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할리우드 강제 진출 (1)
피셔 스튜디오.
조용한 적막 속 직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다, 점심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갔다.
식당에 들어서 음식을 흡입하던 이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요즘 사무실 분위기 장난 아니야.”
“그러니까. 감독님 진짜 무섭다니까.”
“이글맨 시리즈 준비하면서부터 우리 회사에 완전 쓰나미가 온 것 같다고.”
“그런데 요즘은 그 여자 안 오지?”
“누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직원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미세스 마녀.”
“아, 수잔?”
앤드류 피셔 감독의 부인이자 현 제작사의 공동 대표인 수잔 피셔.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직원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따가 오후에 온다고 했어. 안 그래도 걱정이야, 이번에는 또 뭐 가지고 영화에 딴지를 걸지.”
“그 여자가 하도 건드리는 바람에 각본이 아직까지도 완성이 안 된 거잖아.”
“이번에 이글맨 마지막 시리즈 집대성하는 단계인데 그 여자 때문에 망치게 생겼다고!”
여자 직원이 숨을 죽이며 빠르게 말했다.
“이글맨 설정붕괴 된 건 알지? 브루스터 리를 완전히 섹시맨으로 그려놓은 건 또 어떻고?”
“브루스터 리 캐릭터 말야. 이대로 그리면 완전 욕먹을 것 같지 않아?”
“솔직히 세계 최강자 무술인인데 그렇게 섹시한 면모만 강조하면….”
“더욱이 대사도 거의 없어.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장면이 베드신이라니…….”
직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한태주한테서는 연락 아직이지?”
“할리우드 이글맨 시리즈인데 아직도 답이 없어?”
“캐릭터 설정붕괴가 너무 많이 됐으니까. 게다가 노출 수위도 상당해. 배우로서는 부담될 수 있어.”
“하지만 피셔 감독님에, 이글맨 시리즈인데?”
“헤이, 정신 차려.”
여자가 책상을 탁, 쳤다.
“아무리 좋은 감독이 붙어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는 게 이 바닥이라고.”
* * *
몇 시간 후.
피셔 스튜디오에서는 우렁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직도 드림액터스 측에서 답이 안 왔단 말야? 한태주는 답도 안 주고 뭐하는 거래?”
“그게….”
“아무리 촬영 중이라지만 대략적인 답은 줄 수 있잖아! 시놉은 읽었는지, 화상 회의는 언제쯤 할 수 있는지 쯤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직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드림액터스 장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단은 한태주 말고 다른 배우들을 보는 게 어떠냐고 합니다. 영어 되고 잘생긴 배우들이 많다고, 저번에 말했던 김결 배우도 있으니 한번 보기라도 하시……”
“내가 언제 대체재를 원한댔어?”
피셔 감독이 주름진 얼굴을 쓸어올렸다.
“자존심 상해서, 진짜.”
기분이 나빠진 그가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각본 수정하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여기 새로 나온 각본입니다.”
얼마 훑어보지도 않은 피셔 감독의 눈이 한껏 찡그려졌다.
탁.
두꺼운 종이 뭉치들을 책상에 내려치며 소리쳤다.
“대사 이렇게밖에 못 써? 내가 말했잖아, 좀 더 아름답고 철학적인 의미를 담으라고!”
“최대한 신경 썼습니다만….”
“신경을 쓰기는 뭘 써. 여기 버젓이 욕설이 즐비한 건 뭔데?”
피셔 감독은 잔뜩 짜증을 내며 페이지를 여러 차례 넘겼다.
“여기도, 저기도. 내가 그리 고치라고 했건만, 아직도 욕설투성이잖아.”
“하지만 감독님.”
직원이 쩔쩔매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이글맨은 태생이 거칩니다. 평소에는 욕설을 삼가지만. 감정이 격해지거나 억울한 일을 겪을 때, 힘든 일을 겪을 때는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는 캐릭터죠. 그런 면들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줘, 이제껏 이글맨이 사랑받았던 이유기도 하고요.”
“그래도 바꿔! 내 영화에서 이글맨이 천박하게 입 놀리는 건 두고 봐줄 수가 없어. 난 말이야, 이글맨 시리즈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이번 영화를 완전한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놓을 거라고.”
직원은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80년대를 지배했던 거장이 지금은 똥고집을 부린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때.
