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22
222화
위기는 가장 큰 기회 (3)
* * *
그 주, 주말.
삼엄한 경비가 서 있는 고급 호텔에 여러 대의 차가 들어섰다.
그곳에서 마치 시상식이 열리는 듯, 한껏 멋을 낸 여러 연예인이 호텔 안으로 들어선 가운데.
태주도 차용석과 함께 이곳에 참석했다.
이곳은 XJ 엔터테인먼트 산하 파티.
태주는 사실 오늘 피셔 감독의 영화 대본을 정독할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자리에 종종 참석하는 것도 그가 배우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원래 연기를 오래 하려면 이렇게 제작자들한테 인사도 오고 그래야 하는 거야. 네 힘으로만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잖아?
차용석의 말마따나 작품을 만드는 건 배우의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기에, 이런 자리에서 참석해 제작자들과 투자자의 얼굴을 익히는 것도 필요할 듯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온 초대장을 장희재 대표가 일부러 누락시켰다는 말에 꼭 오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장 대표가 날 이렇게나 막는 건지, 궁금해.’
그가 거대한 홀에 들어가니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유명 인사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인다.
태주가 등장하자 많은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태주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태주를 보고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건 장희재 대표.
검은 양복 차림에 와인 잔을 들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태주를 발견하자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태주는 그를 보고 피식 미소 짓고는 눈인사했다.
장희재가 눈썹을 씰룩이며 그에게로 오려던 그때.
분명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던 차용석이 장희재의 앞을 가로막는 모습에 태주가 움찔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들리지는 않지만 그들의 표정과 모습으로 기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잘생긴 장희재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고, 차용석의 듬직한 등이 꿈틀거린다.
태주가 그들 사이로 향하려고 하는데, 뜻밖의 인물이 그를 불렀다.
“태주야, 이게 웬일이냐!”
그를 발견한 이선우가 반갑다는 듯 그를 챙겼다.
“너도 오는 줄 알았으면 같이 왔을 텐데. 말하지!”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초대장을 늦게 받았거든요.”
“그래? 아무튼 잘됐다, 나랑 같이 다니자.”
“네, 좋아요. 그런데 잠시만요.”
태주가 양해를 구하고 차용석이 있는 쪽을 돌아봤는데, 그는 이미 장희재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왜? 누구 찾는 사람 있어?”
“아니에요. 가요, 선배님”
파티장에는 연예인, 음악인, 체육인, 정치인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유명 인사들로 꽉 차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태주의 눈에 민소예도 보였다.
의외의 인물들의 등장은 더 있었다.
특히 문화부 장관이 이곳에 참석한 것에 깜짝 놀랐다.
“이 파티가 장관님까지 참석할 만큼 중요한가요?”
“너 오늘 처음 초대받은 거야?”
“네.”
“아, 그래서 모르는구나. 이 파티 주관한 한서경 부회장이 우리나라 문화계의 거물이잖아. 해서 대부분 그녀의 초대를 거절 못 하거든.”
태주를 챙겨주던 이선우가 급한 전화로 자리를 비우자, 그런 태주를 알아본 익숙한 이가 다가왔다.
“한태주 씨?”
“선배님?”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듯한 눈빛에 강승민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큰어머니가 XJ 영애시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한서경 부회장의 바로 밑에 여동생. 그래서 나도 겸사겸사 초대받은 거죠.”
그의 말을 듣던 태주의 얼굴이 점점 묘하게 변했다.
이 선배, 집안이 좋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좋았다고?
XJ 그룹과 사돈을 맺을 정도면, 엄청난 집안인가 보네?
[얘네 할아버지가 전직 대법관이랬잖아. 큰아버지도 빵빵한 사람인가 보지. 원래 재벌가가 법조계하고 혼인 맺는 건 흔한 일이잖아.]이중협의 말에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끼리끼리 결혼한다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그때, 강승민이 태주에게 선뜻 제의했다.
“혹시 지금 시간 있으면, 제가 큰어머니를 소개해드려도 될까요? 태주 씨 왕팬이시거든요.”
“그럼 인사드려야죠.”
재벌가 영애라던 그의 큰어머니가 궁금했던 태주는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 * *
자정이 훌쩍 넘은 새벽.
늦은 시간이지만 선플라워 프로덕션의 회의실에는 아직도 열띤 회의를 하는 직원들로 가득했다.
책상에 놓인 노트북에 띄어져 있는 공통된 단어는 ‘나의 미래’.
그 영화의 감독, 앤디 피셔도 자리해 있었다.
“촬영 스케줄이 11월 중순에서 12월 초까지 이어지니, 우리는 한국에서 연말을 보내게 생겼군요.”
“앤디, 운 좋은 줄 알아. 해외 로케이션이라니. 공짜 해외여행 가는 거로 생각하라고.”
“촬영하기 바빠서 그런 여유 느낄 시간도 없을걸요.”
잔뜩 들떠 보이는 제작자 그렉에게 앤디가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보다 우리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드는 것 아닙니까? 해외 로케이션이라니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서울의 정경을 영화에 담게 해주고 싶어, 해외 로케이션까지 잡은 거잖아. 그런데 뭐가 이렇게 불만이지, 당돌한 신인 감독 씨?”
그렉의 말에 앤디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맨날 제작비 모자란다고 걱정했던 건 당신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얼마나 씬을 고심해서 스토리보드를 썼는데요. 액기스만 뽑아서 장면을 짜려고 노력했고요.”
“그래서, 제작비를 줄이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다?”
“네.”
