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
2화
귀신 보는 배우님 (2)
귀신이 ‘붙은’ 지 3일째.
그동안 수많은 귀신을 봤지만, 옆에 찰싹 달라붙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태주는 그를 철저히 무시했지만, 귀신은 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나 무시할 거냐? 저기요. 한태주 씨.]끊임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그날을 떠올렸다.
밤중에 연기 연습하고 있을 때부터 이 양반이 주변을 얼쩡거렸지.
아니지, 아이 귀신을 만났을 때부터였던가?
“미치겠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지난 10년간 봐온 귀신들과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의사를 전달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귀신과는 속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특별한 점은, 그가 생전에 배우였다는 점이다.
그의 이름은 이중협.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스무 살에 데뷔.
비율 좋은 늘씬한 몸과 넓은 어깨, 매력 있는 눈웃음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수려한 외모보다 빛나던 건 그의 연기력이었다.
연극, 드라마, 영화를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던 그.
크고 작은 배역을 셀 수 없이 연기해 이름을 알린 실력파였다.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으로 이름을 알리던 그.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더니만…….”
드라마에 나오는 그를 본 적 있었다.
매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것을 기억한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원래 그 인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연기를 볼 수 없었다.
5년 전 돌연 생을 마감했으니까.
그의 나이 36살.
동갑내기 이선우와 동반으로 드라마 ‘데자뷰’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직후.
조연에서 주연급으로 막 발돋움하기 직전이었다.
그가 촬영장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은 것은.
그 후 이중협은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저승에 있어야 할 귀신이 이승을 떠도는 건 생에 미련, 즉 한이 있기 때문이야. 생전 풀지 못한 한 때문에 이승에 미련이 남았고, 죽을 듯한 괴로움과 갈증을 느끼며 하루하루 몸부림치는 거지. 그 한을 풀어야 드디어 평온을 찾고 성불할 수 있는 거고.]“그런데 아저씨는 좀 특이하시네요. 이제껏 본 귀신들은 대부분 음침하고 다들 자기 할 말만 했는데, 아저씨는 뭔가 밝고 자유로워 보이는 거 같아요.”
[난 대장 귀신이니까.]이중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귀신들도 종류가 있어. 대장 귀신, 일반 귀신, 그리고 악귀. 악귀는 한이 지독하게 깊어 일반 귀신들처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는 귀신이지. 이놈들은 정말 위험해.]“일반 귀신하고 아저씨가 다른 건 뭔데요?”
[일반 귀신들은 한을 품은 대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누구한테도 집착하지 않아. 대장 귀신으로서 한이 깊은 귀신 중 악귀가 창궐하지 않게 관리도 하고. 혼의 냄새를 맡아 추적할 수도 있지. 그밖에 다른 능력도 있고.]“참 특이하시네요. 귀신인데 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능력도 많고. 전생에 선하게 사셨나 봐요.”
[하하, 하하하!]갑자기 이중협이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그러더니 으스스한 미소를 지었다.
[나 말이다, 원래는 악귀였어. 스스로 악귀의 껍질을 깨고 나와 제정신을 차렸지만, 한이 무엇인지 잊어버렸지. 한동안 방황하고 있는데, 염라대왕이 날 대장 귀신으로 임명했어. 다른 애들이 악귀로 변하지 않게 막으라고. 그러다 보면 내 한을 풀 기회도 주어질 거라면서.]태주는 충격받은 얼굴을 애써 감추었다.
‘이중협이 전직 악귀?’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난 널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악귀였던 기억도 없다고. 나는 그저 어서 한을 풀어 평안을 찾고 싶은 마음뿐이다.]“……정말 믿어도 돼요?”
[염라대왕을 걸고 맹세하지.]태주가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뭐. 그런데 아저씨가 기억 못 한다는 한이요. 평생을 연기하신 분이시니, 그와 관련된 게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유명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기도 하고 귀신들 앞에서 직접 연기해보기도 하며 지난 5년 동안 열심히 도전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 그러다 널 만난 거야.]이중협은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혼자된 두려움에 울고 있던 아이 귀신을 네가 보듬었을 때는 참 별나고 따듯한 애라고 생각했어. 귀신을 그렇게 원망하면서도 아이가 속상해할까 봐 꾹 참고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차에 치일 뻔한 나도 망설임 없이 구해주려고 했지. 무모하게 말이야. 그러기에 네게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아이는 조금은 다를지도 모른다. 나를 성불시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건…….”
[그리고 나도 모르게 너에게 이끌려 네가 공원에서 절실하게 연기하던 걸 봤어. 네 진심 어린 연기를 보고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지. 그동안 그렇게 난리를 쳐도 고요했던 이 가슴이.]태주는 그 말에 몸이 굳었다.
