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내가 연기를 하는 이유 (5)
* * *
2년 전, LA.
선글라스를 쓴 건장한 남자와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아이가 카페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여자아이의 앞에는 초코 머핀과 핫초코가 놓여 있었지만 남자 앞에는 물 한잔이 전부였다.
레오니는 잔뜩 신경질이 나 보이는 아빠를 긴장한 듯 힐끗거렸다.
‘눈썹과 눈꼬리가 올라간 걸 보니, 아빠 기분이 좋지 않나 봐.’
초점이 없이 뱅글거리는 눈동자는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다 먹었어?”
갑자기 튀어나온 디에고의 말에 레오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빨리 좀 먹어라, 지금 2시간째 머핀이랑 핫초코 가지고 뭐 하는 거야.”
살짝 짜증을 낸 디에고는 주변을 둘러보다 종업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손님이 많은 시각, 머핀과 핫초코 한 잔으로 2시간을 버티는 손님은 그들밖에 없었다.
레오니는 그런 아빠의 눈치를 보며 머핀을 뒤적거렸다.
“레오니는 아빠랑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늘 촬영으로 바쁜 아빠였기에 이렇게라도 아빠를 붙잡아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말에 핸드폰을 연신 바라보던 디에고는 얼굴이 벌게졌다.
“미안해, 레오니. 아빠가 짜증 내서.”
“괜찮아요. 아빠가 원해서 레오니랑 나온 것도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
“레오니는 입양아잖아요. 레오니와 아빠는 남남이니까요.”
“또 그 소리야, 또!”
마치 사전적 정의를 읊듯 담담한 레오니와는 달리 디에고는 속이 타들어 갔다.
“너는 내 딸이야, 누가 뭐래도 내 딸! 그러니까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 아빠 마음이 너무 아파. 제발…….”
일 년 전, 지인이 경솔하게 흘린 진실을 우연히 들은 레오니는 이렇게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종종 상기시키고는 했다.
아이의 말에 악의가 없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상처받는 건 사실이다.
그때, 그의 에이전트로부터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그래, 브론! 어떻게 된 거야, 왜 이제야 연락을 줘!”
수화기 너머 에이전트의 말은 들은 디에고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솔린 감독이 그에게 주연을 제안했고, 지금 근처 제작사에 있는데 미팅을 하자고 했기 때문.
그로서는 거장 메솔린 감독의 작품에 목이 말랐다.
어떻게 해서든 그 작품에 참여하고 싶었다.
“잘 안 들린다고? 미안, 내가 지금 카페에 와 있어서. 그럼 그쪽으로 갈까?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디에고는 맞은편에 있던 레오니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이는 핫초코를 홀짝이며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나비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날아든 모양.
“레오니, 어서 일어나.아빠랑 제작사 가자. 여기서 5분 거리니까 금방이야.”
“싫어요. 나비가 핫초코 먹는 거 보고 가야 해요.”
“가자니까, 레오니.”
“싫어요. 아빠도 레오니랑 같이 있어요.”
레오니는 디에고를 빤히 보며 덧붙였다.
“아빠는 레오니보다 연기가 우선이에요?”
레오니의 투정에 디에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알아서 해. 여기서 기다리든, 아빠를 따라오든! 오늘 아빠 바쁜 거 알면서 따라다니겠다고 한 건 너였어!”
폭발한 디에고는 충동적인 걸음을 옮겼다.
카페를 나가 길을 건너는 그를, 뒤에서 레오니가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 * *
이야기를 듣던 태주가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간신히 물었다.
‘설마…. 아빠를 따라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엄마가 데리러 왔어. 레오니는 모두가 잠든 밤중에 나비를 따라서 우리 집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죽었어.] [그것도 슬픈 죽음이잖아.]이중협이 얼굴을 찡그리며 레오니를 안타까운 듯 쳐다보았다.
[도대체 오밤중에 나비는 왜 쫓아간 거야? 지붕까지는 왜 올라갔고?] [나비가 레오니 방에 들어왔었거든.달빛에 반짝반짝하는 나비가 레오니에게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따라간 거야.] [네 생각을 내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안 그러냐, 태주야?]이중협의 말에 태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네 한을 알겠다. 레오니, 너는 아빠의 진심을 확인받고 싶은 거지?’
[우리 아빠는 레오니보다 연기를 더 좋아해.]레오니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래서 궁금했어. 도대체 연기란 게 뭐길래, 그렇게 우리 아빠가 좋아하는 건지.]그 말에 태주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연기를 하며 그도 이따금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가족을 잊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 * *
폴라리스의 신곡 뮤직비디오가 한창 촬영 중이던 이때.
자신의 분량을 다 찍은 태주는 멤버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다.
“생각 같아서는 태주 씨, 우리 군무 촬영하는 것까지 다 보고 가라고 하고 싶다.”
“그러니까요.”
하강웅이 태주에게 애교 있게 말했다.
“우리 군무 진짜 멋있거든요.”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내일 일찍 촬영이 있어서 어려울 거 같아.”
태주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드라마 촬영가야 하거든.”
“아쉽다.”
하강웅의 아쉬움에 태주는 그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나중에 ‘유토피아’ 챌린지 할 때 불러 줘. 그때까지 내가 열심히 춤 연습해 둘게.”
태주의 말에 윤지호가 박수를 쳤다.
“태주야, 그 약속 꼭 지켜야 해!”
“당연하지. 아까 형이 화장실까지 쫓아와서 부탁한 거잖아.”
“그거 받고 하나 더.”
윤지호가 태주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우리 쇼케이스 때, 네가 사회자 맡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사회 봐본 적 한 번도 없는데….”
“그래도 네가 꼭 맡아줬으면 좋겠어.”
