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29
329화
개척자와 숨기는 자 (7)
한참 생각에 잠긴 태주를 보며 차용석이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말고 나 믿고 맡겨. 3일 후에 미국으로 출국하는데, 너한테 이런 것까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당연히 형만 믿죠.”
현실로 돌아온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닥친 일들이 산더미였다.
그 중, 가장 가까운 건 미국 스케줄.
‘마스크 스타’부터 영화 촬영까지.
여러 일을 소화할 나날이 기대되면서도,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미력이 남아있었다.
* * *
얼마 후.
비서를 닦달한 우창균은 불이 환하게 켜진 사무실로 들어섰다.
“퇴근도 못 하고 야근하고 있네, 우리 동생! 다른 새끼들은 월급 받고 뭐하는 거야?”
“형님, 오늘 술자리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충혈된 눈으로 일하던 키 큰 남자가 당황스러운 듯 일어섰다.
“변 비서, 어떻게 된 겁니까?”
“대표님께서 갑자기 이곳으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창섭이! 내가 우리 늦둥이 동생 좀 보러 오겠다는데,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우창균이 자랑스럽다는 듯 추켜세우는 이는, 그의 하나뿐인 늦둥이 동생이자 회사의 고문변호사인 우창섭이었다.
그 사이 비서는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쌩하니 도망쳐 버렸다.
형님을 소파에 앉히고 따뜻한 보리차를 대접한 우창섭이 맞은편에 앉았다.
“형님. 회사는 일하러 오는 곳이지, 주정 부리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말이야,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우리 마누라한테 어떻게 보여주겠냐!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지!”
그 말에 우창섭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뒤로는 숱한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형의 이러한 가정적인 발언은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늘도 보나 마나 강남 술집에서 여자를 끼고 술자리를 가졌을 게 뻔하다.
얼른 형을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재빨리 말을 시켰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형님. 누굴 만나고 오시는 길입니까?”
“아, 한태주란 녀석 만나고 왔어. 그 새끼 아주 독하더라. 우리 둘이 소주 열 병은 족히 마신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나가떨어졌어.”
익숙한 이름의 등장에 우창섭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배우, 한태주요?”
“그래, 한태주. 내가 진짜 우리 애들 때문에 미끈하게 생긴 미꾸라지 새끼 면상 겨우 참고 술 마셨다. 아 참…….”
우창균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양복 안주머니를 뒤적거려 구깃거리는 종이를 건넸다.
“자, 사인. 너도 꼴에 한태주 팬이잖냐.”
“오!”
그동안 굳어있었던 우창섭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동생의 낯선 모습에 우창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너도 참 별난 놈이다, 무슨 남자애한테 그렇게 빠져서는. 그러니까 네가 장가를 못 가고 노총각인 거야. 얼굴도 반반하고 학벌도 좋은데 말이야.”
“형님. 제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 한태주에 대해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
그래도 동생이 한태주 팬이라고 우창균이 선심을 쓰듯 입을 열었다.
“내 와이프하고 한태주 엄마하고 이름이 똑같더라. 내 와이프는 김혜진, 한태주 엄마 이름은 송혜진.”
우뚝.
무심코 던진 말에 우창섭이 굳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태주의 얼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의 첫사랑이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끝사랑.
* * *
동 시각, 평창동의 고급 일식당.
“넥스트 엔터테인먼트가 제작에까지 손을 뻗치는 건. 역시 뒤에 부회장님의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겠죠?”
“차 대표가 눈치나 실실 보면서 일하는 사람이었으면, 내 눈에 들지도 않았어요. 그 인간, 벌써 다른 곳에서 300억이나 투자를 받았더라고요. 내가 투자 명목으로 생색도 못 내게 말이죠.”
“차 대표 수완이 좋군요. 마음씨 좋은 큰손이라도 잡았나 보죠?”
“정확히 말하면 한태주가 이뤄낸 거래겠죠. YH 캐피털에서 300억을 투자한 건, 태주 씨가 마루야마 회장을 설득한 덕분이니까요.”
XJ 부회장, 한서경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이때.
