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연예계, 감 좋은 놈이 승리하는 곳 (1)
매미가 맴맴 우는 어느 뜨거운 여름날.
중학교 동아리실에 있던 여학생들이 선풍기 앞으로 모여들었다.
“더워, 더워더워더워!”
“너무 더워서 머리가 마비될 것 같아!”
“은설아, 좀 비켜봐, 너 혼자 선풍기 독차지할 거야?”
단발의 귀여운 여학생이 씩 웃었다.
“나 머리 좀 말리고, 언니!”
“뭐야, 수돗가에서 또 머리 감고 온 거야? 네가 남자애도 아니고 뭔 머리를 수돗가에서 감아!”
“그래도 이게 시원하다니까? 자, 다들 기대하시라!”
심은설이 목덜미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털자, 물방울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김태연이 어푸어푸하며 그녀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어휴, 선머슴 같아!”
일련의 소동이 끝난 후.
한자리에 모인 여학생들은 각자 가방에서 노트 한 권씩을 꺼내놓았다.
“자, 자. 다들 단편소설 한편씩 써 왔지? 오늘은 누가 먼저 발표해 볼래?”
“나!”
“나, 내가 할래!”
두 명의 소녀가 동시에 손을 든 순간.
심은설과 김태연은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내가 먼저 할 거야!”
“언니, 오늘은 양보하시지. 저번에 언니가 먼저 했었잖아!”
“어이, 둘이 싸우지 말고. 오늘은 은설이가 먼저 발표해.”
결국 친구의 중재로 심은설이 먼저 자신의 단편소설을 건넸다.
먼저 하고 싶다던 아까의 당당함은 어디로 간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발개졌다.
다 읽은 후, 여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수군대더니 김태연의 소설로 손을 뻗었다.
“태연이 언니 것도 읽어보자.”
한동안 동아리방 안에는 노트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묘한 표정의 여학생들이 김태연과 심은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은설이랑 태연이 언니가 쓴 작품, 둘 다 너무 재밌는데?”
“은설이는 뭔가 간질거리는 로맨스를 잘 쓰고, 태연이 언니는 스케일 웅장한 무협소설 같은 걸 잘 쓴다.”
“둘 다 필력 좋아서 누가 더 나은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둘 다 나중에 작가 하면 잘하겠다!”
친구들의 칭찬과 격려에 심은설은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나는 그럴 만한 실력이…….”
그런 심은설의 등을 두드려주던 김태연이 말했다.
“잘할 수 있어, 우리 은설이. 정말 재밌게 잘 쓰잖아.”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하교하는 길.
김태연과 함께 집으로 향하던 심은설이 문뜩 물었다.
“언니는 아직도 꿈이 드라마 작가야?”
“응.”
김태연이 싱긋 웃었다.
“나 말야, 10년 이내에 내 이름으로 된 드라마 집필하는 게 꿈이야.”
“10년이면 25살인데, 그 안에 메인작가로 데뷔? 오오…. 근데 언니는 할 수 있겠다. 워낙에 글을 잘 쓰잖아.”
부러워하는 눈빛의 심은설을 본 김태연.
“너도 할 수 있어, 은설아. 애들이 맨날 말해, 너 진짜로 글 잘 쓴다고. 그리고 너도 꿈이 드라마 작가라고 했잖아. 나중에 공모전도 도전할 거라면서.”
“내가… 작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럼! 열심히 하면 가능하지!”
김태연이 씩 웃으며 심은설을 끌어안았다.
“우리 꼭, 작가로 성공하자!”
* * *
어둑해진 밤.
속 깊은 이야기까지 꺼낸 심은설과 태주가 호텔을 나왔다.
밤이 늦어서 태주가 자신이 몰고 온 고모의 차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커다란 벙거지를 꾹 눌러쓴 채 검은 마스크까지 쓴 태주는 완벽히 얼굴을 감춘 상태였다.
심은설도 덩달아 캡모자와 하얀 마스크를 쓴 채 총총히 태주를 따라갔다.
차에 올라타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수석에 탄 심은설이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심은설이 멋쩍은 듯 단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 꼬았다.
“솔직히 태연이 언니 떠나고 나서, 좀 마음이 공허했거든. 그런데 너한테라도 이렇게 털어놓으니까 마음이 후련해.”
“너희 이모 계시잖아. 홍은지 기자님 말야.”
태주의 말에 심은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요즘 이모 바쁜데,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흠, 너도 그런 면에서 나랑 비슷하구나.”
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걱정거리 있으면 우리 고모한테 말 안 하는 편이거든. 괜히 나 때문에 고모가 걱정할까 봐.”
애꿎은 손을 만지작거리던 심은설이 태주에게 말했다.
“근데 너, ‘청룡검신’ 안 하는 이유가 뭐야?”
“정확히 뭐가 궁금한 건데?”
태주의 말에 심은설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청룡검신’은 태연이 언니가 보조작가로 참여한 작품이었거든. 언니가 참여한 작품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 왜 거절했나 해서…….”
“아무리 보조작가가 실력이 좋아도 메인작가랑 제작사가 방향을 잘못 틀면 그만이야.”
태주가 운전대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스토리 전개는 나쁘지 않았어. 다만, 역사 왜곡과 중국풍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거야, 불쾌했지.”
“아!”
단번에 이해한 듯 심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어쩐지, 예전에 언니도 비슷한 말을 했었거든. 제작사가 중국 회사라서 소품이나 전개에 그쪽 풍을 끼얹는다고. 그런데 강재하 씨는 이걸 알고도 한 건가?”
