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35
335화
승부의 세계 (6)
* * *
몇 시간 후.
밤이 다 되어가는 시각,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술집에서 두 사람이 추억을 나누고 있다.
태주와 몇 시간 째 대화하고 있는 이는 촬영장에서 만난 중년의 흑인 여자.
함께 자리하던 박인우와 장진혁은 오늘이 뉴욕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라, 관광하고 오라고 가까운 타임스퀘어로 보냈다.
“매기라고 불러요. 혜진은 맨날 내 이름을 가지고 장난쳤죠, 내 이름이 한국어로는 생선 이름이라나, 뭐라나.”
유쾌한 여자는 태주의 엄마와 동갑이었다.
그녀는 혜진이 교통사고로 10여 년 전 죽었다는 소식에 잠시 우울했지만, 태주가 모르는 엄마의 이야기를 해준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녀의 이름은 매기 탈리언.
XTV에서 무대 미술팀으로 20년째 일하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일전에 송혜진이 미국에 왔을 때, 같이 뮤지컬 극장에서 무대미술 파트에서 일했고.
같은 아파트에 살았으며 함께 고생했던 동료라고 했다.
근 15년간 뮤지컬, 영화를 오가며 활약했지만, 5년 전부터는 XTV 방송국에서 음악방송 무대 미술팀장으로 일하는 중이라고.
“아, 나 안 그래도 궁금했던 것 있었어요.”
매기가 인자한 미소로 태주에게 속삭였다.
“‘마스크 스타’ 가왕전 했을 때, 내가 백스테이지에서 미스터 버터플라이 보고 있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 버터플라이가 태……”
“쉿.”
태주가 씩 웃으며 그녀와 장난스러운 눈을 맞추었다.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스터 버터플라이’도 그걸 원할 거고요.”
“아하!”
확실히 말한 건 없지만 매기의 호기심은 해소된 이때.
태주에 대한 팬심이 2배로 커진 그녀는 이제 엄마 미소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한편, 태주도 엄마의 지인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만났다는 사실에 그저 신기했다.
“정말 신기해요. 한국에서는 저희 엄마의 지인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었거든요.”
“그래? 하긴, 내가 혜진에게 듣기로,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으로 도망쳐 왔다고 했었어요.”
“그래요? 저희 엄마한테 그런 소설 같은 과거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는데요.”
“혜진이 당신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고 가지는 않았나 봐요.”
과거를 회상하던 매기가 하나둘씩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러고 보면 혜진도 참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술을 마시면 그래도 조금은 자기 인생을 털어놓더라고요. 자기가 부잣집 딸이라나? 뭐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런데 왜 엄마는 한 번도 친정과 왕래하지 않았지?
[너희 아버님처럼 집안과 갈등이 있는 것 아닐까?]‘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때, 매기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호쾌하게 튕겼다.
“나, 사실은 태주 씨 아빠도 알아요. 이름이 한재경이었나? XX 회사 다니는?”
“맞아요!”
태주의 웃음에 매기가 흡족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 태주 씨를 봤을 때, 사실 진짜 놀랐어요. 혜진이와 재경 씨의 젊은 모습을 섞어 놓은 듯했거든요.”
“저희 아빠를 보신 적 있으세요?”
“혜진과 내가 브로드웨이 쪽에서 무대 미술팀으로 일할 때. 미국으로 신입사원 연수 온 재경 씨가 공연을 자주 보러 왔었어요. 단순히 공연을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 무대 장치 등등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빠가 원래 꿈이 배우였대요.”
“그런데 그때는 그걸 모르고, 그냥 배우들한테 극성맞은 팬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혜진한테 알아서 잘 내보라고 한 게 계기가 돼서 둘이 눈이 맞을 줄은 몰랐죠.”
매기가 눈을 찡긋했다.
“아무튼 둘이 그렇게 사귀게 됐어요. 그러다가 재경 씨가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혜진이도 누군가에게 끌려갔듯 급하게 떠났어요. 여기 있었으면 커리어를 충분히 이어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죠.”
“진짜 아쉽네요.”
태주는 과거 엄마의 여러 모습을 상기해 보았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 꿈이 뭐였는지 물어봤더니, ‘태주의 엄마’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그런 대답에 행복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엄마는 자기의 꿈을 포기하고 엄마가 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태주를 매기가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제 다음 행선지는 어디예요? 한국?”
“한국에 잠시 들렀다가 칸으로 가요. 작년에 찍은 영화로 경쟁 부문에 진출했거든요.”
“와, 대단하네요.”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한 방울, 알 수 없는 눈물이 맺힌 것 같기도 했다.
“칸에서도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요.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태주를 보던 매기의 눈빛은 마치 어머니의 것처럼 따뜻하게 빛났다.
“혜진이 지금의 태주 씨를 봤으면, 정말 자랑스러워했을 거예요.”
* * *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파한 술자리.
태주는 마스크와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박인우와 장진혁에게 연락하자 자기들이 있는 장소를 찍어 보냈다.
천천히 걸어가던 도중.
이중협은 조용한 태주에게 말을 걸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한국도 아니고 미국 땅에서 네 어머니의 흔적을 찾다니.]‘신기하기도 하고,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해요.’
[왜?]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태주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담겨있었다.
‘아무리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다지만, 그래도 아쉬워요. 제가 좀 더 부모님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요.’
[고작 10살짜리 어린애가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해. 너는 그 당시에 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거야.]‘저는 저희 부모님에 대해서 정말 모르는 게 많네요. 아버지가 강씨 집안 핏줄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으니, 어머니도 어떤 비밀을 숨기고 계셨을지 모를 일인 것 같아요.’
