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내가 연기를 하는 이유 (2)
생각지도 못한 아이 귀신의 정체에 태주는 이중협과 당황스러운 시선을 마주쳤다.
‘아빠가 디에고 크루즈라면, 얘는….’
2년 전에 사고로 죽었다던 디에고의 첫째 딸, 레오니 크루즈였다.
그러고 보니 첫째도 입양아였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이게 무슨 인연인지.’
아이가 무슨 한이 있어서 죽은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돌아다니는 건지도 궁금했다.
대본 연습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머리가 레오니의 등장으로 환기되었다.
‘정말 자랑스럽겠다, 아빠가 그렇게 대단한 배우라서.’
그 말에 레오니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레오니의 아빠는 스페인에서도, 할리우드에서 많이 찾는 배우야! 자꾸 일이 들어와서 정말 바빠! 그래서 레오니랑도 많이 놀아준 적 없어.]그 말에 이중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분명 디에고 그 양반, 가정적이라고 하지 않았어? 가족 일이라면 만사를 다 제쳐둔다며. 연기는 그다음이고.]‘아, 형이 없을 때, 용석이 형이 말해준 게 있어요.’
태주가 이중협을 힐끗하며 말을 이었다.
‘딸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연기를 했는데. 딸이 죽은 후로 사람이 확 바뀌었대요. 연기 중심의 생활에서 가족 중심의 생활로.’
[아, 그렇구나.]완벽하게 이해된 이중협이 곱슬머리를 흔드는 레오니를 힐끗거렸다.
[그런데 쟤는 갑자기 왜 네 앞에 나타난 걸까? 꼬맹이가 무슨 한이 있어서 이제껏 이 세상을 배회한 거지?]태주는 그런 레오니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레오니, 오빠가 뭘 해주면 될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 아니야?’
그 말에 레오니가 잠시 망설이더니, 손을 모으고 말했다.
[레오니는 연기가 왜 그렇게 재밌는지 알고 싶어.]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목표에 태주는 잠시 멍해졌다.
이 아이는 등장부터 지금까지, 쭉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야, 10살짜리 중에 이렇게 철학적인 아이는 내 생애 처음이다.]‘저도 처음이에요. 도준이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질문을 한 적은 없거든요. 연기가 왜 재밌냐니, 그건….’
고민을 거듭하던 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재밌는 건데, 연기는.’
[흐음? 그냥 재밌다니,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타당하지 않은 이유잖아.]코웃음을 치는 레오니의 말에 태주가 반박했다.
‘그럼 너는 왜 연기가 재밌는지 궁금해하는 건데?’
[레오니의 아빠가 푹 빠졌던 ‘연기’가 뭔지 궁금했어. 연기하는 아빠는 늘 눈이 반짝거렸거든. 멋있어 보였어.]레오니는 머리를 배배 꼬며 태주에게 말했다.
[도대체 연기가 뭐길래 그렇게 재밌는지, 레오니도 알고 싶어.]* * *
동 시각, 차용석은 호텔 인근의 바에서 두 명의 남자와 만나는 중이다.
선플라워 프로덕션의 대표, 그렉과 낮에 만났던 배우 디에고 크루즈.
차용석에게 술을 따라주던 디에고가 주변을 살폈다.
“태주도 데려오지, 그랬어요. 여기 술맛 괜찮은데.”
“지금 대본 연습에 한창입니다.”
“대본? 내일 나하고 맞춰볼 그 대본이요? 그게 뭐, 하루 연습한다고 실력이 갑자기 늡니까?”
차용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캐릭터에 파고들면 놀라운 연기가 나올 수 있죠. 특히 해당 캐릭터에 애정이 깊은 태주 같은 경우는, 더더욱요.”
“열심히 하는 배우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테스트에도 열심이네요. 솔직히 제가 자기 연기를 테스트한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을 텐데.”
“원래 태주는 그런 아이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연기와 작품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죠.”
“모든 것을 내던진다라….”
깊은 생각에 잠긴 디에고의 얼굴에 점점 술기운이 올라오는 그때.
차용석이 은근슬쩍 본심을 내비쳤다.
“솔직히 이번 영화에서 태주랑 당신, 케미가 죽여줄 것 같습니다. 내일 있을 테스트, 기대하셔도 좋을걸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디에고가 제작자 그렉과 차용석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태주와 연기 합을 맞춰보겠다고 한 건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영화에 출연해보겠냐는 그렉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거든요. 그런데 한태주의 연기에 끌려서 보고 결정하자는 생각으로 온 겁니다.”
