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48
248화
오만과 편견 (3)
* * *
다음날, 정오.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BS 빌딩.
이곳에는 한국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아쿠아리움이 있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았다.
그런 그들의 눈에 띈 한 곳이 있었으니.
“엄마, 저기 왜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있어?”
“글쎄, 오늘 무슨 촬영 하나?”
“여보, 저 사람 디에고 크루즈 아냐?”
긴가민가한 남편이 가리킨 곳에는 디에고 크루즈가 있었다.
건장한 몸에 양복을 걸친 모습이 제법 멋들어졌다.
할리우드 스타가 여러 스태프와 함께 있는 모습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와, 진짜 디에고 크루즈잖아? 그런데 생각보다 얼굴 크다.”
“멋있기만 한데 왜 그래. 역시 최고의 연기파 배우답네.”
“디에고 크루즈가 무슨 촬영 온 거 같은데…. 뭐 때문이지?”
궁금해하던 사람들의 궁금증은 곧 풀렸다.
대본을 들고 디에고에게 다가가는 훤칠한 키의 한태주가 그들의 시선에 들어왔다.
“여보, 저기 한태주 있는 것 같은데?”
흥분한 듯 부인을 잡아끄는 남편의 얼굴이 붉어지며 감탄이 나왔다.
“이야…. 졸라 멋있다.”
“애 앞에서 진짜 무슨 소리를…. 어머, 진짜 잘생겼네. 분위기가 장난 아니야.”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태주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평소와 달리 이마를 머리카락으로 덮고, 청바지와 떡볶이 코트를 입은 모습에서 학생티가 물씬 났다.
오늘 씬은 여러 엑스트라도 동원되는지라, 태주는 미리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디에고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태주는 곧이어 그와 대본을 맞춰보았다.
한차례 확인이 끝나자 디에고가 얼마 전 사태를 들었다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관계자한테 들었어. 자네, 웬 황색언론 레이더에 걸려서 거짓 뉴스에 휘말렸다면서. 이제 마음은 좀 진정된 거야? 연기에 몰입할 수 있겠어?”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디에고. 저는 프로예요. 오늘 연기를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준비했는데요.”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디에고는 태주에게 살가운 눈길을 던졌다.
“자네가 얼마나 철저하게 연기를 준비하는지는 내가 익히 들었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 연기는 특히 눈빛 연기가 중요하기에, 태주는 연신 거울을 보며 연습했다.
아쿠아리움을 즐겨 찾는 진. 그리고 그런 그를 유심히 보며 관심을 갖게 되는 리의 묘한 관계가 처음 형성되는 씬이었다.
한참 거울을 보며 시뮬레이션을 해보던 그는 이내 눈앞에 있는 수족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촬영에는 아쿠아리움에서 펼치는 공연을 보는 장면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잠수부들이 촬영 전이라 물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어? 저기 누가 들어와서 헤엄치는데?]이중협의 말에 태주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잠수복을 입고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남자.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그에게 돌진했다.
“어? 유리에 부딪히겠….”
그런데 남자는 유리를 통과해서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고글을 벗은 잠수부는 제법 젊은 남자 귀신이었다.
그는 태주를 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뵙고 싶었어요. 정말 간절히 기다렸고요.]이중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거렸다.
[역시 귀신이었네. 나 참, 이런 곳에서도 귀신을 만나다니…….]그런데 남자를 살피던 이중협이 갑자기 얼굴을 확 굳혔다.
그리고는 코를 킁킁거리더니 사납게 물었다.
[뭐야, 너 악귀야?]‘네? 제가 악귀라고요?’
[이 녀석, 저번에 비진도에서 봤던 그 귀신과 같은 냄새가 나!]이중협의 말에 태주는 즉각 뒤로 물러섰다.
‘낭만 고양이’ 촬영 중에 조연출 귀신을 만나 바다에 빠졌던 그때의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한이 지독하게 서려서 악으로 가득 찼던 악귀.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귀신이었다.
태주가 슬금슬금 이중협의 뒤로 가서 숨자, 남자는 제법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제가 악귀라니요.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원래 악귀는 자기가 악귀라고 말하지 않는 법이에요. 저번에 만났던 악귀도 그랬고요.’
