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20
220화
위기는 가장 큰 기회 (1)
* * *
타악!
저 멀리 있던 우익수가 호쾌하게 공을 잡아챘다.
“타자 아웃!”
덕순고등학교 유니폼을 입은 투수가 두 손을 높게 뻗어 동료들을 격려하는 가운데.
“하나만 더 잡으면 게임 끝이다!”
경기장 내 가득 채운 관중들은 제각기 실망, 혹은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9회 말에 투아웃이라니! 이제 남일고등학교에 가망은 없는 건가?”
“덕순고를 상대로 9회까지 1점 차이로 끌고 온 것만으로 대단한 거지.”
“그래도 남일고에는 불세출의 천재, 탁윤도가 있잖아. 걔가 한방 해줄지도 몰라.”
이곳에서는 대통령배 전국 고교 야구대회가 치러지고 있었다.
덕순고와 남일고가 맞붙는 이번 경기의 스코어는 9회 말인 현재, 2대 1이었다.
전국에서 뽑혀온 학생들로 이루어진 명문 덕순고와 달리 남일고는 지역 학생들로 이루어진 아주 평범한 고등학교다.
그러나 대회 내내 언더독의 반란이라 불리며 승승장구했고, 그 이면에는 두 명의 선수가 있었다.
투수와 타자 두 부문에서 고등학생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재능을 선보이며 팀을 4강까지 이끈 탁윤도.
주장으로써 팀을 위해 헌신하며 묵묵히 받쳐줬던 황보훈.
그 둘의 활약에 힘입어 남일고는 지역대회를 제패, 전국대회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9회 말 투아웃인 지금, 남일고의 패색이 점점 짙어지자.
“이제 우리도 여기까지인가.”
“하긴, 덕순고를 상대로 여기까지 버틴 것도 잘한 거지.”
남일고의 벤치에서 김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에 탁윤도가 버럭 화를 냈다.
“벌써 질 생각을 하냐, 새끼들아! 아예 지금 짐 싸서 경기장 나가지 그래!”
“윤도야.”
“그렇잖아요, 감독님. 아직 타석이 한자리 남아 있다고요. 바로 저요! 야구천재 탁윤도!”
잔뜩 흥분한 탁윤도를 본 감독이 황보훈에게 눈을 마주쳤다.
탁윤도를 다독일 수 있는 건 오직 팀의 주장인 황보훈뿐이었기 때문.
황보훈은 감독에게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윤도의 어깨를 탁, 쳤다.
“너 그렇게 자신이 있다, 이거지? 그럼 어떻게든 나한테까지 타선을 이어줘. 9회 말 투아웃에서 영웅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너뿐이잖아.”
황보훈의 말에 탁윤도가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이내 자신이 들고 있던 공을 그에게 던졌다.
탁!
굳은살이 가득 박인 황보훈의 손에 야구공이 쥐어진 순간.
탁윤도가 그에게 진지한 눈을 맞추었다.
“절대로 널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내 말 믿어.”
“믿는다.”
황보훈이 미소 짓더니 그의 등을 밀었다.
“9회 말 투아웃의 영웅이 돼줘, 탁윤도!”
곧이어 탁윤도가 타석에 섰다.
상대가 신중하게 투구했지만 탁윤도는 호쾌한 스윙을 휘둘렀다.
경쾌하게 공이 맞는 소리와 함께 탁윤도는 1루로 출루했다.
“역시 윤도가 해낼 줄 알았다니까! 우리의 영웅!”
남일고의 벤치가 뜨거워진 가운데 다음 주자인 황보훈이 마운드로 올라가려는 순간.
감독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영웅은 윤도만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훈아, 나는 너를 믿고 있단다.”
감독의 믿음을 뒤에 업은 황보훈이 타석에 들어서자.
상대편 벤치에는 선수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괜찮아, 한 명만 더 잡으면 된다! 그리고 쟤는…….”
