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4
24화
독립영화 (5)
술을 여러 잔 걸치며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동안 태주가 왜 연예계에서 안 보였는지.
왜 다시 연기하기로 했는지.
태주는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손우현과 김선정은 그가 어릴 적 좋아했던 선배들이었기에.
양군보 감독도 대화에 몰입해서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태주 씨한테 이런 히스토리가 있었군요. 정말 예상치도 못했네요.”
“솔직히 제가 오디션에 합격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태주는 오디션을 봤을 때의 상황을 상기했다.
“제 딴에는 죽정을 충실하게 연기한다고, 회칼도 가져가서 연기한 거거든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심사위원분들께서 당황하셨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똘끼도 그런 똘끼가 없었지.”
손우현이 담담하게 끼어들었다.
“오디션에서 회칼 가지고 설친 배우는 너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너랑 연기하면서 죽정이 눈앞에 보였으니까. 그래서 너의 진정성이 더욱 돋보였는지도 몰라. 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는 절실함도.”
“감사합니다.”
“10년 사이에 많이 바뀌었구나. 연기가 더욱 절실해진 것 같아.”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에는 연기를 끊을 수 없더라고요. 혼자서 끙끙대며 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연기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 잘했다.”
손우현도, 김선정도, 다들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태주를 바라보고 있다.
태주는 괜히 멋쩍어 헛기침해댔다.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혹독하게 가르쳐 주세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손우현은 태주의 머리를 한껏 헝클었다.
“내 눈앞에 있는 이상, 허투루 연기하는 건 두고 보지 않을 거다. 꽉 붙잡고 잘 가르쳐 주마.”
* * *
한 회의실.
독립영화 ‘자유선언’의 감독과 제작 피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태주는 아역 때도 연기를 참 잘했었죠”
김윤혜는 곰곰이 생각하며 덧붙였다.
“그런데 오디션에서 본 한태주 씨는 그보다 더 연기를 잘했어요. 수많은 배우를 봤지만, 제 심장을 덜컹거리게 한 배우는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미쳤죠, 그런 연기는 정말.”
양군보가 한껏 상기된 얼굴을 했다.
“아역배우 경력을 떠나서, 정말 연기를 맛깔나게 하는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가 죽정에 캐스팅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요.”
“이번 영화 홍보 카피에 한태주 씨를 이용하면 좋을 것 같네요.”
김윤혜는 노트에 뭔가를 바쁘게 적어가며 덧붙였다.
“천재 아역 한태주, 비극적인 사고를 겪고 웅크리다,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연예계에 복귀하다! 시련을 딛고 부활한 미남 스토리는 시대를 막론하고 먹히는 법이죠.”
“피디님, 저는 그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배우의 사생활을 홍보에 이용하는 건…….”
“감독님, 아무리 독립영화라도 XJ에서 후원, 제작하는 영화입니다. 본전은 둘째치고 손해는 절대로 볼 수 없어요.”
김윤혜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한태주 씨 본인 커리어에도 좋은 거예요. 예전에 똘똘이를 사랑했던 시청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분들이 지금 한태주 씨가 다시 훌륭한 연기로 돌아온다고 하면 무척 좋아하시지 않겠어요?”
“글쎄요, 그건 그렇고 한태주 씨의 복귀작이 우리 영화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김윤혜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봤자 학생들 단편영화잖아요? 그런데 한태주 씨가 나왔다는 걸 누가 알겠어요?”
* * *
연예 언론사, 스타뉴스 본국.
그곳의 수습기자가 선배에게 불려가 지시를 받고 있다.
스타뉴스의 베테랑, 홍은지가 말했다.
“피르마 단편영화제라고, 내일부터 일주일간 결선이 열리거든? 거기서 딴 애들은 볼 것 없어, 한태주란 애를 찾아.”
“임강현이 아니고요?”
수습기자 우성림은 며칠 전 본 기사를 떠올렸다.
