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12
312화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순간 (4)
* * *
“이야, 태희 마중 나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차를 운전하는 태주는 콧노래를 흥흥거리고 있었다.
요즘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느라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었다.
당장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굿맨’ 대본 리딩을 준비하느라 회의실에서 맹연습 중이다.
조금 전까지는 QVN에서 곧 녹화 들어갈 ‘류퀴즈’ 사전 인터뷰를 했고.
대본 리딩 후 팬미팅을 한 다음, 곧바로 일본으로 떠난다.
‘류퀴즈’가 일본에서 녹화를 진행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네.”
태주는 가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저 멀리 학교에서 나오는 태희를 보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태희다!”
그런데 태희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도준이도 보였다.
태희가 팔짱을 끼자 도준의 볼이 붉어졌다.
“어라, 저 녀석들? 무슨 사이지?”
그때 혼자 고민하던 태주의 귓가에 차 문이 똑똑,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태희가 도준이와 함께 온 거다.
차 문을 열어주자 두 아이는 냉큼 뒷자리에 탔다.
“안녕하세요, 태주 형.”
태주의 눈치를 보던 도준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태희가 저희 집이랑 가는 방향이 같다고 태워준다고 했는데…… 괜찮아요?”
“당연하지.”
그런데 너희 둘은 무슨 사이니?
그 말이 혀끝까지 차오르던 태주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태희의 볼 통통한 모습에 태주는 금세 기분이 좋아지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태희야, 오빠가 데리러 와서 좋지? 예전에는 이렇게 하교할 때마다 데리러 왔었잖아.”
그 말에 태희는 냉큼 대답했다.
오빠가 마중 나오는 거 좋아. 그런데 도준이랑 둘이 가는 게 더 좋아!
태주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태희야…. 나 충격받았어.”
그런 태주를 보던 태희가 장난스러운 보조개를 지었다.
“아, 그렇다고 내가 오빠보다 도준이를 더 좋아한다는 건 아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건 엄마랑 오빠니까.”
그 말에 도준이는 살짝 실망한 듯한 표정을, 태주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두 어린아이의 사랑싸움을 곁에서 실시간으로 보던 이중협과 유키는 킬킬거리며 웃느라 바빴다.
[세대를 막론하고 사랑싸움이 제일 재밌구만.] [순수하고도 아름다울 때죠.]그때, 도준이가 금세 주제를 바꾸었다.
“형, 이번 주 토요일에 대본 리딩이라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태희한테 들었죠. 요즘 리딩 준비하느라 집에도 못 들어온다면서요. 힘들겠어요, 형.”
도준이의 어른스러운 말에 태주의 마음이 일순간 따스해졌다.
“힘들기는, 당연한 거지. 리딩은 드라마의 첫 단추를 끼우는 중요한 자리니까, 주연배우인 나는 더욱 열심히 해야 하거든.”
“그렇구나! 저는 항상 대본 리딩이 재밌기만 했거든요.”
해맑은 도준이의 목소리에 태주는 백미러로 그와 얼굴을 마주쳤다.
“혼자서 대본 연습하면 다른 사람들 연기는 제가 상상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대본 리딩 가면, 다른 사람들 연기를 마주하면서 티키타카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전 그게 재밌더라고요. 상상 속의 역할극이 진짜가 된 것 같고. 크크.”
거울 속 보이는 아이의 눈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즐거움과 열의로.
한동안 태주가 잊고 있었던 감정들이었다.
그저 대본 리딩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묶여 있었던 탓일까.
[누구든 재밌어서 연기를 시작하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시작하지는 않지. 역시 애들이 뭘 좀 아네.]옆에서 들려오는 이중협의 목소리에 태주는 더욱 마음이 가벼워졌다.
“도준아, 고맙다.”
“네?”
“재밌어서 하는 게 연기인데, 그런 기본적인 걸 잊고 있었네.”
해맑은 도준이의 격려에 태주는 마음속 답답함이 뻥, 뚫렸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한테서 부담감 없이 하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음에도 마음을 비우는 게 어려웠는데.
도준이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말에 이렇게 마음이 가벼워질 줄이야.
[역시 아이들이 단순하다니까. 본질을 이렇게 꿰뚫어 버리잖아?]기분이 붕붕 뜨는 이중협이 태주를 보고 씩 웃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은 태주도 기분이 좋아 흥흥거렸다.
“우리 도준이, 형보다 나은 배우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빠, 요즘 사춘기인가? 왜 이렇게 기분이 왔다 갔다 해?”
* * *
그 주 토요일, 마침내 대본 리딩 당일이 되었다.
KTS 방송국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연예부 기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곧 있으면 나타날 주연 배우들을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이었다.
그중 제일 일찍 나온 우성림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황유나에게 말을 걸었다.
“살면서 여기로 대본 리딩 취재를 올 줄은 몰랐는데. 유나야, 넌 여기 와본 적 있니?”
“저도 처음이에요. 사실 ‘굿맨’ 아니었더라면 ‘KTS’라는 방송국이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황유나의 말에 우성림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래. 여기가 지금은 KTS 방송국으로 간판을 바꾸었지만, 예전에는 ST 채널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 재방송만 주구장창 하는 채널이었어. 그런데 이제 드라마 왕국에 도전장을 던진 거지, 한태주라는 필승 카드와 함께.”
“그 도전이 반은 성공한 것 같은데요.”
어깨를 으쓱하던 황유나가 주변을 가득 메우던 기자들을 턱짓했다.
