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71
271화
수확의 묘미 (5)
* * *
어두컴컴한 밤.
은은한 가로등이 켜진 길가로 나온 태주는 강변 가까이에서 비니 모자와 검은 마스크, 발목까지 오는 커다란 코트를 입고 서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수안 씨.”
작게 말한 태주의 목소리에 윤수안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가 태주를 마주했다.
“진짜 왔네요.”
윤수안의 말에 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약속했는데 꼭 만나야죠.”
“뭐라도 마실래요?”
“저는 뭐든 상관없어요.”
왠지 들뜬 마음을 안은 태주가 윤수안과 함께 발길을 옮겼다.
그 뒤로 이중협과 한재경이 걸음마를 뗀 아기를 보는 것처럼 초조하게 따라오는 것도 모르고.
* * *
태주와 윤수안이 걸어서 도착한 곳은 파리 센 강 주변.
한쪽에는 야시장이 열리고, 강 위에는 유람선들이 오가는 이곳은 밤인데도 매우 활기가 넘쳤다.
은은한 불빛 덕분에 야경이 아름다운 건 덤이었다.
그들은 맥주 한 잔씩을 사서 근처 벤치에 앉았다.
“아, 베일릭스에 데스 게임이 공개된 거 봤어요.”
“재밌었어요?”
“네, 앉은 자리에서 1화를 다 봤어요.”
윤수안이 상기된 얼굴을 끄덕였다.
“태주 씨 연기도 멋있었고. 생존을 향해 발악하는 모습이, 가슴을 울리더라고요.”
그 말에 태주는 괜히 멋쩍어 맥주를 홀짝였다.
한참을 침묵 속에 정면만 응시하던 그의 눈에 문득 야경이 들어왔다.
태주는 핸드폰을 꺼내 센 강 사진을 찍으며 감탄했다.
“서울 야경만큼 예쁜 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여기도 무척 예쁘네요. 태희랑 고모도 같이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던 윤수안이 제안했다.
“태주 씨 나오게 사진 찍어 줄까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기다렸다는 듯 태주가 핸드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센 강을 유유히 지나가는 유람선을 배경으로 윤수안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태주는 그녀가 돌려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제안했다.
“우리 같이 셀카 찍을래요? 저 배경을 두고 안 찍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셀카는 제가 더 잘 찍는 것 같으니까, 제가 카메라 들게요.”
“저도 잘 찍는데….”
“태주 씨 SNS에 올리는 셀카 사진 보면 영 아니에요.”
단호한 윤수안은 핸드폰을 들어 프레임 안에 자신과 태주를 담았다.
키가 큰 태주가 매너 다리를 해 윤수안과 눈높이를 맞춰줬다.
“하나, 둘, 셋!”
태주가 윤수안의 옆에서 다정하게 브이를 하는 포즈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한편,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두 아재가 있었으니.
이중협과 한재경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태주 저 녀석… 어른이 다 되었구나.]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이중협에게 한재경이 불쑥 물었다.
[저 윤수안이란 아가씨, 태주한테 소중한 사람입니까?] [소중한 사람이죠.]그동안 태주와 윤수안의 역사를 회상하던 이중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가 ‘그림자 무사’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나왔을 때, 윤수안의 목숨을 구해주는 역할로 처음 만났었죠. 그 후로 같은 회사에 소속되어 드라마에서 연기 합도 맞춰보았고요. 둘이 그다지 표현은 안 해도 척이면 척, 합이 맞는 파트너예요.] [내가 보기엔 파트너, 그 이상으로 보이는데요.]아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한재경의 눈이 아릿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같은 삶을 살아가고, 같은 선을 걸어가며 제 생각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죠. 예전에 제가 태주 엄마를 만났던 것처럼…….]* * *
몇 시간 후.
헤어지기 직전까지 태주와 윤수안은 벤치에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녀와는 어떤 주제로 이야기해도 편안함을 느끼는 태주였다.
연기면 연기, 인생이면 인생.