[글쎄, 저는 그런 악귀 따위가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왜 네게서 사랑에 실패한 듯한 이 찌뿌둥한 냄새가 나는 거지? 사랑에 실패한 자들은악귀가 되기 십상인데, 너도 그런 과 아니야?]이중협의 추궁에 남자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얼마 후 고개를 끄덕인다.
[사랑에 실패라…. 고백도 안 해봤는데 그걸 사랑이라 할 수 있나요? 저 혼자만 좋아하는 걸 수도 있거든요. 아니, 사실은 제가 그녀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남자가 혼란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를 그렇게 열심히 바라봐 주던 그녀가, 왜 갑자기 없어졌는지 궁금할 뿐이에요.]뜬구름 잡는 듯한 소리에 이중협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뭐야, 이 녀석? 귀신이 한 없이 구천을 떠돌 리는 없는데. 도대체 너 누구야?] [저는 이곳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던 잠수부였어요. 매주 금요일마다 수중 쇼를 진행했고요. 제가 태주 씨를 찾아온 건….]‘잠시만요.’
태주가 손을 들어 그를 멈춰 세웠다.
그의 이야기도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연기를 할 때였다.
‘제 연기를 끝마치고 나서, 그쪽 이야기를 들어드릴게요.’
태주의 말에 남자는 미안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열심히 연기하세요.] [그래. 우선 넌 저쪽에서 나랑 태주 응원이나 하자.]이중협이 남자를 데려가자, 태주는 깊은숨을 들이마시었다.
‘어디든 사연 없는 장소는 없구나. 하긴, 우리 영화에서도 수족관은 제법 중요하게 다뤄지니까.’
그리고는 디에고 크루즈와 다시 한번 연기를 맞추는 도중.
태주의 눈길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 디에고가 헛기침했다.
“왜 그렇게 봐?”
“별다른 것 없는 이런 수족관에서도 인연이 만들어질 수 있겠구나, 싶어서요.”
“뭐야, 벌써 영화에 몰입한 거야?”
그렇지만 태주의 눈빛이 진지해서, 디에고도 덩달아 눈빛이 그윽해졌다.
“자, 슛 들어가겠습니다!”
감독인 앤디의 우렁찬 외침에 배우들이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로 향했다.
태주는 관람석 맨 앞줄에 얌전히 손을 모으고 앉았다.
“레디, 셋…. 액션!”
* * *
거대한 아쿠아리움 수조 앞에 모여있는 수많은 손님.
곧 있으면 시작하는 잠수부의 수중 쇼를 기다리는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이었는데, 어른들도 간혹 끼어있었다.
그중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은 맨 앞줄과 뒷줄에 앉아있는 두 남자였다.
떡볶이 코트를 입고 맨 앞줄에 앉아있던 진은 제법 상기된 모습이었다.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에게는 한 달에 한 번 진행되는 수중 쇼가 무척 소중했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유유하게 헤엄치는 물속에 잠수부가 나타나자, 주변에 있던 어린이들이 와아! 하는 함성을 질렀다.
잠수부가 유유자적 헤엄을 치며 묘기를 선보이자, 진은 입을 벌린 채 그것을 감상하기 바빴다.
한편, 맨 뒷줄에 앉아있던 양복 입은 남자는 그런 진을 힐끔거렸다.
그는 수족관 속 공연은 뒷전인 듯, 오직 진에게만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진이 환히 웃는 모습,눈가가 곱게 접히는 모습,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 등등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콕 와서 박혔다.
‘사람이 저렇게 밝을 수도 있나.’
감정이 메마른 리는 우연히 이곳을 방문했다가 수족관 공연을 감상하는 진에게 시선이 뺏겨버렸다.
유행이 지난 떡볶이 코트에 낡아 보이는 신발,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 등 그의 행색은 다소 초라했다.
그러나 수족관 공연을 보며 환히 웃는 미소만으로 진은 더없이 빛나 보였다.
‘저런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 나도 저런 행복과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어.’
그를 지그시 보던 리의 마음에 진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 * *
잠수부의 공연이 끝나고, 모였던 인파가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진은 못내 아쉬운 듯 아쿠아리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수족관에 가까이 다가가서 물고기들을 구경하고 있는 그에게 리가 조용히 다가왔다.