“리딩 단계부터 이렇게 많은 기자가 와서 관심을 표하는 걸 보니, 화제성은 단연 압도적인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아까 들어보니까, 저기 샐럽패치 기자들은 태주 씨 연기만 불을 켜고 보려는 것 같더라. 뭔가 흠을 찾아내려는 듯한 모양새였어.”
“진짜요?”
황유나가 고개를 돌려 우성림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샐럽패치’가 적힌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에 기사로 오디션을 통해서 실력파 배우들이 뽑혔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했잖아. 한태주 씨가 이런 장르의 드라마 주인공을 하며 극을 이끌어 가기에는 무게감이 가볍다면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배우들보다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닌지 엄격하게 보려는 것 같더라.”
“태주 선배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데요!”
“그러니 이런 부담감을 이겨내고 연기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거지. 잘해야 하고.”
그때, 기자들이 한쪽으로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 대의 차가 등장하고, 그 안에서 내리는 배우들을 필두로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되었다.
손우현, 윤수안 등의 배우들이 기자들을 보곤 인사하며 지나가고.
마침내 커다란 리무진에서 한태주가 등장했다.
눈이 멀 듯한 강한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가운데.
태주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려 차 안을 살폈다.
“나오세요, 다들.”
그러자 쭈뼛거리며 배우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왔다.
오늘 기자들의 취재가 있다는 말을 들은 태주가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배우들에게 연락해 샵에 데려갔다가 데려온 것이다.
“한태주 씨, 여기 포토라인에 서주세요!”
얼핏 보면 스태프로 보이는 배우들을 못 알아본 기자들이 태주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그 말에 몇몇 배우들은 자존심이 상하는 듯 얼른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태주는 세 명의 배우들을 모두 잡아 제 옆에 세우고는 당당히 말했다.
“저와 함께 드라마 ‘굿맨’에서 활약해주실 배우들입니다. 각각 추석대 배우, 김영광 배우, 이규성 배우입니다.”
“아, 이번에 오디션에서 뽑혔다던 배우들이구나.”
“그런데 한태주가 직접 데리고 온 거야? 특이하네.”
수군거리던 기자들을 뚫고 태주는 배우들과 함께 방송국 안으로 향했다.
기자들의 플래시가 멈추고 나서야 태주와 함께 걸어온 배우들이 긴장한 숨을 한껏 내뱉었다.
“이야, 태주 씨는 이런 거 도대체 맨날 어떻게 견뎌요?”
“원래 대본 리딩 때 이렇게 기자들 취재가 많아요?”
“아, 오늘 외운 대사들 다 까먹겠네.”
수다스러운 남자들 사이 추석대만이 아무 말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도중.
크흠 거리던 그는 태주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오늘 샵에 데려가 준 거, 차 태워 준 거 다 고마웠습니다.”
추석대의 살짝 긴장한 얼굴에 태주가 슬쩍 물었다.
“긴장했나 봐요?”
“사…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라서.”
“그럼 리딩 때는, 나만 보고 연기한다고 생각하고 해봐요. 오디션도 그렇게 해서 잘 봤잖아요.”
무덤덤하지만 따뜻한 태주의 말.
그 덕분에 추석대는 피식거리며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주연배우의 클라스란 건가. 젊은 녀석이…. 다르긴 다르네.”
* * *
얼마 후, 대회의실에 여러 관계자가 모였다.
드라마 ‘굿맨’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커다란 라운드 테이블에 널리 앉았다.
그 주변으로는 메이킹 카메라를 조작하는 스태프와 기자 등 많은 관계자가 빽빽이 들어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먼저 주인식 감독이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주인식입니다. 좋은 극본은 물론 좋은 배우들과 함께 촬영할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식의 인사를 시작으로 작가, 배우들이 차례로 인사했다.
기자들의 플래시는 멈출 줄 몰랐다.
드라마의 화제성과 기대감이 하늘을 찌르는 것과는 대조되게 작가와 배우 중에 신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이 입봉작인 심은설 작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무명 배우들.
익숙함보다는 긴장감을 내비치는 분위기에서 단연 중심을 잡는 건 주연 배우들이었다.
“윤수안입니다. 이번 작품은 배역이 난도가 있음에도 대본을 읽자마자 하겠다고 결심할 만큼 정말 매력적이었는데요. 그 이유 중에는 한태주 배우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윤수안의 시원시원한 소감에 여러 사람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품, ‘굿맨’이 다소 대중적이지 않은, 낯선 종류의 드라마라는 건 연예계에 소문이 자자했다.
사이코패스 주인공,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 등등.
극본이 매력적이었지만 그만큼 어려웠기에, 주연배우 한태주가 작품에 가져올 설득력과 압도적인 존재감이 절실한 상황.
태주는 주변의 기대감 어린 시선을 마주하며 인사를 하러 일어났다.
“기분 좋네요. 남들이 저한테 기대한다는 건, 저한테 그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거잖아요.”
주변을 둘러보며 씩 웃던 태주가 눈을 곱게 휘었다.
“배우는 흔히 사람들의 기대감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저도 다른 배우들과 함께 연기할 이 날만을 정말 기다려 왔습니다. 좋은 분들과 함께 좋은 작품, 만들어 봅시다.”
씩씩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태주의 말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진 가운데, 대본이 넘어가고 본격적인 리딩이 시작되었다.
메이킹 카메라가 태주의 얼굴을 크게 잡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태주의 얼굴은 금세 주인공, 신윤재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씬 5-1! 형사 신윤재와 연쇄살인범 이성용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씬!”
다들 한태주의 연기를 한껏 기대하는 가운데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