“여보.”
피셔 감독의 부인, 수잔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느 여배우만큼이나 미인인 그녀의 등장에 직원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이번 영화 캐스팅이 안 됐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아, 여보….”
당황하던 피셔 감독에게 그녀가 눈을 한껏 찡그렸다.
“아직도 확답이 안 온 거야?”
“그게….”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수잔이 그의 어지러운 책상을 훑어보더니, 눈에 띈 문서를 집어 들었다.
“차라리 얘가 낫지 않아? 연기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고. 무슨 그리스 조각 같이 생겼잖아.”
그녀가 집어 든 건 백시영의 사진.
그녀의 말에 피셔 감독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걔는 안돼, 여보. 한국에서 활동 중단했다는 거 못 들었어? 무엇보다, 걔는 영어가 안돼서 우리 쪽에서……”
“그러니까 딱이지. 브루스터 리 역할은 대사도 별로 없잖아. 몸 좋고 섹시하면 됐지.”
“아니, 걔는 안 된다니까….”
“여보.”
거만한 표정의 수잔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내가 하라면 그냥 해, 알았어?”
피셔 감독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명문가 가문의 따님인 수잔은 이 제작사를 세우게 한 일등공신이자 거액의 투자자이기도 했다.
잔뜩 긴장한 피셔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미소를 지은 수잔이 나가려다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최근에 재밌는 걸 알아냈어. 선플라워 프로덕션에서 키우는 애송이 감독이 있다던데? 앤디 피셔라고. 어떻게, 내가 파봐도 괜찮을까?”
그 말에 피셔 감독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 *
동 시각, 런던.
태주가 아침 일찍 조깅하고 방에 들어왔다.
어젯밤 영화 ‘탈출’의 촬영을 마치고 제작진과 술자리를 가졌다.
다른 사람들은 오늘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태주는 2일 정도 더 체류하기로 했다.
앤디 피셔와 단편영화를 찍어야 했기 때문.
태주는 재빨리 대본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미래에서 온 아들이라고 말하는 설정이 신선하고도 재밌었다.
영어로 된 대사를 한창 외우고 있는데 차용석이 비몽사몽 한 채 깨어났다.
“태주야. 우리 어제 어떻게 호텔에 들어온 거냐?”
“제가 형, 업고 들어왔어요. 형이 토한 것도 다 수습하고요.”
“미안하다, 진짜.”
얼굴이 벌개진 차용석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앤디랑 같이 영화 촬영하기로 했잖아요.형도 이따가 시간 되시면 와서 구경하세요.”
“이따가라니? 나 너랑 같이 현장에 갈 건데.”
“네? 형 런던에서 쇼핑하고 싶은 거 있었다면서요, 저는 촬영하고 있을 테니까 형은 해롯 백화점 가서….”
“뭣이 중하냐? 내가 지금 쇼핑하는 것보다는 너 촬영 봐주는 게 더 중하다!”
차용석이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조금만 기다려, 나 얼른 씻고 나올게!”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태주가 조깅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이중협이 데보라와 함께 들어왔다.
[레이디 퍼스트입니다.] [호호, 친절하셔라.]평소에는 장난기 많던 이중협이 데보라 앞에서는 세상 정중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데보라를 데리고 발코니에 나가서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하호호거리며 웃음꽃이 피는 게 꼭 봄이 온 것 같다.
‘뭐지, 마음 한구석이 시린 것 같은 이 기분은?’
옷을 갈아입은 입은 태주는 다시 대본을 집어 들었다.
어제 밤을 새우다시피 분석한 종이는 구깃구깃했다.
“연기에나 집중하자.”
곧 진지해진 태주의 시선이 대본에 푹 빠져들었다.
* * *
오늘 영화를 찍기로 한 곳은 런던의 한 공원.
차용석과 함께 도착한 태주는 미리 와 있던 앤디 피셔와 그의 친구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오스틴 호로위츠입니다. 오늘, 스태프로 왔습니다.”
자그마한 남자가 흥미로운 눈빛을 빛냈다.
“앤디와는 대학교 때 만나서 지금까지 완전 절친이죠.”
앤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절친이니까 런던까지 날아와서 영화 촬영을 도와주는 거죠. 지금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친구거든요. 사운드 엔지니어 쪽에서는 알아줍니다.”
