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8
18화
전혀 예상치 못한 역할 (4)
당황한 태주에게 윤이도가 대본을 넘겼다.
보기 좋게 펴진 페이지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호위무사 성계훈?”
“중전을 모시는 무사야. 스토리 고려해서 만들어낸 배역이고. 재하 씨도 이리로 와 봐요, 설명해줄 거 있으니까.”
저쪽에 있던 강재하가 빠르게 태주 옆에 섰다.
태주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친밀감을 표시하는 그.
윤이도가 빠르게 설명에 들어갔다.
“호위무사가 왕을 대신해 밤에 침소를 지키는 것이 반복되자, 왕비가 밤의 왕과 낮의 왕이 다르다는 점을 의심하게 돼요. 그리고 낮에 종종 누군가 자신을 몰래 지켜준다는 것도 눈치채고요. 그러던 와중에 왕비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왕의 광증은 더욱더 심해지고. 왕은 친정을 다녀오는 왕비를 자객들을 시켜 암살하려 하는 거예요.”
“그럼 자객들과 맞닥뜨리는 이 씬에서, 왕비의 호위무사가 몰래 뒤따라오던 호위무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겁니까?”
“그렇지. 태주, 이해력이 빨라서 좋아.”
윤이도는 강재하와 태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기서 호위무사 민정후가 왕비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요. 그리고 자객들의 집중포화로 치명상을 입은 성계훈은 민정후에게 왕비를 당부하고는 장렬하게 죽는 거고요.”
태주가 대본을 넘겼다.
현장에서 만들어진 배역, 그리고 대사.
고작 한 줄일 거로 생각했던 분량이 생각보다 길었다.
이 씬의 오롯한 주인공. 그것이 바로 자신이 맡은 배역이었다.
“오…….”
“할 수 있겠어?”
윤이도의 강렬한 눈길을 받은 태주는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대본을 꼭 쥐었다.
“네.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해보겠습니다.”
* * *
약 한 시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대사를 외우고 액션 라인을 맞춰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해내야 했다.
이름이 주어진 첫 배역이다.
태주는 화면에 얼굴이 나오는 소중한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대사를 외우고 또 외웠으며 무술팀과 합을 맞출 때 실수가 나오지 않게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 역을 맡은 배우들과 몇 번이고 리허설을 했다.
지금까지 그가 했던 연기는 남들과의 감정 교류가 없는 솔로 플레이였다.
‘마지막 승부’에서 명현석은 홀로 고군분투했다.
‘그림자 무사’에서는 뒷모습 대역, 액션씬의 한 파트를 맡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왕비의 호위무사로서 왕비를 지키고 그림자 무사에게 그녀를 부탁해야 했다.
자신의 감정을 다른 이에게 오롯이 전달하는 것.
그것이 태주가 이번 씬에서 보여줘야 할 과제였다.
“자, 이제 찍어봅시다. 각자 자리로.”
윤이도의 부름에 태주는 윤수안이 탄 가마 옆에 가서 섰다.
숨을 가다듬었다.
‘왕비를 지키는 호위무사로서, 최무백의 검술을 백분 발휘해 후회 없는 연기를 하자.’
“레디, 액션!”
* * *
한가로운 저녁.
노을이 뉘엿뉘엿 지는 이때.
왕비가 탄 가마가 느리게 한적한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다.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마는 지름길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길로 굽이굽이 돌아갔다.
호위무사가 가마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해가 지고 있습니다. 궁에 당도하시려면 좀 더 빠르게 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빨리 가고 싶지 않다. 궁에 최대한 늦게 가고 싶어서 이러니, 이해해다오.”
가마 안에서 나오는 힘없는 왕비의 목소리.
무사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살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지는 한 식경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파스스.
골목길 어딘가에서 자객 여럿이 나타났다.
“곱게 죽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는 그들.
호위무사는 가마를 열어 덜덜 떨고 있는 왕비를 꺼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것이냐? 저자들은 다 누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다해 마마를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누군가를 향해 외쳤다.
“중전마마를 지키고 싶거든 나와서 날 도우시오!”
그러자 몸을 숨기고 그들을 따르던 그림자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객들은 내가 상대할 테니, 얼른 중전마마를 모시고 떠나시오, 어서! 마마, 어서 저자를 따라가십시오.”
그림자 무사는 왕비를 데리고 서둘러 사라졌다.
