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53
253화
오만과 편견 (3)
“그래, 한태주.”
마범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기도 알겠지만 여기서 주인공이 연기 삐끗하면 드라마의 중심이 흔들리잖아.”
“그건 그렇지만……”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아가던 주인식이 침을 삼켰다.
‘역시 사람들 생각은 다 똑같구나.’
‘굿맨’의 주인공을 매력적으로 그려낼 배우는 한태주밖에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특히 경찰관 신윤재처럼 감정선이 복잡한 캐릭터라면 더더욱.
처음에는 무미건조하다가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며 점점 감정이 풍부해지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섬세한 감정선을 그려낼 줄 아는 역량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단연코 주인식 감독의 선택지에는 한태주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인식은 자신이 한태주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싫었다.
괜한 자존심에 그는 마음에도 없는 다른 배우를 거론했다.
“임강현은 어때? ‘광대’에서 보니까 유약하면서도 신경질적인 연기를 잘하던데.”
“임강현도 잘하지. 그런데 한태주보다는 임팩트가 부족해.”
마범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자네, 한태주가 출연했던 ‘나의 미래’라는 영화 봤나?”
“피셔 주니어 감독하고 찍은 단편영화잖아.”
“거기서 한태주 연기 보면말이 안 나와. 무미건조한 연기부터 광기 어린 연기까지, 변주가 기가 막혀.”
그 말을 듣던 주인식은 만감이 교차했다.
한태주를 주인공으로 연출해 보고 싶다는 욕심과 과거에 그가 혹독하게 연기 지도했던 과오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태주와 함께 작업해 보고 싶다는 욕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톱스타 한태주가 뭐가 아쉬워서 자신과 작품을 함께 하겠는가.
이제 그는 감독을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에게 자신은 수많은 감독 중 하나일 뿐일 텐데.
“아마 한태주가 안 할 거야, 나랑은….”
* * *
다음날.
태주는 박인우와 함께 제작사 ‘스튜디오 S’를 방문했다.
그가 밤새 연습한 인어왕자 목소리 톤을 원작자인 서지우에게 확인받기 위해서였다.
제작사 측에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완벽주의인 태주의 성정 상 원작자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싶었다.
텅 빈 회의실 안.
태주는 다크서클이 진 서지우를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바쁘신데 괜히 불러낸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인어왕자의 목소리 톤이나 성격 같은 것을 좀 잡아봤는데요. 잘 어울리는지 작가님께서 봐주셨으면 해서요.”
“그래요? 진짜 기대되네요. 제 상상 속의 왕자님이 맞는지도 궁금하고요.”
서지우는 무척 기대된다는 듯 안경을 추켜올렸다.
태주는 옆에 있던 도인서를 힐끔 바라보았다.
[잘할 수 있어요.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잖아요.]도인서는 마치 자신이 목소리 연기를 하는 듯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인어왕자 역을 연습하며 일전에 성우 지망생이었던 도인서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태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인어왕자 연기를 시작했다.
“너를 만나기 전, 나는 드넓은 바다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어. 하지만 널 본 순간, 네가 나의 손을 잡아준 순간, 나는 너만의 조각이 되어버린 거야.”
눈을 감고 태주의 목소리 연기를 들은 서지우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그녀가 상상하던 인어왕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평소 동굴같이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감미로운 분위기가 깔린 서글픈 목소리였다.
“너만을 사랑할게. 내가 물거품이 되는 그날까지, 영원히.”
[이야, 남자가 들어도 반할 것 같다.]고개를 끄덕이는 이중협에게 도인서가 맞장구를 쳤다.
[좋은 목소리에 훌륭한 연기까지 더해지니, 정말 완벽하네요.]얼마 후.
연기가 끝나고 태주가 조심스럽게 서지우에게 물었다.
“어땠어요…?”
“인어왕자가 꼭 웹툰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요!”
조용하던 서지우가 상기된 얼굴로 태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냥 신이 났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복잡하게 변해갔다.
“그런데 태주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럼요.”
“이 대사, 어떤 감정으로 연습한 거예요?”
정곡을 찌른 서지우의 질문에 태주는 차분히 대답했다.
“지우 씨가 아쿠아 쇼에서 잠수부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상상하면서 연기했어요.”
서지우의 눈이 화들짝 놀란 것처럼 커진 순간 태주가 말을 이었다.
“지우 씨는 분명 웹툰 준비를 위해서 아쿠아리움에 가기도 했을 테지만. 그곳에서 공연하는 잠수부를 보며 인어왕자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특별함을 느끼는 그 감정을 투영했어요.”
“정말…. 제 마음을 정확히 짚으셔서 너무 놀랍네요.”
서지우가 당황한 듯 목소리가 갈라지자.
태주는 옆에 있던 도인서를 힐끔거렸다.
사실 인어왕자의 감정선은 도인서가 한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왜 그녀의 근황을 궁금해했는지 저조차 몰랐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요. 저는 그녀에게 제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궁금했고. 제가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이기를 기대하며, 그분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말을 안 하면 모른다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있죠. 저는 지우 씨의 작품에서 그 감정을 읽었어요. 그래서 표현했을 뿐이에요.”
서지우가 멍하니 태주를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저, 그분이 물거품이 된 건 알고 있었어요.”
“알고 계셨어요?”
“얼마 전에 거기서 알바하는 친구한테 들었거든요.”
