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연기의 진정성 (2)
화려한 조명이 가득한 술집.
여러 방을 가득 채운 손님들의 취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인적이 없는 긴 복도에 남자와 여자가 마주 보고 서 있다.
관능적이지만 잔뜩 겁에 질린 미스 봉.
그런 미스 봉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두목.
그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가자, 미스 봉이 벌벌 떨며 몸을 웅크린다.
“이러지 마세요…….”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지금 당장 따라 들어와, 시중 좀 들라고 몇 번을 말해.”
“손님들도 계시잖아요. 지금은 좀…….”
“이년이 진짜!”
결국, 두목이 미스 봉의 머리채를 와락 잡아챘다.
탐스러운 머리칼이 그의 손아귀에 잡힌 상태로 미스 봉이 두 손을 비비며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머리 굴리지 말고 그저 내 말만 고분고분 따르라고 했잖아. 이게 어려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사람은 학습의 동물이라는데 네년은 어떻게 그런 머리도 없냐? 응?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쾅!
결국, 두목은 미스 봉을 헌신짝처럼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쳤다.
셔츠 단추가 마구 뜯어졌지만, 그녀는 무릎을 꿇고 두목에게 빌 뿐이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제발요…….”
“이러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잘못은 네가 먼저 했는데, 그치? 그러니까 좀 맞자.”
퍽!
그가 걷어차자 미스 봉이 배를 붙잡고 쓰러졌다.
때마침 몇몇이 부엌에서 만든 음식을 가지고 복도를 지나쳤다.
그러나 그들은 두목이 미스 봉을 밀치고 때리는 것을 그저 무시했다.
한참이나 구타가 이어지던 그때.
하얀 요리복을 입은 죽정이 모자도 벗지 않은 채 나타났다.
“두, 두목님!”
그는 미스 봉과 두목 사이에 자리를 잡더니, 이마를 바닥에 쿵, 박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손님께서 두목님을 찾으십니다.”
“나를? 지금 있는 손님들은 다 여자들 끼고 잘 놀고 있잖아, 날 찾을 사람은 없을 텐데?”
태주는 고개를 들어 결연한 눈빛을 보였다.
“박 사장님께서 부르십니다.”
화면 가득히 잡힌 태주의 얼굴.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던 양군보 감독이 몇 번을 고민하다 결국 마이크를 잡았다.
“컷……, 컷!”
* * *
촬영을 멈춘 양군보 감독은 곧장 태주에게 향했다.
“죽정이 미스 봉을 구해주는 건 그런 구원자 느낌이 아니에요. 태주 씨는 지금 너무 자신감에 차 있어요.”
태주가 대본과 자신이 연기한 장면을 번갈아 보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말한다.
“리딩할 때는 괜찮았는데, 실전이라 너무 힘이 들어갔나 봐요.”
“그렇죠? 죽정이 여기서 미스 봉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정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도박이에요.”
양군보가 태주에게 차근히 설명했다.
“죽정 본인도 밑바닥인데, 그런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방패가 되어주는, 그런 마음이죠. 알겠어요?”
“다시 해보겠습니다.”
태주가 주먹을 꼭 쥐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촬영을 거듭했다.
그런데 양군보 감독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잠시 쉬었다 합시다!”
결국, 모두가 피곤해하자 그는 잠시 촬영을 놓았다.
태주가 화장실을 가자 양군보 감독이 손우현을 찾는다.
“우현 씨. 잠깐만…….”
한참을 대화하던 그들.
손우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시 촬영이 재개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몇 번이고 NG가 나, 아직도 그 씬에 정체돼 있다.
죽정이 두목에게 맞는 미스 봉을 거짓말로 구하는 그 장면에서.
조감독이 양군보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이만하면 된 것 아닙니까? 이 정도면 죽정과 두목 사이의 텐션,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니야. 우현 씨는 그렇다 쳐도 태주 씨 텐션이 아직 안 올라왔어.”
