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38
338화
언더독의 반란 (2)
새치가 희끗희끗한 붉은 머리를 양 갈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화장기 하나 없이 주근깨가 나 있는 말간 모습.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태주를 향해 노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미인을 처음 보나?]통통한 노부인의 자부심 넘치는 모습에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크흡, 웃음을 삼켰다.
마치 삐삐 롱스타킹이 늙으면 저런 모습이겠거니, 생각했다.
태주의 웃음을 눈치챈 듯 노부인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내 머리 스타일 때문에 웃는 거죠?]‘아뇨, 그게 아니라…….’
[서운하네, 폴은 내가 이 머리 했을 때 제일 예쁘다고 해 줬단 말이에요.] [마이 레이디. 저는 그대를 처음 본 순간,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혀에 니스칠한 이중협은 부인의 손을 잡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아름다운 그대의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머, 대장 귀신께서 이렇게까지 해주신다면야.]노부인은 예쁘장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제 이름은 에바 벨포르입니다. 폴 벨포르의 아내였죠.] [이야, 폴 벨포르 씨의 아내를 만날 줄이야.]이중협은 미노년의 부인에게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춘 인사를 했다.
두 귀신의 모습에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우리 영화가 수상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로도 촉각이 곤두서고 있는데.
폴 벨포르의 5년 전 죽은 아내를 만나다니. 그것도 이런 타이밍에.
“아이고, 머리야.”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고성열이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낮부터 너무 달린 거 아냐? 너, 와인 몇 잔 마셨어?”
“세수 좀 하고 오면 괜찮을 거야.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태주는 밖으로 나오며 뒤에 있던 두 귀신도 데리고 왔다.
화장실에서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자, 더욱 생생히 보였다.
이중협 옆에서 말간 표정으로 서 있는 자그마한 몸집의 노부인, 에바 벨포르가.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저런 할머니가 도대체 무슨 한이 있어 이 세상에 남은 걸까?
도저히 짐작되지 않던 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할머니…….’
[할머니라고 부르지 마요. 저는 생전에도 아이들한테 할머니라는 소리 안 들었어요. 젊어 보여서. 그러니 그냥 남들이 하던 대로 에바라고 불러요.]거참 희한한 할머니네.
태주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 남아계신 걸 보면, 아직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아니, 난 그런 것 없어요.]‘……네?’
에바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태주를 바라보았다.
[제가 원하던 건 폴이 다 해줬어요. 입고 싶은 옷과 먹고 싶은 걸 사주는 건 물론 여행 가고 싶다 하면 데려가 주고요.]그 말에 태주가 당황스러워 헛기침했다.
여태껏 만난 귀신들은 모두 이루지 못한 한이 있어 이승을 떠돌아다니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노부인은 뭐지?
태주가 이중협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럼, 정말 이루지 못한 소원이 없단 말인가요?’
[그럼요. 나는 살아생전, 폴의 아내로 사는 게 너무나도 행복했어요.]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무슨 한이 있어 이승에 남았단 말인가?
‘형, 좀 도와줘 봐요.’
[나도 모르지. 귀신 본인도 모르는 한을 내가 어떻게 알아?]이중협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대장 귀신인 그가 딴청 피우며 입을 열 생각은 안 했다.
이 일은 태주 스스로 해결해야 할 듯했다.
‘칸이 내게 주는 도전인가, 아니면 기회인가.’
이제껏 귀신들의 한을 풀어주며 태주는 얻는 것들이 있었다.
그들의 능력. 그리고 생전 그들이 산 자들과 맺었던 인연.
혹시 에바 벨포르를 만난 건, 폴 벨포르라는 걸출한 배우와 인연을 맺으라는 신의 계시인 것일까?
* * *
다음 날 오전.
태주는 칸에 반가운 얼굴들이 도착했다는 말에 그들을 마중하러 나갔다.
그의 옆에는 송도준이 함께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칸의 한 노천카페.
송도준은 어딘가를 살피더니 태주에게 말했다.
“형이 찾는 사람들이 저분들이에요?”
[둘이 재밌게 논다, 진짜.]이중협이 재밌다는 듯 어딘가를 보며 웃었다.