멈칫거리던 서지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마음이 안 좋아요. 제 작품의 원천은 그분인데, 꼭 그분한테 보여주고 싶었는데. 정작 그분은… 이 세상에 없잖아요.”
“아니에요. 그분은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죠. 지우 씨 작품에서 언제나 살아계실 테니까요. 그만큼 서지우 씨한테 소중했던 분이니까요. 그렇죠?”
“소중했죠, 아주.”
그 말에 서지우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도인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당신한테 소중한 존재였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됐어요. 한이 풀린 것 같습니다. 태주 씨, 정말 감사해요.]도인서의 시선이 웹툰 속 인어왕자에서 서지우에게 옮겨간 순간.
그의 몸이 물거품이 흩어지듯 환히 빛났다.
* * *
BS 빌딩 아쿠아리움의 남자 탈의실.
잠수복으로 갈아입던 도인서가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휴, 오늘도 무사히 마치자!”
“아이고, 목소리가 우렁차네!”
옆에 불쑥 나타난 선배의 존재감에 도인서가 깜짝 놀라자.
선배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윙크했다.
“그 여자, 또 왔어.”
“그 여자라뇨?”
“에이, 너도 알잖아.”
선배가 그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매번 네가 쇼 진행할 때마다 맨 앞줄에 앉아서 관람하는 그 여자 말이야.”
도인서의 머릿속에 자그마한 체구의 서지우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부끄러움에 괜히 툴툴거렸다.
“그분이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요.”
“상관이 없기는 뭐가 없어. 네가 쇼할 때만 오시는데. 그분, 내가 쇼할 때는 오지도 않는다고.”
“그건 선배가 착각….”
“인서야, 내 말 잘 들어라. 아무리 봐도 그 여자,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아니면 매주 맨 앞에서 널 뚫어져라 볼 리가 없잖아. 게다가 널 볼 때, 완전히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다고.”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제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진 도인서.
그런 후배가 귀엽다는 듯 선배가 킬킬거리며 그의 등을 탁, 쳤다.
“네 목소리가 이렇게 멋있는 걸 그 여자분이 알면 2배로 더 반할 텐데. 내가 너 대신해서 그 여자분 붙잡아 둘까?”
“아니에요, 선배. 제발 그러지 마세요.”
“뒤로 빼다가 그 여자 놓친다? 임마,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쩔쩔매던 도인서는 선배를 아슬아슬하게 물리쳤다.
잠수복을 입고 그가 수조에 들어간 순간.
투명한 유리 건너편에 있는 수많은 관객 속에서 그녀가 보였다.
언제나처럼 맨 앞줄에서 그를 오롯이 보고 있는 그녀.
동그란 안경 뒤로 보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그와 마주치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도인서의 가슴이 점점 따스해졌다.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를 보던 서지우의 눈길에도 애정과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는 사실을.
차가운 물 속에서 따스함이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마치 인어왕자가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 * *
팟.
은색과 푸른빛이 뒤섞인 물거품과 같은 빛이 퍼지며 도인서가 성불한 순간.
태주는 옆에 있던 이중협과 눈이 마주쳤다.
그 또한 감명 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식의 사랑도 있을 수 있다니,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지우 씨는 인서 씨를 좋아했던 마음을 자기 작품에 그대로 담았어요. 이걸 인서 씨가 떠나기 전에 알고 가서 다행이에요.’
태주의 가슴 속에 왠지 도인서의 감정이 오롯이 남은 듯했다.
서지우를 궁금해하던,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던 그의 따스한 감정이.
서로를 탐하는 그런 감정만이 사랑이 아니다.
이런 식의 사랑도 있는 것이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그래서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대신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런 사랑이.
그때, 태주는 도인서의 이런 감정을 담아 다시 웹툰의 대사를 연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저 다시 인어왕자 대사를 읽어봐도 될까요? 지금의 감정이라면 좀 더 섬세하게 감정선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감정이 섞인 콧물을 훌쩍거리던 서지우.
갑작스러운 태주의 제안에 그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태주는 심호흡하고 원고를 쭉 읽어 내려갔다.
일전에는 그저 감정선이 섬세하다고 감탄하며 분석했던 작품이, 도인서의 감정이 반영된 지금은 완벽히 공감되고 있었다.
바닷속에서 하염없이 헤엄치며 공주를 사모했던 인어왕자.
만날 수 없는 사이임에도 절대 사그라지지 않았던 사랑이란 너울.
“널 본 순간, 네가 나의 손을 잡아준 순간, 나는 너만의 조각이 되어버린 거야.”
예전에는 그저 고백하는 심정으로 읊은 대사였다면, 지금은 이게 얼마나 애타고 절절한 감정인지를 알게 됐다.
태주에게서 간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내내 서지우는 두 손을 모은 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정이 더욱 깊어진 느낌이야.”
불과 몇 분 전 똑같은 대사를 읊었지만, 지금은 그 느낌이 또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대사가 더 표현력이 풍부한 느낌이다.
절실한 감정이 듬뿍 들어간 태주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방안을 가득 메우자, 다들 감탄했다.
이중협도 마찬가지였다.
[태주 이 녀석은 진짜…. 난 놈이라니까. 아무리 도인서의 성우 능력을 받았다지만. 어떻게 서지우를 생각하던 그의 감정까지 이렇게 온전하게 흡수할 수 있지?]그때 이중협의 레이더에 낯선 감탄의 시선이 걸렸다.
그가 재빨리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주인식 감독이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