“아마 그럴걸. 이런 결격사유가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했겠지.”
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내 손 떠난 작품이야. 나는 내가 맡은 작품들에 충실할 뿐이고.”
심은설이 그런 태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예전에 동락이 단편영화 찍던 게 엊그제 같은데…. 뭔가 달라졌다, 너.”
“내가? 뭐가 달라졌는데?”
“뭐랄까, 자기 확신이 더 생긴 것 같아. 자신감도 더 생긴 것 같고.”
[맞아. 그때는 그저 연기를 하고 싶은 생각에 막무가내로 덤비는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네 선택을 믿고 네 연기를 하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니까.]‘그건 그래요. 예전에는 스스로를 못 믿었죠, 지금은 믿지만.’
태주는 씩 미소를 지으며 액셀을 밟았다.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겠어.”
* * *
동 시각.
밤늦은 시각임에도 훤히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에 장희재와 젊은 여자가 대치하고 있다.
“난 이런 식으로 일 못 해요.”
샤오웨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고작 광고 하나 가지고 무슨 테스트를 한다는 거예요? 불쾌하게, 누가 누굴 테스트한다는 건지.”
“별것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바보 취급하지 말아요. 나도 주변 사람들한테서 들을 만큼 다 들었어요.”
표독스러운 눈초리의 샤오웨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한태주란 그 배우가 화장품 광고 파트너로 날 거절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가 아니라 이름도 없는 모델을 파트너로 지명했다던데? 뭐라더라, 마스크가 더 좋고 연기력이 뛰어난다던가? 기가 막혀서, 지가 뭘 안다고 나 같은 여자를 깔보는지.”
장희재가 골치 아픈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화장품 ‘주노’의 메인 모델인 한태주가 파트너 모델로 샤오웨이와 채이진을 테스트해서 결정하겠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모양이다.
‘분명 그렇게 입단속을 시켰는데, 한태주가 흘린 걸까?’
거액 투자자인 헤븐 리조트의 따님, 샤오웨이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눈치를 주었는데 말이다.
샤오웨이와 채이진을 카메라 테스트를 시키면 솔직히, 누가 뽑힐지 뻔하다.
‘채이진이 그렇게 표정 연기가 좋은지 몰랐지.’
본부장에게 3팀과 관련된 보고를 받은 그는 왜 한태주가 채이진을 파트너로 추천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영화 ‘탈출’에서는 비록 단역이지만 섬세한 몸짓으로 시선을 사로잡았고.
드라마 ‘데스 게임’을 위해 준비한 오디션 영상에서는 다채로운 감정을 눈으로 담아내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그에 비해 샤오웨이는, 그저 얼굴만 예쁘장한, 버릇없는 여배우일 뿐이다.
솔직히 헤븐 리조트 대표의 딸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쩔쩔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치겠네, 진짜.’
신경 쓸 일도 많은데 이 어린 여자애는 적당히 구슬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장희재는 빙긋 웃으며 샤오웨이를 달랬다.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요, 샤오웨이 씨. 아버님을 봐서라도 내가 그쪽을 굴욕당하게 하겠습니까? 이번에 화장품 광고는 한태주 씨와 샤오웨이 씨, 둘로 진행될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아뇨, 이미 기분은 상할 대로 상했어요. 한태주란 인간이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아요.”
거만한 표정의 샤오웨이가 장희재에게 명령했다.
“내가 모델로 뽑히는 건 당연하고 한태주한테 나를 무시한 걸 사과하라고 하세요. 안 그럼, 아빠한테 말할 거예요. 장 대표, 일 잘못하고 있다고.”
* * *
얼마 후.
샤오웨이가 난동을 피우고 나간 사무실 안에 장희재가 홀로 앉아있다.
그는 앞에 초록색 압생트 한잔을 둔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걸 어쩌면 좋지……. 미치겠군.”
장희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사업 확장을 위해 손을 잡은 중국의 큰손, 헤븐 리조트의 회장.
드림액터스에 거액을 투자하는 대신 고명딸인 샤오웨이를 한국 연예계에 성공적으로 데뷔시키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
한국에서 유명해져 몸값을 올리면, 중국에 돌아갔을 때, 보다 쉽게 유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백시영, 윤수안, 김결을 톱스타로 성공시킨 전적이 있고, 그 노하우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만큼은 큰 벽이 꽉 가로막힌 느낌이다.
“그놈의 한태주…….”
한태주가 화장품 광고모델 파트너로 샤오웨이를 인정했더라면.
아니, 적어도 ‘주노’ 측에 샤오웨이와 채이진의 카메라 테스트를 제안하지만 않았더라도.
저렇게 샤오웨이가 화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투자자의 딸을 화나게 하는 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다.
아무리 20대 초반인 햇병아리라지만, 샤오웨이가 헤븐 리조트 회장에게 뭐라고 해서 투자금이 날아갈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하지?”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비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태주의 협조가 제일 손쉬운 해결책이지만, 도통 말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태주가 시영이 반만 따라줬더라도 이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어. 애가 고집만 세 가지고 내 말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말이야. 차 팀장이 애를 잘못 길들여 놨어.”
잠시 생각하던 장희재 대표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광고주의 힘을 빌리면 되겠네.”
그가 평소 인맥을 통해 다져놓은 네트워크에는 그 여자도 있었다.
화장품 주노의 모회사, ‘마인’의 회장 김주영이 말이다.
재빨리 핸드폰으로 연락하는 장희재의 표정은 다소 묘했다.
“그 마녀의 손을 빌리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한태주가 그의 계획을 망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