그쪽에는 빈 커피잔을 짠, 하고 마주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서로를 무슈, 마드모아젤이라 부르며 킬킬대는 우성림과 황유나가.
그때, 태주를 발견한 우성림이 손을 흔들었다.
“봉쥬르, 무슈 태주! 무슈 도준!”
“선배, 그냥 한국어로 해요. 무슨 프랑스어 바람이 불어서.”
외국에서 익숙한 지인들을 만나는 이 반가운 기분이란.
태주는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야, 이렇게 프랑스에서 만나 뵈니 너무 반가운데요?”
“꼭 이산가족 상봉하는 기분 같네요.”
우성림이 눈을 찡긋하며 일어났다.
“일단 칸의 거리라도 걸으면서 이야기 나눌까요? 저기 이글맨 레드카펫 행사하는 곳 있던데.”
“피셔 감독하고 주연 배우들이 직접 홍보 나선 것 같더라고요. 아예 크루아제트 거리를 통째로 다 빌렸어요.”
[그럼 백시영도 있겠는데?]그 말에 태주가 망설였지만, 이글맨의 왕팬이라는 송도준은 방방 뛰며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구경만 가면 안 돼요, 형? 저 이글맨 팬인데.”
결국 송도준의 재촉에 태주는 일행과 함께 크루아제트 거리로 향했다.
영화 ‘이글맨’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 그곳은 거리 전체가 이글맨 신작 포스터로 도배되는 등.
칸에서 최초 공개하는 포스가 엄청났다.
우성림과 황유나. 그리고 태주와 송도준은 같은 곳에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주는 이글맨의 팬이라는 송도준의 사진을 찍어주기 바빴고.
우성림은 황유나와 함께 레드카펫에서 팬 서비스를 하는 백시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야, 결국 백시영이 칸까지 왔네.”
“얼굴 정말 두껍네요. 저는 아직도 해외에서 백시영이 인기가 있다는 게 신기해요.”
“그 점에서는 피셔 감독 고집이 맞았네. 한국에서나 마약으로 소란 피우지, 해외에서는 그냥저냥 지나간다는 거.”
“잠깐, 그런데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몰려가는 것 같은데요?”
주변을 살피던 황유나는 서둘러 카메라부터 챙겼다.
“선배, 이거야말로 특종이에요, 특종! 이글맨 시사회에 온 팬들, 우연히 온 한태주에게 반해서 몰리다!”
그들이 서둘러 달려가자.
그곳에는 자신을 알아본 수많은 팬의 환호를 받으며 송도준을 꼭 안고 얼떨떨해하는 태주가 있었다.
그의 품에서 송도준은 자랑스러운 듯 병아리처럼 삐악거렸다.
“우리 형, ‘데스 게임’에도 나온 월드 스타예요!”
‘이글맨’으로 도배된 곳에 한태주의 이름이 널리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 * *
어스름한 노을이 진 그날 저녁.
칸의 해변에 설치된 가건물에 국내외 영화인 500여 명이 모였다.
이선우의 건배사로 시작된 행사는 밤 9시가 된 지금,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다.
여러 영화인과 인사하느라 바빴던 태주는 모황국 감독과 제작자 이덕량을 만나 이야기 중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진 것 같아 정말 신기해요.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권 사이에서만 인지도가 있었잖아요.”
“그렇지. 한국 영화하면 ‘올드 걸’에서 주인공이 생낙지 통으로 집어먹는 그런 장면만 생각났었는데. 지금은 ‘데스 게임’도 있고, ‘낭만 고양이’도 있고, ‘광대’도 있고. 아주 다채로워졌지.”
“그런데 그게 알아요, 태주 씨?”
이덕량이 태주를 보며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원래 백시영이 여기 오기로 되어 있었대요. 근데 안 온 거죠. 왜일 거 같아요?”
태주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 이덕량은 먼저 킥킥대며 선수를 쳤다.
“이글맨 평이 영 안 좋아서요. 오늘 낮에 시사회 했었잖아요. 그런데 영화 보고 나온 사람들 평이 하나같이 안 좋더라고요. 이글맨 시리즈에서 이글맨은 안 보이고 웬 미장셴만 그렇게 보인다면서요.”
