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23
323화
개척자와 숨기는 자 (1)
* * *
깊은 밤.
거대한 일본풍의 저택, 사나다 가에 낭랑한 대사 읊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중에 화장실을 다녀온 중년의 신스케는 귀를 쫑긋거렸다.
“이 시간까지 누가 대사 연습하고 있지? 카에데인가?”
하지만 좀 더 귀를 기울여 보니 그 대사의 주인은 카에데가 아닌, 다른 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그 녀석이…….”
기대감에 찬 얼굴을 애써 숨긴 채 신스케가 향한 곳은 연습실이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그의 아들, 유키가 대사를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른 연습실을 종횡무진 오가며 동선을 연습하기도 했다.
어느새 신스케가 문을 열고 연습실 구석에 서 있었지만, 연습에 몰입한 아들은 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대견스럽다는 듯 쳐다보던 그가 사레들려 캑캑거리기 전까지는.
“아버지!”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에 유키가 아버지에게 냉큼 달려와 물을 건네며 연습은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신스케는 자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아들을 섭섭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본심과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그에게서 나왔다.
“나 있다고 왜 연습을 중단하냐? 계속해.”
“아버지야말로 왜 오셨어요? 매번 석대에게만 관심 가지셨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차피 석대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계시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신스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늘 이렇게 약해빠진 소리를 한다.
“네가 노력해서 그 후계자 자리를 거머쥘 생각을 해야지. 왜 벌써 포기하는 거냐?”
“아버지께서 한 번도 제 연기를 인정해 주지 않으셨으니까요. 아버지도…… 저를 포기하신 거잖아요.”
“너는 내 하나뿐인 아들이다. 절대로 포기할 생각 없어. 네게 1퍼센트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이상, 널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거짓말……. 저를 아들로 생각하기는 해요?”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나온 말.
유키가 적대적인 눈으로 아버지를 마주했다.
“다들 제가 아버지의 피를 전혀 물려받지 않았다고 해요. 오히려 카에데가 아버지의 승부욕이나 연기력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하죠…….”
“남들 말은 신경 쓰지 마.”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는 절 누가 인정해 주겠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 누가 뭐라고 하던, 너는 날 누구보다 쏙 빼닮은 아들이야.”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신스케는 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말에 멍해진 유키였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자신과 닮았다고 했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너는 꺾이지 않는 마음을 지녔거든.”
“꺾이지 않는…… 마음?”
“그래. 관객을 감동하게 하는 연기를 위해서, 매 순간 노력하잖냐. 내 여태껏 수많은 제자를 길렀지만 나를 빼닮은 유일한 제자는 바로 너다.”
달빛을 빌려 진심을 털어놓은 신스케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뒤를 돌아 저 멀리 사라지는 아버지를 본 순간.
유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던 아버지.
1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를 발전시키겠다는 아버지.
자신이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라고 안심시켜 주는 아버지.
연기에 있어서 제일 소중한 재능인,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자신을 인정한 아버지.
수많은 제자 사이에서 연기로 고군분투하던 자신을 처음으로 아버지가 인정한 순간.
유키의 얼굴에는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어? 이번에는 유키의 과거를 보여준 게 아닌 거 같아요……. 뭐지?’
[맞아, 과거가 아니라 꿈이야. 종종 귀신이 꿈에 찾아온다고 하잖아. 오늘 밤 신스케 어르신이 그동안 담아 두었던 말을 유키에게 해줄 모양이야.]‘세상에…….’
[이 녀석, 처음에는 친구가 궁금해서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줄 알았더니. 결국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로구만.]‘성불한 걸 보니 아버지의 온전한 인정을 받았다고 느꼈나 봐요.’
유키가 성불한 자리에는 눈이 부신 황금빛이 반짝거렸다.
그때, 신스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지금 자네를 보고 있으려니, 내 곁에 유키와 카에데도 있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드네.”
그를 위로하듯 태주가 말을 건넸다.
“아드님은 돌아가셨지만, 석대 씨는 한국에 계시니까 언제든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서랍을 뒤지던 신스케가 한 장의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건 카에데가 이곳을 떠나기 전 남기고 간 편지일세. 그런데 보다시피 일본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써서, 나는 통 읽을 수가 없었지.”
태주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보았다.