윤지호가 태주를 믿음직스러운 시선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우리 그룹과 인연이 깊잖아. 내 솔로 앨범 피처링으로 참여했고. 강웅이하고도 같은 예능에 출연하고 있잖아. 그리고 우리 신곡, 회사 식구들 이외에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이 너야.”
그가 간절한 눈매를 태주에게 마주쳤다.
“그러니까 네가 쇼케이스 진행해 줬으면 좋겠어.”
* * *
10월 말, 제법 쌀쌀해진 날씨임에도 신생 소속사인 넥스트 엔터테인먼트는 긍정적인 분위기로 가득했다.
대부분이 제 능력을 인정받아 이곳으로 스카웃 된 직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자, 치킨 먹고 합시다! 배부터 채우자고요!”
“아, 오늘도 김 대리님 때문에 살찌겠어요.”
“그래도 행복하면 장땡이죠!”
김진수 대리는 양손 가득히 쥔 치킨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가 속해 있는 ‘배우 1팀’에는 드림액터스에서 넘어온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남은 건 한태주의 이직이었다.
“그런데 한태주 씨는 언제 넥스트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할까요?”
“이제 2달 정도밖에 안 남았어. 곧 올걸?”
“그런데 장희재 대표님이 순순히 놓아줄까요?”
송유리가 걱정스러운 듯 김진수 대리에게 말했다.
“대리님도 아시잖아요. 예전에 염수정 배우님, C&K로 이적하실 때 장 대표님이 언플을 얼마나 심하게 하셨는지. 사치스럽고 남자들 갈아치운다고 막….”
“그때는 그랬지. 막말로 염수정 씨는 남사친들이 많아서 그런 루머가 생성됐다고 쳐. 그런데 한태주는 아역배우 생활도 오래 안 했고, 연기를 재개한 지 이제 겨우 2년 차야. 책잡힐 게 거의 없지 않겠어?”
“그건 그렇죠.”
송유리는 고개를 애써 흔들었다.
원래 걱정은 미리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것들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럼 저희가 태주 씨를 위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이 ‘나의 미래’와 관련된 걸까요?”
“XJ 엔터가 배급사를 맡을 것 같으니까. 우리는 선플라워 프로덕션과 제휴해서 한국 촬영 매니지먼트를 총괄할 것 같아.”
김진수가 치킨을 뜯는 직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나의 미래’도 본격적인 크랭크업에 들어가니까.”
“진작에 시작했어야 했죠. 그런데 한태주 상대역에 캐스팅이 늦어져서 그렇지.”
“아직 그 역할은 캐스팅 안 되지 않았어?”
“몇몇이 물망에 올랐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브래드 필즈랑 샘 로빈스였나.”
“90년대 드라마 스타들이 다 모였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디에고 크루즈.”
무게감 있는 이름에 직원들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그 사람이 정말 한태주랑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고?”
“그것도 한태주랑 공동 주연으로요?”
“만약에 출연한다면, 그렇겠지. 그런데 아직 제작사 측에서 해당 배역을 맡는 배우를 공식으로 발표하지 않아서 알 수가 없네.”
“크랭크업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뭘 그리 어물쩍대는 걸까요? 영화를 한태주 혼자 찍는 것도 아닌데.”
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디에고 크루즈가 출연 결정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 생각에는 거의 확정인 거 같아.”
김진수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팀원들에게 속삭였다.
“차용석 팀장님이 그랬어. 지금 디에고 크루즈, 한국으로 날아오고 있다고.”
* * *
다음 날 새벽.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뮤직비디오 촬영을 했던 태주는, 하품하며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났다.
간단히 씻고 캐리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강화도에서 ‘데스 게임’ 촬영이 있다.
그곳에서 심요연, 채이진과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찍을 예정이다.
오늘은 박인우와 함께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드라마 포스터 촬영도 한다고 했으니, 지금 헤어, 스타일링 팀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벌써 일어났니?”
태주의 인기척에 일어난 고모가 그의 짐을 이것저것 들여다보았다.
“간식 좀 싸 줄까? 고구마말랭이 어때?”
“싸주면 너무 좋지.”
“조금만 기다려 봐.”
고모가 부엌으로 가자.
옆에 있던 레오니가 고모를 빤히 바라보았다.
[태주 오빠는 고모를 사랑해? 연기를 사랑해?]‘당연히 둘 다 사랑하지.’
[흠…. 속마음을 숨기는 대답이네.]레오니는 태주를 힐끗하며 입을 쭉 내밀었다.
[아빠는 늘 연기만 신경 썼어. 그래서 레오니를 버렸어.]‘그런 거 아니라니까.’
태주는 며칠째 레오니와 이 문제를 가지고 실랑이 중이었다.
그러나 디에고가 레오니에게 오해의 소지를 준 건 분명했다.
그날 카페에서 디에고가 레오니를 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가 연기에 빠져 레오니를 잠시 방치한 건 사실이니까.
같은 배우로서, 태주는 디에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식을 잠시 방치한 걸 옹호하는 건 아니다.
연기의 세계에 빠져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거다.
“자, 여기. 가는 길에 용석 씨랑 먹어.”
고모가 건네준 짐을 챙기며 태주가 그녀에게 물었다.
“고모.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그동안 내가 연기하면서 말이야….”
“뭐가 궁금하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잠시 고민하던 태주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내가 연기에 빠져서 가족을 등한시했던 적 있나?”
그 질문에 고모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흠……. 외로울 때가 있기는 했지.”
“외로웠어?”
“약간은?”
고모는 그에게 복잡한 눈빛을 맞춰왔다.
“너는 극 중 세계에 늘 빠져 있었으니까.”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