양군보가 초조한 듯 화면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찼다.
무언가 사파리의 최하층 하이에나가 사자에게 도전하는 듯한 날것의 느낌이 안 난다.
모든 것을 걸고 도박하는 그 처절함.
그러나 그 느낌이 없다, 아직은.
한태주의 감정을 끌어내려 일부러 손우현에게 애드리브도 해 달라 부탁했었다.
“이런 미친놈. 내가 네놈 말에 움직일 것 같아? 내가 왜 니새끼 말을 들어야 하는데, 네가 뭔데!”
대본에 없는 욕설을 남발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면, 리얼한 연기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한편, 태주는 두렵기보단 혼란에 빠졌다.
대본에 없는 손우현의 애드리브를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게다가 양군보 감독도 계속해서 자신만 지적했다.
‘분명 룰은 그가 어겼는데.’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이중협.
손우현을 오래 알아 온 그로서는 이 상황을 대충은 알 거 같았다.
‘태주의 연기가 마음에 안 차는 거지.’
더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는데, 그게 안 나오니까 일부러 자극을 주는 거고.
그래서 그는 태주에게 넌지시 힌트를 주었다.
[네가 생각하는 게 연기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제가 뭘 더 해야 감독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어요.’
[네가 연기하는 ‘죽정’이 정말 그게 다일까? 또 다른 모습이 있는데 네가 외면하고 못 끌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그 말에 태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연기에 스스로 만족했던 것이 패인이었을까?’
그제야 깨달았다.
‘마지막 승부’의 연기를 영화제에서 인정받았다고.
유수의 감독들이 그의 연기를 칭찬했다고.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 취해 있었다.
‘이건 배우로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었는데.’
태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죽정의 또 다른 면을 끌어낼 수 있을까?’
조금 전 감독님이 해준 조언을 곰곰이 되새기며 고심했다.
-죽정이 미스 봉을 구해주는 느낌이, 그런 구원자 느낌이 아니에요.
-죽정 본인도 밑바닥인데, 그런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방패가 되어주는, 그런 마음이죠.
몇 번이고 생각하다 깨달았다.
‘그래, 죽정은 이판사판이야.’
자신이 반드시 미스 봉을 구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닌, 그래야만 하는 처절함이다.
미스 봉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불사할 수 있어.
두목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든, 폭력을 행사하든.
미스 봉의 고통을 자신이 대신할 수만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두목의 시선을 자신이 돌려야 한다.
그 어떤 발악을 해서라도.
* * *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
몇 번이고 계속되는 촬영에 스태프들은 잔뜩 긴장했다.
“도대체 감독님은 무슨 생각이신 거지? 저만하면 오케이 아닌가?”
“태주 씨 연기를 더 끌어낸다는 것 같던데. 그래서 아까 우현 씨한테 그런 주문도 하셨고.”
“아니, 저기서 죽정의 감정선을 어떻게 더 끌어내는데?”
그때, 죽정이 두목의 폭력으로부터 미스 봉을 지키기 위해 다급하게 말한다.
“박 사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야, 여자 치마폭에 쌓여있는 놈이 날 왜 불러.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고 저리 꺼져.”
“저더러 꼭 좀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좇 같네, 진짜. 박 사장 건은 네 선에서 유도리 있게 처리하라고 몇 번을 말했어.”
몇 번이고 거듭되던 장면.
손우현은 일부러 더욱 센 욕설을 던졌다.
태주의 감정을 자극해서 더욱 리얼한 반응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내가 미스 봉하고 좋은 시간 보내겠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었냐? 이런 쭉정이 새끼야, 네놈 대가리는 장식이야? 손님 잡아놓는 것도 못 해?”
원래 양군보 감독의 의도라면 태주는 이 말에 벌벌 떨며 김선정을 자기 몸으로 감싸야 한다.