상대 감독은 황보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더 강하다! 저런 겉절이 따위 한 번에 잡아 버려!”
1번의 스윙만으로 출루한 탁윤도와 달리, 황보훈은 벌써 두 번의 스트라이크까지 몰렸다.
신중하게 타이밍을 재고 있는 황보훈의 뒤에서 상대방 포수가 실실거렸다.
“스트라이크 한 번이면 너넨 끝이야.”
그리고 투수가 공을 세차게 던진 순간.
타악!
황보훈이 과감하게 때려낸 공이 저 멀리 담장을 넘어갔다.
“2점 홈런이다!”
“대박, 9회 말에 역전했어!!”
경기장은 관중의 엄청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끝내기 홈런이야! 남일고가 3-2로 이겼다!”
황보훈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벤치에서 달려 나온 친구들이 그를 에워싼다.
“훈아, 너 진짜!”
“황보훈 이 자식…. 진짜 제법이잖아!”
그리고 탁윤도가 자신의 곁으로 달려왔을 때, 황보훈은 싱긋 웃었다.
“나 어땠냐?”
“죽여줬지!”
탁윤도가 싱긋 웃으며 황보훈과 눈을 맞췄다.
“고맙다, 훈아. 너는 우리의 영웅이야!”
“나야말로 고맙다.”
황보훈은 자신을 야구로 이끌어 준 친구, 탁윤도를 쳐다보며 마음을 전했다.
“너는 나의 끝내기 홈런이야, 친구.”
* * *
팟!
다른 이의 인생에서 태주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태주의 눈에 저 멀리 날아가는 공이 보였다.
우중간을 길게 뻗어가는 공에 관중들도, 마이크를 잡은 아나운서도 흥분했다.
“오오, 한태주 씨가 탁윤도 선수의 공을 멋지게 받아쳤습니다!”
배트를 잡고 있던 태주의 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탁윤도가 던진 공의 메시지가 그에게 스며들었기 때문.
솔직히 이제껏 진심으로 믿지 못했었다.
야구공을 받는 것만으로 어떻게 상대가 건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겠냐고,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태주는 탁윤도의 메시지를 들었다.
자신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이건 이제껏 마운드에 오르지 못한 이유인 그의 영원한 친구, 황보훈을 위한 전언이었다.
-나는 이 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너도 최선을 다해 현재 상황을 이겨내. 나의 평생 친구이자 라이벌.
탁윤도와 황보훈는 함께 야구를 시작했던 친구이자 평생 야구와 함께하리라 맹세했던 동료였다.
그들이 공 하나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깊은 사이라는 걸, 이제야 실감했다.
탁윤도의 녹슬지 않은 실력과 태주의 멋있는 폼에 야구장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 이때.
태주와 탁윤도는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사력을 다해 던진 공과 온 마음을 담아 휘두른 배트.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없이 웃을 수 있었다.
탁윤도가 모자를 벗고 태주에게 고개 숙이자, 태주도 방망이를 밑으로 놓고 그에게 인사했다.
그 모습이 전광판에 크게 담기자 아나운서가 그들을 호명했다.
“시구에 탁윤도 선수님, 시타에는 한태주 배우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백산 재규어즈 마스코트의 안내를 받아 야구장을 나가는 길.
태주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황보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성불하셨나?’
아무런 말 없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네.]그의 마음을 알아챈 듯 이중협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보통 귀신들이 성불할 때는 자신을 성불시켜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관례거든. 그거 안 하고 튀는 귀신은 거의 못 봤는데.]그때, 옆에서 나란히 가던 탁윤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탁윤도가 급히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터질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까랑까랑 울렸다.
-윤도야! 윤도야…. 흐흑….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우리 훈이가… 훈이가 일어났다! 눈도 뜨고 정신도 제대로 차렸어! 제일 먼저 찾는 게 너랑 한태주 배우다. 그러니까 얼른 데리고 오렴!
그리고는 툭, 끊긴 전화.