“자업자득이지. 애초에 피셔 감독한테 이 영화 맡긴 것부터가 실수였던 거야.”
모황국 감독이 팔짱을 끼며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피셔 감독은 탐미적인 영화 전문이야. 이글맨 같이 캐릭터 플레이로 가는 영화가 아니라. 그리고 중간에 백시영 베드신 넣은 것도 좀 어색하다고 그러던데.”
“아시아 시장을 노린 것 때문에 분량을 늘렸겠죠. 없던 씬도 몇 개 더 추가하고.”
제작자 이덕량이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솔직히 양심이 있으면 이렇게 빨리 활동 복귀하면 안 됐습니다. 염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덕량 씨, 진정해.”
“저는 솔직히 피셔 감독도 이해가 안 가요. 그런 일련의 논란들이 있었음에도 백시영을 굳이 쓴 것도, 칸에서 대규모의 시사회까지 여는 심리도요. 그것도 무슨 거리를 통째로 빌려서.”
“제작사가 워낙에 큰 곳이잖아. 그리고 칸에서도 ‘이글맨’ 홍보를 반길걸? 피셔 감독 이름값이 있으니까.”
“아무리 비경쟁부문 초청이라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영화들이 다 묻혀버리잖아요. 상도덕에 어긋나는 홍보라고요.”
잔뜩 흥분한 이덕량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글맨 같은 초대형 프랜차이즈가 칸에 오면, 상어가 송사리들을 잡아먹는 격밖에 더 되겠습니까? 게다가 언론들은 다들 이글맨 타령만 하며 그 영화 개인 홍보대행사처럼 굴고 있고요.”
한껏 열을 내던 이덕량의 시선이 태주에게 향했다.
“태주 씨도 말해 봐요. 솔직히 여기저기 이글맨 타령이라, 짜증 나잖아요. 안 그래요?”
“하하, 아까 낮에 ‘이글맨’ 레드카펫 행사하는 거 보니까. 와, 스케일이 장난 아니긴 하더라고요. 지난 10여 년간 누적된 팬들도 많고, 피셔 감독님 포스도 정말 대단하셔서 그런가 봐요.”
그때, 옆에 있던 이선우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태주야, 그건 왜 말 안 하냐?”
“네? 뭐를요?”
“아까 도준이가 말해주던데? 네가 이글맨 행사 가니까, 그곳 시선들이 너한테 집중됐다면서. 아니다, 사람들이 아예 너한테만 몰렸다든가?”
그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태주에게 향했다.
“어쩐지, 아까 이글맨 홍보담당자들 우연히 만났는데, 태주 씨 탓을 하더라고요. 난 태주 씨가 방해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언성 높였었는데,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어요?”
태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네요. 사실 도준이가 이글맨 팬이어서 거기 간 거였는데…….”
“민폐는 무슨. 피셔 감독하고 백시영 이름값을 태주 씨가 압도한다는 현실을 깨우쳐 준 거죠.”
코웃음을 친 이덕량이 덧붙였다.
“제아무리 칸에서 최초 공개를 하고 시사회를 한들, 그쪽도 현실을 깨달아야 해요. 이제 대세는 한태주라고.”
* * *
기분 좋은 밤이 점점 깊어갔다.
‘한국 영화의 밤’ 행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태주는 이덕량의 의외의 목적을 알아낸 참이었다.
“좋은 대본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고요?”
“그럼요.”
이덕량이 눈을 찡긋하며 태주에게 말했다.
“이곳에 젊은 영화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와요. 투자금에 쪼들리지만, 열정과 아이디어는 누구보다 넘치는 그런 창작자들이요.”
그러고 보니 저쪽 구석에 낯선 눈빛을 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는 것 같다.
모황국, 이선우 등등 유명인들에게 말을 붙이고 싶은데 차마 용기가 안 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의외로 저들한테서 좋은 대본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요.”
확신에 찬 이덕량의 눈이 반짝였다.
“실력 있는 언더독. 딱 저런 사람들이요.”
귀신 보는 배우님