“물고기들을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참 좋아하는데.”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흠칫 놀란 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에 깔끔한 양복을 입은 리의 모습에 진은 다소 안도했다.
“아, 네. 어렸을 적부터 수족관 오는 걸 좋아했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종이 있으세요?”
“흠…….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이 수족관 안에서 유유히 유영하는 거북이를 가리켰다.
“뭐니 뭐니 해도 거북이가 최고죠. 튼튼한 등딱지로 자신을 보호해, 적이 자신을 쉽게 해치지 못하게 하잖아요. 게다가 두꺼운 피부 때문에 해파리의 독도 들지 않아요, 거북이는요. 이처럼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힘이 참 부러워요….”
진의 말을 유심히 듣던 리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저는 범고래를 제일 좋아합니다. 죽을 때까지 동료를 챙기는 의리 있는 녀석이거든요.”
“아, 네….”
“끝까지 제 사람을 챙기는 건 정말 멋진 일이죠.”
말끝을 흐리던 진은 리를 힐끔거렸다.
제 할 말만 하고 수족관으로 고개를 돌린 리에게 관심이 생겼다.
이렇게 멀끔하게 생긴 신사가 무슨 일로 수족관에 왔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진은 미처 몰랐다.
리가 진지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 * *
같은 시각, XJ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손목시계를 보던 박송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BS 빌딩에 가면 타이밍 늦었겠지?”
“한태주 씨 촬영 보러 가시려고요?”
그의 속내를 알아챈 비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벌써 촬영 중일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가봤자 할 일도 없어요. 괜히 부담 주지 마시고 멀리서 응원하시죠.”
“그래도 지금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잖아. 넥스트 엔터 쪽에 연락해서 물어볼까?”
박송훈이 초조한 듯 손으로 깍지를 꼈다.
비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핸드폰으로 현장에 연락해 보았다.
잠시 후, 그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역시 한태주네요. 역시 디에고 크루즈고요. 피 튀기는 엄청난 연기를 봤다고 스태프들이 지금 난리 났답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그 둘의 눈빛 연기에 다들 전율이 일었다고 하네요.”
“하, 역시 나도 가서 볼 걸 그랬나.”
서류를 뒤적거리던 박송훈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내가 가면 괜히 배우들하고 제작진하고 고생했을 거야. 나 신경 쓴다고.”
“정확한 진단이십니다.”
씩 웃던 비서가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힐끔거렸다.
“근데 이건……. 이번에 QVN 드라마 공모전 입상자들 명단이잖아요? 이미 결정 난 걸 뭘 그리 보십니까?”
“이거? 이번에 내가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박송훈이 고개를 들어 비서를 마주했다.
“이번에 최종까지 온 10명 중에 좀 아깝게 떨어진 작품 있지 않았어?”
“아, 굿맨이요?”
“그래, 굿맨. 그거 내가 보기에는 참신했는데, 왜 떨어뜨렸지?”
기억을 더듬던 박송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거, 작가도 실력이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름이… 심은설이었던가?”
“설정이나 시놉은 괜찮았는데. 작가의 역량이 완결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안 들었다고 합니다.”
“신인들 역량이 다 거기서 거기지. 쓰면서 느는 거, 아냐?”
“제가 알기로 그 작품을 쓴 작가가 ‘낭만 고양이’ 보조 작가 등등. 여태껏 청춘물에 주력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이코패스 킬러 주인공을 앞세운 장르물로 투고했더라고요.”
“심은설 작가는 로맨스를 잘 쓰는데. 이번에 안 해본 장르로 투고해서 떨어뜨린 거야?”
“아무래도 좀 리스키해서요. 완결까지 끌고 갈 역량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주인공이 사이코패스인 게 한국 정서상 안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답니다.”
“흠…. 그래도 좀 아까운데….”
입맛을 다시던 박송훈이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중견작가 한 명 붙여서 좀 다듬어서 내보내면 좋을 것 같네. 심은설 작가한테 다시 연락해 봐. 이런 조건으로 타협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가 재빨리 심은설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맞은편의 목소리에 응답하던 그의 눈이 왈칵 커졌다.
“네? 벌써 다른 제작사와 계약했다고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