오스틴이 눈을 찡긋했다.
“다행히 지금은 휴가 중입니다.”
호감형 외모와 더불어 유쾌한 입담이 빛이 나는 오스틴은 촬영을 도와준다고 했다.
오전 시간, 조깅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피해 찾아온 한가로운 벤치.
태주는 미리 준비한 청자켓과 검은 청바지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대본을 본 후, 앤디와 몇 번 합을 맞춰보았다.
“지금 찍을 씬은 거의 마지막 부분이죠?”
“네, 일정상 뒤에서부터 찍어야 할 것 같아요. 감정 몰입하는데 괜찮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감독 겸 배우인 앤디는 태주에게 눈짓했다.
“준비됐으면, 시작할까요?”
태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촬영이 시작됐다.
* * *
하이드 파크에 홀로 앉아있던 깡마른 남자 옆에 동양인 남자가 앉아있다.
둘 다 눈앞의 풀밭만 바라보는 적막함 속.
먼저 입을 연 건 동양인 남자, 진이었다.
“나 이제 가봐야 해, 아빠. 타임머신 작동 시간이 다 됐어.”
“아, 그렇지. 정오면 가봐야 한다고 했지.”
남자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다시 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검은색 눈동자가 말갛게 빛나던 순간.
진이 남자를 향해 말했다.
“힘내서 잘 살아, 아빠.”
“힘든 게 인생이지, 뭐.”
남자가 진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난 3일 동안 네가 있어서 제법 재미있었단다. 가족도 없고 여자친구랑도 깨지고. 내 인생 정말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와서 좋았어.”
퍽이나 좋았겠다, 너는.
남자를 보는 진의 눈길은 비웃음에서 해방감으로 변했다.
그는 지난 3일간 남자와 보냈던 나날들을 회상했다.
사기꾼인 그는 지난 한 달간 돈을 뜯어낼 사냥감을 물색, 눈앞의 남자로 결정한 바 있었다.
늘 혼자 다니며 외로워 보이는 남자.
별다른 직장도 없이 늘 집에서 혼자 지내는 그는 돈을 뜯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가 공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맞는 사기 계획을 완벽히 세웠다.
가족도 연인도 없이 외로운 그에게 미래에서 온 그의 아들이라며 지난 3일을 같이 보낸 것.
처음에는 남자가 그를 미친놈이라 의심했지만, 나중에는 그의 외로움을 보듬고 그 자체로 좋아해 주는 진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꼭 진짜 아들처럼 대해주기도 했고.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이 잘생긴 동양인 청년을 말이다.
처음에는 사기꾼의 마음으로 접근했던 진도 차차 다정한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진심으로 그를 대하며 마음이 불편해질 무렵, 3일간의 만남이 끝났다.
“나도 아빠랑 있어서 재밌었어.”
잠시 망설이던 진이 남자를 힐끔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사기극에 끝을 낼 시간이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빠는.”
재빨리 말을 쏟아낸 진이 벌떡 일어났다.
비밀을 숨긴 듯 그의 눈이 왈칵 흔들리자 남자가 그를 잡았다.
“너…, 안 가면 안 되냐?”
아무런 대답을 안 하는 진에게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너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네 정체도 궁금해하지 않을게. 그냥, 내 곁에 있어 줘.”
“나도 아빠 곁에 있고 싶어. 그렇지만, 이제는 정말 가야 할 시간이야.”
“진!”
“미래에 내가 이렇게 태어났다는 거 알았으니. 아빠, 이제는 함부로 혼자 될 생각 하면 안 돼.”
진이 남자를 보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인생은 사계절이라고 하잖아. 지금이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라면 언젠가는 꼭 봄이 올 거야. 그러니까 아빠, 꼭 버티고 버텨.”
그가 배낭을 메고 떠나려는 그때.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의 목덜미를 와락 잡았다.
“다시 혼자가 되기 싫어. 네가 있는 지난 3일 동안 외로움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거든.”
“아…, 아빠!”
“누가 네 아빠야, 이 사기꾼아.”
진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남자의 광기 어린 시선이 비쳤다.
“나 뜯어먹어도 좋아, 돈 다 가져가도 좋아. 대신, 내 곁에 있어.”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