홀로 남은 왕비의 호위무사는 왕비를 쫓으려는 자객들을 있는 힘을 다해 막았다.
“네놈들은 결코 중전마마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셀 수 없는 칼날들이 비처럼 들이치던 순간.
태주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칼날의 움직임이 마치 섬광과도 같았다.
눈앞에 있던 적들을 단번에 베고, 재빨리 움직여 뒤에서 내려치는 검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틈을 봐 빠져나가려는 자객들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명을 상대했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깊게 베인 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 검을 들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이제는 한계였다.
“젠장……”
마지막 남은 적 하나가 도망치려 하자. 그를 쫓으려 호위무사가 발걸음을 옮겼다.
툭.
그러나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그때.
왕비가 어디에선가 나타나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태주의 피 범벅된 몸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왕비의 얼굴은 눈물바다였다.
“눈을 떠라, 성 무사! 눈을 떠! 죽으면 아니 된다!”
“왜 여기 오셨습니까……. 그 무사는…….”
“여기 있습니다.”
그림자 무사가 진지한 얼굴로 옆을 지켰다.
태주는 간신히 눈을 떴다.
“기댈 곳 없이 외로우신 분이십니다……. 광증에 젖은 왕에게서 중전마마를 잘 보호해 주십시오. 그럴 수…… 있으시겠습니까?”
왕과 똑같은 얼굴에도 불구하고 호위무사임을 알아본 그.
“어, 어떻게 알고…….”
“마마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나와 같았으……, 쿨럭.”
태주는 검붉은 피덩어리를 토했다.
왕비가 다급하게 그를 흔들었다.
“성 무사, 이렇게 가면 안 되네. 성 무사!”
“그래도 다행입니다. 마마를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태주는 옆을 지키던 호위무사의 손을 꼭 잡았다.
겨우 쥐어짠 목소리로 내뱉은 말.
“마마를…… 잘 부탁한다.”
그의 손이 툭, 떨어졌다.
* * *
화면 가득히 잡히는 얼굴.
얼굴이 하얗게 질린 태주였다.
눈가는 핏줄이 터져 붉었다.
죽어가는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역동적으로 보였다.
윤이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걱정했었다.
한태주가 강재하나 윤수안의 짬밥에 밀리지 않을까, 하고.
한태주는 초짜 신인인 데다가 아무리 대역, 액션을 했다지만 그것은 혼자 하는 연기였다.
다른 배우들과 감정을 주고받은 경험이 적었다.
이 씬을 장악하느냐, 잡아먹히느냐는 그가 하기에 달렸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목숨 바쳐 왕비를 지키는 무사를 너무나도 잘 연기했다.
옆에서 정신없이 보던 정규범이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판 깔아주니까 이렇게 잘하는걸. 태주 이 녀석, 다음 작에서도 볼 수 있을까?”
“그럼.”
윤이도가 덧붙였다.
“다음에는 더 큰 역할로 봐야지.”
* * *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태주는 단체 회식에 참석했다.
“우리가 말이야, 약 한 달을 동고동락하며 한 작품을 만든 사이 아니냐. 태주, 너한테 정이 많이 들었어, 이 무뚝뚝한 놈아. 그러니까 술 한잔 따라봐!”
평소에는 회식에 참석 안 하고 집에 간 태주.
그러나 오늘만큼은 동료 배우들과 회포를 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기의 합을 맞추며 경험했던 동료애를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늘 혼자서 연기했던 태주에게는 배우들로 득시글대는 이 현장이 너무나도 좋았다.
함께 꿈을 공유하고, 연기 철학을 나눌 수 있었기에.
그리고 솔직히 오늘은 조금 들떴다.
‘내 씬을 찍은 날이니까.’
대사도 쳤고, 표정도 오롯이 잡혔다.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있을까?
감독님께 인정받은 것인데.
“한태주, 이리 와봐.”
마침 윤이도가 그를 부른다.
태주가 긴장한 채 다가가자 그가 씩 웃어 보였다.
“오늘 정말 잘했다.”
그제야 태주의 눈가가 사르르 풀어졌다.
그 말을 듣고 싶었다.
그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이제껏 죽어라, 열심히 노력한 걸 그가 알아준 느낌이다.
그 모습을 보며 윤이도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 뭐야. 칭찬을 해줬는데 별로 기뻐하지도 않네? 이제 다 끝난 관계다, 이거야? 남이라는 거냐?”