그저 미스 봉을 구하는 것이 죽정의 유일한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태주는, 또다시 손우현을 올려다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은 여전했다.
다만, 그 눈빛에 분노와 진한 감정이 섞여 있다.
지옥 밑바닥에 있는 것 같은 억울함과 격분이었다.
“저도 박 사장 말 듣기 싫습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그 새끼가 두목님 부르라고 그렇게 지랄해 대는데. 그러니까 두목님……, 제발 좀 해결해 주십쇼.”
* * *
현장이 술렁였다.
조마조마했던 스태프들에게서 감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와…… 태주 씨 세게 나온다.”
“진짜 벼랑 끝까지 몰린 절박함이네.”
태주가 이렇게 거칠게 나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들 태주의 연기에 빠져있는데, 양군보 감독이 미친놈처럼 실실거리기 시작했다.
“미쳤다, 이거.”
태주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그가 원했던 죽정이 자기 것을 지키는 하이에나였다면.
태주가 표현한 죽정은 제 목숨을 걸고 발악하는, 그래서 그 기세로 상대를 움찔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태주의 연기에 손우현의 연기도 더욱 리얼해졌다.
그 또한 태주가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동공이 흔들리는 게 카메라에 담길 정도였으니까.
다음 대사를 하는 그의 목소리도 살짝 떨렸다.
그의 모습은 처음으로 반항하는 죽정에게 당황한 두목, 그 자체였다.
손우현의 연기는 더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외의 수확이다.
한태주란 배우가, 더욱 기대되는 순간.
양군보가 주체할 수 없는 입꼬리를 올렸다.
“오케이, 컷!”
* * *
컷, 소리가 들리자마자 태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죽더라도 할 말은 하고 죽자는 심정으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한 연기.
태주가 죽정에게서 빠져나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과연 이 장면에 맞는 연기였을까?’
그로서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연기였다.
뒤에서 김선정이 걱정스러운 듯 그를 두드렸다.
“태주야, 괜찮니?”
“괜찮아요.”
“나 아까 진짜 놀랐어. 네 연기 정말 좋더라.”
자신을 힐끔거리는 김선정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양군보 감독이 배우들을 불렀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조금 전 찍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손우현도, 김선정도, 스태프들도 다들 침묵에 빠진 이때.
짝짝짝짝-
양군보 감독의 박수 세례가 침묵을 깨뜨렸다.
그가 손우현과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손우현이 너털웃음을 짓더니 머리를 긁적거렸다.
“짜식, 이렇게 연기를 잘해버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네?”
“태주 너, 아까 연기할 때 무슨 생각으로 했길래 이렇게 달라졌냐?”
“죽정이 미스 봉을 지키려면, 강한 단어를 써서라도 두목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미스 봉을 구하려는 죽정은 절실했으니까요.”
손우현과 양군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네 연기가 마뜩잖았어. 그래서 일부러 애드리브도 치면서 널 자극하려 했던 거야.”
양군보가 말을 보탰다.
“그런데 조금 전 연기는 상상 이상으로 잘해줬어요. 두목에게서 미스 봉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죽정이, 이보다 더 생생할 수는 없었습니다. 덕분에 손우현 선배도, 김선정 씨도 더 좋은 연기가 나왔어요.”
“아……, 그럼 제 연기, 괜찮았던 건가요?”
“너는 도대체 몇 번을 의심하냐, 잘했다면 그냥 좀 믿어!”
손우현이 그의 머리를 세게 헤집었다.
태주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역시 연기란 자만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고심을 거듭할 때, 그제야 볼만한 연기가 나오는구나.’
과연 그는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이중협이 옆에 있었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중협이 형, 정말 고마워요.’
이중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작 21살짜리 애송이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연기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경외감과 부러움, 그리고 자신도 저런 연기를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그동안 연기 잘하는 기특한 후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의 연기를 뺏고 싶어졌다.
그만큼 태주의 연기가 매력적이었기에.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