앤디의 뿌루퉁한 얼굴에 그렉이 미안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친애하는 앤디, 그건 내가 당신의 늘어지는 스토리를 좀 더 좋게 만들어 보려고 내놓은 비책이었어.”
“뭐라고요?”
“솔직히 ‘나의 미래’가 처음에 여러 투자자에게 거절당한 이유가 소재도 소재인데 지나친 디테일로 스토리가 늘어져서였잖아. 해서 좀 더 축약하고 압축해야 더욱 재미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고.”
“그런 거였군요…….”
앤디의 얼굴에 놀라움과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스토리의 속도감이 많이 개선된 건 사실이었기 때문.
“게다가 해외 로케이션이나 투자 부문에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 앤디.”
그렉이 다른 직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한국 로케이션 장소 잡는 과정에서 한국의 유력한 배급사와 연이 닿았어. XJ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인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개봉하게 된다면 그쪽과 하게 될 가능성이 커.”
“XJ 엔터테인먼트….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의 투자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맞아. 거기가 공격적으로 여러 작품에 투자해서 최근에 성과를 많이 보고 있지. 무엇보다, 우리도 그곳의 투자 대상이 되었고.”
“얼마나요?”
패기 넘치는 젊은 감독 앤디에게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의 제작자, 그렉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숫자를 가리킨다.
앤디는 숫자를 세어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한국에 이런 투자자가 있었다고요?”
“남자보다 훨씬 대담한 여장부라고 소문이 자자해. 앤디, 당신은 데뷔작부터 운이 무척 좋은 거야. 물론 우리가 한태주를 주연으로 물었기에 가능한 투자인 것 같지만.”
“그럼 저희, 한태주 상대역에 좀 더 좋은 배우를 쓸 수 있겠군요.”
앤디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적은 개런티 때문에 출연을 망설이는 배우들이 꽤 있었잖아요. 제작비가 많아진다면 캐스팅이 더 수월해지지 않겠어요?”
아쉬운 기색을 삼킨 앤디가 덧붙였다.
“사실 한태주가 할리우드에서 생소한 배우라 거절한 경우도 많았지만요….”
“한태주가 아시아권에서는 톱스타지만 아직 할리우드에서는 신인이나 다름없지.”
냉철한 분석의 그렉이 옆에 있던 직원에게서 리스트를 건네받았다.
“그래도 개런티가 올라가면 오겠다는 배우가 몇 있어. 앤디, 당신도 보고 같이 의논해 보자고.”
보고서를 쭉 훑어보던 앤디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니, 이 배우가 하겠다고 했다고요?”
“그 배우는 이번 선댄스 영화제에 방문해서 당신과 한태주가 나온 단편영화를 직접 봤다는군. 그래서….”
그렉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한태주와 직접 합을 맞춰보고 출연을 결정하고 싶다고 했어.”
“이 둘의 조합이 이뤄진다면야…. 너무 좋아서 기절할 거예요, 저.”
앤디가 바들바들 떨며 리스트 속 이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디에고 크루즈.
스페인 사람으로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진출, 지금은 21세기 최고의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이라 불리는 배우였다.
* * *
한편, 강승민이 태주를 데려간 곳은 파티장에 별도로 마련된 별실.
그곳에서는 화장을 진하게 한, 두 여인이 마주 본 채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쪽은 키가 크고 한쪽은 몸집이 작았지만, 그 둘이 자매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큰어머니, 한태주 씨 오셨어요.”
“어머, 어머!”
태주의 등장에 키 큰 여자가 벌떡 일어나 태주의 손을 잡았다.
“내가 너무 팬이에요, 태주 씨!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한서연이에요.”
“서연아, 너무 흥분하지 마, 주책맞아 보여.”
자그마한 여자가 태주의 다른 손을 잡으며 밝게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한태주 씨. 한서경이에요. 내가 장 대표한테 만나게 해달라고 할 때마다 그 인간이 태주 씨 바쁘다고 거절하더니 이제야 보네요.”
그녀는 유쾌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축하 고마워요. 그런데 이제 곧 피셔 감독하고 같이 영화 찍죠?”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태주의 얼굴에 그녀가 대답했다.
“제가 ‘나의 미래’에 100억 정도 투자했거든요. 그래서 이번 영화에 기대를 좀 하고 있어요.”
그 소리에 태주는 냉큼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일전에 지나가는 소리로 앤디에게서 들은 적 있었다.
선플라워 프로덕션은 이제껏 공포영화로 근근이 이어온 제작사라, 이번 영화에도 제작비가 빠듯한 형편이라고.
“제가 얼마나 태주 씨가 보고 싶었으면, 장 대표 보기도 전에 이렇게 태주 씨를 먼저 불렀겠어요.”
태주를 훑어보던 한서경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딱 장 대표가 싫어할 스타일이구만. 깨끗하고, 반듯하고, 연기에 대한 소신도 있고.’
그래서 초대장도 일부러 빠뜨린 건가.
한편, 태주도 그녀에 대해 파악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가벼운 여자로 보이지만 그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나도 장 대표가 이 여자한테 공들인다는 것만 소문으로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이중협이 혀를 차며 감탄했다.
[과연 여장부답네. 부드럽게 상대를 압도하는 저 카리스마.]‘상대를 온전히 신뢰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상대를 고르는 스타일 같아요. 그러니까 장 대표님 말고 저를 먼저 부르신 거겠죠.’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탐색하던 무거운 공기 속.
먼저 침묵을 깨뜨린 건 태주였다.
“장 대표님을 빼고 절 찾으셨다는 건. 저에게만 논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한서경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