“아, 아닙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영화 제작발표회 때 너도 불러줄게. 그러니까 내 연락, 꼭 받아라. 강재하 전화번호만 저장한 거 아니지?”
“아닙니다. 감독님을 1번으로 저장해 놓았습니다.”
“농도 잘 치네.”
윤이도가 거칠지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여러모로 대견한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뒷모습 대역으로 현장에 발을 디뎠다.
대사가 없는데도, 화면에 나오지 않는데도 열심히 연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공백이 생긴 무술팀.
거기서도 압도적인 무술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빛냈다.
노력과 성실함. 그리고 재능으로 눈길을 끈 그.
미리 계획한 것만 찍는다는 원칙주의자 윤이도의 마음도 돌려버렸다.
“다음 작품에서는 분량을 더 줘야지.”
태주를 욕심내던 윤이도가 자리를 옮긴 태주를 에워싸는 강재하를 발견했다.
“저 녀석의 진가를 알아본 건 나만이 아닌가 보군.”
* * *
“저번에 내가 준 제안, 생각해 봤어? 우리 회사 꽤 좋은데.”
태주의 눈앞에는 권기도 팀장이 눈을 반짝이고 있다.
강재하에게 술을 받으러 간 테이블은 어느새 아티스타 컴퍼니 계약 건을 논의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태주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직은 회사에 관한 생각이 없어서요.”
“아니, 우리 회사 오면 내가 잘 챙겨준다니까.”
몇 번이고 생각해 봤던 제안이지만, 답은 똑같았다.
“호의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은 정말 생각이 없습니다.”
태주가 예의 바르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자, 권기도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흠…. 그럼 이건 어때, 태주 씨.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투자해서 제작하는 드라마가 있어. ‘뱀파이어의 첫사랑’이라고 원작이 웹툰인. 거기 서브 남주 역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뱀파이어의 첫사랑?’
예전에 고모가 보는 걸 본 적 있었다.
포털사이트 조회수 3위 안에 들었고, 팬들의 화력이 짱짱한 웹툰.
“그게 드라마로 제작됩니까?”
“6개월 전부터 제작 들어갔어. 200억 투자해서 만드는 거고, 캐스팅도 짱짱해. 임강현이 주인공으로 들어가 있거든. 태주 씨가 강현이하고 얼굴 합도 잘 맞을 것 같고, 연기도 되잖아. 어때? 이런 기회 자주 오는 거 아니야.”
태주가 잠시 고민에 빠진 사이.
강재하는 유독 적극적인 권기도에게 투덜거렸다.
“형,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이었어? 나 회사로 영입할 때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가치가 있으니까.”
권기도가 입맛을 다시 한번 다셨다.
“잘생긴 애는 많아도, 연기를 맛있게 하는 애는 흔치 않거든.”
* * *
끊임없는 권기도의 구애.
태주는 잠깐 생각할 시간을 달라하고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공기가 발개진 볼을 식혔다.
“후…….”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아티스타 컴퍼니에서 200억을 들여 만드는 드라마에, 원작의 인기도 압도적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권기도 팀장이 날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은데, 그럼 오디션도 수월하게 볼 수 있나?’
“안녕하세요. 한태주 씨 맞죠?”
“네, 맞습니다.”
갑자기 옆에서 접근한 한 남자 때문에 생각이 끊어졌다.
희멀건 얼굴에 동그란 뿔테안경을 쓴 게 어디서 본 것 같다.
‘어디서 봤더라?’
촬영장에서 오고 가는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예전에 영화 ‘뻐꾸기 새끼’ 촬영하지 않으셨나요? 10년 전쯤에, 손우현 배우님 아역으로요.”
“네…….”
‘어떻게 알았지?’
태주가 당황스러움을 숨기기도 전 남자가 그를 와락 안았다.
“야, 긴가민가했는데 태주 너, 맞구나! 이게 얼마 만이냐! 진짜 반갑다.”
“누구…….”
“나 황철수야. ‘뻐꾸기 새끼’ 찍을 때 너랑 자주 놀아주던 촬영부 막내. 생각 안 나? 너, 우리 집에서도 자주 자고 갔잖아.”
그제야 생각난 태주의 눈빛이 반갑게 변했다.
“황철수 형?”
끊어졌던 연결고리가 수면 위로 떠 오르며, 임강현에 이어 아역 때의 인연을 만났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