맞은편에서 날카로운 은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가 그녀와 술잔을 마주쳤다.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던 작은 신문사에서 시작한 그의 가업은 어느새 한국 정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큰 신문사가 되어 있었다.
“90년대인가, 그때 부회장님께 버릇없는 소리를 한 저 자신이 후회스러워지는군요.”
“뭐, 치기 어린 젊은 날, 술자리에서 한 말이었으니까요.”
“그때 부회장님이 그러셨죠. ‘한국도 미국 할리우드처럼 문화 강국이 될 거다. 그 전에 우리도 미리 기반을 다져놔야 좋은 작품들, 좋은 배우들이 탄생할 거다.’라고요”
“그런데 그건 나만 생각한 게 아니에요. 예전에 서진 씨 여동생도 맨날 제창하던 소리였잖아요.”
술에 취한 한서경이 턱을 비스듬히 괬다.
“혜진 씨였죠? 대학 안 가고 돈 모아서, 미국으로 영화 공부하러 갔던 여동생.”
송서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늦둥이 여동생은 집안의 천덕꾸러기였다.
호적에 올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집안 식구들에게는 혜진이는 눈엣가시였고.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곧잘 했던 여동생인지라 일말의 기대감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조각났다.
그녀는 대학을 안 가겠다고 선언했고, 영어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하며 번 돈을 모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무난하게 대학을 졸업시켜 좋은 혼처를 구해 시집보내려고 했던 송서진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그와 열 살 이상 차이 났던 늦둥이 여동생은 미국에 간 이후로 그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격에 맞지 않는 남자와 연애하지 않나.
한국으로 끌려오듯 돌아와서도 평범한 남자와 혼전 임신으로 결혼하지를 않나.
실망을 거듭한 그는 결국 여동생과 절연했다.
그러다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복잡한 심경에 그 아이의 존재를 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최근 여동생을 고대로 빼닮은 그녀의 아들, 한태주가 한국 문화계를 뒤흔들며 혜진이의 존재가 다시 살아났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송서진의 귓가에 한서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서진 씨, 요즘 한국일보가 많이 설치고 다니던데, 도의적 차원에서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한국일보가 자사 방송국에서 하는 트로트 프로로 재미 좀 보더니, 연예 프로그램으로 돈 좀 벌려나 보더라고요.”
“돈 벌려면 뭔들 못하겠어요. 상대방의 약점을 까발려서라도 돈을 벌려는 족속들인데.”
눈치 빠른 송서진은 한서경의 말에서 적의를 느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일보 쪽하고 관계가 안 좋으신가 봅니다, 부회장님.”
“예전부터 쭉 안 좋았는데, 이제는 더 싫어졌어요.”
한서경이 술을 한잔 크, 들이켰다.
“검증되지도 않은 걸 사실처럼 써서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제가 아끼는 사람을 모함해서 궁지에 몰아넣은 전적이 있거든요.”
“부회장님이 아끼시는 분이요?”
“한태주요.”
한태주?
복잡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는 송서진에게 한서경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얼마 전에 한태주가 전직 대법관, 강대원 어르신의 손자임이 밝혀진 건 아시죠?”
“당연하죠. ABS 9시 뉴스에서 강원경 어르신과 함께 인터뷰한 것도 봤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한국일보에서 한태주 씨 아버지가 사생아라고 헐뜯는 기조의 기사를 낸 적이 있었어요. 강대원 어르신의 전 부인되시는 분이 그쪽 국장을 구워삶았다는 말도 있고, 아무튼 뭐 말이 많았죠.”
커다란 한서경의 눈이 송서진을 향했다.
“이제 한태주가 강씨 일가라는 게 밝혀진 이상, 한국일보는 본격적으로 한태주를 물어뜯을 거예요.”
“하지만 한태주는 정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연예인 아닙니까. 왜 물어뜯는다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한태주 큰아버지 되는 강시경이 이번에 유력한 법무부 후보로 떠올랐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일보 측은 부형윤을 밀고 있거든요.”
그 말에 송서진이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야 모든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2기 내각을 맞이한 이번 정부는 여당에게 법무부 후보 추천을 맡겼고, 그 후보는 둘로 압축되었다.
법조계 명문가의 총아이자 현재는 로펌 대표로 재직 중인 강시경.
