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28
228화
내가 연기를 하는 이유 (3)
태주가 마지막 대사를 마쳤으나 주변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그의 손에서 들고 있던 대본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탁!
정신을 깨우는 소리에 태주가 눈을 깜빡였다.
사기꾼 ‘진’에서 배우 ‘한태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절박함과 여유로움을 담았던 진의 눈동자는 어느새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있던 디에고는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않은 듯, 그의 깊은 눈동자는 태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을 보던 집착 어린 눈빛인 것 같기도, 태주에 관한 관심이 불타오르는 눈빛인 것 같기도 했다.
“하…. 이건…….”
그때 디에고가 주름진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긴 한숨을 내쉰 그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 보였다.
이중협 옆에 바싹 붙어있던 레오니가 아빠의 얼굴을 관찰하고는 말했다.
[저거, 레오니의 아빠가 무언가를 숨기는 표정이야.] [숨기는 표정?]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어. 아빠가 왜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건지.]레오니의 시선을 따라 디에고를 본 이중협은 ‘숨기는 표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태주의 연기에 감명받았는데, 정작 자존심 때문에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못 내는 거구만.]이중협의 분석은 정확했다.
디에고는 감탄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을 애써 숨기며 태주를 바라보았다.
‘저 애송이 앞에서 내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대단한 녀석이네.’
자신과 같이 연기하고 싶어 LA까지 날아왔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단이나 맞춰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멋대로 만나는 시간을 바꾼 것도 한태주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한 그의 변덕이었다.
분명 화가 날 법도 한데, 연기에 영향이 갈 법도 한데.
한태주는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연기가 시작되자, 한태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재빠른 사기꾼, ‘진’만이 그의 눈앞에 있을 뿐이다.
그 둘을 흥미롭게 보던 제작자 그렉이 앞으로 나섰다.
“대사만 오가는 대도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연기로 칼을 뽑고 싸운다는 게 이런 거군요.”
옆에 있던 앤디도 흥분해서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은 있을 수 없을 거예요. 디에고 씨의 연기도 연기지만, 한태주 씨의 차분함 속에 감춰진 감성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힘을 뺀 연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사로잡는 힘이 인상적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앤디. 디에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갑자기 화살이 돌아온 디에고.
태주를 유심히 보고 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놀라웠습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한태주의 연기에 매료됐다는 사실을.
* * *
30분 후.
태주는 차용석, 박인우와 함께 제작사 밖으로 나와 숙소로 향했다.
빡빡한 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캐리어를 싸던 박인우가 궁금한 듯 차용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태주, 합격한 거예요?”
“글쎄, 나도 모르겠다.”
“팀장님이 모르시면 누가 알아요. 하, 태주 연기 정말 죽였는데. 디에고 크루즈, 자기가 뭐라고 우리 태주한테 확답도 안 주는 거람.”
박인우가 투정을 부리다 태주를 힐끗했다.
태주가 의연하다 못해 후련하다는 표정을 하자 의아한 듯했다.
“태주 너는 기분 나쁘지도 않아?”
“내가? 왜 나빠야 하는데?”
“아니……. 네가 직접 LA로 날아와 테스트까지 받았잖아. 그런데 정작 캐스팅 확답을 안 주니까.”
“형, 가족 두고 연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태주는 박인우에게 자기 경험을 빗대어 설명했다.
“배우들은 필연적으로 가족하고 연기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그런 의미에서 디에고는 지금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거야.”
“가족하고 연기, 둘 다 놓지 않으면 되잖아.”
“인우 형,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태주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배우 생활을 하는 건, 적어도 나한테는 불가능한 것 같아.”
아역배우 시절부터 연기를 재개한 지금까지 태주는 늘 가족들에게 고마웠다.
지금 연기를 하는 것도 고모와 태희의 이해가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무언가에 미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하잖아. 더욱이 다른 이의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는 오죽하겠어.”
“하긴, 네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다.”
태주의 말에 설득된 듯 박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옆에 있던 레오니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중협에게 중얼거렸다.
[레오니는 이해가 안 돼. 시간을 들여 노력했는데 결과를 얻지 못했어. 그런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지?]태주는 그런 레오니에게 대답하듯 박인우와 차용석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내가 이 영화를 위해, 이 캐릭터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다 보여줄 수 있어서 속이 시원해.”
그의 말에 박인우와 차용석은 동의의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건 그래. 너 연기 죽였어.”
“내가 보기에 디에고도 망설일 뿐이지, 결국 같이 영화 하자고 답 올 거야.”
태주도, 다른 사람들도 다들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레오니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듯 고래를 갸웃거렸다.
[레오니의 아빠를 영화에 캐스팅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는데, 만족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게 가능한 거야?] [그게 연기의 묘미야.]이중협이 레오니에게 슬쩍 말했다.
[그만큼 태주가 연기를 좋아하니까. 자기가 원하는 연기를 했으니까. 만족하는 거야.] [연기를 좋아하니까….]이중협의 말을 따라 하던 레오니의 눈이 반짝였다.
* * *
동 시각.
태주와의 대본 리딩이 끝났음에도 디에고는 아직 제작사를 떠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라 대본을 보며 조금 전 태주와 합을 맞춰본 상황을 복기하는 중이었다.
“특히 이 대사를 하는 한태주의 연기가 인상적이더군요.”
디에고가 한 구절을 콕 짚었다.