“가족 때문에 고민되는 거라면, 둘의 균형을 최대한 맞추면 되지 않을까요? 연기하는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습니까?”
차용석의 말에 디에고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연기는 내가 언제든 원할 때 할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을 마주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요. 아빠로서 아이들이 크는 과정을 지켜보며 어려움을 함께하지 못한 것. 첫째 아이를 그렇게 보낸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렉이 그의 고통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디에고.”
“우리 딸, 레오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도 벌써 2년 전이군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연기를 한답시고 레오니와 시간을 거의 보내지 못했어요. 그게 두고두고 후회돼요.”
디에고의 강인한 얼굴에 후회가 가득 찬 순간.
차용석과 눈을 맞추며 신신당부했다
“연기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 아이들도 사랑해요. 그러니까 한태주가 그걸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내가 그 영화를 할 일은 없을 겁니다.”
* * *
다음날, 오전.
바에서 나와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도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던 태주.
새벽 어스름이 다가와서야 자신이 밤을 새운 걸 깨달았다.
옆에서 대사를 봐주는 귀신들과 함께 연기를 연습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야, 미쳤어, 미쳤어! 컨디션 조절하라니까 밤을 새우면 어떡하자는 거냐!]이중협이 옆에서 다크서클이 자욱한 태주를 챙겼다.
[괜찮아? 용석이 이 녀석은 매니저라는 놈이 술 퍼먹고 새벽에 들어와서는 퍼질러 자고, 말이야!]‘괜찮아요, 형. 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컨디션이거든요.’
태주는 옆에서 같이 대본을 보고 있던 레오니를 가리켰다.
‘레오니 덕분에 더욱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며 온 아이 귀신, 레오니는 의외로 태주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레오니는 캐릭터의 감정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왜 여기서 화가 나는지, 왜 슬픈 척 연기하는지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번 보고 들은 건 절대로 잊지 않는 천재적인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동안 태주가 봐온 여느 아이와 다른 건 확실했다.
그래서 더욱 난감했다.
‘감정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아이에게 연기가 재밌다는 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연기는 다른 이의 인생을, 감정을 느껴보는 건데 말이다.
“우선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자!”
태주는 벌떡 일어나 차가운 물로 세수했다.
커튼을 젖히고 발코니로 나가니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붉은 태양이 저편에서 솟아오르는 게 보이자,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태주의 가슴 속에 가득 찼다.
지금 태주의 머릿속에는 ‘나의 미래’의 진으로서, 리에게 맞서 스크린 속에서 노닐 생각밖에 없었다.
밤새 빠져들었던 대사들이 그에게 완전히 흡수되는 순간.
태주의 눈앞에는 그 광경이 선연했다.
자신과 디에고 크루즈가 진과 리가 되어 칼싸움하듯 합을 맞추는 모습이.
이처럼 달콤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 디에고의 테스트에 합격해야 한다.
태주는 주먹을 꽉 쥐고 크게 소리쳤다.
“아자! 할 수 있다! 한태주 파이팅!”
뒤에서 레오니가 이중협에게 속삭였다.
[레오니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왜 저렇게 비과학적인 일을 하는 거야? 밤을 새워서 안 그래도 몸이 피곤할 텐데. 악을 쓰고 소리 지르는 건 몸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빼는 행위잖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이중협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들이 비과학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은 일들을 하는 데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어. 저것도 태주만의 의식이야. 기합을 통해 하루를 시작할 용기를 불어넣는 거지.] [흠.]레오니는 동그란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한태주의 저런 열정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뭔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고.
* * *
오전 11시 40분.
태주는 제 시각에 선플라워 프로덕션에 도착해 대본을 복기하고 있다.
그러나 디에고는 만나기로 한 11시가 한참 지났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옆에는 차용석이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렉에게 말했다.
“어제 내가 태주를 좋게 봐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약속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늦는다고 연락하는 건 도대체 뭡니까?”
“그게….”
“그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무례하네요.”
그 말에 앤디가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게요. 그렉, 어떻게 된 거예요?”