믿기지 않는 소식에 태주와 탁윤도 가 다급하게 야구장을 뛰쳐나갔다.
* * *
조금 전까지 야구장에 있었던 태주는 지금, 황보훈이 입원해 있는 병실에 와 있다.
오는 길에 차용석에게 사정을 설명했으니, 그는 구단에 자초지종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태주가 경기를 안 보고 왜 급하게 사라졌는지 해명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현재.
탁윤도가 의자에 앉아 황보훈의 손을 붙잡고 있다.
“훈아, 황보훈! 나 윤도야, 윤도!”
“그만해, 머리 울린다.”
병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말에 황보훈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길에서 봤으면 몰라봤겠다. 이제는 아저씨가 다 됐잖아.”
유쾌한 농담까지 한 황보훈의 시선은 곧 옆에 서 있는 한태주에게 향했다.
태주는 놀라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핏기없는 귀신의 모습도,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것도 아닌 황보훈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옆에 있던 이중협도 혀를 내두르며 놀라고 있었다.
[세상에, 나도 말로만 들었지 생령이 성불해서 다시 살아난 걸 보는 건 처음이야.]그때, 황보훈이 태주를 보며 씩 웃었다.
“한태주 씨, 정말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감개무량합니다.”
그의 말에 탁윤도도, 황보훈의 어머니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태주 씨를 기억하니, 훈아? 너 누워계실 때 자주 찾아오셨기는 했는데….”
“기억하고 말고요. 아주 고마우신 분이죠.”
황보훈은 태주를 보며 힘을 주어 말했다.
“저, 한태주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깨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 말에 탁윤도가 끼어들었다.
“네가 한태주 씨를 언제 만나봤다고 그래?”
그 말에 황보훈은 태주와 시선을 마주 보았다.
웃음기 가득한 그를 대신해서 태주가 대답했다.
“아마 꿈에서 만났을 겁니다.”
“꿈이요??”
“네, 아주 기분 좋은 꿈이었죠.”
다들 혼란스러운 가운데, 오직 황보훈과 태주만이 서로를 보며 유쾌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 *
며칠 후, 논현동 인근의 커피숍.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황유나가 법인카드를 패기롭게 직원에게 내밀었다.
“아메리카노 8잔 주세요. 두 개는 샷 추가해주시고 두 개는 얼음은 적게 물 많이로 부탁드려요.”
쉴 틈 없이 주문한 황유나는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자리에 앉았다.
인턴인 그녀는 점심을 일찍 해치우고 연예국 선배들을 위해 커피를 사러 온 거였다.
핸드폰을 보며 커피를 기다리던 그녀의 눈에 띈 기사가 있었으니.
“홍은지 선배님이 태주 오빠 기사를 쓰셨네?”
황보훈을 가운데 놓고 탁윤도와 한태주가 환히 웃는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
황유나는 기사에 푹 빠져, 읽고 또 읽었다.
“무슨 판타지 소설 보는 거 같네. 가능한 거야, 이게?”
한태주 선배의시타가 지난 10년간 잠들어있던 야구선수, 황보훈을 깨웠다는 내용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흥미로웠다.
황보훈 선수의 말로는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귀는 열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태주하고 탁윤도가 시구, 시타 하는 걸 알게 되었고.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얼른 일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란 게 10년 만에 깨어난 계기가 됐다고 한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감동의 도가니에 황유나의 얼굴이 붉어진 그때.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 두 명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이번에는 진짜라니까!”
“너는 조삼식 선배의 헛소리를 진짜 믿는 거야? 그 선배, 한태주 물고 늘어지는 게 이번이 몇 번째야? 하도 헛소리하니까 국장님도 그 인간은 안 믿는다고.”
“이번에는 진짜래. 드림액터스 장 대표가 직접 말해준 내용이라고 했어.”
장 대표? 한태주?
황유나는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최대한 귀를 그쪽으로 열었다.
그녀들의 말을 훔쳐 듣던 황유나는 재빨리 핸드폰 메모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