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드러나는 진실 (7)
* *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밴을 타고 샵으로 향하던 윤수안은 방금 황재남 팀장에게서 들은 말로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금요일에 시간 빼두라고? 나 그날 영화 시놉들 읽어보면서 분석하려고 했는데.”
“뭘 고민해, 김종덕 감독 영화 하면 되겠구만.”
“그건 오빠가 나한테 잘 어울린다면서 밀어붙이는 작품이고. 이제는 그런 로맨스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
뒷자리에 앉아 가방을 뒤적이던 윤수안이 덧붙였다.
“다른 시놉들도 찬찬히 보면서 신중하게 결정할래. 차기작은 뭔가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캐릭터였으면 좋겠어.”
그런 윤수안을 한심하다는 보던 황재남이 툴툴거렸다.
“너 한태주 병 걸렸냐?”
“뭐? 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윤수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황재남과 마주쳤다.
“잘될 거 두고 이상한 거 손대는 게 한태주 병이잖아. 이글맨 시리즈도 회사에서 떠먹여 준다는데 싫다. 300억 대작 드라마에 주연에 꽂아주겠다는데도 싫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말이 너무 심하네, 오빠. 태주 씨가 지금 하는 영화며 드라마, 다 좋은 작품들이야.”
“뭐야, 너 지금 한태주 편드는 거야?”
황재남의 말에 윤수안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태주의 편을 들고만 윤수안이었다.
회사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을 이끌어 준 황재남 팀장에게 목소리 높여 대든 것도 처음이었다.
‘태주 씨 얘기는 하면 안 되겠네.’
큰소리가 나는 걸 싫어하는 윤수안은 괜히 매니저를 자극해서 화나게 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금요일에 시간 빼두라니, 무슨 일인데?”
“이번에 너 좋아하는 팬분하고 식사 같이하기로 했어.”
“팬분하고 식사? 오빠, 나 그런 거 안 하는 거 알잖아.”
“대표님 지시야.”
“그래도….”
“이번에 잘해야 하다, 수안아. 네가 잘해야 대표님도 살고 우리 회사도 살아.”
그 말에 윤수안의 몸이 굳어버렸다.
“오빠, 지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윤수안의 말에 황재남은 크흠,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검사장님하고 같이 밥 먹는 것뿐이야. 대표님 얼굴 봐서 식사 한번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
“평범한 식사가 아니라는 거, 내가 아니까 그렇지.”
윤수안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있었다.
“고위 검사하고 밥 먹는 게 어떻게 평범한 식사야?”
“대표님 아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니까.”
“우리 대표님, 검찰 측에 아는 라인 많은 거 알고 있어. 그래서 여태 사건 있을 때마다 손쉽게 덮을 수 있었던 것도 알아.”
“그래. 말 잘했다, 수안아. 우리 회사가 이만큼 클 수 있었던 건 장희재 대표님께서 다 싸바싸바를 잘하고 다녔기 때문이야.”
황재남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태도를 보였다.
“이런 것도 비즈니스의 일환이지. 연예계 사업하다 보면 접대는 필수야. 그래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좋게 좋게 일이 넘어가니까.”
“그냥 나… 연기만 하면 안 돼? 나 배우잖아, 오빠. 연기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 회사가 시키는 대로 작품이랑 광고도 찍고 있고.”
윤수안은 벌게진 눈가를 비볐다.
“여태까지 우리 회사에 내가 벌어다 준 게 얼만데. 나 때문에 우리 회사, 강북에 있던 거 강남으로 이사했잖아. 그런데도 내가 그래야 해?”
“수안아, 왜 이래. 다 너를 위해서잖아.”
황재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엄격하게 바뀌었다.
“회사가 잘되면 누가 좋냐? 네가 좋은 거야. 그래야 너도 더 높은 개런티 받지, 그래서 돈 모으고. 너 처음에 배우 된 계기가 뭐라고 했어. 돈 벌려고 된 거라고 했잖아.”
그 말에 윤수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걸 놓치지 않은 황재남이 교활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너 아버지가 편찮으시잖아. 병원비 꽤 많이 든다며. 돈 들어갈 데 천지지?”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오빠.”
