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3
23화
독립영화 (4)
그리운 이름이었다, 한태주.
십여 년 전 만났던 아역배우.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배역을 완전히 이해했던 녀석.
자신의 연기에서 본인이 아닌, 극 중 인물만 보이던 녀석.
눈앞의 한태주와 그때의 한태주가 겹쳐 보인다.
결국, 손우현은 참지 못하고 돌직구로 물어보았다.
“한태주 씨. 어렸을 때 제 아역으로 영화같이 하신 적 있죠?”
제작진도, 태주도 모두 놀랐다.
“아니, 한태주가 그 아역배우 한태주였다고요?”
“프로필에는 그때의 기록은 없는데.”
“어떻게 된 거죠?”
모두의 시선에 태주는 난감했지만,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
손우현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한다는 게 좋아서.
아역 때 연기가 그에게 인상 깊게 남은 것 같아서.
“맞습니다, 손우현 선배님 아역 했던 한태주입니다.”
주변이 놀라움으로 술렁거렸다.
“이게 얼마 만이야, 십 년 만에 보는 건가?”
“어렸을 때랑 많이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요.”
반가워하는 손우현부터 의아해하는 제작진까지.
손우현이 몸을 쓱 내밀어 오디션 내내 의아했던 것을 질문했다.
“어렸을 때랑 연기의 결이 달라져서 긴가민가했어. 절박함이 더해졌던데…… 그 이유가 뭐야?”
“어렸을 때는 그저 촬영장에서 여러 선배님과 연기하는 게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배역을 맡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리고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죽정’ 이란 역할을 잘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을요.”
속 시원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태주.
그런 그를 본 손우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기를 함에 있어서는 절실함이 중요했다.
그래서 이 녀석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당장 이 역이 아니면 아니라는 듯한 절박함.
주방장에게서 직접 칼을 빌려오는 저 대담함.
이 배역을, 이 작품을 얼마나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저렇게 절실하다면, 분명히 이 작품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 *
며칠 후, 저녁.
태주는 동락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전에 독립영화 오디션 봤다면서. 어떻게 잘 봤냐?”
“뭐, 최선은 다했어. 대본이 좋아서 연기할 맛이 나더라.”
아직 오디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매일 오디션에 합격하기를, 최선을 다해 기도했다.
정말 ‘죽정’ 역을 연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우현 선배님과 연기하고 싶기도 하고.
대본을 맞춰보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사를 주고받으며 이렇게 신이 난 건 처음이라고.
마치 연기로 칼싸움을 하는 느낌이랄까.
붕 뜬 듯한 태주를 보며 동락이 입을 비죽였다.
“연기할 맛이 나? 한 배우, 나 너한테 섭섭해지려고 그런다. 너 우리 영화 할 때는 연기할 맛이 난다거나, 그런 말은 안 했잖아.”
“쑥스럽게 그런 말을 왜 해.”
“쑥스럽긴! 재밌으면 재밌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달라고! 나는 칭찬을 먹고 사는 감독이니까!”
동락의 구구절절한 애원에 태주는 씩 웃었다.
“이보세요, 서동락 감독님. 애초에 내가 왜 네 영화에 출연했는지 잊으셨어요?”
“뭔데?”
“지난 10년간 연기를 잊으려 부단히 애를 쓰던 나야. 그런데 다시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에 불을 붙인 건, 네 영화였어. ‘마지막 승부’가 정말 내게는 승부처였다고.”
“오 마이 프렌드…… 너란 놈은 정말!”
“정말 좋은 영화야. 자신감을 가져.”
그의 말에 감동한 동락이 엉겨 붙으려는 걸 태주가 간신히 막았다.
그리고는 문뜩 생각난 걸 묻는다.
“근데 오늘 피르마 단편영화제, 결선 발표 난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렇지.”
“그런데 왜 이렇게 태연하냐? 얼른 인터넷 켜 봐.”
단편영화제의 예선을 통과한 30편만 진출할 수 있는 본선.
태주는 내심 기대되었다.
동락이 잔뜩 굳은 채 핸드폰을 그에게 내밀었다.
“네가 확인해 봐, 나는 떨려서 못 보겠다.”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하지만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켜는 태주도 심장이 덜컹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이트 주소를 몇 번이나 틀렸는지 모른다.
