와, 진짜 이 영화는 태주 씨하고 도준이 케미가 다 살렸다.”
양군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태주가 도준이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도준이가 잘해줘서 그렇죠. 저 아역 때도 이렇게는 못 했는데, 도준이는 천재인가 봐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태주의 칭찬에 쑥스러워하는 도준이를 다들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난 촬영.
다들 한잔하러 펍에 간 그때.
태주는 도준이를 호텔에 있는 엄마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태주를 유독 반가워하면서도 미안해했다.
“도준이 때문에 고생 많으시죠. 제가 현장까지 따라갔어야 하는 건데,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오늘 도준이 덕분에 촬영을 정말 즐겁게 했습니다.”
“나 아직 안 피곤한데, 형 따라가면 안 돼요?”
도준이의 투정에 태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 그가 수없이 들었던 말을 드디어 써먹었다.
“아직 도준이는 어려서 못 가. 나중에 크면 데려가 줄게.”
* * *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영화 ‘탈출’의 제작진과 배우들의 술자리가 벌어졌다.
“헤이, 군보! 군보!”
“흔들지 마, 속 쓰려….”
기네스 맥주 두 잔에 잔뜩 취해버린 양군보 감독이 소파에 쓰러져 드르렁 코를 골았다.
태주는 맞은편에 있던 양 감독의 친구들과 술잔을 맞댔다.
“그냥 둬, 원래 술이 약한 애잖아.”
“영국 유학 때보다도 술이 더 약해진 것 같아!”
“원래 군보가 술은 약했지.”
“태주 씨는 그 반대네!”
태주는 씩 웃으며 술을 마셨다.
학창시절, 영어를 미리미리 공부해 두라는 고모의 말을 들은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그때는 잔소리로 여긴 게 지금은 큰 도움이 되네.’
양군보 감독의 친구라는 이 사람들, 하나하나 뜯어보니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DK 스튜디오 소속 미술팀, 메솔린 감독 휘하 조감독 출신 등등 커리어가 화려한 가운데.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피셔 감독님 밑에서 조연출하셨다고요?”
“네, 뭘 그렇게 놀래요? 대단한 것도 아닌데.”
태주의 동그래진 눈에 남자가 피식거렸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대단한 거네요. 성깔 있는 피셔 감독 밑에서 10년을 버텼으니.”
“하하, 피셔 감독님이 좀 완강한 면이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태주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만난 적 있어요?”
태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영화 일로 만난 것을 살짝 흘리는 건 괜찮다고 판단했다.
“이번에 신작 준비하시는 거로 연락 주셨어요. 그런데 캐릭터 해석이 달라서 지금은 보류 상태입니다.”
“잠깐만요. 이번에 피셔 감독이 제안 줬다는 그 영화, 이글맨 시리즈인가요?”
“네, 맞습니다.”
태주의 말에 남자는 눈을 부릅떴다.
“그 영화 진짜 하지마요. 그런 쓰레기 영화, 해봤자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
남자의 흥분에 옆에 있던 친구들이 그를 말렸다.
“토니,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가 그 인간 밑에서 나온 게 그 쓰레기 같은 영화 때문이잖아. 그 양반, 연출만 맡을 것이지 각본에도 손을 대서 말이야. 캐릭터 설정붕괴에 플롯도 그렇게 늘어질 수가 없다고!”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