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드러나는 진실 (5)
* * *
밤늦은 시각, 자그마한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두 사람.
운전대를 잡은 이덕량이 조수석에 앉은 이수한을 힐끗 보았다.
품에 꼭 안은 악보는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지금도 악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허공에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하며 연습하는 중이다.
그런 동생을 보며 이덕량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급한 마음은 알지만, 종일 피아노를 연습하는데 달리는 차 안에서라도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수한아, 좀 쉬어라. 형이랑 약속했잖아, 레슨 받고 차 안에서는 쉬기로.”
“그렇지만 복습해야 하는걸. 배운 건 바로 이렇게 복습해야 내가 마음이 편해.”
이수한의 거절에 이덕량은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차 안에는 고요함만 가득했다.
조수석에 앉은 이수한은 이따금 악보를 구기며 미간을 찡그리기도, 악보에 코를 처박고 한참을 보기도 했다.
완전히 음악 세계에 빠진 동생을 이덕량은 연신 힐끔거렸다.
늦게 시작한 게 지금에서야 한이 되었다.
서울에서 레슨해 주시는 교수님 말로는 수한이가 재능은 있는데, 연습량이 부족해서 왜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냐고 했으니까.
‘망설이지 말걸. 동생에게 이것저것 시켜줄걸.’
이덕량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그때.
“형, 무슨 생각 해?”
악보를 내려놓은 이수한이 이덕량을 쳐다보자, 그는 얼른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를 빤히 보던 이수한이 씩 웃었다.
“형, 나 진짜 열심히 해서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게. 그래서 돈 벌면 형한테 제일 먼저 갚을 거야.”
“야, 너한테 뭐 바라는 거 없어. 그저 네가 행복하게 피아노 치면 그걸로 충분해.”
“나는 이미 행복해, 형.”
그 말을 하던 이수한의 얼굴은 수줍은 미소로 가득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 시간들이 너무 행복하고 벅차. 형이 내 꿈을 지지하고 옆에서 도와주는 이 시간도 모두. 그러니까 나, 정말 열심히 할 거야, 좋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그래. 넌 좋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난 작품 프로듀서가 되어서. 널 내 작품에 특별출연으로 쓸 거야. 네가 치는 ‘트로이메라이’는 세상 그 어떤 피아니스트가 치는 것보다도 아름다우니까.”
그의 패기 어린 말에 이수한이 킥킥거렸다.
“형, 포부가 크네. 아직 제작사 직원이라면서.”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제작자가 되겠지.”
“내가 피아니스트가 될 것처럼?”
“그래.”
이덕량이 씩 웃었다.
“그러니까 같이 노력하자, 꿈에 다다를 때까지.”
* * *
“수고하셨습니다!”
카메라 구도를 바꿔가며 여러 번 같은 장면을 찍고 난 후.
태주의 촬영이 완전히 끝났다.
무대에서 내려온 태주가 인사하자,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태주 씨, 오늘 정말 연주 좋았어요!”
“표정 연기도 좋았어요. 곡에 집중하며 나오는 그 무아지경의 표정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아, 피아노 연주가 사람 마음을 울리더라고. 치면 칠수록 더 잘 치는 것 같아, 이게.”
“우리 딸래미도 치는 곡이라서 이게 괜찮을까, 했는데. 태주 씨가 치니까 이 곡이 이렇게 고급스러울 수가 없네.”
그들의 칭찬에 태주는 점점 뿌듯해졌다.
이제까지 ‘트로이메라이’를 아름답게 치기 위한 노력들이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건 물론.
자신의 연주를 듣고 성불한 이수한을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야, 태주 씨 오늘 정말 굉장했어! 1화의 단연 하이라이트야!”
옆에 다가온 모황국 감독이 태주의 등을 다정히 두드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제작자 이덕량.
태주는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물었다.
“저, 오늘 연주로 제작자님의 마음을 움직이려 노력했습니다. 괜찮았을까요?”
그의 말에 이덕량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 옛날 생각도 나고, 꿈을 향해 달려가던 생각도 나고…, 제 동생 생각도 나고. 그랬습니다.”
“아 참. 이 피디 동생이 피아니스트였다고 했잖아, 맞지?”
“네.”
모황국의 말에 이덕량이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트로이메라이’, 이 곡은 진심과 열정을 얼마나 담느냐가 관객들을 울리는 관건이라 생각했어요. 전문 피아니스트도 아닌 태주 씨가 이 곡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의심했지만…. 제 오판이었습니다.”
그가 태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연주 정말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덕량의 인사에 태주도 덩달아 뭉클해졌다.
“아니, 뭐…. 제가 더 감사하죠.”
그 덕분에 이수한의 능력도 얻게 되었으니.
그가 성불한 이후에 얻은 섬세한 피아니스트의 능력으로, 그다음에 찍은 수많은 테이크에서는 더욱 향상된 감성과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그때, 모황국 감독이 신이 나서는 태주에게 제안했다.
“오늘 회식 갈 거죠?”
“아, 죄송합니다. 오늘 말고 내일 참석하면 안 될까요?”
“당연히 되죠. 그런데 오늘, 뭐 하는데요?”
“대학 모임이요.”
태주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선배님들께서도 다 오신다고 해서요.”
* * *
그날 저녁.
사람이 얼마 없는 술집에 캡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자가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던 여자는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은지야!”
“언니!”
홍은지와 심요연이 반가움에 부둥켜안았다.
곧이어 자리에 앉은 그들은 한숨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야, 오늘이라도 만나서 다행이다.”