그때, 심은설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흥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동락, 우리 진출했어, 결선 진출했다고! 40대 1을 뚫었다고, 이 쫄보 감독님아! 이 영광의 순간에 우리랑 같이 안 있고 어디를 간 거야!
“우리 영화…… 피르마 단편영화제 결선에 올랐다고? 30개 작품 안에 뽑혔다고?”
-아니 너, 동락이가 아니라 한태주…….
태주도 잔뜩 흥분해서는 동락을 냉큼 껴안았다.
“야, 우리 결선에 올랐대!”
* * *
같은 시각.
동료 영화인들과 회식을 갖던 이형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식당에 들어왔다.
옆에 있던 윤이도가 그를 힐끔거렸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별건 아니고.”
이형곤은 방금 조교에게서 확인한 정보를 내뱉었다.
“피르마 단편영화제 결선에 진출한 작품들 소식 좀 듣고 왔지. 거기 우리 학교 학생들 작품이 몇 개 있어서.”
“싹수 있는 녀석들이 있나 보군요. 그 녀석들 나중에 소개 좀 해주십쇼, 우리 연출부로 들어오라고 하게요.”
“안돼, 나중에 내가 데려가서 써먹어야지. 윤 감독 눈에는 안 찰 거야.”
“선배님도 참. 이번에 작품 낸 애들이 꽤 괜찮은가 본데요.”
윤이도의 웃음에 이형곤도 미소로 화답했다.
“내가 특별히 눈여겨본 애는 있지. 윤 감독도 최근에 그런 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한태주.
이형곤은 만약 서동락의 단편영화, ‘마지막 승부’가 결선에 진출한다면. 그건 주연배우의 연기 때문일 것이라 직감했다.
어쩌면 주연배우의 교체가 그 영화의 ‘신의 한 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배우 있잖아요. 별다른 연출도, 효과도 안 줬는데 유독 빛나는.”
윤이도가 몽롱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촬영장에서 발견한 애가 딱 그랬거든요. 연기에서 빛이 난다고나 할까.”
“그런 배우가 있기는 하지, 드물긴 하지만.”
“원래는 대사도 없었어요, 그런데 걔 연기를 더 보고 싶어서 역할을 현장에서 만들어 줬죠.”
“아니, 연기를 얼마나 잘하길래 윤 감독이 그렇게까지 해?”
“정말 잘해요. 그 녀석, 눈빛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몸 쓰는 것도 좋았지만, 표정 연기가 참 좋았어요.”
얼굴을 부르르 떨던 윤이도가 꿈에서 깨어나듯 덧붙였다.
“그런 녀석은 연기를 계속해야 해요.”
“신인배우라면서. 다음 작품 들어가는 건 있고?”
“그게 좀 특이해요. 강재하 매니저가 걔한테 드라마 오디션을 추천해줬나 봐요. ‘뱀파이어의 첫사랑’이라고 요즘 제일 핫한 거요. 그런데 1차 붙고 2차를 지 발로 안 갔답니다. 분명 연기하겠다는 놈인데, 왜 그런 좋은 기회를 지 발로 차버린 건지….”
이형곤이 재밌다는 듯 씩 웃었다.
“더 좋은 걸 하려고 그러나 보지.”
“그런가요?”
“그래서 그 녀석, 이름이 뭔데?”
* * *
그날 저녁.
“아고, 죽겠다…….”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태주는 앓는 소리를 냈다.
[핸드폰 진동 울리는 것 같은데. 전화 왔나 보다.]이중협의 말에 태주는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일단 받았다.
“여보세요.”
-한태주 씨 맞으십니까?
“네, 맞는데요.”
피곤함에 젖은 하품이 나오려는 그때.
-저번에 ‘자유 선언’ 오디션 보셨죠? 죽정 역에 합격하셨습니다.
하품이 쏙 들어가고 육성으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됐다! 됐어요, 아저씨! 아저씨, 저 죽정 역 합격했어요!”
[난 네가 될 줄 알았다고! 축하한다 짜샤!]기쁨에 날뛰던 이중협이 태주에게 와락 달려든 순간.
서늘한 귀신의 기운이 그를 덮쳤다.
당황스럽고 시원섭섭한 이중협이 괜히 태주의 눈치를 보았다.
[에잉, 장해서 한번 안아주려고 했더니.]‘말이라도 고마워요, 아저씨.’