[임강현, 피르마 단편영화제에 본인 출연 작품 출품…… 절절한 로맨스의 매력 기대해 달라]피르마 단편영화제에서 기대할 만한 배우라면 임강현일 텐데.
‘왜 한태주란 배우를?’
“한태주라니…… 유명한 배우입니까?”
“야, 너는 어렸을 때 ‘쌍갑동 식구들’도 안 봤니? 거기서 똘똘이로 연기 잘하던 아역 있잖아, 걔가 한태주야. 이번에 영화제에 출연했다더라고.”
“선배는 어떻게 아셨어요?”
홍은지가 목소리를 죽였다.
“한태주가 출연한 영화 스태프 중에 내 조카가 있거든. 걔가 떠들어대는 거 듣다가 알았지 뭐.”
“와, 한태주라.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근 10년 만에 연기를 재개하는 건가요?”
수습기자 우성림.
이번에 꼭 좋은 기사를 써서 정규직으로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했다.
“이번에 영화제에서 GV도 한다니까, 그때를 잘 이용하라고.”
“네, 연기력을 잘 분석해서 독자들의 니즈를…….”
“멍청아,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건 연기력 따위가 아니야. 왜 한태주가 지난 10년간 잠적했다 이제야 나오냐, 그거지.”
홍은지가 음흉한 표정을 내보였다.
“비극적인 사건이 있으면 그걸 최대한 강조하란 말야. 그래야 비극에서 벗어난 천재 배우 이미지를 우리가 독점할 수 있지.”
* * *
[역시 배우는 레드카펫에서 제일 빛나는 법이지. 자, 나 어떠냐? 괜찮지 않냐?]이중협이 레드카펫에서 모델 워킹을 했다.
태주는 피르마 단편영화제에 서동락과 함께 참석했다.
그가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 ‘마지막 승부’가 결선에 진출했기 때문.
피르마 단편영화제에서는 결선 진출작 30개에 한해서 일주일간 상영회를 연다.
그리고 관객투표와 심사위원들 점수를 합산해 1등부터 5등을 결정한다.
관객투표는 인터넷에 공개되어 실시간으로 등수가 공개된다고 했다.
태주는 내심 ‘마지막 승부’가 1등 하기를 바랐다.
속에 꽁꽁 감춰둔 승부욕이랄까.
그렇지만 동락은 결선에 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격한 듯했다.
“와, 내가 여기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주연배우 이탈해서 대타로 출연한 배우 데리고 영화제 결선에 진출하다니. 역시 나는 운이 겁나게 좋아!”
“패션 센스도 겁나게 좋습니다, 서 감독님.”
“내가 원래 트렌드 젠더잖냐.”
“트렌드 세터겠지.”
아빠 양복을 빌려 입은 듯한 동락의 패션.
태주는 그의 바지단을 접어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어릴 적부터 봐왔지만, 동락의 패션 센스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뭐, 그도 좋은 편은 아니니까 할 말은 없지만.
하지만 레드카펫을 걸어가는 태주의 등에는 수십 쌍의 눈들이 꽂혔다.
기자들, 관객들, 그리고 심사위원들이었다.
* * *
피르마는 국내 최고 규모의 단편영화제로, 흔히 신인 감독들의 등용문이라 불렸다.
현재 기성으로 성장한 감독 중 일부는 이 영화를 통해 데뷔했기 때문.
대표적인 예로 이번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최준모 감독이 있다.
데뷔작부터 극찬받은 그는 2편의 상업 영화를 히트시키며 ‘충무로의 신성’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선배의 발자취를 좇는 후배 신인들은 피르마 단편영화제의 수상을 노렸다.
그리고 그 영예를 누릴 작품은 결선에 올라온 서른 작품 중 단 다섯 작품뿐이다.
“사람들이 많네.”
SNS와 인터넷을 통해 홍보를 돌린 덕에 상영회에 관객들이 제법 온 것 같았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이곳을 방문한 이형곤이 심사위원들 쪽으로 향했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를 알아본 최준모가 냉큼 몸을 돌렸다.