똑같이 아역으로 시작해 성인 배우로 안착하기까지 경험이 비슷해서 그런지, 그녀는 태주의 경험과 고충에 물씬 공감했다.
“25살이 되도록 제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밖에 없더라고요. 아이돌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그동안 연기만 파서 그런지, 다른 걸 할 용기도 재능도 없는 거 같아요.”
“저는 도중에 연기를 쉬었잖아요. 그동안 사실 다른 길로 가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결국에는 연기로 돌아오더라고요.”
“그러니까요.”
윤수안이 태주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천상 연기쟁이에요. 어떻게든 연기를 해야 하죠.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조금 힘들거나 외로우실 테지만요.”
“왜요?”
“우리는 매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니, 가족한테 많은 신경을 쓸 수 없잖아요. 지금 자신이 맡은 캐릭터의 삶도 디자인하기 바쁜데, 가족들을 신경 쓸 틈이 있겠어요?”
그 말에 태주는 뒤통수가 시렸다.
아역배우를 할 때도 사실 부모님보다는 연기에 더욱 많은 신경을 썼었다.
그런데 아빠가 귀신으로 나타난 지금도 그를 떠나보내는 상처를 겪기 싫어 밀어내고 있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상처받기 싫은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복잡한 표정의 태주가 윤수안에게 물었다.
“수안 씨는 가족을 어떻게 생각해요?”
“저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죠. 제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버팀목인 동시에 제 감정을 소모하는 대상이기도 하고요.”
“네?”
“우리 아빠, 제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아프셨어요. 지금은 강원도에서 전원주택 짓고 요양하고 계시는데, 언제 떠나실지 모르는 상태예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항상 마음을 비우고 있으라고.”
생각지도 못한 개인사에 태주가 눈을 깜빡거리자, 윤수안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우리 아빠, 존재 그 자체만으로 제게 힘이 되어 주시는 분이에요. 아빠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제가 힘들어하면 언제든 내려오라고, 아빠가 너 하나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거든요.”
“수안 씨가 가족 이야기하는 건 처음 들어봐요.”
“아빠 얘기만 하면 눈물 날 것 같아서, 그동안 안 했어요. 그만큼 아빠는 저한테 소중하니까요. 눈앞에 보이든 안 보이든 존재 자체가 너무 소중해요. 힘이 되고.”
말을 잇던 윤수안이 태주를 향해 속삭였다.
“태주 씨가 나한테 그런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고백.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태주는 윤수안의 빨개진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존재 그 자체’라는 말이 아른거렸다.
세상에는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태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눈앞에 있든, 없든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채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 * *
다음날, 파리 공항.
“하, SNS에 태주 네 사진 퍼져서 아주 난리도 아니네.”
게이트로 들어가는 때까지 팬들의 사진, 사인 요청에 시달린 태주였다.
옆에서 동행한 박인우는 태주의 인기에 흐뭇해하면서도 비행기 탑승 시간에 늦을까 전전긍긍했다.
태주는 싱긋 웃으며 팬들에게 기분 좋은 인사를 해주더니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그런 태주를 유심히 보던 박인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냐?”
“내가?”
“어젯밤에 어디 나갔다 왔다며? 누구 만나고 온 거야? 그래서 기분 좋은 거야?”
장진혁의 보고를 들은 박인우의 물음에 태주가 흔들리는 시선을 돌렸다.
어제 윤수안을 만나고 왔는데, 그녀와의 대화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건 사실이다.
“센 강 산책하고 왔어. 거기 야경이 엄청나게 멋있다고 해서.”
그 말에 박인우의 입가가 묘하게 씰룩거렸다.
“수안 씨 만나고 온 거지?”
“뭐야, 어떻게 알았어?”
“수안 씨가 나한테 보고했어. 혹시 네가 말 안 했을까 봐, 자기가 이야기한다면서.”
전직 윤수안의 로드 매니저였던 박인우였기에, 그녀와 지속적인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럼 됐네.”