“너희 집에서 네가 가장이다, 그 말을 해주는 거야. 네가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좋잖아.”
황재남은 어깨를 으쓱하며 교활한 눈초리를 내보였다.
“회사가 잘 돼야 너도 더 밀어줄 수 있어. 그건 꼭 명심해.”
“…….”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윤수안을 남겨두고 나갔다.
홀로 남은 윤수안은 두 손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어떻게 해야 해, 정말….”
곤경에 빠진 그녀의 눈앞에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
한태주였다.
그녀가 몇 번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무렵.
지잉.
갑자기 울린 진동에 윤수안은 깜짝 놀라 얼른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 * *
그날 점심.
종로의 한 식당에서 태주는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형!”
“야. 내가 할 말이다, 그건! 우리 전화나 문자만 했지, 이렇게 만나는 건 진짜 오랜만이잖아!”
강재하는 태주를 요란하게 끌어안았다.
태주를 보자마자 눈가가 접히는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태주도 강재하도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이야기할 것 투성이었다.
“요즘 강현이는 뭐하냐? 회사 옮기더니 통 소식이 없다, 애가.”
“요즘에 뮤지컬 도전하고 있어요. 라디오 디제이 제의 들어온 거 있는데 그것도 고려 중이고요.”
“뮤지컬? 라디오? 그거보다 주연으로 드라마 미니시리즈 게 돈은 더 될 텐데.”
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대요. 뮤지컬에 출연하는 거. 지금 오디션 준비하느라고 엄청 바쁩니다.”
그의 말에 강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회사에 있을 때도 뮤지컬이나 라디오, 무척 하고 싶어 했지. 회사에서 돈 안 된다고 반대해서 못 했지만.”
“강현이가 우리 회사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행이죠, 제가 강현이더러 우리 회사로 오라고 꼬드긴 거라.”
“강현이는 너희 회사가 아니라 너희 팀이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잘해주나 봐? 강현이한테.”
강재하는 아티스타 컴퍼니에서의 임강현을 생각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강현이를 밀크남 이미지로 밀고 나가려고 했거든. 무조건 드라마로 띄우려고 했고. 아무튼, 그건 그렇고.”
탁.
강재하가 책상을 치며 태주의 주의를 끌었다.
“너 ‘조선패션왕’이랑 ‘청룡검신’ 왜 거절했어?”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태주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형, 이미 제 손을 떠난 작품들이고. 저는 이미 다른 작품을 하고 있잖아요.”
“정말 아까워서 그래. 내가 널 진작 만나서 조언했어야 하나 싶고.”
“뭘요?”
잔뜩 진지한 강재하를 보고 태주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기로 했다.
궁금한 건 이중협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선배랍시고 뭔가 조언하겠다고 하나 본데. 도대체 뭘까?]잔뜩 뜸을 들인 강재하가 한숨을 쉬며 태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람이냐, 돈이냐. 사실 이건 배우들이 커리어 내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야. 솔직히 배역 가리지 않고 막 하는 신인 시절에는 이런 고민 안 해.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오고 배역을 골라야 할 시점이 되면, 고민한다 이거야.”
그가 태주를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전에 같이 작품 했던 감독님이 제안하는 작품을 의리로 할 것이냐. 아니면 투자금이 두둑한, 좀 더 스케일 큰 작품을 도전해 볼 것이냐.”
“아, 형.”
다음에 나올 말이 뻔히 예상되는 태주는 급히 강재하의 말을 끊었다.
“저 그런 이유로 양 감독님 영화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그 영화가 재밌었다고요, 조선패션왕 보다.”
“뭐야. 그럼 네가 ‘청룡검신’ 거절한 것도 같은 일환이냐?”
“그건…….”
“솔직히 말해봐. 너 사극 잘하잖아. 사극으로 영화도 두 편이나 했고. 그런데 이번 드라마는 왜 거절한 거냐?”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태주는 머리를 굴렸다.
[재미없다고 솔직하게 말해. 여기서 뭘 더 거짓말하려고?]이중협의 조언에 태주는 머뭇거렸다.
‘그래도 지금 드라마 찍고 있는 당사자한테 그런 건 악담이잖아요. 이왕 찍는 거, 기분 좋게 찍어야죠.’