“감독님, 여기까진 웬일이십니까? 요즘 학교에서 후학 양성하는 데 집중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하하, 우리 학생 중에 여기 진출한 애들이 몇 명 있어서.”
“그래요? 누구입니까?”
“어허, 나 그렇게 치사한 사람 아닐세. 우리 애들, 내가 안 봐줘도 충분히 잘 해낼 애들이야. 오늘은 그냥 구경하러 왔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레드카펫을 걸어오며 서동락에게 무언가를 급히 말하는 한태주.
그 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했다.
“이번에 특히 눈에 띄는 작품들은 있나?”
“글쎄요, 이번에 올라온 작품들이 워낙에 수준이 높아서요.”
잠시 고민하던 최준모는 눈썹을 씰룩였다.
“아, 특이한 작품은 하나 있어요. 정돈되지 않은 느낌인데 가슴을 울린달까요?”
“그런 게 있어? 그런 건 최 감독 취향은 아니잖나. 자네는 간결하고 우아한 게 취향 아니었나?”
“제 취향은 아니죠. 그런데 연출도 신선하고, 무엇보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더라고요.”
고개를 돌리던 그가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태주를 발견했다.
“그래, 쟤가 나온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에서는 열혈남아로 보였는데 저렇게 차려 입으니까 또 멀쑥해 보이네요.”
그들의 시선에는 여자들에게 에워싸인 태주가 보였다.
이형곤이 괜히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사람은 꾸미기 나름이라더니, 거참…….”
“아는 배우입니까?”
“조금.”
태주의 발개진 얼굴을 보고 덧붙였다.
“연기밖에 모르는 바보 있어.”
* * *
“오 마이 갓, 너 슈트 구겨진 것 좀 봐!”
“다들 팔을 잡아당겨서 그렇지 뭐.”
태주와 동락은 레드카펫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관객과의 대화는 15분 후 있을 예정이었다.
솔직히 엄청난 관심은 기대하지 않았다.
태주가 부른 고모와 태희, 동락의 부모님과 누나들이 그들을 반기면 족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레드카펫 옆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던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그리고 사진을 찍을 테니 포즈를 취해달라는 기자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태주는 그저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었다.
이중협은 그 모습을 보며 킬킬 웃어댔다.
여자들과 셀카를 찍을 때마다 굳는 태주의 얼굴 때문이었다.
[배우라면 이때도 연기를 해야지, 왜 긴장을 하냐!]‘생전 이런 걸 경험했어야죠.’
결국, 본 행사 전에 레드카펫에서부터 탈탈 털리고 왔다.
태주가 먼저 대기실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자, 화장실을 다녀온 동락이 들어온다.
“폭풍 같은 시간이었다.”
“흠…….”
상영관을 살짝 들여다보고 온 동락.
굳어진 얼굴로 자신을 보는 동락에게 태주가 말했다.
“반 정도는 찼어?”
“그건 당연히 그렇지!”
“그럼 됐어. 너도, 나도 유명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상영관이 다 차겠냐.”
“임강현 출연한 영화는 이미 사람이 넘쳐난단 말이야.”
“임강현 이름값 때문에 그렇지. 그쪽은 팬들도 많고.”
안절부절못하는 동락을 보며 태주가 말했다.
“왜 그렇게 신경 써. 이번에 수상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다며. 결선에 올라온 거로 됐다면서, 나보고 욕심쟁이라고 했잖아.”
“이왕 올라온 거, 욕심이 생기는 걸 어떡하냐. 태주야, 난 왜 이리 욕심쟁인 걸까?”
그의 손을 잡은 동락의 손은 축축했다.
“손에 땀 좀 봐!”
태주의 놀림에 동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긴장해서 그렇다, 긴장해서!”
때마침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동락 님, 한태주 님. 무대 위로 올라가실게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