앤디의 시선을 부딪친 그렉은 묘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늦어도 정오까지는 온다니까, 오겠지. 상대는 할리우드의 거물이야, 쫄리는 우리가 참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렉은 디에고가 늦어지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차용석이 먼저 떠나고 단둘이 남자 디에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한태주가 말로만 나와 연기하기를 바라는 건지, 진짜로 원하는 건지 시험하고 싶어요. 진짜로 원한다면, 그가 자존심을 구기면서까지 나를 기다리지 않겠어요?
그렉은 회의실에 앉아 대본을 넘기는 태주를 힐끔거렸다.
옆에서 차용석과 앤디가 뭐라 하든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대본에 집중했다.
실제로 태주는 디에고가 늦게 오든, 일찍 오든 상관없었다.
오직 ‘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10분 후.
디에고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일찍 끝냅시다.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하와이안 셔츠에 캡모자, 그리고 헐렁한 수영복 바지.
누가 봐도 해변에 가려는 옷차림에 차용석은 씩씩거렸지만, 그런 그를 태주가 막았다.
“지금 널 무시하는 게 뻔한데! 우습게 보고 있는 거라고!”
“형, 진정해요. 지금 저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가 그를 압도하는 연기를 보여주면 끝날 일이에요.”
태주는 맞은편에 앉은 디에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끝내는 건 제가 아니라 그쪽에 달려 있겠죠. 제 연기에 밀려서 그쪽이 실수라도 하면 늦어질 테니까요.”
“뭐라고?”
태주의 도발에 디에고가 흥미롭다는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연기의 실수를 태주가 아닌 그가 할 수도 있다는 식의 도발.
당연하게 자신을 위에 놓았던 디에고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대본을 넘기며 그가 태주를 노려보았다.
“한번 해봅시다, 그럼.”
* * *
난장판이 된 집.
부엌에는 식기가 있는 대로 나와 나뒹굴고 있고, 거실에는 찢어진 베개에서 나온 솜이 나풀나풀 날리고 있었다.
이 집에서 한 달간 인질로 잡혀있던 진은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했다.
자신과 6시간만 같이 보내주면 돈을 준다던 ‘리’에게 속아서 결국 집에 갇히게 된 그.
한 달을 같이 보냈지만, 그가 보내줄 기미가 없어 결국 탈출을 감행한 것.
그러나 격렬한 시도 끝에, 진은 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털썩!
거실의 바닥에 쓰러지려는 진을 붙잡은 리는 그를 소파로 내던졌다.
푹신한 소파에 묻힌 진은 광기 어린 리를 마주했다.
“왜! 왜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어, 왜!”
핏발이 선 리의 암흑 같은 눈동자를 본 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을 것 같았으니까.”
“네가 왜 죽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돈도 줬잖아, 원하는 걸 다 사줬잖아. 하고 싶다고 한 것도 다 하게 해줬잖아!”
“사람은 말이야, 리. 자유가 없으면 죽어가는 법이야.”
진의 말에 리는 충격받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은 그런 리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해. 얼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얼마나 사랑이 고팠으면 날 돈으로 샀겠어.”
태주가 디에고 크루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태주를 시험하는 눈이 아닌, 완전히 작품에 빠져든 눈이었다.
일찍 끝내자고 거들먹거리던 디에고는 달라져 있었다.
진에게 집착하고 의지하는, 고독한 리에게 완벽히 빙의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리,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힘으로도 가둘 수도 없고.”
디에고를 빤히 보던 태주가 형용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날 놔줘, 리.”
* * *
“이거, 정말….”
태주와 디에고를 번갈아 바라보던 관계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함성을 애써 참았다.
앤디는 허벅지를 꼬집으면서까지 탄성을 참다가, 결국 옆에 있던 그렉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저 둘이 딱이라니까요! 상대방을 감쪽같이 속이는 한태주의 섬세한 연기에, 상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디에고의 무게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요!”
“저기 좀 봐, 앤디.”
그렉이 디에고 크루즈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앤디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처음에는 태주의 연기에 반신반의하며 대본 리딩에 참여한 그.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대본에 몰입해, 태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사를 치고 있다.
핏발이 선 그의 목을 보며, 그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디에고가 핏발이 섰으면 다 끝난 거야.”
그렉이 앤디에게 승리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디에고가 한태주에게 함께 연기해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야. 평생 저런 연기할 기회는 인생에서 있을까, 말까 한 기회니까.”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