“촬영 끝나자마자 만나자고 해서. 괜히 언니 귀찮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괜찮아, 괜찮아. 나도 너 보고 싶어서 정말 기대하고 있었어.”
심요연과 홍은지가 맥주를 짠, 했다.
그녀를 보던 홍은지가 아까부터 고대하던 질문을 조심스레 내뱉었다.
“그런데 오늘 한태주 씨하고 촬영 잘하셨어요?”
“이것 보게, 자나 깨나 한태주 타령이네! 언니가 오랜만에 왔는데!”
“어머, 죄송해요. 그런데 아시잖아요. 저 한태주 전담 기자인 거.”
홍은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사실 오늘도 현장 취재 엄청 가고 싶었다구요. 베일릭스 측에도 여러 번 문의했었는데. 곧 죽어도 안 된다고 해서, 오늘 언니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죠.”
“촬영 구경 왔으면 와, 대박이었을걸? 오늘 한태주가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
“무슨 촬영 했는데요? 하긴, 한태주 배우님이야 무슨 연기를 하든 대박이었을 테지만요.”
심요연이 미소를 지으며 술을 한모금 들이켰다.
“오늘 정말 대단했어. 한태주가 직접 완곡한다는 거, 솔직히 뻥인 줄 알았거든. 애가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배우가 연기나 잘하지, 왜 피아노에 욕심을 내나 싶었어요?”
“맞아. 제작자도 맨 처음에 완곡은 말렸다고 하더라.배우는 표정 연기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피아노 연주는 대역을 쓰면 된다고 말이야. 그런데 한태주가 이 캐릭터를 연기하려면 자기가 직접 완곡해야 한다고 했다는 거야.”
“태주 씨가 피아노를 잘 치나 봐요? 무슨 곡 쳤어요? 쇼팽? 리스트?”
“정확하게는 무슨 곡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촬영 당시를 회상하던 심요연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초등학생들이 흔히 배우는 곡이었어.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그런데 직접 현장에서 들으니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더라.”
그녀의 표정으로 홍은지는 당시 상황을 짐작해 보려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한태주의 연주를 직접 듣지 않은 당사자는 그때의 설렘을 느낄 수 없다.
“젠장, 베일릭스에 드라마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네.”
“내년 초에 올라온다는데, 나 솔직히 많이 기대하고 있어. 미국에 있는 친구들도 기대 중이야.”
심요연의 말에 홍은지가 눈을 반짝였다.
“미국에서도 한태주 씨 인지도가 있어요? 어때요?”
“당연하지. 이름값이 제법 돼. 태주가 출연했던 단편영화가 이번에 선댄스 영화제에서 대상 탔잖아.”
“아, 피셔 주니어 감독이 만들었던 그 영화요?”
“그래. 잘하면 이번에 피셔 시니어 감독하고 라이벌 구도로 붙을 거 같아. 같은 시기에 이글맨하고 ‘나의 미래’가 붙는다고.”
“그런데 솔직하게 이글맨 시리즈하고 신인 감독 작품하고 붙으면 좀….”
“한태주가 불리할 거라고?”
“그러지 않겠어요?”
홍은지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할리우드 정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글맨 시리즈가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건 알아요. 이전 시리즈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900만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잖아요.”
“프랜차이즈 영화를 그렇게 많이 봤다는 건 정말, 신드롬이었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글맨 시리즈예요. 게다가 이번 작품은 시리즈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 편인데다, 할리우드 거장인 피셔 감독이 영화를 맡았고요.그에 비해 한태주 씨는 신인 감독에 제작사 규모도 중소 같던데요. 슬래셔(slasher film) 같은 B급 공포영화만 만드는.”
“너, 선플라워 프로덕션의 저력을 잘 모르는구나.”
미국에서 살다 온 심요연은 할리우드에 여러 친구가 있던 터라 그쪽 정세를 잘 알았다.
“공포영화만 만들었던 건, 그쪽이 제작비 대비 수익이 잘 나왔기 때문이야. 선플라워 프로덕션이 유명한 건 플롯과 연출이 아주 탄탄하기 때문이고. 그런 곳에서 작정하고 만들면 제대로 된 영화 나오는 건 시간 문제지.”
“투자는 어떻게 잘 되고 있대요?”
심요연은 일전에 차용석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XJ 측에서 태주가 출연하는 앤디 감독 영화에 투자랑 배급한다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해외 영화 투자부를 신설하더니, 이쪽에 투자할 줄은 몰랐거든요. 아 참, 이거 대외빕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선배님.
차용석의 애절한 눈빛을 떠올린 심요연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몰라. 내가 한태주 일에 관해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에이, 언니도 참.”
하지만 홍은지도 여기서 멈추었다.
애초에 그녀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음과 동시에, 그녀는 조심스레 심요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언니, 좀 놀랐어요. 미국에서 잘 살고 계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한국에 오실 줄 꿈에도 몰랐거든요.”
“뭐야, 내가 한국에 안 왔으면 좋았겠다는 거야?”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언니.”
홍은지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언제나 우리 심요연 스타께서 연기로 다시 복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그런데 대단하신 장희재 대표님께서 언니가 연기하는 걸 막은 거, 아니에요?”
“맞아.”
“거참 이상하네요. 두 분 대외적으로는 정말 사이좋은 부부로 보였는데. 3년 전인가, 장 대표님이 인터뷰에서도 두 분의 금실이 정말 좋다고 했었고요.”
심요연이 냉철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마누라 연예계 복귀를 막은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