“너와 이런 관계를 형성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나의 현재를 살아가고, 나의 미래를 공유하는 너야.”
“딕션이 참 좋았죠. 솔직히 원어민 같았다고는 못하겠지만, 자신감과 표현력으로 모든 걸 커버하더군요.”
“단순히 딕션만 좋은 게 아닙니다. 딕션 좋은 배우는 세상에 수없이 많아요. 대사 안에 감정을 자연스레 싣는 배우가 몇 없어서 그렇지.”
“한태주는 감정 표현이 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이시켜 더욱 좋은 연기를 끌어내는 능력도 있고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렉의 질문에 디에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다들 아는 뻔한 걸 왜 또 말합니까.”
그 말에 그렉이 씩 웃었다.
디에고 크루즈가 한태주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확실시됐다.
다만, 아직 확답을 주지 못하는 건, 그의 자존심 때문이리라.
가족을 우선시하겠다는 그의 다짐을 깬다는 게 부담스러울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의 심중을 떠보는 듯 그렉이 운을 띄웠다.
디에고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역시 나는 이기적인 놈입니다. 그렇게 가족한테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결심을 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이렇게 무너지고 마네요.”
“무너지는 게 아니라, 당신의 본능이 연기를 가리키는 겁니다. 일전에 헬레네도 그랬잖습니까. 가족은 자기가 지킬 테니디에고, 당신은 원하는 연기를 하라고.”
“아내는 늘 제가 원하는 걸 하라고 했죠.”
생각에 잠긴 디에고는 그렉에게 물었다.
“혹시…. 한태주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 한태주는 공항으로 가고 있을 겁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디에고의 눈이 커졌다.
“한국으로 벌써 돌아간단 말입니까? 뭐가 급해서 이렇게 빨리요?”
다급하게 소리치는 디에고를 본 그렉이 재밌다는 미소를 지었다.
“한태주 씨가 한국에서 톱배우인 걸 잊었습니까? 너무 바빠서 이번에 시간 빼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흠…. 당신이 한태주 씨를 따라 한국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디에고가 급히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 최대한 빨리 구해야겠어요.”
* * *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태주야, 좀 자 둬,”
“아직 안 피곤해요.”
박인우, 차용석을 안에 밀어 넣은 태주는 복도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앞에 자리한 레오니였다.
레오니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태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태주를 따라 한국에 가겠다 선언한 그녀는 결국 비행기까지 탔다.
혼자 날아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싫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태주는 레오니가 신경 쓰였다.
두 손으로 귀를 가리고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게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아?’
그때, 갑작스러운 기류에 휩쓸린 비행기가 양옆으로 흔들리자 레오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레오니 무서워…….]그런 아이를 이중협이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태주를 힐끗거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화장실에서 얘 달래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라.]이중협과 레오니가 사라지자, 옆에 있던 박인우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 불편한 데 있어? 표정이….”
“아니에요, 그런 거.”
태주는 서둘러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태주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디에고 크루즈 씨. LA로 가족여행 왔다고 했잖아. 그럼 평소에도 여행을 많이 다녔겠지?”
“그러지 않을까? 그런데 가족들이랑 비행기 탄 건 엄청 오랜만 이랬어.”
박인우가 제작사에서 그렉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상기했다.
“그 양반, 몇 년 전에 죽은 큰딸이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딸이 그렇게 비행기 타는 걸 겁냈대. 비행기 타려면 애가 숨이 벌떡벌떡 넘어가고 엄청나게 무서워했다더라.”
그때, 이중협과 화장실에서 돌아온 레오니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태주의 앞에 앉았다.
‘좀 괜찮아졌어, 레오니?’
[응, 레오니는 중협 아저씨 덕분에 한결 편해졌어.]‘그래도 많이 불편하면 말해야 해, 참지 말고.’
그 말에 레오니는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레오니는 참을 수 있어. 한국에서 왜 연기가 즐거운 일인지 알아내야 하니까, 참아낼 거야.]* * *
스타뉴스 본국.
하품하며 일찍 출근한 황유나는 짐을 책상에 풀어놓았다.
그런데 자리를 정돈하던 그녀의 눈에 띈 담요로 덮인 웬 짐 더미 하나.
저쪽 구석에서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앞의 커다란 모니터는 슬립 모드로 되어 있었다.
“저기…. 선배님?”
황유나는 조심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톡톡 건드리자, 짐 더미가 갑자기 버럭 일어났다.
“푸핫!”
“아잇 깜짝이야!”
머리가 까치집이 된 홍은지가 눈을 비비며 황유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 아직도 퇴근 안 했니?”
“이제 막 출근했는데요. 지금 아침 7시에요, 선배님.”
그녀의 말에 홍은지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밤새웠었지, 나.”
그녀는 눈앞의 키보드를 톡톡 두드려 잠금 화면을 풀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밤새 작성하고 있던 기사가 띄워져 있었다.
그것을 슬쩍 본 황유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요? 디에고 크루즈가 한국에 온다고요? 이거 독점 취재하실 거예요?”
“디에고가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예매했다는 얘기가 있더라고.”
“에이, 디에고가요? 무슨 스케줄로요? 요즘에 찍은 작품도 없는 걸로 아는데.”
“이건 아직 대외빈데….”
홍은지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디에고 크루즈가 한태주랑 같이 영화를 한다는 소문이 있어.”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