이중협은 유일했다.
그가 공원에서 연기하던 모습을 본 자.
연기에 대한 열망을 토해내는 모습을 본 자.
[본디 배우란 수많은 인생을 연기하지. 따뜻한 시선으로 다른 이를 돌아볼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너는 이미 훌륭한 배우다, 태주야.]“아니에요, 전…….”
[죽은 후에 후회해 봐야 소용없어. 살아있을 때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해.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태주는 이중협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쳤다.
[너, 연기하자. 사실 너도 미치도록 하고 싶잖아?]가슴속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건드렸다.
10년간 지켰던 소망이다.
친한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들키지 않은, 오직 나만 아는 나의 은밀한 바람.
죽기 직전에 눈앞을 가득 채웠던 열망, 연기.
다시 살아나면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하던 연기에 대한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 * *
주말을 하루 앞둔 금요일 오후.
태주는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아르바이트를 쉬는 게 좋지 않겠냐’는 고모의 걱정에도 괜찮다고 웃으며 카페에 나왔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중협의 말대로 죽기 전 본 주마등이 한이라면.
내 한은 아마 연기일 것이다.
다시 살아난 인생, 두 번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원 없이 연기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연기만큼이나 가족도 소중했다.
부모님을 잃고 폐인이 되었던 그를 사랑으로 보듬어준 고모와 사촌 동생.
그들 덕분에 자신은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카페 문이 활짝 열리고 통통한 몸집에 사람 좋은 미소가 일품인 청년이 들어왔다.
태주의 십년지기 친구, 서동락이었다.
“동락아, 웬일이냐? 너 영화 때문에 바쁘다면서.”
“너 일 끝나면 우리 얘기 좀 하자. 나는 항상 먹던 걸로 줘.”
드디어 올 게 왔구나.
그동안 그가 전화상으로 피했던 그 주제에 관한.
* * *
몇 시간 후.
태주가 동락의 앞에 앉았다.
“할 이야기가 뭔데?”
태주가 동락과 친구로 지낸 건 유치원 때부터였다.
6살부터 이어진 우정이 올해로 15년째였다.
태주는 꿈을 접었지만, 동락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감독이 되기 위해 영화과에 진학했으니까.
“나 피르마 영화제에 단편영화를 출품하는데, 복싱 영화야. 결승전 상대역이 필요해.”
태주는 동락이 건네주는 대본을 받았다.
‘마지막 승부’.
빠르게 대본을 훑었다.
슬쩍 보았는데도 이야기가 재밌었다.
주인공의 서사가 푹 빠질 만큼 좋았고.
결승전 상대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분량은 적었지만 치열한 승부욕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나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 태주야, 한 번만 도와주라.”
“생각할 시간을 줘.”
“오늘까지는 답을 줘야 해.”
태주가 당황한다.
“그렇게 빨리? 너무 촉박하잖아.”
“아, 당장 결승전 촬영이 내일이야, 오전부터 체육관에서 찍는다고.”
동락이 조급한 어조로 덧붙였다.
“너 그동안 연기 쉰 것 때문에 망설이는 거면 걱정할 필요 없어. 키 크고 운동신경도 좋다는 점이 딱 너야. 사실은 이 영화 구상할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을 삼킨 듯 동락의 입술이 바들거렸다.
“언제까지 연락 주면 되냐?”
“밤 10시까지.”
“야, 그렇게 늦으면 대타는 어디서 구하려고…….”
“태주야.”
동락이 태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 너 믿는다.”
그렇게 동락이 떠나고 이중협이 태주에게 말을 건다.
이중협이 고민에 빠진 듯 말이 없는 태주를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하지만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바란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이잖아. 그리고 선택할 기회가 있다는 것, 그건 산 자의 특권이거든.]한 번 사는 인생, 후회 없는 선택, 산 자의 특권.
태주는 그 말을 괜히 여러 번 되뇌었다.
* * *
그날 밤.
동락과 헤어진 후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 태주가 집에 들어왔다.
그는 과제부터 마친 후 대본을 꺼내 연습했다.
몇 번이고 읽고 분석해서 종이가 꾸깃꾸깃하다.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캐릭터들을 이해했다.
그들의 대사를 따라 말해보면서 확신이 들었다.
연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고모와 태희한테 말하려 힘차게 밖으로 나간 순간.
거실에서 행복하게 웃는 그들을 본 태주가 화장실로 급히 도망쳤다.
그리고는 답답한 마음에 괜히 찬물 세수를 한다.