그곳에는 한국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스승님. 제가 비록 스승님의 그늘은 떠나지만 그래도 연기라는 길은 걷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 스승님, 유키가 하는 노력도 좀 인정해 주세요. 그 녀석, 저보다 노력을 배로 하는 녀석이에요. 정말 대단한 녀석이라, 저도 항상 존경한다고요.
궁금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신스케에게 태주가 일본어로 번역하자, 그는 고개 숙이더니 한동안 들지 못했다.
“이 늙은이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채 헤아리지 못 했구만….”
“앞으로는 잘해주면 되죠, 어르신. 지나간 일은 너무 괘념치 마세요.”
그 말에 신스케가 고개를 벌떡 들었다.
마치 태주의 말에 무언가 깨달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래, 결심했네. 태주 군, 내가 자네를 도울 일이 없을까?”
[갑자기?]“내가 자네 덕분에 우리 유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한결 덜었고. 석대에 대한 소식도 들었으니. 보답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 말에 태주는 곧이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르신께서 도움을 주시면 좋을 일이 하나 있습니다.”
* * *
일본에서의 마지막 스케줄은 류퀴즈 촬영이다.
“류퀴즈, 일본에서 만나는 한국인 특집으로 지금 촬영하고 있는데요. 지금 제 곁에는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사랑받는 배우, 한태주 씨가 나와 계십니다.”
한 고즈넉한 카페를 빌려 두 명의 엠씨와 태주가 토크를 하는 이때.
녹화 예정 시간을 두 시간 가까이 넘겼지만, 그들은 아직도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국의 신사 개그맨인 류인환과 그가 아끼는 후배 개그맨, 오세인이 진행하는 이 쇼에서 태주의 일생은 좋은 얘깃거리였다.
아역배우 시절, 아역배우를 그만두었을 때. 그리고 다시 연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데스 게임’으로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게 푹 빠져들어 이야기를 듣던 박인우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퍼뜩 놀랬다.
그는 피디에게 속삭였다.
“저희 비행기 시간 때문에 30분 안에는 끝내야 합니다, 감독님.”
“아이고, 태주 씨 얘기가 워낙에 재밌어서 그만.”
멋쩍은 표정의 피디가 서둘러 덧붙였다.
“이제 게스트를 모시고 진행하는 토크만 남았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엠씨 류인환이 진행을 서둘렀다.
“그리고 일본에서 한태주 씨를 응원하러 오신 두 분이 계시다는데요. 나와 주세요!”
태주는 마이크를 차고 나타난 두 명의 노인들을 환하게 맞이했다.
“마루야마 회장님! 신스케 어르신!”
한 명은 문화계의 거물 투자자, 한 명은 일본 문화계의 대가.
예능은 물론 티비에서도 잘 볼 수 없는 거물들의 등장에 제작진의 입은 귀까지 걸려 있었다.
특히나 사나다 신스케는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제법 알려진, 일본의 살아있는 문화재였기 때문.
“이야, 태주 씨 덕분에 티비 나들이도 해보는구만.”
“난 태주 씨보다 이 두 엠씨들이 더 마음에 드네. 친근한 외모가 딱 내 스타일이야.”
마루야마 회장의 유창한 한국어에 신스케 어르신의 능글맞은 농담까지.
한순간에 유쾌해진 현장은 이내 그 들이 어떻게 태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젖어 들었다.
“저는 우리 손녀가 태주 씨 팬이라서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태주 씨 덕분에 어릴 적 헤어졌던 아버지도 만나게 됐죠. 제겐 정말 복덩이입니다.”
“태주 씨가 제 공연을 보러 온 게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죠. 그리고 같이 마스크 광고를 찍었는데, 진실된 연기를 하는 모습에 반했습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이야기하던 신스케가 태주를 힐끗 바라보았다.
“사실 이 자리를 빌려 태주 씨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얼마 전, 태주 씨가 우리 집에 다녀간 이후, 꿈에 아들이 나타났거든요. 그동안 못 전했던 내 진심을 아들한테 이야기해준 귀중한 시간이었죠.”
엠씨들은 팔짝 놀라 눈동자를 굴렸다.
신스케의 아들인 유키가 불의의 사고고 죽었다는 것도, 생전 그들 부자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
그 의문에 답을 해주려는 듯 신스케가 헛기침을 했다.