“수안 씨 말로는 좋은 친구에게 인생 상담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게 뭔지….”
“들은 그대로야, 형. 내가 설마 형 뒤통수를 치겠어?”
“그렇긴 하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연애할 시간이나 있겠냐.”
박인우는 태주에게 몸을 숙여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아침에 ‘데스 게임’ 6화까지 공개된 거 봤냐?
그가 미소 지으며 태주에게 덧붙였다.
“지금 회사에서 대표님이랑 배우 1팀 직원들이 야근하면서 추이 지켜보고 있대.”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회사에서 용석이 형이랑 같이 베일릭스만 보고 있었을 거야.”
상기된 표정의 태주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정성 들여 연기한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렜다.
* * *
몇 시간 후, 한국.
밤인데도 환히 불이 켜진 넥스트 엔터.
컴퓨터를 응시하던 직원들은 제각기 일로 무척이나 바빴다.
그중에서도 차용석은 김진수, 송유리와 함께 한 테이블에 모여앉아 여러 일을 의논하고 있다.
“이번에 포털에 연재된 ‘인어왕자’ 있잖아. 그거 1화 반응 어때?”
“무빙툰으로 1화를 연재한 게 신의 한 수였던 거 같습니다.”
김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특히 인어왕자에 더빙된 목소리가 워낙 몰입감이 좋아서 작품에 푹 빠져들었다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당연하지, 누구 목소린데.”
자부심 가득한 차용석의 말에 김진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댓글이 태주 씨 더빙 실력에 대한 칭찬 일색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디 좀 볼까?”
차용석이 자리를 옮겨 김진수 쪽에 앉았다.
커다란 화면에 띄워진 웹툰 스크롤을 내리자 보이는 수백 개의 댓글.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한태주’라는 이름이 제법 친근했다.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몰입감, 그림체, 스토리 세 박자가 골고루 맞아떨어지는 갓작 탄생.
-솔직히 1화부터 무빙툰이다, 더빙이다. 너무 투머치한 게 아닌가,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네요. 특히 인어왕자 목소리 연기를 한태주가 너무 잘해준 듯.
-2D 캐릭터하고 사랑에 빠질 뻔. 인어왕자 왜 이렇게 매력적이죠?
스튜디오 S에서 제작한 웹툰, ‘인어왕자’.
차용석은 넥스트 엔터가 제작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주의 목소리가 더빙됐다는 이유로 이 작품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독자들이 태주의 목소리 연기에 흠뻑 빠진 것 같아 기분이 고조됐다.
곧이어 그의 시선은 한태주의 또 다른 작품으로 향했다.
“베일릭스에 공개된 데스 게임 말이야. 랭킹에 진입은 했나?”
“잠시만요. 보통 8시간 단위로 랭킹을 집계하더라고요.”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김진수가 시선을 모니터로 옮겼다.
“오! ‘데스 게임’이 월드 랭킹에 진입했어요!”
송유리가 호들갑을 떨며 차용석에게 말했다.
“월드 와이드 9위입니다!”
“한국 랭킹은?”
“한국 랭킹은… 5위입니다!”
“됐어!”
차용석이 만족스럽다는 듯 허벅지를 탁, 쳤다.
“스타트를 잘 끊었어, 이제는 치고 올라갈 일만 남은 거라고.”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좀… 순위가 낮은 거 아닌가요?”
송유리가 아쉬움이 물씬 느껴지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진짜 재밌던데요. 저 드라마 뜨자마자 그 자리에서 6화 다 봤잖아요.”
“유리 씨, 너무 급하게 가지 말자고. 어차피 좋은 작품은 사람들이 다 알아보게 돼 있어.”
한껏 기대 어린 시선을 한 차용석이 캄캄해진 창밖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태주가 바빠지겠는걸? 해외에서 반응이 확 오면 런던에 있는 태주한테 인터뷰 요청이 얼마나 올지 상상도 안 갈 정도야.”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