태주가 이중협을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남자랑 안는 건 사양이에요.’
[이 녀석이! 안 되겠네, 앞으로 이 형님의 따뜻한 사랑을 더욱 퍼부어주마!]기쁨으로 가득 찬 밤이었다.
* * *
집에 들어가자마자 태주는 가족들에게 알렸다.
“고모, 태희야 나 합격했어, 합격! 영화 오디션 합격했다고!”
거실에서 고양이를 쓰다듬던 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오디션? 합격했어?”
“그래, 태희야! 오빠가 드디어 독립영화 주연으로 오디션에 합격했어!”
“와아아!”
태희가 벌떡 일어나 방방 뛰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하던 고모가 앞치마를 한 채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오디션 합격했다고? 손우현하고 한다는 그 영화?”
“응, 고모! 나 합격했어!”
“우리 태주! 역시 장해!”
조카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처럼, 고모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러나 한 손에 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제법 무시무시했다.
“태주야, 오디션 합격한 건 좋은데. 도대체 도마가 왜 이 지경이 된 걸까?”
고모가 가리킨 곳을 보니, 도마 중앙에 움푹 금이 가 있다.
예전에 그가 칼로 액션씬을 연습하느라 생긴 자국이다.
‘아, 저거 뒷수습을 안 했었네.’
[이제 너는 죽었다.]이중협이 그를 놀리듯 옆에서 날아다녔다.
태주는 뒤로 찔끔 물러났다.
“아무리 연기연습을 한다고 해도 그렇지, 멀쩡한 도마를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되겠어?”
아, 저럴 때가 제일 무섭다.
“하하…… 고모, 미안해.”
“생각해 보니 뭐, 조카가 연기 연습한다는데 고모가 돼서 이런 건 넘어가 줘야지. 도마야 다시 사면 그만이니까. 그렇지?”
태주를 뚫어지라 보던 고모가 환히 웃었다.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고, 고모. 차라리 화를 내. 왜 무섭게 웃고 그래?”
* * *
며칠 후, 충무로의 한 식당.
독립영화 ‘자유선언’의 주연배우 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는 자리였다.
오늘은 손우현뿐만 아니라 김선정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배우로, 잘 관리한 몸매와 우아한 미모가 눈에 띄는 그녀.
저번에는 해외 화보 촬영 때문에 오디션에 참석하지 못했었다.
김선정은 손우현이 보여주는 사진을 눈을 찡그리며 집중해서 보았다.
“어머, 태주가 많이 변했네. 10년 만에 훤칠한 청년이 됐어.”
“그렇다니까. 나도 처음에는 아닌가 싶었거든, 그런데 연기 보니까 바로 알겠더라고. 아니야, 말하는 거만 들어도 알 거야. 딱 태주야.”
“얼른 보고 싶다. 이게 몇 년 만인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태주는 양군보 감독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눈앞에 손우현과 김선정이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게 보였다.
양군보가 태주를 손우현 옆에 앉혔다.
“자, 이쪽은 이번에 오디션에서 죽정 역에 합격한 한태주 씨입니다. 다들 인사 나누시죠.”
태주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한태주입니다.”
맞은편의 김선정이 설레하며 물었다.
“10년 전쯤에 아역배우로 연기했죠?”
“네.”
“그럼 EVS에서 나랑 요리 방송 같이 진행한 것도 기억나요?”
태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전혀 변하지 않은 김선정을 보니 반가웠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선정 선배님은 그때랑 지금이랑 바뀐 게 없으시네요.”
“태주 맞네, 한태주 맞아! 예쁘게 말하는 것도 딱 태주야!”
김선정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태주를 왈칵 껴안았다.
“야, 태주야. 나 선정이 이모야. 진짜 반갑다. 그동안 너 소식 없어서 내가 얼마나 궁금했는데, 이렇게 다 커서 만나냐.”
“선배님, 저 잠깐만…….”
“얘 숨 못 쉬잖아, 어서 떨어져!”
김선정을 떨어뜨려 놓은 손우현.
그리고는 태주의 손을 꼭 붙잡았다.
“너 이 녀석…….”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
태주는 씩 웃으며 옆에 있던 술병을 들었다.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손우현은 대견하다는 얼굴을 했다.
“짜식, 많이 컸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