“태주 씨를 보니 우리 아들이 생각나더군요. 둘 다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 닮았거든요. 그래서 태주 씨를 내 아들처럼 생각하고 응원할 생각입니다.”
엠씨들은 서로 놀란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 거물급 노인들에게 한태주가 미친 영향을 꽤 큰 듯했다.
그때 개그맨 류인환이 신중히 입을 뗐다.
“한태주라는 배우를 좋아하는 마음도 크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 한태주를 애정하는 마음이 깊게 느껴집니다.”
“그렇죠.”
“우리는 한태주를 좋아하니까요.”
두 노인이 입을 모아 말했다.
“태주 씨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마루야마 회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유를 하나만 고를 수 있나요. 그냥 좋아하는 건데.”
그들의 극찬에 태주는 몸 둘 바를 몰랐다.
“하하, 저하고 단둘이 있을 때는 이런 얘기 안 해주시더니, 눈앞에 카메라가 있으니까 이야기해주시네요. 섭섭해요, 어르신.”
괜히 쑥스러웠던 태주가 몸을 배배 꼬자, 그런 그를 노인들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런데 태주 씨는 유독 어르신들과 케미가 잘 맞으시네요. 어르신들도 태주 씨를 매우 좋아하며 아끼는 것 같고요. 혹시 어르신들에게 사랑받는 비법이 있을까요?”
“하하, 제 얼굴에 어르신들을 잘 모실 상, 이렇게 적혀 있잖아요?”
너스레를 떨던 태주의 말에 두 MC도 으하하 웃어버렸다.
* * *
그날 밤.
모두가 퇴근한 시각에 야근하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기사를 쓰고 있던 홍은지와 우성림이었다.
“이건 말이야, 특종 중의 특종이라고.”
홍은지가 마우스로 스크롤을 쫙쫙 내렸다.
모니터 안에는 그녀가 지난 한 달을 공들여 취재한 기사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야, 내가 생전 원주라면 출렁다리밖에 모르던 사람인데 말이야. 이 기사 취재한다고 거기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단 말이지.”
“그런데 저희, 정말 이거 발행해도 될까요?”
“안될 이유가 뭐가 있어?”
“아니, 이게 정치계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성림아, 기자가 이렇게 깡이 없어서 되겠어? 대한민국 연예계의 투명함을 위해서라도 이건 무조건 보도 해야 하는 기사라고. 검찰 측처럼 숨기기만 해서는 안 돼!”
얼굴이 벌게진 홍은지가 열변을 토했다.
“생각해 봐,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원주 별장에서 이중협 배우의 왼손 유해가 발굴됐다는 게?”
“그러니까 더 무서운 거죠.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홍은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튼 내일 중으로 기사 나갈 테니까 마음 단단히 준비하라고.”
“태주 씨는 이 소식 알고 있을까요?”
“태주 씨? 아 참, 그러고 보니 태주 씨가 공공연히 이중협 배우 왕팬이라고 말했었지.”
진지했던 그녀의 표정이 걱정스러운 듯 변했다.
“태주 씨, 곧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이 기사 읽고 기절하는 거 아니겠지?”
* * *
다음 날 아침.
화창한 햇빛이 사무실 안까지 기분 좋게 들이치는 이때.
비서가 올려놓은 수많은 서류를 확인하던 탁시준.
검찰에서 보낸 서류를 뜯는 그의 손길은 무척이나 급했다.
서둘러 서류를 읽어 본 탁시준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참고인 출석 요구서? 어차피 출석할 의무도 없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야.”
손안에 서류가 왈칵, 구겨지는 순간.
문이 쾅, 하고 열리며 비서가 헐레벌떡 탁시준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급한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왜 이리 호들갑이야. 무슨 일인데!”
“지금 인터넷 좀 보십시오. 스타뉴스에서 단독으로 낸 기사인데요. 이중협 씨 유해가 원주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뭐!”
얼굴에 열이 확 오른 탁시준이 허겁지겁 컴퓨터로 인터넷 기사를 확인했다.
튀어 나갈 듯 쿵쿵대던 그의 심장 소리는 이제 조용한 사무실을 울릴 정도였다.
기사에는 뼈만 남은 손 사진도 첨부돼 있었다.
약지에 반지가 끼워진 이중협의 손을 알아본 탁시준의 표정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분명히 저건…… 확실히 처리했었는데?”
그는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그 말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던 비밀이었기에.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