결국 태주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이제 사극보다는 현대극으로 제 한계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청룡검신’의 주인공은 저보다는 형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그 말에 강재하는 단순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건 그렇지.”
“형이 있어서 거기 현장 분위기도 좋을 것 같아요. 저 ‘그림자 무사’ 찍을 때 형 덕분에 정말 즐겁게 했잖아요.”
분위기를 풀려는 태주의 말에 강재하는 갑자기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야, 분위기가 좋기는 무슨. 하루하루가 완전 살얼음판이야. 솔직히 좀 짜증 난다.”
“…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태주가 눈을 크게 뜨자, 강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들 기 싸움이 장난 아니야. 여주인공 맡은 은혜선하고 무녀 역할인 중국 여자애가 매일같이 으르렁댄다.”
“배역 분량 때문인가요?”
“맞아!”
“이번에 여론이 안 좋아서 분량 줄인다고 하지 않았어요?”
“줄이긴 했는데, 그래도 거의 비슷해. 나랑 말도 안 되는 로맨스로 엮이는 것도 똑같고.”
강재하가 이해가 안 가는 듯 태주에게 되물었다.
“솔직히 그 중국 애가 여주인공 비중으로 분량이 많거든? 현장에서도 말 많아, 걔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데 씬을 다 걔한테 몰아준다고.”
“은혜선 씨가 여주인공인데, 나중에라도 비중이 늘어나지 않을까요?”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아. 이게 제작사의 농간이라는 말도 있거든. 제작사가 너희 회사잖아, 아주 그 중국 배우 밀어주려고 애를 쓰는 거지.”
강재하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배우는 연기로 승부해야 하는데, 뒤에 소속사를 업고 뭘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 * *
강재하와 점심을 먹고 돌아온 후, 태주는 곧장 ‘데스 게임’ 촬영장으로 향했다.
오늘 촬영이 진행되는 곳은 연희대 근처의 짜장면집.
차정후가 ‘데스 게임’에 참가하기 전, 사고로 피아노를 그만두고 짜장면 배달하는 장면을 찍기로 했다.
“너 배달부 역할이 엄청 익숙해 보인다?”
“예전에 동락이 독립영화 찍었을 때, 배달부 역할 연기했었거든요.”
검은 츄리닝 바지와 저지를 입은 태주가 대본을 보며 대사가 입에 익을 때까지 중얼대고 있는데.
옆에서 차용석이 그에게 슬쩍 물었다.
“점심때 강재하는 잘 만났냐? 괜찮았어?”
“네? 아, 네….”
“표정이 영 찜찜한데. 왜, 강재하가 너더러 뭐라고 한 건 아니지?”
차용석의 추궁에도 태주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강재하와의 대화에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어 충격이었다.
드라마 ‘청룡검신’의 분위기가 개판이라는 것과드림액터스가 ‘샤오웨이’를 작정하고 밀어서 여주인공 분량과 거의 맞먹는다는 걸.
회사에 정말 실망스러운 순간이었다.
회사가 배우를 돕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제작사의 위치를 내세워 분량을 확보하는 건 치트키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업계에서 완벽한 도덕성을 기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형, 나는 정말 내 힘으로 열심히 올라갈 거예요.”
뜬금없는 태주의 말에 차용석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넌 이미 그러고 있어. 이따금 네 매니저인 내가 옆에서 조력하는 게 없어서 너무 무안할 정도로.”
“하하, 그런가요?”
그때, 모황국 감독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오늘 찍을 씬에서 ‘음대생 소희’로 나오는 배우가 곧 오실 겁니다.”
그 말에 태주가 손을 들었다.
“안 그래도 궁금했습니다, 감독님. 한번 대본을 맞추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당일에 가능할까요?”
“태주 씨하고 아주 쿵짝이 잘 맞는 배우라, 오늘 맞춰도 충분할 겁니다.”
뭔 소리야, 그게, 라는 태주의 표정도 잠시.
그는 저쪽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발견했다.
“아니, 도대체…….”
“태주 오빠!”
환히 웃으며 그에게로 뛰어오는 여자.
분홍색 투피스를 발랄하게 차려입은 설채빈이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