거울 속 보이는 얼굴이 유달리 창백했다.
이중협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왜 그래?]“미치겠어요. 도저히 고모한테 말할 용기가 안 나요. 연기와 가족 중에 연기를 택한다는 그 말,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왜 연기와 가족 둘 중 하나만 선택하려고 해? 둘 다 선택할 수 있는데.]“고모는 제 엄마나 마찬가지예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귀신은 보이지, 정말 폐인이나 다름없었어요. 하루에도 죽을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고요. 저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으니까요.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고모는 절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전 혼자 행복해지자고 연기를 할 수가…….”
연기, 애증이 뒤섞인 상대.
아역배우 시절 정말 즐겁게 연기했었지만, 부모님의 죽음 이후 죄책감으로 연기에 대한 욕심을 괴롭게 억눌러 왔다.
그런데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중협은 태주의 혼란스러움을 알아챘다.
이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의 고모는 그의 행복만을 응원한다는 것을.
[너야말로 고모를 뭐로 생각하는 거냐?]“네?”
당황한 태주에게 이중협이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고모가 네 엄마라면서. 세상 모든 엄마는 자식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거다. 게다가 그것이 자식의 꿈이라면, 더더욱.]그 말에 태주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가족과 연기, 그 둘 다 태주에겐 소중한 꿈이었다.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
태주는 화장실에서 나와 방에서 대본을 챙겼다.
그리고는 소파로 가 고모와 태희 옆에 앉았다.
“고모, 태희야. 나 할 말 있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비장해?”
태주가 고모에게 대본을 건네며 말했다.
“나, 연기 다시 시작해 보려고. 내일 촬영이야.”
“내일?”
“나 정말 오래 고민했어, 고모. 그런데 연기를 너무 하고 싶어. 그러니까 나…… 해도 돼?”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중협도, 태주도 긴장한 이때.
대본을 훑던 고모의 시선이 태주를 향한다.
“태주야, 이걸 왜 이제야 말하니. 언제 이야기해주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고모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네가 꿈을 좇아갔으면 좋겠어.”
그 말이 방아쇠처럼 태주의 빗장을 풀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굳게 숨겼던 연기에 대한 열망.
그런데 고모가 괜찮다고 한다.
“괜히 애어른처럼 굴지 않아도 돼, 태주야. 너, 충분히 가족 챙기고 있어. 우리 챙긴다고 네 개인 시간 빼서 같이 보내고, 이젠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고모, 그건 내가 정말 좋아서…….”
“물론 네게는 가족도 소중하겠지. 하지만 연기도 가족만큼 소중하잖아. 그래서 매일같이 공원에서 연기 연습한 거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태주의 눈빛.
고모가 씩 웃었다.
“앞으로는 뒤에서 숨어서 하지 말고 앞에서 하라고. 나랑 태희도 좀 보게.”
“뭘 보는데?”
태희가 옆에서 눈을 빛냈다.
태주는 조심스레 태희에게 말했다.
“태희야, 내일은 엄마랑 같이 동물원 가고, 오빠하고는 나중에 같이 가면 안 될까?”
“왜? 나 오빠랑 같이 가는 거 기대했는데.”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연기라고.”
“연기?”
긴장된 마음으로 초롱초롱한 눈을 한 사촌을 바라보았다.
“내일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
“내일뿐이야?”
“응, 내일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태희야, 그동안은 오빠가 태희 원하는 거 많이 해줬잖아. 이제는 태희도 오빠가 원하는 거 응원해주면…… 안될까?”
아직 어린데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태희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때.
고모가 태희의 귀에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혼란스럽던 태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빠, 꿈이 생겼구나! 그런 이유라면 알겠어, 조심히 갔다 와!”
생각지도 못한 환영에 태주가 눈을 깜빡였다.
“응?”
“내일 다른 사람들에게 이 ‘대본’이라는 거, 읽어주러 가는 거라면서?”
태주에게 태희가 엄지를 척 내밀어 보인다.
“힘내, 오빠! 나한테 그림책 읽어준 것처럼 하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거야! 아, 그래도 내가 오빠 제일 좋아한다는 거 잊어버리면 안 돼!”
사촌 동생의 응원에 태주는 울컥했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죄책감과 미안함에 눈이 멀어 고모와 태희의 따뜻함을 잊고 있었다.
가족은 그의 꿈을 응원하는 넘버 원 팬인데.
태주는 고모와 태희를 와락 껴안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울컥하는 수많은 감정이 입을 막았다.
“즐겁게 해, 너 좋아하는 거니까 신나게 하고.”
고모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오빠랑 새언니도 너, 연기하는 거 정말 반겼을 거야.”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