[그건 그래.]이중협이 자신도 모르게 왼손을 소매로 더욱 깊이 숨겼다.
창백했던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것처럼, 생기가 도는 부위.
아직도 이게 왜 이런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제껏 멈춰있던 그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
무한에서 유한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
[한이 풀리기 시작한 건가? 내가 떠날 날도 다가오고 있는 거고?]한이 풀리는 게 좋으면서도, 태주의 곁을 떠나는 건 싫다.
이중적인 마음이 일렁이던 이중협은 태주의 말간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뭐예요, 그런 눈빛은? 음흉한데요?’
태주의 표정을 본 이중협은 괜스레 큰소리를 냈다.
[순수하게 널 생각하는 눈빛이다, 이거!]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
옆에 있는 태주와 함께하는 날들을 소중히 여기자.
그것이 태주의 찬란한 나날을 함께 보내고 있는 이중협의 생각이었다.
* * *
4월 말, 봄의 기운이 한껏 어우러지는 이때.
연예계는 한 스타의 귀국으로 한껏 술렁였다.
“한태주 씨 입국했대요!”
“이미 알고 있어요. 우리 팀원들, 벌써 태주 씨 취재하러 공항에 간 지 오래거든요.”
홍은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그때.
딩동.
한번 시작된 메신저 알림음은 이윽고 쉴 틈 없이 계속해서 울리기 시작했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모니터 구석에는 ‘사진이 도착했습니다’라는 문구가 계속해서 떴다.
옆에 있던 동료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사진들에 눈을 크게 떴다.
“유나 씨 사진 진짜 잘 찍는다! 이야, 우리 조카가 아이돌 사진 잘 찍는데 그에 못지않아!”
“안 그래도 폴라리스 홈마 출신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고퀼리티 실력이 괜히 나온 거 아니에요.”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태주의 사진을 본 홍은지.
피곤한 안색에도 팬들에게 눈을 맞추며 웃어주는 그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역시 한태주는 한국 땅에 있어야 해, 이런 국보 같으니라고.”
한태주를 한국에서 오래 보고 싶은 홍은지로서는 그의 일정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곧 열리는 혜인예술대상에서, 한태주는 또 한 번, 최고의 영예를 차지할 것이니까.
* * *
봄바람이 한껏 부는 4월.
혜인예술대상이 열리는 연희대학교 대강당은 스타들의 향연이었다.
여러 팬이 스타들을 반기고, 그런 팬들을 스타들이 반기는 가운데.
이곳에 태주는 시상자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작년에 ‘낭만 고양이’로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미리 받은 대본을 여러 번 숙지하고 스태프들에게 자신의 동선을 확인받은 후.
‘데스 게임’ 테이블에 앉아 여러 배우와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들.”
“해외물 먹더니 더 멋있어졌어, 우리 태주!”
스모키 화장으로 강렬한 인상을 한 심요연은 긴장으로 덜덜 떨던 채이진과 모황국 감독에게 당부했다.
“다들 태주 좀 본받읍시다. 이진이도, 감독님도. 다들 뭐가 그렇게 긴장된다고 덜덜 떨고 있어요? 즐기면 되죠.”
그 말에 채이진과 모황국은 동시에 외쳤다.
“이런 시상식이 처음이라 너무 긴장돼요.”
“드라마로 평가받는 건 처음이라 덜덜 떨리는 걸 어떡해요.”
“아, 도대체 이 사람들을 어쩌면 좋니, 태주야. 이렇게 간이 작다니!”
심요연이 목소리는 컸지만, 살짝 떨리는 걸 알아챈 태주는 씩 웃었다.
“하하, 저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예요, 선배님.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니까, 다 같이 우리 드라마의 선전을 기원해 봐요.”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임강현이 그의 등을 툭, 두드렸다.
“태주야!”
“오, 강현아! 너 어디 있다가 지금 왔냐?”
“나 오늘 엠씨 보거든. 윤수안 씨랑 같이.”
그가 자랑스러운 듯 무대 위 엠씨석을 가리켰다.
그러나 태주의 시선은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손에 대본을 든 채,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윤수안이었다.
중단발의 머리카락은 한쪽으로 땋아 늘어뜨리고, 연분홍 드레스를 입은 자태가 우아한 그녀.
“야, 너 어디 보냐? 설마, 여자?”
임강현의 묘한 추궁에 태주는 괜히 헛기침하며 속마음을 감추었다.
“얼른 가서 연습이나 해. 나중에 실수해서 대사 버벅거리지 말고.”
“날 뭐로 보는 거야, 나 연습 엄청 많이 했거든?”
툴툴거리며 저쪽으로 가는 임강현을 보던 태주.
옆에서 이중협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하여튼 너도 남자구나, 예쁜 여자한테 눈 돌아가는 걸 보니.]‘저 그런 놈 아닙니다.’
[누가 나쁘대? 나도 예전에 시상식 참석할 때면 늘 수정이한테만 시선이 가곤 했어. 그거 나쁜 거 아니야, 본능인 거니까.]‘본능은 무슨 본능…. 아, 형하고 얘기하다 보면 늘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샌다니까요.’
이중협과 투덕거리며 태주의 긴장감이 저 멀리 사라진 순간.
혜인예술대상이 그 막을 올렸다.
기대에 부푼 마음과 시선들이 회장을 가득 채운 이때.
수백 쌍의 시선들은 태주를 향해 있었다.
어쩌면 오늘 ‘데스 게임’으로 또 한 번의 기적을 쓸 그에게.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