엘리트 코스만 밟아 검사장으로 재직 중인 부형윤.
둘 다 자질은 뛰어났기에 이제 관건은 여론전이었다.
자신을 띄우든지, 상대를 깎아내리든지, 총력을 다해야 할 때이다.
‘태주가 한국일보의 농간에 휘둘리게 둘 수는 없지.’
주먹을 꽉 쥔 송서진이 재빨리 머리를 굴리더니, 한서경이 그를 보며 간곡히 부탁했다.
“내가 특별히 아껴서 그러는데, 앞으로 태주 씨 잘 좀 부탁해요, 서진 씨.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종횡무진으로 활약할 배우인 것 알잖아요. 그런데 말도 안 되는 루머들 때문에 발목 잡히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한태주 씨는 좋은 배우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것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배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껏 그를 지켜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송서진의 눈이 번뜩였다.
“저희 쪽에서 최선을 다해, 한태주 씨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겠습니다.”
그 말에 한서경이 씩 웃으며 그와 술잔을 부딪혔다.
배우 한태주를 위한 도원결의가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뭐, 정작 당사자인 태주는 모른다는 것이 포인트였지만.
* * *
며칠 후.
4월 말이 다 된 이때, 날씨가 제법 봄다웠다.
태주는 약 1주일 동안의 미국 스케줄을 위해 집을 나서는 참이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현관까지 낑낑거리며 들고 온 태희는 태주에게 꼭 붙어있었다.
“흐잉, 오빠 또 미국 가네.”
“이번에는 일곱 밤만 자면 집에 올 거야.”
서운해서 볼을 퉁퉁하게 부풀리는 태희에게 태주가 무릎을 굽혔다.
“이번에는 오빠가 뭐 사 올까? 바비 인형? 아니면 친구들하고 나눠 먹을 수 있게 초콜릿이랑 사탕 사 올까?”
그 말에 눈물이 맺혔던 태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 아직 생각 못 했는데. 오늘 저녁까지 고민해보고 오빠한테 문자 해도 돼?”
“태희 버릇 나빠진다. 네가 보고 적당히 알아서 사 와라, 태주야.”
고모의 제지에 태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태주가 고모 몰래 태희에게 눈을 찡긋하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나중에 문자 해. 오빠가 다 사 올게.’
[으이그, 태희가 어리광부리는 건 다 네 탓이구만.]일찍 일어나 태주의 아침을 차려준 고모는 하품을 쩍 했다.
“비행기 놓치겠다, 얼른 가.”
“섭섭하네, 날 얼른 치워 버리려는 것 같아서.”
그 옆에서 태희가 홍홍거리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오빠 없으면 용석이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자고 가. 아저씨 진짜 재밌어, 오빠만큼 나랑 잘 놀아주는 거 같아.”
“아니 이런! 내가 집을 비우면 용석이 형이 내 자리를 차지하는구만!”
태주가 배신감 가득한 눈빛을 번뜩이자, 고모는 결국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진짜 늦겠다, 태주야!”
* * *
동시각.
넥스트 엔터의 배우 1팀에는 쏟아져 들어오는 대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대본을 보느라 정신없던 직원들 사이에서 김진수 팀장이 지시했다.
“일단은 우리 선에서 괜찮아 보이는 걸 뽑아둡시다. 그렇다고 안 좋은 걸 버리라는 건 아니에요. 그건 또 따로 분류해 놓으세요.”
“아이고, 며칠 야근하게 생겼네요. 이렇게 볼 게 많아서야!”
앓는 소리를 하는 송유리 대리.
하지만 피곤한 안색과 달리 그녀의 눈은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 충무로랑 방송가의 모든 대본이 우리 쪽에 1순위로 들어 온다고 하던데요? 아직 제작사를 본격적으로 설립하기도 전인데, 정말 대박 아닌가요?”
“스타뉴스에서 낸 기사 때문에 더 화제가 쏠린 거겠죠.”
김진수는 어제저녁 난 기사를 상기했다.
스타뉴스의 홍은지 기자가 야근하면서까지 재빠르게 낸 기사는 곧바로 연예란 메인을 차지했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